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395)
395화. ‘나’의 세계.
“제국의 병사들이 미궁 도시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흑왕도 남부 전선을 뚫고 중앙 대륙으로 넘어왔습니다.”
“백왕이시여, 어찌하시겠습니까?”
크람델.
네 주력들이 보고를 받은 백왕은 이맛살을 구겼다.
그간 예의주시 지켜보던 제국과 흑왕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목적지가 의아했다.
미궁 도시라니.
“······ 오주력은 이미 죽었다.”
백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 그 오주력이 말입니까?”
“그 미친 까마귀가······!”
“허어어······”
주력들 모두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탄식을 쏟아냈다.
미친 까마귀, 오주력.
그 괴물 같은 놈이 죽다니?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은 놈이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데다 백왕마저 위협하던 존재.
‘황금률의 드루이드와 혼을 섞었을 때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틀림없이 미궁 도시의 주인인 오주력은 죽었다.
세계수의 던전에서 백왕은 그 사실을 확인한 바가 있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
녀석에게 잡아먹힌 듯했으므로.
혹시 몰라 오주력의 생존을 확인했으나, 증발한 듯 오주력은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뒤였다.
어디에도 흔적이 없다.
잘못보고 느낀 게 아니라는 의미다.
하지만······.
빠드득!
백왕은 이를 갈았다.
어금니를 되찾아준 오주력의 복수를 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이면서 누구보다 깊은 어둠을 지닌 자.
놈의 영혼을 마찬가지로 먹어치우려 하였으나, 역으로 먹힐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백왕을 잡아먹지 않았다.
‘나를 살렸지. 굴욕적이지만······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마음만 먹었다면 그때 나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육체만이 아닌 영혼까지 모조리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가 지닌 미래시에는 확실한 죽음만이 그려지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먼저 공격을 행한 백왕을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려주었다.
이후 백왕은 그를 죽이는 걸 포기했다.
너무나도 큰 격의 차이를 실감했으므로.
···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그 괴물을 죽일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포기하고, 굴종한 것과 다름이 없다.
······ 그러지 않는다면 북부 전체가 사라질 테니까.
“오주력의 도시까지 잃을 수는 없지.”
비록 은원을 제대로 갚지는 못했으나, 이게 백왕이 내린 최선의 결론이었다.
적어도 오주력의 도시만큼은 지켜주리라.
그가 처음 천명했던 것처럼.
미궁 도시를 공격하는 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라는 말.
또한, 흑왕의 진격을 가만히 두고볼 순 없었다.
백왕이 조용히 읊조렸다.
“모두 준비시키거라. 사냥의 시간이 도래했으니.”
*
1만에 이르는 백왕의 군단이 미궁 도시에 입성했다.
장대한 행렬에 저도 모르게 입이 벌려질 정도이지만, 미궁 도시에 입성한 건 미단 백왕만이 아니었다.
아우릴이 이끄는 500명의 엘프부대,
멸악의 거인과 20에 이르는 별 수호자,
에이션트 피닉스 알 라움과 그의 새끼들,
빛의 수호자와 다수의 석상,
전설의 드루이드 알비노와 열 명의 각주,
카심과 광휘의 기사단,
페어리 드래곤을 탄 원탁의 기사들까지!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꿈을 꾸는 건가······?”
집행자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 역시 사신교에 속해 있으며 제국의 말도 안 되는 저력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지만.
······ 지금 보고 있는 것 또한 제국에 전혀 밀리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대로 뭉칠 수 없는 조합이었다.
대륙 각지에 흩어져, 접점이라곤 전혀 없을 괴물들 아닌가.
이만큼 다양한 종족이 힘을 합치다니.
역사를 뒤져봐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하나의 집단만 해도 어지간한 왕국 하나쯤은 상대할 수 있는 전력.
한데 그런 집단이 거의 열에 달한다.
“··· 너희는 미궁 도시에 왜 있는 것이냐?”
백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세계수의 던전에서 함께 경쟁한 관계이긴 하지만, 왜 이들이 오주력의 도시에 모여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자 카심이 나섰다.
“내가 불렀다.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지키기 위해.”
“······?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이곳에 있나?”
“아아. 저 제단에 있는 ‘최초의 불’이 꺼지면,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죽는다.”
카심이 거대한 궁의 가운데에 활활 타오르는 ‘최초의 불’을 가리켰다.
저 불이야말로 현재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살아있는 유일한 원동력인 탓이다.
하지만 백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깐. 오주력과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무슨 관계인 거지?”
“아주 깊은 관계라고 하더군.”
“아니······ 뭐?”
“그러니 너는 굳이 안 불러도 알아서 올 거라고도 얘기하더군.”
백왕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황금률의 드루이드에게서 느껴졌던 오주력의 기척과 냄새.
설마 그 모든 게 저 ‘불’과 관계되어있는 걸까?
아주 깊은 관계라는게 어느정도의 관계를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생명이 담긴 불을 오주력의 도시에 놔둘 정도면 말은 다했다.
그러니······ 어쩌면.
“··· 오주력은, 살아있느냐?”
······ 오주력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가 오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저 ‘불’과 함께 살아계십니다.”
백왕이 묻자, 허드슨이 답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상한 말이다.
“‘최초의 불’은 황금률의 드루이드의 생명줄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런데 오주력도 ‘최초의 불’과 함께 살아있다고?”
“예. 자세한 설명은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
두통이 심해졌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으므로.
미궁 도시에 있는 최초의 불.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굳이 이곳에 자신의 심장과도 같은 것을 두었고, 더 나아가 오주력은 저 불과 함께 살아있다고 한다.
이 말인 즉슨······.
“그러니까······ 오주력이······ 황금률의 드루이드란 말이냐?”
백왕이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이 경우 외에 다른 건 떠오르지도 않았다.
허나, 말이 되는가?
오주력.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시체 까마귀가.
온갖 어둠을 몰고 다니던 그 녀석이, 사실은 황금률의 드루이드라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황금률의 드루이드는 강대하기 짝이 없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가 지닌 영혼의 거대함에 휩쓸려 백왕은 그대로 소멸을 맞이할 뻔했다.
그런 존재가 시체 까마귀의 모습으로 자신의 주력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백보, 천보, 만보를 양보해도 도무지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성립 자체가 안 된다. 그럴 가능성은 없어.’
말을 내뱉고선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백왕은 내심 고개를 저어댔다.
자신의 딸 아리아와 결혼까지 주선했던 그였다.
비록 실패했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세심하게 살폈다는 뜻이다.
오주력과 그 드루이드는 너무 다르다.
절대로 동일한 존재일 수 없었다.
이윽고, 허드슨이 입을 열었다.
“예.”
“······.”
허.
결국 백왕은 입을 꾹 닫고 두 눈을 감았다.
살다살다 이렇게 충격적인 일은 처음이었으니까.
*
······ 겨우 정신을 추스른 뒤.
백왕은 생각했다.
‘그래서였나······ 그토록 짙게 냄새가 나던 이유가.’
완전한 동일인이라면 그야 같은 냄새가 날 수밖에.
하지만 세상의 어느 누가 황금률의 드루이드를 보고 오주력이라고 생각하겠나.
생김새도, 성향도, 기세나 위엄 따위도 전부 다를진대.
아니, 애초에 오주력은 ‘시체 까마귀’였다.
시체 까마귀!
시체를 먹으며 사는 까마귀와 자연의 수호자 드루이드는 결코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는 것이다.
허나······ 돌이켜보면.
‘시체 까마귀 따위가 그만한 업적들을 이룰 수 있을 리가 없지.’
부정의 단계에서 납득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오주력은 등장부터 화려했으므로.
자신조차 달성하지 못한 ‘신비의 탑’을 끝까지 정복하지 않았나.
혼자 심연 미궁을 차지하고, 그의 간담을 서늘케할 정도로 위험한 존재.
그게 사실 황금률의 드루이드여서 그랬던 것이라면 어느정도 이해는 간다.
‘모습을 바꾸고, 힘을 숨겼던 건가?’
하지만 여전히 이상하다.
굳이 그럴 이유가 뭔지.
“오주력이 황금률의 드루이드라면······ 왜 주력이 되는걸 받아들인거지?”
“북부에서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본래의 모습으로 그곳을 돌아다니긴 힘드셨겠지요.”
“설마······.”
백왕이 무겁게 말했다.
그때 불현 듯 떠오른 생각 때문이다.
황금률의 드루이드가 굳이 오주력이 되어 북부에 있던 이유.
‘설마 나를 시험한 건가?’
사실은 처음부터 백왕 그를 시험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빌헬름이 가져간 어금니를 되찾아준 것도, 세계수의 던전에서 그를 살려준 일도 전부 그 일환이었다면?
‘언제든 나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백왕의 털이 곤두섰다.
오주력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자신을 시험하고자.
만약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면, 죽일 작정으로 말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오주력에게 불길함을 느꼈던 것이었다.
순간.
문득, 오주력을 대했던 태도 등이 다시금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혹여나 문제가 생길법한 일들이 있었는지.
“······.”
······ 오주력과의 사이에서 그다지 서로가 좋았던 기억은 없는 것 같았다.
꿀꺽!
결국 그간의 일들을 떠올리던 백왕이 한 차례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눈을 뜨자, 새하얀 세계가 나를 반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의 세계.
그 앞에 쓰러진 수많은 벽들.
보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나의 안쪽.’
이곳은 나의 안, 나의 영혼을 표현한 세계다.
마혈왕과 원시 천마가 들어왔던 문의 안쪽이었다.
어쩌면 이곳이야말로 사후세계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게 죽음의 끝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천천히 쓰러지고 무너진 벽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더 이상은 ‘벽’이라 부를 수 없는 잔해들.
툭.
툭.
그것들을 하나, 하나, 다시 쌓기 시작했다.
물론 이 벽이 무너지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나는 이 세계에 처음 와보니까.
하지만 어차피 이미 죽었다면, 더 이상 할 일도 없지 않은가.
‘느긋하게. 천천히.’
피식 웃으며 내 나름대로 벽의 모양을 만들어갔다.
조급할 건 없었다.
도리어 이토록 여유로움을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런 여유를 느낀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분명히 게임을 할땐 마냥 즐거웠던 것 같은데.
‘내가 무슨 게임을 했더라······.’
그런데 그건 정말 게임이었을까?
기억이 희미하다.
열심히 했던 기억은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무슨 꿈을 가졌었더라?’
꿈이 있었던가?
박현명이라는 인간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인간 아니었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거라곤 게임밖에 없는.
‘··· 재밌네.’
아무렴.
이제는 상관 없다.
이미 죽었으니까.
게다가 벽돌로 벽을 다시 쌓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다.
차츰 모양이 완성되자 더 이상 벽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해졌다.
이건··· 이 벽은 뭘까?
아니, 벽이긴 했을까?
왠지는 모르겠지만 벽이 아닌 것 같다.
하기야 벽돌로 뭘 만들든 내 마음이다.
그래. 다시 만들어야겠다.
나는 다시 벽을 허물어, 벽돌로 완전히 다른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
그리고 저 멀리서.
거대한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