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ting with 13 hidden characteristic RAW novel - Chapter (419)
419화. 개같은 신이라서.
어두컴컴한 암흑 속.
‘궤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종말’의 안인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칠흑 같은 어둠뿐.
‘종말’에게 먹힌 직후 떨어진 곳이다.
하지만 ‘궤멸’을 가둬둘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상대가 또 다른 멸망이라 할지라도, ‘봉인’의 능력이 자신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봉인이 아니다. 여긴······ ‘진리’······ 한데······.”
어느덧, ‘궤멸’은 ‘진리’의 안에 자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다.
그가 아는 ‘진리’의 내부와는 너무 달랐으니까.
무엇보다 ‘진리’라면 자신을 이런 식으로 가둬둘 리 만무했다.
순간.
-‘진리’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 허공에서 ‘입’이 나타났다.
궤멸은 가만히 ‘입’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보자마자 온몸이 경직됐다.
사고가 멈추고, 입조차 뻥긋할 수가 없었다.
-그저 ‘진리’를 휘두르는 자에 따라 다른 형상을 보일 뿐.
‘천상’을 말하는 것이다.
궤멸이 알고 있는 ‘진리’의 모습은, 오로지 천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진리’란 그런 게 아니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 누구도 독점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너······ 는······.”
궤멸이 사력을 다해 입을 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입’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종말’을 ‘권속’으로 만들 수 있었는지도 한꺼번에 이해가 된 탓이다.
··· 그의 생각이 맞았다.
저 ‘입’의 존재로 인해 모든 수수께끼가 풀렸다.
“어째서 네가······ ‘멸망’이 인간의 안에 있는 거지?”
허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입’은 멸망이다.
가장 강했다고 알려진 멸망.
판게니아를 멸망시키려던 존재!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사라졌으며, 소명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후 ‘멸망’은 실패작으로 분류됐다.
-‘천상’은 여전히 오만하고, 여전히 독선적인가?
“넌······ ‘처분’되었을 텐데······!”
하지만······ 있을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실패작으로 분류되어 ‘처분’되었을 터인 멸망이, 어찌하여 이곳에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하하하! 천상이 나를 말이냐?
‘입’이 크게 웃었다.
마치 인간과 같다.
호쾌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 천상이 자신을 처분하는 것 자체가 가소롭다는 듯이.
-너는 내가 ‘처분’되어 이곳에 있는 것 같나?
천상의 ‘처분’이란 소멸을 의미한다.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인 ‘천상’이 허투루 처분할 리가 없다.
말인즉슨.
······ 멸망은 ‘처분’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소멸 되었을 터······.”
곧이어, ‘멸망’의 웃음이 멈췄다.
-기껏해야 ‘주입’된 지식으로 잘도 나불대는구나.
아아··· 그렇다.
이는 ‘진리의 문’에서 흘러나온 지식의 파편일 뿐이었다.
천상이 제멋대로 만들어낸 ‘진리’ 말이다.
“너는 실패작이다. 소명을 거부한 멸망 따위가 주제넘게 나불대지 마라.”
‘궤멸’은 부정했다.
천상은 절대적이다.
이 모든 게 자신을 혼란케 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쯧. 다른 놈들보다 더 열등하군. 새로 만들어낸 ‘멸망’이라 하여 내심 기대했거늘······ 이래서야.
허나 ‘입’은 막말을 멈추지 않았다.
실망감이 도를 넘어 허탈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입’은 계속해서 말했다.
-약하기에 의심한다. 약하기에 부정한다.
무엇을 의심하고, 무엇을 부정한다는 건가.
아마도, 진실을 말하는 것일 테다.
궤멸이 그보다 더 약하다는 사실을, ‘멸망’이 처분되었다는 건 천상의 거짓이라는 걸.
무엇 하나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부정하는 건 그 때문이었다.
특히 ‘천상’이 거짓된 지식을 주입했다는 부분.
거짓으로 둘러대야 할 만큼, ‘멸망’이 두려웠다는 방증이므로.
“나는 네놈보다 더 완성되었다.”
그러니, 그럴 리가 없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멸망은 진화해왔다.
궤멸인 그야말로 최강의 병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 상대는 고작해야 판게니아 하나 지우지 못한 멸망이다.
이런 곳에 숨어 천상의 눈을 피해온 멸망이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약하기에 완성에 집착하는 게다, 아둔한 것.
강자는 완성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있으니까.
완성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나야말로 너를 뛰어넘는 멸망이다······!”
-그렇다면 네 이름은 ‘궤멸’ 따위가 아니었겠지.
궤멸.
모든걸 지우는 절대자의 이름이다.
그것을 비웃었다.
-내가 왜 ‘멸망’이라 불렸는지 아느냐?
스으윽-
찰나.
작은 바람과 함께 ‘종말’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종말은 얌전히 그의 앞에 앉아, 궤멸을 바라보았다.
마치 애완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이윽고 ‘멸망’이 말했다.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만이, 유일무이한 멸망임을 선포했다.
파멸, 절멸과 같이 멸망의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존재들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그만이 ‘멸망’이라 불리는 건 단연코 가장 강하며, 대체불가한 영역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멸망’의 이름을 계승하지 못했다.
파멸도, 절멸도, 종말도, 그리고 ‘궤멸’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사라져라. 양산형.
······ 양산형이라니.
감히 자신을 양산형이라 말하다니!
표현 그대로 대량생산에 최적화된 제품이라는 의미다.
무시를 넘어 경멸이다.
아예 같은 멸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엔 너무나도 조악했으므로.
하지만 궤멸이 채 반박하기도 전에, 자기 할말만을 꺼내고 ‘입’은 자취를 감췄다.
이제 이 영역에 남은건.
스으으으!
······ 종말과 궤멸뿐.
동시에 종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궤멸, 그에게 종말을 선사하기 위해.
“설마······.”
순간 궤멸은 몸을 잘게 떨었다.
‘멸망’이라 불리는 존재들은 서로를 공격할 수 없다.
서로가 망가지지 않도록.
그리고 천상에 대적하지 못하도록.
그게 율법이었다.
이는 방금전까지 있었던 ‘멸망’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멸망은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천상과 관계없는 ‘종말’을 만들고, 그 종말을 권속으로 부리는 방식을.
그리하여 자신의 금제를 깨트리는 묘안을 구상했다.
멸망의 의도는 다분하다.
“천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냐, 네놈?”
왜?
그래봤자 천상의 무기 아닌가.
천상의 무기가, 주인을 멸망시키겠다니?
놈이 아무리 강력한 존재일지라도 그딴게 가능할 리 없다.
무엇보다.
‘팬텀. 놈은 뭐지?’
······ 그럼 ‘팬텀’은 뭐냔 말이다.
이 모든 게 가능토록 만든 건 결국 팬텀이었다.
지고한 존재들이 그와 함께하고 있는 까닭.
단순히 ‘멸망’이 개입해서라면 빌헬름과 같은 거대한 영혼이, 두 여신들의 기척이 느껴질 리 만무했다.
그야말로 상극.
절대로 함께있을 수 없는 조합이니까.
이 모든걸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라는 게 있을 수가 있나?
“······ ‘진리’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불현 듯 멸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진리라면.
휘두르는 자에 따라 달라질 뿐이라면.
혹시.
팬텀은······.
“그 존재 자체로 진리라는 거냐······?”
······ 인간의 형상을 한 ‘진리’라는 의미다.
하여, 모든 것을 휘두른다.
전혀 다른 것도, 상극이라 함께할 수 없는 것조차도!
“아······!”
그를 깨닫자 ‘궤멸’의 눈동자가 커졌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다.
기껏해야 멸망의 분신이라고 여겼다.
멸망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만든, 혹은 다른 의도로 만들어진 복제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그런 게 아니었다.
같을 수가 없다.
그저 ‘진리’가 나타났기에 그들이 몰려들었을 따름이다.
자신들을 휘둘러줄 ‘진리’를 찾아서 나선 것이었다.
천상이 휘두르는 ‘진리’와는 달리, 진리 그 자체에게 휘둘러지길 원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와 같은 존재들이, 휘두르려는 게 아니라 휘둘러지길 원한다는 게.
어쩌면······ 변질된 ‘진리’의 반작용으로, 새로운 ‘진리’가 탄생한 것일 수도 있었다.
살아있는 인간의 형태로.
그들을 휘두르며 더 완성시키는 존재가 바로 팬텀이란 이름의 진리였다.
아직 본인은 모르는 듯하지만.
“그런가. 그런 거였나!”
깨달음.
궤멸은 각성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이 바뀌자, 더 넓은 사고가 가능케 된 것이다.
궤멸은 종말에게 손을 뻗었다.
“진리여, 나를 휘둘러라! 너라면 나를 담아낼 수 있을 터이니······!”
그러자.
그의 앞에 ‘집’이 나타났다.
거대하기 짝이 없는 저택.
저곳에 모든 게 있다.
‘진리의 문’을 열어서도 알 수 없었던 것들이 모두 저 안에 있었다.
저곳에 들어가면, 자신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제발 문을 열어다오! 나야말로 진정한 멸망이란 말이다······!”
모든 갈망을 담아 애원했다.
자신이 휘둘러진다면 멸망보다 더 강력한 멸망으로 거듭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부여잡고 매달려도.
대신.
쩌어어어억!
콰직!
‘종말’이 입을 연 뒤 그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윽고 ‘문’의 앞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
궤멸의 전신이 먼지처럼 흩날리며 사라지고 있다.
“왜······!”
궤멸의 얼굴이 어느덧 다른 존재로 바뀌었다.
··· 황금가면.
궤멸의 빈자리를 그가 다시 차지한 것이다.
황금 가면은 전신이 모두 사라지기 전에, 발악을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쿠웅!
콰아아앙!
압도적인 파괴력과 속도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너는 항상······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가.
빌헬름의 복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결국 패배하여 사라질 운명인 것이다.
모든 걸 버리고, 잊으려고 하였음에도, 가짜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황금 가면은 모든 원망을 쏟아냈다.
팔과 다리가 먼지로 화한 뒤에야 그 움직임은 겨우 멈췄다.
바닥에 쓰러져 머지않아 소멸할 그를 바라보며.
“다 털어냈나?”
······ 나는 말했다.
하지만 황금 가면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움직일 여력 따윈, 입을 열 힘 따윈 없었으니.
“아직 부족한가?”
부족하겠지.
채워질 리 없다.
저것은 영원토록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이니까.
그러자 황금 가면이 나를 쳐다보았다.
“빌헬름은 너를 부러워했다. 너에겐 자유가 있었으니.”
황금 가면은 가짜의 운명으로 고통받았다.
반면, 빌헬름은 육체의 자유를 잃는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빌헬름은 차라리 가짜가 더 부러웠다.
자신의 대행으로 만들어진 황금 가면에게는 적어도 자유가 있을 터이니.
마음대로 움직이고 사고할 수 있는 자유가.
··· 믿기지 않는다는 듯, 황금 가면은 불신의 눈초리였다.
허나.
“빌헬름은 항상 나를 개같은 신이라 불렀지.”
내가 생각해도 빌헬름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엄청났다.
오직 자유를 되찾고자 최선을 다했다.
나를 욕하면서도 계속해서 갈구하지 않았나.
“녀석은 네가 되고 싶어했다. 네가 빌헬름이 되고 싶어했던 것처럼.”
여기엔 진짜도, 가짜도 없다.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할 뿐이었다.
당연히 서로를 원망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황금 가면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의 입가는 한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빌헬름이 자신을 부러워했다는 말에.
어느 정도 위로를 받은 듯이.
나는 천천히 황금 가면의 눈을 감겨주며 말했다.
“이제 자라.”
이제, 모든걸 끝낼 시간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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