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ck in the Tower RAW novel - Chapter 800
799화 다 데려와
듀마고스와의 서열 정리는 금방 끝났다.
이 녀석 덩치가 작아지니까 영 힘을 못 쓰더라고.
“크윽, 분하다! 비겁하게 약해졌을 때를 노리다니!”
“약점 공략은 전투의 기본이지.”
뭘 당연한 소리를 하는지.
약간의 투닥거림이 있기는 했지만 놈도 동행하기로 했다.
내가 기강을 잡아서 그런 건 아니고.
“신기하군. 진짜로 나타나지 않다니.”
“말했잖아. 놈은 나한테 안 올 거라고. 적어도 자기 힘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숭배자의 왕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나라는 것도 이제는 인정하는 느낌.
“아까 싸웠던 쓰레기들은 선발대다. 목표물을 발견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시간을 끄는 역할이지.”
“역시 본대는 따로 있는 건가.”
“숭배자의 왕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니까. 그럴 필요가 없거든.”
동의한다.
자신의 명령이면 목숨을 내놓을 부하들이 한둘이 아닌데 굳이 본인이 나설 필요 있나.
중요한 순간, 자신이 필요한 타이밍에만 나타나면 그만이지.
“본대라는 거, 규모가 어느 정도냐?”
“흐음. 본대 전체를 말한다면 모른다. 놈들은 개념 사냥을 동시다발적으로 하니까.”
한 번에 하나씩 하는 게 아니었군.
하기야 그 편이 효율적이긴 하다.
선발대와 본대가 흩어져 사냥감을 붙잡고, 숭배자의 왕이 하나씩 수확하면 되니.
“보통 찾아오는 놈들은 최소 100명에서 많으면 200명가량. 정예부대가 포함되어 있고 제작자도 함께 온다.”
“제작자?”
“괴이체와 개념 무구, 무너진 자를 설계하고 만드는 놈들. 개념 추출 등등 온갖 일을 하지.”
이건 처음 듣는 내용이다.
제작자라.
확실히 숭배자의 왕 한 명이 만들었다기에는 괴이체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괴성채에서 공장처럼 찍어 낸다고만 생각했는데.
‘따지고 보면 괴이체라는 것도 조합이 맞아야 만들 수 있지.’
조합과 설계를 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당연했다.
살짝 신경 쓰인다.
어떻게 보면 개념의 전문가라는 뜻 아닌가.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그런 일들을 할 수 있을 테니.
만약 그렇다면.
‘등반가도 자유롭지는 않다.’
지금 탑에 남아 있는 등반가 대부분은 개념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공략당한다면 곤란해질 게 뻔했다.
“조심해야 할 건 뭐지? 제작자라는 놈들은 어때.”
“제작자 자체가 강하지는 않다. 학자에 가까운 놈들이니까. 순수한 본인 능력만 따진다면.”
까득.
녀석이 이를 갈았다.
“변이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시적으로 본인들을 괴이체나 혼돈의 파편처럼 만들 수 있거든. 남의 것을 주무르는 것도 도가 튼 놈들이다.”
과연. 쉽게 볼 녀석들은 아니군.
나머지 병력들은 그들을 보조하는 역할이라 생각하면 편하다.
그건 그건데.
“야, 너는 계속 형상 유지할 수 있냐?”
“가능하다. 이 몸은 위대한 종말의 드래곤이니. 다른 놈들처럼 영혼 상태로 빠지지 않아도 되지.”
저번에 사라졌던 것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은 몸집이 작아져서 못 봤던 건가.
형상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라.
지금 꼴을 보아하니 유지라기보다는 절전 상태에 더 가까워 보이긴 한다만.
‘나쁘지 않아. 영혼체가 되면 움직임이 제약되니.’
육신과의 연결은 거의 다 끊고 영혼 상태로 버티는 특성상 멀리 움직일 수가 없다.
다시 살아나려면 육신이 있어야 하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전에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었으니.
“종말의 드래곤이라 부르던데.”
숭배자들도 놈을 그렇게 불렀다.
묵시록의 드래곤.
종말과 관련된 존재.
가지고 있는 개념도 종말이다.
개념이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대변하는 것.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종말이라는 개념이 붙는 걸까.
“내 이명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이 몸이 그 대단한 종말의 대리자이다!”
뭐가 그리 뿌듯한지 앙증맞은 날개를 활짝 펴는 녀석.
쪼만해서 그런가 그다지 위엄 있지는 않았다.
“내 기껏 세상을 종말시키려 했거늘. 빌어먹을 탑이 나보다 빠르게 세상을 멸망시켰다.”
“미친놈이었군.”
“아니, 현명한 처사였다.”
듀마고스의 눈빛이 가라앉는다.
“우리는 탑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니, 내 종족들은 세계가 쌓은 업이 터지기 전에 미리 세상을 종말시키고 다시 탄생시키길 반복했지.”
탑은 어떻게 등장하는가.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각 세계마다 감당할 수 있는 혼돈은 정해져 있었고 기준을 넘어가면.
‘탑이 나타난다.’
전쟁, 다툼, 불화 등등.
크고 작은 업보가 쌓여 혼돈이 커지면 탑이 찾아온다.
정도를 넘어선 혼돈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게 세상의 규칙.
모든 세계는 언젠가 탑을 맞이한다.
‘설마 그보다 미리 종말을 일으켜 탑을 피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위험하다 못해 미친 발상이다.
그걸 꾸준하게 해 왔다는 건 더 굉장한 일이고.
“우리는 종족을 제외한 모든 것을 미물로 보지. 한번 지우더라도 세계를 유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오만하네.”
“태생이 그런 종족이다.”
세계 전체를 보면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몰랐다.
다른 종족들은 피를 보겠지만.
“세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완전한 종말과 비교한다면 나을지도 몰랐다.
이전부터 궁금했다.
멸망한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세계에 살아가는 지성체가 모두 죽는 것으로 끝나는 건가.
아니면 진짜 세계 자체가 사라져 버리나.
“조금 더 서둘렀어야 했는데. 하찮은 놈들이 대항하지만 않았어도 우리 세계는 살아남았을 거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이냐.”
“너흰 탑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했잖아. 어떻게 알고 있었지?”
“먼 과거 나타난 적이 있으니까. 이후로는 관측해 왔다.”
과거에 나타났다라.
그럼.
‘세계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닌 모양이군.’
극소수의 생존자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아 문명을 재건했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멸망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을지 몰라.’
탑이 세계가 쌓아 올린 혼돈을 없애는 방법으로 멸망을 선택한 이유가 뭘까.
그건 듀마고스가 한 말과 연결된다.
원인 제거.
혼돈이라는 거, 영원히 쌓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랬으면 종말이 찾아오더라도 혼돈이 남아 있었겠지.
즉, 혼돈은 추가되지 않는다면 서서히 사라진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정말 세계에 쌓인 혼돈을 해소할 방법이 멸망밖에 없다면 어째서 탑은 기회를 주는가.
왜 탑을 열어서 멸망을 극복할 힘을 주는 걸까.
난 이것에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다.
“듀마고스, 멸망이 찾아왔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이겨 내면 어떻게 되지?”
끝끝내 몰려드는 몬스터와 혼돈의 파편을 무너트리고 살아남는다면.
몰락하지 않고 이겨 낸다면 어떤 결과가 찾아올까.
세상이 망할 때까지 탑이 기다리려나.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멸망을 피한 세계는 없다.”
“극복한 곳은 있잖아.”
제6 천계.
오필리아가 계승한 천사의 세계는 멸망을 극복했다.
“어디를 말하는지 알겠군. 그래. 특이한 케이스가 있기는 했지.”
고개를 주억거린 녀석이 입을 열었다.
“간단하다. 극복해 낸 시련은 더 이상 시련이 아니지. 세계의 격이 올라간다.”
“세계의, 격이라는 건.”
“감당할 수 있는 혼돈의 총량이 늘어난다는 거지. 그것 또한 멸망을 이겨 냈다 볼 수 있겠군. 가능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시련을 이겨 낸 자, 강해질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논리.
세계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어째서 탑은 등반가를 초대하는가.
온갖 위험과 함정을 뚫고 위로 올라온 이에게 보상을 내려 주는가.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들어온 NPC에게 마지막 기회를 남겨 두었는가.
이겨 낼 수 있으니까.
더럽게 어렵고 힘들어도 가능성이 있기에 그랬던 거다.
‘최악의 경우는 없다.’
불가능과 불가능에 가까운 것.
그 차이는 크다.
조금은 안도감이 든 채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멸망도 극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 좋은 소식이지만 행복 회로만 굴릴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숭배자의 왕은 힘을 키우고 있었으니까.
“여기 중 네 상징체가 있나?”
릴카와 준비한 상징체를 바닥에 깔았다.
덕춘이가 발견한 것들을 중심으로 만든 거라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오호, 기특하게도 이 몸의 상징체를 가지고 있구나.”
놈이 가리킨 건 하나.
금이 간 달걀 형태의 상징체였다.
“이걸 이용하면 힘을 더 쓸 수 있을 거야. 짧지만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상징체란 그런 거다.
비록 잃었음에도 흔적은 남아 있는 법.
그만큼 삶의 영속성은 강했으니 과거를 추억하듯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어거지로 하는 거라 유지 시간도 짧고 완벽히 전성기의 힘을 쓸 수는 없지만 없는 것과는 천지 차이.
더불어 흐릿해져 가는 몸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숭배자의 왕. 같이 잡자.”
난 제안을 했고.
“네가 아니더라도 언제고 복수할 생각이었다. 좀 더 빨라졌다 생각해 주지.”
녀석이 짧은 앞발을 내밀었다.
99층을 클리어하고 싶은 자와 복수를 꿈꾸는 자의 뜨거운 악수.
-스으으으.
놈의 영혼 일부가 상징체로 빨려 들어간다.
쇠약해진 이들은 그대로 상징체 속에서 휴식을 취했지만 이 녀석은 강하다.
“흐음. 확실히 몸을 가누기 편해졌군.”
-꾸드드득.
작아졌던 몸이 도로 커진다.
최적의 사이즈를 찾는 건지 몸을 뒤척이던 녀석이 이전보다는 좀 작아진 모습으로 변화를 멈추었다.
그럼 이쪽은 준비가 끝난 거 같으니.
-자그락.
상징체들을 한데 모아 녀석에게 넘겼다.
“이걸 왜 주지……?”
“네가 잊혀진 자들 중 제일 세다던데 맞냐?”
“그야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럼 데려와.”
“응?”
“싹 끌고 오라고.”
난 애들한테 갈 거니까.
* * *
괴성채의 비밀 통로.
포탈이 숨겨진 절벽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두 사람이 달렸다.
“이쪽 길 맞아?”
“나의 명석한 두뇌로 봤을 때 분명하지!”
“이 씨. 아닌 거 같은데.”
급격히 불안해진 핥짝이가 탈모맨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특임대에 있던 만큼 목적지를 찾아가는 건 탈모맨에게 맡겼다.
길을 잘못 들었을 때를 대비해 핥짝이 역시 지나쳐 온 길을 외우고는 있었지만.
‘슬슬 헷갈려.’
사람의 기억력엔 한계가 있었고.
“오른쪽!”
“좀 꺼져!”
-콰아아악!
수시로 달려드는 괴이체와 숭배자 잔당이 달려들어 싸우다 보니 기억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저.
-꽈드드득.
지나쳐 온 통로에 흔적을 남겨 대비할 뿐.
그만큼 길이 복잡했다.
스마일캡이 남긴 좌표 덕분에 어떻게든 가까워지고는 있었으나 확실한 길을 찾는 건 둘의 몫이었다.
“엇? 공듀한테 메시지 왔다.”
앞서가던 탈모맨의 외침에 핥짝이 또한 커뮤니티를 확인했다.
“오! 왕이랑 숭배자 애들 별로 없더니만 다른 곳 갔나 본데?”
“그건 다행인데, 얜 진짜 밖에 나가면 정신과 한번 보내야겠다.”
“하하! 무슨 소리야. 현실에서는 안 그런다고.”
“그게 더 문제가 아닐까. 지능적인 미친놈이라는 거잖아. 밖에 나가서 어쩌려고.”
이미 밖에는 공듀님 돌아오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준비가 한창이라던데.
80층대였던가, 이준석이 개인 메시지로 이야기했었다.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할 계획이라고.
밖에서 공듀를 사칭할 미친놈은 없었으며 신분 확인 절차가 끝났을 거다.
결과적으로 쁘띠공듀가 아직 탑에 있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탑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잖아, 멍청아.’
이미 알 사람은 안다.
탑에 남아 있는 게 누구누구인지.
예고된 친구의 사회적 매장을 떠올린 핥짝이가 질끈 눈을 감았다.
그것도 잠시.
“근데, 지원군이 남아 있던가?”
의문이 들었다.
“음. 요리사 친구 한 명 남지 않았나?”
“걔를 말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미간을 찌푸렸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래서 믿었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었을 거라고.
-끼익!
“조금 있으면 산맥 진……!”
“아, 뭔. 읍!”
좌표를 확인한 탈모맨이 골목을 꺾는 찰나.
급격히 몸을 튼 탈모맨이 핥짝이의 입을 막았다.
탈모맨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경계심에 부푸는 근육.
-스윽.
심상치 않음을 느낀 핥짝이가 탈모맨의 손을 치우고 자세를 낮췄다.
골목 너머 어둠이 꿀렁거렸으니.
벽에 달라붙은 수많은 숭배자의 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저게 어떤 현상인지 알고 있다.
몸에 맞지 않는 개념을 받아들였을 때의 현상.
“으으음. 이놈들은 영 못 쓰겠군.”
괴물이 되어 가는 이들을 냉담한 눈으로 바라보는 자가 쿡쿡 그들을 찔렀다.
어떠한 동정심도 없다.
물건 상태를 확인하는 것처럼 건들고 있었지.
숭배자의 왕을 따르는 이들 중에서도 특별한 자들.
“이번 설계는 별로군.”
설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