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08)
108
이곳 구조에 밝은 이보답게 그는 능숙하게 나를 야외의 갑판 위로 안내해주었다.
그곳에서도 깨진 석판 없이 다들 어수선한 자리를 정돈해놓은 상태였다.
다른 층에 비해 귀족들이 더 많았는데,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이기도 했다.
확실히 상품만 살피는 게 아니라 읽는 데 집중이 필요하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아까 소란에서도 점잖게 대피하려고 했을 것 같네.’
한가하게 주변을 구경하는 나와 달리 이보는 올라오자마자 시종을 시켜 안경을 받았다.
나는 무심코 그걸 보다가 내심 놀랐다.
그게 마넬라노가 준 안경이었기 때문이다.
‘……관리 되게 잘했는데.’
내 것은 잔 흠집이 엄청나게 났는데, 이보 것은 거의 새 안경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아끼고 아껴서 쓴 티가 났다.
하긴, 저 안경은 요새도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소성이 높고 성능도 좋지.
어쨌거나, 따지고 보면 이보도 운이 나쁜 건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현재에서도 이보와 연적인 마넬라노가 구해줬다고 하기엔 너무 훌륭한 물건이니까.
안경을 쓴 이보가 내게 어쩐지 기대하는 어조로 물었다.
“너는 안 써?”
“저도 쓰려고요.”
나는 주섬주섬 안경집을 꺼냈다.
그리고 안경을 쓰자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경은 언제 바꿨어?”
“최근에 새로 마련했어요.”
“이것도 기능성이야?”
“네. 도련님이 새로 구해다 주신 새로운 안경이에요. 이것도 특수한 기능이 있죠.”
사실 말과 달리 안경은 도수만 있는 평범한 안경이었다.
이제 따로 기능성 안경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기에, 특수 각인을 해준다는 도련님의 말을 거절했었거든.
지하에서 북부의 석판만 볼 땐 몰랐는데, 바깥의 일반 석판은 그냥 눈으로 봐도 해석이 가능할 정도였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단련이 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겐 좋은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석판 해석할 일이 또 있을지 모르니 이보에겐 그런 능력까진 안 밝히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이보와 갑판 위를 아까보단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석판을 멀리서 보기만 해도 내용이 읽혔다.
글자가 특수 안경을 쓴 것처럼 반짝이기도 했고.
‘……타국의 석판들이라 달라도 뭐가 다르긴 한 건가?’
석판마다 회오리며 불꽃 비슷하게 신기한 문양을 띤 게 보였다.
그걸 보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가만. 도련님도 전에 공작의 시험을 받을 때 이렇게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그간 내가 도련님의 체향이나 숨으로 회복되었으니, 그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은 했다.
그리고 이제 같은 증상을 몇 번 겪고 나니 거의 확신이 되었다.
‘그럼…… 내가 가진 병이 완전히 나쁜 건 아니었네.’
살면서 내가 가진 병이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이상은 진절머리 나고 끔찍하기만 했지.
그래도 인생 오래 보고 살 일이라고. 그 병이 이제는 완전히 끔찍하게 여겨지지만은 않았다.
그 덕에 도련님을 만나 좋은 추억을 쌓고, 이런 귀한 능력까지 얻었으니.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감회에 젖은 채 갑판 위를 반 이상 둘러볼 때쯤, 이보가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네가 찾는 건 오늘도 없어 보이네. 따로 구경하고 싶은 건 있어?”
“아뇨. 그럼 이만 객실로 돌아가요.”
사실…… 다른 것보다 뒤에서 계속 쫓아오는 도련님이 신경 쓰였다.
괜히 몸도 아픈 사람을 고생시키느니 빨리 가서 조금이라도 쉬게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래서 둘러보던 걸 이만 멈추고 반대편 계단을 향해 가는데 귀족들이 많이 몰린 곳이 눈에 들어왔다.
스치듯 보면서 지나치려는 찰나, 무언가 반짝이는 형상이 보였다.
‘……저게 뭐야?’
나는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다른 석판들과 다르게 사람들 등까지 투명하게 뚫고 보였는데, 심지어 형상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주먹만 한, 백색 사각형의 결정에 무슨 푸른 점들이 박힌 것 같긴 한데…… 직감상, 분명히 저 푸른 것도 석판 형질의 일종이었다.
혹시 도련님이 과거에 공작의 시험을 치를 때와 같은 상황일까?
‘그때도 석판이 겹겹이 쌓여 있어서 문양 여러 개가 동시에 보인다고 하셨지…….’
그런 생각이 들어 몇 걸음 더 다가가서 사람들 어깨 너머로 석판을 봤다.
그러나 최고급 카펫 위로 석판은 딱 하나씩만 진열되어 있었다.
과거 도련님이 보신 것처럼 여러 개가 동시에 겹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눈으로 보기에 분명히 석판 하나당 성질이 둘이었다.
백색 사각형 결정체에 박힌 푸른 돌…….
엄지손톱 크기나 간신히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그것은 흐릿하지만, 푸른 아우라 같은 무언가가 표면에 피어오르기까지 했다.
‘석판 하나에 두 형질……. 저게, 정말 가능한가?’
심지어 백색 사각형 속에 돌이 박힌 위치는 석판마다 제각각이었다.
어느 것은 정중앙, 어느 것은 왼쪽 최상단, 어느 것은 하단에 어중간한 자리……. 마치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섞인 것 같았다.
그사이 젊은 상인은 귀족들을 둘러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 이 석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은 멸망한 고대 마법 왕국의 바위로 만들어진 특별하고도 특별한 석판이지요!”
저것은 일반적인 탐구용 석판이 아니라. 어디서도 보기 힘든 소장용 석판이었다.
신의 가호가 깃들어 있어 신성력을 만나면 영롱하게 반짝이며 빛이 나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귀족들이 과시용으로 소지하기도 하고, 특수한 방식으로 녹여 무구에 넣기도 하는 희귀품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내가 이렇게 놀란 것은 아니었다.
“저희 대상단의 선조가 사유지에서 따로 귀중히 보관하고, 또 귀중히 보관하여……!”
“로벨.”
내가 넋 놓고 구경하는 바람에 구경꾼들 틈에서 빠져나오려던 다른 상인과 부딪칠 뻔하자, 이보가 나를 잡아 끌어주었다.
“로벨. 왜 그래.”
그때까지도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보가 어깨를 흔들며 묻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대체 뭘 보는 건데. 저게 갖고 싶어서 그래?”
“형님. 잠시만, 이쪽으로.”
나는 당장 저 의심쩍은 석판을 사줄 것처럼 구는 그를 사람이 좀 적은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대뜸 물었다.
“여기 혹시 신고 포상금 있어요?”
좀처럼 듣기 힘든 단어 조합에 이보가 잠시 멈칫했다.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이보를 올려다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물론 효과는 없었다.
나를 잘 아는 그의 목소리는 한층 더 불안함을 담을 뿐이었다.
“그런 건 아직…… 들어본 적 없는데.”
“아하. 그럼 없다는 얘기도 못 들은 거죠?”
“……그건 그렇지.”
이 정도만 말했는데도 이보는 상황을 어느 정도는 파악한 모양이다.
잠시 곤란한 듯 미간을 문지르던 이보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갑자기 무슨 문제를 발견한 건데?”
“이보 형님. 혹시 저거 보이세요?”
내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보가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 특별할 것도 없다.
멸망한 고대 왕국의 석판을 구경하는 귀족들의 등만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 이보는 보이지 않는구나.’
하지만 도련님의 영향을 받아 디프의 특성이 깃든 내 눈에는 달랐다.
사람들 등을 투명하게 뚫고 보는 것처럼, 그 근처의 석판들이, 그리고 그 석판의 특이점이 선명히 보였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그게 아니었다.
“이 안경 덕분에 알 수 있는 건데요. 저기서 판매하는 석판들의 형질이 이상하게 두 개로 보이거든요.”
모양이나, 다른 세세한 건 말할 필요 없겠지.
일단 나는 중요한 요점부터 말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 마법 바위 석판은 다 가짜예요.”
“……뭐?”
“진짜를 녹여서 가짜 석판 위에 덧바르고 굳혀서, 가품 여러 개를 만든 것 같아요.”
“로벨. 나도 가능하면 네 말을 믿고 싶은데……. 저자가 판매하는 것들은 여태껏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이보는 여전히 믿기 어려운지 내 말에 하나둘 반박을 했다.
최근 저자의 석판으로 무구를 제련한 귀족들이 신전에 입고 다녔는데, 성력에 반응했다고 한다.
그 영롱한 광채에 다른 귀족들도 모두 주목하며 부러워했다고.
“그러니 네 추측은 틀렸어. 가짜라면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잖아.”
한숨 쉰 그가 말을 이었다.
“석판을 녹여 무구를 제작하는 것까지야, 성력에 반응하는 성질이 사라지진 않지만…… 무구를 제작하는 것 외의 다른 물질과 만나면, 그 성질이 전부 파괴되어 버리는데.”
이보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재까지도 성력에 반응하는 그 빛의 실체는 누구도 밝히지 못했고, 그래서 같은 방식으로 사기를 치려던 상인들은 줄줄이 실패했다.
석판을 녹여 그럴싸한 가품의 외양까진 만들 수는 있다 쳐도, 신성력에 반응하는 광경을 보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저 상인은 덴카르트의 새로운 자원도 도맡아 서부 운반을 나누어 책임질 정도로 규모가 커. 황가의 허락까지 받아 그 자원들로 다방면의 연구와 실험을 하고 있…….”
이보는 말하다 말고 무언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멈칫했다.
“네. 저도 그게 가장 걸리긴 했는데요.”
나는 그를 마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도련님이 발견한 자원으로 연구를 하다가 뭔가를 찾아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