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25)
125
나는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선 떨리는 호흡만 간신히 새어 나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실제로 겪는데도 머릿속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도련님은 혼자서 잘도 생각하고 행동했다.
예쁜 녹안이 무언가를 알아챘다는 듯이 반짝이다가 서서히 휘어졌고,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가 순식간에 닫혔다.
나는 지나치게 가까운 도련님과의 거리보다 그 표정에 더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을 무수히 많이 봤는데도,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말 그대로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 여기까진 괜찮다는 거구나. ]언제부터인지 비가 요란하게 오고 있었다.
굵은 빗발이 마차 지붕이며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피부 속까지 저릿하게 아파졌다.
[ 그럼 다음은…….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린 시절 상단에서 로베르 오라버니와 장난을 치다가 귀한 옷감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다시 정돈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어머니의 예리한 눈은 속이지 못했다.
당시 흐트러진 옷감을 발견하신 어머니를 피해서 허겁지겁 도망친 적이 있었다.
상단 건물의 꼭대기부터 일 층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내내 달렸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간절히, 도망치고 싶어졌다.
‘……나가야 해.’
복잡했던 머릿속엔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 하나밖에 들지 않았다.
[ 장난은 적당히 하세요. ]이 말을 뱉을 때 내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던가, 쉬었던가.
둘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마차는 멈춘 상태였다.
비에 젖는 건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날씨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요란하게 떨어지는 빗길도 뚫고 저택을 향해 뛰려고 했다.
간신히 그 말을 뱉고선 마차 창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가 바로 따라 나왔다.
[ 로벨! ]그런데 어느 순간 비가 멈추었다.
정확히는 굵은 빗방울이 내가 서 있는 곳만 빗겨 가듯이 하늘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떡하려고 능력을 제멋대로!…….’
누가 볼까 불안한 심정으로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는데, 태연자약한 도련님이 보였다.
주변을 살피며 어쩔 줄을 모르는 나와 다르게 오히려 외투를 벗으며 내게 여유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손과 다르게 따뜻하게 데워진 외투가 내 머리 위로 걸쳐졌다.
이윽고 커다란 제복 외투가 내 어깨며 허리까지 모두 보호하듯 감싸주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주 어이가 없었다.
‘추위를 탄다더니…… 아무렇지 않잖아.’
손도 멀쩡하고……. 아주 뱉는 말마다 몽땅 거짓말이었다.
기가 막혔다.
믿었던 도련님이 공작만큼이나 뻔뻔하게 자랄 줄은 몰랐다.
‘아니, 이건 오히려 공작보다 악질적이지 않나?’
공작은 잔혹하고 매정할지언정, 사람 놀리는 시시한 거짓말 따윈 하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사람 아픈 건 질색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악질적인 거짓말을 하다니…….
그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배신감과 분노에 내 언성은 빗소리보다도 높아졌다.
[ 왜 저한테 거짓말하셨어요? ]젖은 금색 머리카락이 잔뜩 달라붙고, 빗물이 뚝뚝 흐르는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처연해 보였다.
셔츠가 반투명해질 정도로 젖어 불편하고 추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닦아주지 않았으며 들어가자고 종용하지도 않았다.
이번만큼은 매서운 눈으로 두고 보고만 있었다.
한참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지만, 도련님이 답하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제일 열 받는 건, 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도련님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에 젖은 도련님이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할지, 이런 날씨를 싫어하는 그가 어서 쉬어야 하진 않는지 끓는 머릿속을 뚫고서 쿡쿡 찔렀다.
내게 도련님의 상태를 신경 쓰는 것은 숨을 쉬고 뱉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망할. 이건 정말 호구가 따로 없네.’
도련님에게 화가 났지만, 나에게도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내 인내심은 쌍방향에서 가위질하듯 싹둑 잘렸다.
[ 갑자기 대답 안 하세요? 방금까지만 해도 저보다 잘만 말씀하시던 분이 왜 가만히 있을까. ]나는 타고나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도 싫어하는 성향이다.
그런 데다, 타고나길 예민한 도련님의 성품을 잘 알기에 더 세심히 주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짜증을 참을 수 없었다.
[ 입 없어요? 말해보라니까. ] [ ……. ] [ 말하라고요. ] [ ……무서워서. ]나는 어이가 없었다.
빈말이라도 결코 무서워서 그런 거짓말을 했다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떨거나 겁먹은 기색도 없었다.
그러긴커녕 무언가를 단호하게 결심하고 기다렸던 사람 같았다.
[ 나는 그때 로벨 네가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그러니 내게는 이마저도 질 나쁜 장난으로 느껴졌다.
‘내가 정말 무서웠다면 나를 속이는 짓은 하지 않았겠지.’
나는 그를 뒤로한 채 저택 현관에 다가갔다.
가는 내내 주변은 온통 흠뻑 젖는데도 여전히 내 몸은 물 한 방울도 닿지 않았다.
비에 젖은 것은 도련님이 걸쳐준 외투뿐이었다.
도련님이 계속 나를 따라오며 디프의 힘을 여지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속 안감에도 무슨 힘을 썼는지 여전히 따뜻하고 젖지도 않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눈에 띄어 도련님의 정체가 드러날까 봐 나야말로 두려웠다.
그런 내 초조한 마음을 도련님은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참다못한 내가 걸으면서 또 뒤를 돌아 소리쳤다.
[ 하지 마요. 아…… 진짜. 에이, 진짜!! 그거, 좀 쓰지 말라니까?? ]이제 도련님은 아예 못 들은 척을 했다.
그러더니 뻔뻔하게 제 할 말만 해댔다.
[ 그러니까 내가 우산을 씌워준다고 했잖아. ] [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데요. 싫다고 했죠. 예? ] [ 나도 너한테 싫다고 했어. 내가 너 비 맞고 있는 거 보고 있어야 해? ]나는 속으로 짜증을 냈다.
‘언제부터 이렇게 내 말을 안 들었지, 예전엔 천사처럼 착하더니……. 누가 애를 이렇게 망친 거야?’
림슨 형이나 아리프 형은 아닐 텐데. 거기 주둔지에 이상한 놈들이 있었나??
속으로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욕을 하면서 도련님에게는 치를 떨며 짓씹듯 뱉었다.
[ 저 이제 시종 일 안 할 거예요. ] [ 그래, 그러자. ] [ ……? ]뜻밖의 말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다시금 고개를 돌리자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도련님의 낯이 보였다.
내 뒤의 현관에 선 그는 비에 젖은 머리를 대충 털며 말했다.
[ 그건 나도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뭐야. 지금 돌려 까는 거야?
내가 시종 일을 얼마나 잘했는데??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도련님이 당당하게 말했다.
[ 로벨 네가 왜 남의 시중을 들어. 시중을 받아도 모자라는데. ]그동안 자기 시중을 들었는데도 도련님은 이상하게 억울한 눈치였다.
왜 그런 고생을 했냐며 본인이 더 화가 난다는 듯이 표정을 구기질 않나, 앞으로는 직접 수고로운 일을 하지 말라며 엄포까지 내렸다.
그러면서 또 나를 따라 자연스럽게 2층으로 올라가는데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애가 왜 이렇게 바뀐 거야…….
[ 집사님, 들으셨죠? ]그런데…… 전에 트레이시라고 했었나.
내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쫓아오던 기사가 눈치 없이 뒤에서 말했다.
분명 뒤에 함께 서 있는 웨인에게 말한 건데도 나한테 들렸으니 도련님도 분명히 들었을 터였다.
급변하는 그의 표정이 감정을 반증해주었다.
[ ……로벨한테 나 말고 다른 놈을 종일 붙이겠다고? ]눈치를 보던 트레이시는 뒷짐 진 채로 조용히 층계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늘 하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이상하게 바라보는데, 수하 중 한 명이 도련님께 무슨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 주군, 찾았습니다. ] [ ……. ]도련님은 얘기를 들으며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얘기가 끝나자 나더러 쉬고 있으라 한 뒤 나가서는, 여태껏 귀가하지 않았다.
그 후로 나는 혼란의 쳇바퀴를 쉬지 않고 굴려야 했다.
처음에는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건가 싶었다.
다음에는 내 안일함을 속으로 꾸짖었고.
그래.
혈연관계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아이에게 먼저 다가가고, 지나치게 대했던 것은 나다.
그러니 도련님이 애착 관계를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로베르 오라버니만 해도 어릴 때 친구랑 떨어지기 싫다고 칭얼거렸으니까…….’
일단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도련님이 지금 당장 외출하신 것에 감사했다.
오늘 늦은 밤에라도 도착하실 수도 있지만, 피로감이 있을 테니 금방 주무실 것이다.
그래서 페드릭에게만 조용히 부탁했고, 나갈 채비를 은밀히 마쳤다.
사실 그동안 줄곧 준비해왔기에 크게 챙길 것도 없었다.
시선을 들자 조촐한 짐가방 두 개가 보였다.
* * *
그토록 기다리던 실마리를 찾은 에드릭의 입매가 비틀렸다.
“……혼사라더니.”
그의 손에는 로벨이 미리 작성한 제국 이주 신청서가 들려 있었다.
다 들통 날 거짓말을 한 쪽은 로벨도 마찬가지였다.
20여 년간 윈스 제국에서 입국한 자들과 벨리칸에 갔던 자들을 모두 조사하였으나, 로벨과 비슷한 또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로벨은 사실도 아닌 이상한 핑계를 대고서 이 나라를 완전히 뜨려고 했다.
무슨 중죄라도 짓고서 도망치는 사람처럼 말이다.
전혀 로벨답지 않았다.
‘그 와중에 이건 또 뭐고?…….’
어제 수하가 페드릭이란 놈에게서 빼앗은 서신이라고 했다.
거기엔 웬 귀족 영애들 목록이 수두룩했다.
대부분 이름을 적긴 했는데, 이름이 없다면 가문명이나 주로 입는 의상의 특징 등이 있었다.
도대체 무언가 했더니, 자신과 절대 혼인하면 안 되는 여자들의 이름이라고 했다.
에드릭은 그걸 보자마자 태워버릴 뻔했다.
직접 주면 될 것을, 왜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놈에게 전해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로벨이 그놈에게 이 서신을 줄 때 둘이 손을 잡았냐고 묻자 수하는 거듭 그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황한 표정을 보니 꽤 오랜 시간 둘이 밀접하게 붙어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에드릭은 이를 사리물었다.
‘로벨…… 너도 나한테 관심이 있잖아. 나랑 같이 있고 싶었잖아. 그러면서 왜 자꾸 떠나가려고만 해.’
사실대로 말해야 할 장본인은 자신뿐만 아니라, 로벨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라고.
차마 말 못 할 어떤 이유 때문에, 정체를 숨기면서까지 자신을 모셨던 거라고.
그 이야기를 진솔하게 해주어야 했다.
‘어디까지 속이려 하는 건지…….’
그런데 로벨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에드릭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오늘 밤에 페드릭이란 하인의 이름으로 국경까지 향하는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