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29)
129
‘다 나으면 조용히 돌아가자.’
덴카르트에 첫발을 내디딜 때, 그렇게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살려고 들어온 자리이니, 목적만 이루고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처럼 아픈 도련님이 점점 눈에 걸려서, 예상치 못하게 마음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7년 전, 언젠가.
도련님이 내 정체를 알면 어떻게 될까 가만히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내가 여자라고 하면…… 도련님은 내 말이라 해도 안 믿으려나.
믿는다 해도, 그동안 이성이 시중을 들었다고 불쾌해하면 어쩌지……?
동성도 불편해하고 싫어하는 도련님인데 이성이라 하면 더 끔찍하게 여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도련님의 얼굴을 떠올리면 죄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한 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기필코 살고 싶다는 나의 갈망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게는 거짓말이었다.
그런 생각들에 파묻혀 온종일 잘 하지도 않던 실수를 반복했다.
도련님 외투를 들고 다니다가 바닥에 떨어트린다든가, 그가 다 먹은 식기를 치우지 못하고 멍하니 보고 있다든가.
도련님이 ‘왜. 어디가 아픈 거야?’라며 내게 걱정스럽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나는 두 손을 저으며 ‘아니요, 그럴 리가요.’라고 했지만, 도련님은 여전히 나를 걱정스럽게 봤다.
그 시선에 양심은 더 찔렸다.
그리고 다음 말에는 기분이 더 이상해졌다.
동병상련이라고.
아픈 사람의 마음은 아픈 사람이 가장 잘 아는 법이므로 도련님은 내게 무리한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도련님의 의도와는 별개로 평소에는 하지도 않을 상상을 해보았다.
‘도련님도 병세에 시달릴 때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가족이든 친구든 누구든 원망스럽고 부러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을 거야.’
나중에 후회했을지언정 때로는 그랬을 거라 생각했다.
나도 그와 같은 병을 알았기에 짐작할 수 있었다.
괜히 악마의 병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도련님도 진실을 알았을 때 내 결심을 이해해주지 않을까?’라는 어리석은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을 때…….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 저기요, 도련님. ]약 기운에 취했던 소년이 녹색 눈을 들어 나를 봤다. 당장 눈꺼풀이 감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하긴 그날 저녁에 도련님이 먹은 약은 유난히 독했다.
남은 것을 몰래 조금 먹은 나도 피로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평소라면 그냥 자게 두었을 테지만, 그날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불안으로 흔들리는 손에 주먹을 쥐며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 세상에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게 있다고 하잖아요……. 거짓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 [ ……로벨. ] [ 예, 도련님. ]긴장해서 뒷말을 기다리는데 미약한 숨소리가 들렸다.
[ 내 어머니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죽고 말았어. ]분명히 소리는 언제라도 사그라들 것처럼 여리지만, 그 안에 든 증오는 뼈처럼 단단했다.
[ 나도 어머니 외에 가장 믿었던 그 사람에게 죽을 뻔했었고……. ]도련님이 가물가물해지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 나도 너처럼 싫어. 솔직하지 않은 사람은……. ]다만, 그 순간에는 도련님의 눈이 감겨있어서 다행이라 여기고 말았다.
[ 너무나 끔찍해……. ]‘……말하면 안 돼.’
……절대 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순한 의도와 다르게 도련님의 호의를 분명히 얻었다.
그러나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시 믿었던 사람이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잘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숨기고 싶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내게 실망한 도련님의 얼굴은.
도련님은 가만히 있어도 예쁘지만,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낼 때가 가장 예뻤다.
신뢰 섞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할 때는, 그가 주인공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마음이 들떴다.
잠시뿐이지만, 내가 정말 그의 인생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영원히 도련님 인생에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힘든 지하의 작업을 견딜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어떻게 더 속아줘야 하나 내내 고민했거든.”
그런데 다신 상상조차 하기 싫던 그 일이 눈앞에 펼쳐지자, 나는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사과해야 할까……. 아니. 오히려 사과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그에게 기만이 아닌가.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도 없겠다는 생각만 들어.”
도대체 언제 알아내신 거지? 알면서도 계속 모른 척을 하셨던 건가…….
나는 복잡한 머릿속을 감당하는 것마저 버거웠으므로 표정 관리를 조금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도련님도 그런 내 혼란스러운 심정을 고스란히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련님은 나를 가엾게 보거나 위로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무슨 반응을 꺼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과를 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는 이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고 직시하라는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7년 넘게 너 하나만 신경 썼어. 그러니 너도 도망칠 생각 하지 말고 나를 의식해.”
7년…….
어쩐지 그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실을 다 알고서도 내게 말하기를 7년이나 기다렸다는 뜻 아닐까.
죄책감과 혼란스러움에 내 고개가 추락하는 순간, 도련님이 말했다.
“로벨. 고개 들어.”
새순처럼 여리던 소년의 목소리가 어느덧 명령이 익숙한 자의 단단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거부할 수 없어 천천히 시선을 올리자 가까워지는 도련님이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도 한 대 때릴 수 있을 테다.
하지만 도련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원망이나 조금 하고 말 사람이었다.
‘아무리 빼어난 검사가 되었다 해도…… 내게 상처 입히느니 자기 손을 자를 사람이야.’
그래서 나는 죄책감에 몸을 떨어도 두려움에 떨진 않았다.
그저 그가 무슨 비난을 할지만을,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불안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내 구두 앞에 바로 멈춰선 그가 고개를 숙이더니 내 어깨에 이마를 댔다.
뜨거운 숨소리가 어깨부터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피하지만 말고…… 나 좀 봐 달라고…….”
나는 그 상태로 굳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상상과 같은 상황에서 도련님은 나를 경멸하지 않았다.
“많이 놀랐다면 미안해.”
오히려 내게 사과를 했고.
“그래도 제대로 확인하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잖아. 내가 앞으로 예쁜 짓 많이 할 테니까…….”
애원했다.
“당장 버리지만 말아줘, 제발.”
그렇게 말하는 그의 긴 목덜미가 수치심으로 새빨개져 있었다.
모든 것이 내 불안했던 상상과 어긋나자 나는 속으로 무거운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 * *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이보 님.”
상단원의 공손한 말에 이보는 천천히 정면을 훑어보았다.
마틴 가문의 대저택은 그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거실 또한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그런데 숙련된 사용인들의 솜씨로 늘 깔끔하던 그 장소가 오늘은 다른 것으로 가득 찼다.
거실의 한 면을 모두 채우는 새까만 석판이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단 하나도 구하거나 구경하기도 힘든 마법 바위 석판들이었다.
만약, 그도 공작의 지원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다양하고 많은 석판을 가져올 수는 없었을 테다.
이보는 곧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응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덴카르트에서 받아온 새로운 자원들이 보였다.
“전부 나가.”
잠시 그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보는 물건을 옮긴 상단원을 모두 내보냈다.
그리고 오래된 가죽 가방에서 안경집과 양피지를 차례대로 꺼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양피지는 자그마치 수백 년 이상 보관되어온 가문의 비보였다.
그것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읽던 이보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시작도 안 했지만, 그 많은 양과 난도에 벌써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이것들이 로벨과 관련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불길함이 들었다.
‘……로벨은 왜 이걸 공작 몰래 구하려 했던 거지?’
한숨을 쉰 그는 높게 쌓인 석판 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선을 거두진 않았다.
눈빛에 흔들림조차 없었다.
그사이 노크 소리가 들리고, 대리인이 들어왔다.
예리한 이보는 상대 특유의 탁탁거리는 발소리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이보 님. 더 지체되면 대상단 연합에 늦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중대한 상황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보는 고개를 돌리거나 답하지도 않고 여전히 석판만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돌덩이들은 덴카르트 공작의 속내처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째서 그 오랜 시간 로벨을 공자의 시종으로 두고, 지하의 석판이나 만지게 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하지만 당사자에게 물어봐도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거친 손을 하고서도 거리낌 없이 웃는 로벨이라면 평생 답하지 않으리라.
이보의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답이 필요한 의문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왜 로벨리아라는 멀쩡한 이름을 두고 로벨이라는 사내 이름을 얻어 아슬아슬한 가짜 삶을 자처했는지, 가족들에게는 이따금 서신만 보내는지…….
‘그래도…… 로벨이 생각 없이 행동한 건 아니야.’
가족에게도 하지 못할 얘기가 있는 게 분명했다.
과거에 곧 그만둔다는 얘기를 하고서도 어영부영 계속 남았던 이유도 이 안에 함께 숨어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했다.
‘……아직 내 힘으로 완벽히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지.’
이보는 무력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 된 증거를 찾고,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할 일을 해내온 로벨에게 힘을 줘야 했다.
그러니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대로 알아야 그녀의 방패든 창이든 될 수 있었다.
“당분간은 불참한다.”
“이보 님!”
“그렇게 전해두고.”
고개를 돌린 이보가 대리인을 향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덴카르트에 이 일이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막음해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