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126)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126화(126/280)
사나이로 태어나서 1
땡스기빙 연휴가 지나고 학교에 갔더니 교장 샘이 또 부른다.
선물이 준비되었단다.
예쁘게 포장된 태블릿 노트가 내 품에 들어왔다.
환하게 웃으며 교장 선생님과 체스 클럽 담당 선생님인 미스터 찰스, 회장 잭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그건 그대로 학교 페이스북에 박제되었다.
동시에 한국에도 기사가 실렸다.
출처는 한섬 홍보실.
체스 대회의 1등부터 6등까지 상패와 수표(Check) 모형의 팸플릿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많은 네티즌들이 한국계 미국인 입양아가 1등을 했다는 사실에 엄지 척을 눌러 주었다.
그리고 곧 다른 기사들에 밀려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일단은 스크랩을 해 두었다.
다음에 대입 원서를 쓸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떤 학교는 기사가 난 것이 있으면 첨부하라고도 한다니까.
미스터 크롭스키는 이미 내가 디베이트에서 1등을 한 전적이 있어 사심 없이 축하를 해 주었고, 미스터 칼은 살짝 부러워했다.
ACC 클럽도 좀 더 키워야 하지 않겠냐고.
인도 음식을 제공하려던 11월 행사는 취소됐다.
날짜 계산을 잘못한 탓이다.
땡스기빙 연휴가 그다음 주 월요일까지라는 걸 확인하지 못했다.
보통은 그 주 일요일까지 연휴고, 월요일에는 학교를 나갔는데 올해부터 바뀌었다고.
개학하기 전에 1년 행사표가 다 나오는데, 게을러서 확인을 안 한 탓이다.
문제는 12월도 마찬가지라는 것.
12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은 방학이다.
이에 12월 중순에 행사를 하는 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오케스트라부터 밴드까지 콘서트들이 줄줄이 있고, 기말고사도 있고, 12학년들은 원서 쓰기에 정신이 없는 때라 그냥 1월 말로 행사를 넘기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그리고 12월의 첫 주 금요일 우리는 TYT 오디션을 보았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스쿨버스를 타고 40분 거리의 다른 고등학교에서 치른 오디션.
밤 11시가 되어야 끝이 났다.
8개 학교가 모이는 이 프로그램은 특이하게 7학년부터 9학년까지를 주니어, 10학년부터 12학년을 시니어로 구분한다.
나는 6학년 때부터 주니어로 쭈욱― 오디션을 봐 왔고, 계속 합격했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더군다나 주니어에서 제일 급이 높은 9학년이다.
First Chair는 그냥 내 거라고 보면 된다.
이번에는 7학년이 된 조나단까지 합류해서 우리 공부방 놈들은 모두 합격이다.
제이콥과 매튜마저.
매주 일요일마다 널싱홈에서 연주 봉사를 하는 것이 의외로 연습량부터 여러 가지로 효과를 나타낸 것 같다.
아.
물론 새롭게 멤버가 된 미아와 라이언은 제외다.
미아는 바이올린으로 오케스트라 쪽이고, 라이언은 이제까지 풋볼 주전으로 뛰었기에 음악을 안 한다.
내가 체육(GYM) 수업을 듣지 않는 것과 같다.
이제 예술 쪽으로 나가 볼까 한다며 다음 학기부턴 색소폰을 연주할 거란다.
그나마 배우기가 제일 쉽다는 게 이유다.
폐활량은 뛰어나니 금방 잘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 * *
그리고 오늘 밤은 미스터 벤이 그토록 기다리던 겨울 콘서트 날이다.
밴드 수업은 9월부터 12월까지의 두 학기 동안 이번 콘서트를 위해 달려온다고 보면 된다.
1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는 또 학기 말 콘서트를 위해 달리고.
연주를 하는 학생들의 부모님들부터, 긴 겨울밤 시간이 남아도는 동네 어른들과 친구들까지도 놀러 오는 자리다.
학생들 밴드 연주에 누가 가겠냐고 한다면 오산이다.
이 동네는 정말 놀 것이 없다.
5월에 있을 학생들의 뮤지컬은 10불이라는 거금을 내고서도 꾸역꾸역 구경하러 오니까.
― 달달달달.
“미스터 벤, 그만 좀 떨어요.”
“누, 누가 떨어?”
“선생님이요. 진정제라도 드려요?”
“이미 먹었어.”
“…….”
“무대 한두 번 서시는 것도 아닌데, 매번 이러시는 거예요?”
“아냐, 아니라고. 이번에는 달라. 소문을 너무 냈어. 좀 가만있을걸. SS(심포니 스트릿 오케스트라) 관계자들이 대거 몰려온다고 했다고.”
“예에? 왜요?”
“내가 편곡한 곡을 그쪽 악단에 보냈거든.”
“어? 그럼 잘하면 선생님 우리 학교 그만두시는 거예요?”
“어우, 아니야. 그냥 이름값 올라가는 거지. 편곡자이자 작곡자이자 위대한 음악 스승으로서. 으하하, 후우. 그냥 우리끼리 하고 말걸. 괜히 보냈나 봐.”
평소 학생들 일에 관심은 많지만 되도록 그사이에 끼지는 않으려 노력하는 것도 간이 작아서인 것 같은데.
왜 일을 키웠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편곡한 곡들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
이 동네가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SS는 작지 않다.
중고등학생들이 주로 포진해 있는 SS1, SS2가 아닌 진짜들이 포진해 있는 SSO(심포니 스트릿 오케스트라).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SSO의 연주를 듣기 위해 이곳까지 오고, 스스럼없이 지갑을 연다.
협연 요청부터 심사 요청도 많고, 각종 기부금도 상당히 많이 들어오는 명실상부 거대 악단이라 할 수 있다.
“미스터 벤! 할 수 있어요!”
“맞아요. 할 수 있어요! 우리 열심히 했잖아요.”
“맞아요. 그만 좀 떨어요.”
“후아후아, 그래그래. 잘 해야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정말 지겨워 죽을 것 같아도 맨날 그 곡만 연주했지. 거기다 애들 좀 보라는 마누라의 잔소리까지 제치고 몰두하며 이루어 낸 나의 업적으로….”
미스터 벤의 말이 많아지는 걸 보니 정신이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보통 때의 공연 시간은 1시간 남짓.
오늘은 80분이나 된다.
발키리 여전사들에 대한 소개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엠마와 베티가 맡았다.
정말 딱 맞는 인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게 드디어 7시 정각.
좌석이 꽉 찼다.
희미한 불빛으로 채워져 있던 관객석의 불빛이 꺼지고, 무대의 불이 켜졌다.
“안녕하세요. 센트럴 팍스 하이스쿨의 밴드 공연에 와 주신 모든 분들 환영합니다. 저는 스티브 벤입니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눈이 와 줘서 감성적으로 날씨빨을 좀 받았는데 말이죠. 오늘은 너무 화창해서 연주 잘못하면 실력 다 뽀록나게 생겼습니다. (하하하 ― 관중들 웃음) 제 와이프가 제가 무대에만 서면 말이 많아진다며 늘 조심하라고 했는데요. 사실 전 무대에서만 말이 많은 게 아닙니다. 늘 많습니다. (하하하)….”
미스터 벤은 무대 뒤에서 언제 떨었냐는 듯 능수능란하게 진행을 시작했다.
오늘 연주할 곡은 총 7곡.
중간중간 학생들이 나와 곡 소개도 하고, 미스터 벤이 곡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것들도 들려주기 때문에 시간은 거의 딱 맞다.
마지막 곡이 미스터 벤이 심혈을 기울여 편곡한 곡이다.
내 자리는 가로로는 가운데고, 세로로는 약간 뒤쪽에 위치해 있다.
중학교 때는 미세스 알링턴이 바순 소리를 좋아해 첫 줄 오른쪽에 늘 배치시켰지만 사실 바순 자리는 이쪽이 맞는 것 같다.
바순의 저음이 다른 악기 소리들을 받쳐 주면서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11학년 여학생이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넘겨받는다.
“오늘 콘서트의 주제는 ‘Warrior’s Spirit’입니다. 이번 시즌에 미스터 벤이 여전사들에 꽂혀서 우리는 이번 학기 내내 호전적이고 격렬한 전투적인 곡들을 연주해야 했습니다. 부모님들, 가끔 우리가 밴드가 있던 날 저녁 전투적이었다면 용서하세요. (하하하) 이게 전부 너무 열심히 연주한 탓입니다. 우리는 워리어의 정신력을 이어받았거든요. (하하하) 첫 번째 곡은 구스타브 홀스트의 ‘Mars, the Bringer of War’입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 짝짝짝짝.
커다란 박수 소리가 들리고, 미스터 벤이 자리를 잡았다.
― 빠빠빠빠 투투투투
바순과 팀파니(Timpani)의 울림으로 시작하는 연주.
전쟁의 서막이 올라가듯 서서히 분위기가 고조되더니 곧이어 공격적인 전투 장면이 연상될 만큼 강한 트럼본과 프렌치 혼의 사운드가 공간을 뒤흔든다.
여러 색소폰과 클라리넷이 빠르게 치고 나간다.
― 으아아앙.
급기야 관객석의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보통 이런 콘서트에 어린아이는 잘 데려오지 않는데 맡길 곳이 없었나 보다.
무대 위에서는 관객석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우리에게 맡겨진 파트를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자지러진 아이의 울음 소리.
아이 부모는 황급히 아이를 데리고 관객석을 빠져나갔다.
.
.
.
미스터 벤은 평소엔 수다쟁이이지만 무대 위에서만은 진짜다.
머리카락이 흩날릴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무대를 지휘한다.
대략 7분간의 연주가 끝나자 뜨거운 박수갈채가 튀어나온다.
― 브라보!
― 액셀런트!
― 휘이익! 최고다!
.
.
.
미국 사람들 정말 호전적인 거 좋아한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두 번째 곡.
오늘 콘서트의 주제에 걸맞게 모험과 전투를 상징하는 곡이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주제곡인 ‘Pirates of the Caribbean Theme’.
처음부터 화려하게 몰아치듯 시작한다.
전쟁터가 되었다가 낭만적인 캐리비안 해변이 되었다가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가 모든 것이 사라진 쓸쓸한 해변만이 남았다.
그렇게 다섯 곡이 모두 끝났다.
중간중간 곡에 대한 해설도 나오고, 아이들의 에피소드들이 공개되었다.
나는 9학년에 처음 고등학교 무대에 서 보는 것이지만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관객들이 이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고.
한 곡이 끝날 때마다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드디어 두 곡이 남았다.
미스터 벤이 살짝 긴장되는지 주먹을 폈다 접었다 한다.
“하하. 지금부터 2개의 곡을 연달아 들려 드리겠습니다. 사실 마지막 곡은 리차드 웨그너(Richard Wagner)의 ‘Ride of the Valkyries’를 편곡한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것만 마지막 곡으로 짜잔― 하고 들려 드리고 싶지만, 마음이 쫄려서 안 되겠습니다. (하하하) 묻어가는 심정으로 모드스트 무소지스키의 ‘Night on Bald Mountain’을 먼저 들려 드린 후 곧바로 이어 마지막 곡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감상 되십시오.”
― 짝짝짝짝.
장장 15분이나 되는 연주가 시작되었다.
8분의 첫 곡이 끝나고, 곧바로 연이어서 마지막 곡이 나왔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한 곡처럼 느껴지는 연주.
관객 대부분이 모르고 넘어가지만, 아는 사람들은 안다.
특히나 저기 맨 앞줄에 앉아 열심히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는 4명의 남녀는 정확히 곡이 바뀌는 시점을 알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 미스터 벤의 다리를 떨게 만든 장본인들일 것이다.
그렇게 모든 곡이 끝났을 때 전 관객들의 우렁찬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미스터 벤의 손짓에 우리도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꼿꼿이 서서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박수는 길게 이어졌고, 곧 관객석의 불이 켜졌다.
오늘의 콘서트는 끝났으니 모두 이만 돌아가시라는 뜻.
우리도 각자의 악기를 챙겨 들고 밴드실로 향했다.
“오늘 완전 대박이었지?”
“어, 미스터 벤이 몇 달 내내 죽어라 한 우물만 파게 하더니 끝내주는 연주가 나온 거 같아.”
“그니까. 전문 악단 멤버가 된 거 같았다니까.”
“고등학교 4년 동안 이런 콘서트는 처음이었던 거 같아. 미스터 벤도 열정이 샘솟는다고 하더니 진짜 열심히 하더라.”
“미스터 벤 손에 땀 밴 거 봤냐?”
“지휘봉 놓칠까 봐 걱정되더만.”
“그걸 봤어? 난 따라가기만도 벅찼는데.”
“첫 곡 끝나고 다들 기립 박수 치는데 전율이, 크아. 역대급이었던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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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는 각자의 악기 케이스에 악기를 분해해 넣으면서 입은 쉬지 않는다.
다들 나름대로 짜릿함을 느낄 수 있었던 연주였으니까.
악단은 지휘자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지휘자가 얼마나 열정을 가지고 지휘를 하느냐에 따라 그날 연주의 질이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연주는 고등학교 콘서트치고는 제법 듣기 괜찮았다.
― 벌컥.
문이 열리고 미스터 벤이 들어온다.
머리카락이 완전 젖어 있는 선생님.
“으아아! 얘들아. 진짜 고맙다. 오늘 수고했어. 난 오늘 새롭게 태어났다고오!!”
― 으하하하하.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르짖는 포즈를 취한 미스터 벤이 그대로 밴드실 한쪽의 작은 소파에 털썩― 널브러졌다.
그 모습에 우리 모두 자지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