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American Dirt Spoon Gang Village RAW novel - Chapter (84)
미국 흙수저 깡촌에서 살아남기-84화(84/280)
앵벌이 2
정중하게 인사했다.
“신청서 작성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원장님. 20불은 이번 일요일에 널싱홈 가면 드리겠습니다.”
“하하. 역시 캡틴. 좋아! 내가 캡틴 봐서 한 박스 산다. 얼마라고?”
“와. 진짜요? 72불이요.”
“오케이. 마음 바뀌기 전에 내 책상 위에 가져다 놔. 내일 이 시간까지 안 놓으면 없던 일로 하는 거다. 임플란트도 관리 잘해야 한다고.”
“어우. 그럼요. 고객의 요구는 언제나 최우선으로 처리되어야 하죠. 초콜릿 한 박스는 1시간 내에 배송될 겁니다. 그. 대금은… 일요일에 주실 건가요?”
“으하하하. 체크 되나?”
“네. 체크도 되고, 현금도 됩니다. 카드만 안 됩니다.”
“오케이. 지금 바로 써 주지.”
이제는 전신에서 광채를 뿌리는 원장님이 체크(Check, 자기앞 수표)를 꺼내 든다.
이분이야말로 호구 중 호구 아닌가.
물건도 안 보고 일단 돈부터 질러 주시는.
멋진 어른이다.
자기앞 수표를 적고 있는 원장님 뒤로 중년의 어른들이 몇 명 걸어온다.
다들 정장을 빼입고 있는 걸 보니 중한 회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궁금증에 우리 쪽으로 다가온 어른들.
“헤이. 그렉. 무슨 일이야?”
“음… 노상 강탈당하는 중?”
“뭐? 강탈을 이렇게 자발적으로? 뭔데?”
“초콜릿 한 박스씩 사. 우리 널싱홈에서 아주 인기 있는 연주 봉사자님들이지.”
“오올. 지금 치과 의사들한테 초콜릿 장사하는 거야?”
“치과 치료받고 초콜릿 하나씩 받아 가면 얼마나 좋아해? 박스당 72불이야. 옛날 생각해서라도 한 박스씩 사.”
“…오케이. 나도 줘. 근데 어떻게 받아?”
“주소만 주시면 어디든 당일배송 가능합니다!”
“당일배송? 하하. 됐고. 그럼, 이 주소로 내일까지 가져다줄 수 있어? 내가 자리에 없어도 데스크에 맡기면 돼.”
“넵! 쌉가능합니다.”
“하하. 패기 한번 좋네.”
널싱홈 원장님 그렉은 신이다!
우리는 그날 자그마치 5박스의 초콜릿을 팔았다.
공부방 놈들이 먹다먹다 뜯지 못한 오디의 초콜릿 1박스가 그대로 널싱홈 원장님 책상으로 직배송되었고, 나머지는 다음날 제이콥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며 모두 배송했다.
‘언제는 안 타겠다더니 부려 먹는다’며 투덜거리는 제이콥에겐 남은 초콜릿 5개를 찔러 주며 입을 다물게 했다.
* * *
주말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4시간 동안 하트우드 공원에서 열리는 파머스마켓.
원래는 커뮤니티 센터 앞 주차장에서 열던 것을 사람이 너무 안 와서 하트우드 공원 주차장 쪽으로 장소를 바꿨다.
토요일은 SS 연습이 있다.
SS1은 12시면 끝난다.
SS 멤버가 아닌 조나단은 시간이 널널하다.
조나단과 내가 먼저 좌판을 벌였고, SS2 멤버들은 4시에 일정이 끝나자마자 와서 합류했다.
우리 좌판 옆에는 집에서 직접 만든 쿠키, 잼 같은 걸 파는 뱃살이 두툼한 중년의 부부가 자리했다.
다른 쪽은 옥수수와 길쭉한 주키니 호박 같은 걸 팔고, 맞은편엔 테라스에 걸어 놓으면 바람에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풍경(風磬) 같은 수제공예품들을 판다.
조나단과 헤나를 짝지어 주차장 입구에서 팻말을 들고 서 있게 했다.
초콜릿 그림과 가격이 적힌 박스 쪼가리다.
― 지역 대표 명품 초콜릿이 하나에 2불!
“초콜릿 사세요. 초콜릿!”
알아서 호객 행위도 하네.
혼자 하면 쪽팔렸겠지만 둘이 하니 신이 난 것처럼 보인다.
아주 적극적이다.
토요일 오후라 가족 단위나 애완동물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다.
산책이 목적인지라 대부분은 마켓 근처로 오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밝다.
“초콜릿이다! 엄마! 아빠!”
“나도, 나도.”
“오예~ 초콜릿!”
“우리도 오랜만에 마켓에 뭐 있는지 구경이나 할까?”
휴대폰 커버나 바지 주머니에 비상용으로 20불짜리 하나씩 넣어 다니던 사람들이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온다.
그 모습에 어른들끼리 온 이들도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파머스마켓이 분위기를 탄 것 같다.
공짜 초콜릿을 잔뜩 드신 공부방 고등학생들이 본인 SNS에 알아서 홍보도 해 줬다.
초콜릿이 쭉쭉 팔려 나간다.
“한 박스 클리어!”
“오예~”
“우리 몇 박스 가져왔지?”
“10박스.”
“많이도 가져왔다. 그거 다 팔 수 있을까?”
“남으면 들고 가면 되지. 무슨 걱정. 괜찮아. 괜찮아.”
보호자 한 명이 필요해서 리암 삼촌이 붙들려 와 있었다.
메디슨이 오늘 저녁 친구들과 모임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끌고 왔다.
벌써 3개째 드시는 중이다.
하나 까 먹을 때마다 주머니에서 2불씩 꺼내서 오디에게 보여 주고는 돈통 속에 넣는다.
착하다.
쿠키 냄새를 맡은 개들이 튀어오는 걸 개 주인들이 리스를 바짝 당겨 아무 데나 튀지 못하게 막는다.
파머스마켓 상인들의 얼굴이 활짝 폈다.
“아이고. 오늘은 학생들이 와서 그런가 공원에 사람이 많은 것 같네.”
“그러게. 난 벌써 100불어치나 팔았다고.”
“날씨까지 받쳐 주고, 오는 사람도 많고. 학생들. 다음 주에도 오나?”
“아. 초콜릿 판매가 담주 목요일에 끝나서요. 오늘 최대한 많이 팔고 가야 해요.”
“그래그래. 많이 팔아. 아니다. 그럴 게 아니라 우리도 한 5개 줘 봐.”
“우리도. 10불이면 되는 거지?”
“그럼요.”
“우리는 그냥 한 박스 줘. 이번 할로윈 때 그거 내놓지 뭐. 동네 꼬마 놈들이 좋아하겠네.”
“우린 한 박스는 부담스럽고, 10개 줘.”
“네. 감사합니다! 우리 삼촌이 쿠키랑 호박 필요하대요. 잼이랑 쿠키도요.”
“내. 내가 그게 필요할까?”
초콜릿 까먹다가 화들짝 놀라는 삼촌.
“그럼요. 삼촌. 재료가 신선해서 숙모가 좋아할 거예요.”
“…후우. 하나씩 주세요.”
“으하하. 조카 녀석이 아주 똘똘하네요.”
“보통 아니죠.”
삼촌이 싫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흘긴다.
이왕 사는 거 몇 개씩 구매한다.
풍경은 혼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식량이야 뭐 늘 필요한 거니까.
남으면 우리 집에도 좀 넘기면 된다.
덕분에 우리는 그 자리에서 초콜릿 박스를 3개나 팔아 버렸고, 삼촌은 50불어치 이상의 음식을 샀다.
4시간은 금방 지난다.
“힝. 다 못 팔았어.”
“사실 처음부터 너무 많았어. 10박스면 자그마치 720개, 그럼, 돈이 얼마야. 히익. 1,440불이나 되는데 이 동네에서 가능하겠냐?”
“맞아맞아. 욕심이 과하면 체해요. 그나저나 우리 얼마나 팔았지?”
“5박스에서 4개 빠졌어. 총 712불이네.”
“와. 700불이 넘었어. 그럼 절반은 캔디 공장으로 가니까 우리 밴드로 들어오는 돈은 자그마치 3백… 얼마지?”
“356불.”
“헤헤. 역시. 우리 캡틴.”
“그냥 초콜릿 하나당 1불이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알렉스. 너 진짜 괜찮겠냐?”
“시꺼. 갑자기 암산이 안 됐을 뿐이야. 암튼 리암 삼촌. 그 돈 잃어버리면 큰일 나요.”
“별걱정을 다 해요.”
“헤헤. 그럼, 다들 내일 널싱홈에서 보자. 나 먼저 간다.”
“어. 내일 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판 초콜릿은 오디의 3박스까지 포함해서 총 14박스.
공부방 놈들 중 현재 중학교 아너스 밴드에 소속된 인원은 6명.
이만하면 할 만큼 했다.
월요일부터는 학교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팔기로 했다.
목요일까지 점심시간마다 판매해도 2박스를 못 팔 것이다.
그렇게 첫 번째 앵벌이가 이렇게 끝이 났다.
* * *
금요일 저녁. 미세스 알링턴의 이메일이 도착했다.
아너스 밴드 학부모와 학생들께.
4월에 있을 밴드 트립의 펀드레이징을 위한 초콜릿은 총 42박스가 판매되었습니다.
이에 초콜릿 공장에 보내는 금액이 아닌 밴드부의 수익금은 3,024불이며, 이는 이번 밴드 트립에 전액 사용될 것입니다.
12월 10일(수) 오후 7시, 중학교 전체 밴드 공연이 있습니다.
포인세티아(Poinsettia) 꽃이 필요한 분은 미리 말씀해주시면 공연 후 가져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꽃은 화분당 15불입니다.
한 화분당 밴드부로 6불이 들어오며, 이 역시 트립 때 모두 사용됩니다.
판매 금액이 올라갈수록 학생당 부담금이 적어집니다.
주위에 홍보 많이 해 주세요.
미세스 알링턴.
“42박스 판매? 진짜 이거밖에 안 된다고? 총 300박스 가져왔다지 않았나?”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옆에서 크리스틴이 비웃는다.
“그걸 믿냐?”
“뭐?”
“나 6학년 때는 총 30박스 팔았었어. 그것도 잘했다고 했다고. 아마 처음부터 50박스도 안 받아왔을걸?”
“뭐? 이건 사기야!”
“워워. 진정해. 알렉스. 미세스 알링턴도 니들이 그 말을 믿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걸?”
“…….”
“큭큭. 이제야 말하지만 난 캡틴조차 그 말을 진지하게 믿는 게 더 웃겼어. 애는 애구나 싶었다니까. 으흐흐.”
고딩들이 비웃는다.
방심했다.
미세스 알링턴이 300박스를 다 보여 주진 않았다.
그냥 ‘학교 스토리지에 300박스 정도 쌓여있는데, 그걸 언제 다 파나’고 했을 뿐이다.
벙찐 표정을 하고 있으니 매튜가 어깨를 두드려준다.
“괜찮아. 거기 가면 미세스 알링턴이 코치들이랑 12시에 피자 먹거든? 그거 꼬옥 뺏어 먹어라.”
“피자?”
“어. 밤 12시에 먹는 피자 맛이라는 게 있단다. 트립 때마다 꼭 시켜 먹으니까 잠복하고 있다가 쳐들어가. 일부러 3판 이상 시키니까.”
위로가 안 된다.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것이 억울해진다.
이게 다 우리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을 줄이기 위함이었으니 가서 따지지도 못하겠다.
피자라…
꼭 뺏어 먹어야겠다.
* * *
2주 후,
미세스 알링턴이 학부모들에게 2번째 앵벌이 품목에 대한 이메일을 보내왔다.
빨간 꽃에 초록색 잎이 포인세티아 꽃.
크리스마스 풀(Christmas Holly)라는 꽃(?)과 함께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꽃으로 불린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엄청나게 팔려 나간다.
“예쁘다. 우리 집에도 2개 정도 있으면 좋을 거 같네.”
이메일을 확인하던 엄마가 2개를 주문한다.
그리고 삼촌에게도 2개를 강매했다.
마커슨네도 2개를 주문했고, 마크네는 마커슨 할머니 때문에 2개를 강매당했다.
고등학생인 제이콥네에도 1개, 패트릭 아저씨네도 1개씩이 강매되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골목 집집의 창문마다 포인세티아가 필 것이다.
지금은 10월 초다.
12월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누구보다 먼저 판매해서 선점해 버리는 미세스 알링턴.
선생님 말고 장사를 했어도 잘했을 것 같다.
* * *
― Hurry! Hurry!
― 조금만 더 가면 돼! 힘내라!
― 와아아아! 잘한다!
.
.
.
토요일 오전.
SS에 학교 행사 때문에 빠진다는 사유서를 제출한 우리는 지금 2시간 거리의 고등학교에 와 있다.
8개의 학교가 모인 크로스컨트리 지역 대회에 참석한 것이다.
대략 400명 정도의 학생들이, 본인 학군의 색으로 되어 있는 러닝복을 걸치고는 출발선에 섰다.
현재 내가 다니고 있는 중학교의 이름은 멜버른이지만 우리 학군은 ‘센트럴팍스(Central Fox) 스쿨 디스트릭’이다.
여우답게 학군 대표색은 빨간색과 하얀색이 교차되어 있는 것이다.
공부방 놈들도 모두 러닝복을 걸치고, 다리를 풀었다.
오늘은 고등학교를 끼고 이 동네 거리를 다 뛴 후 마지막으로 다시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되돌아오는 것까지다.
동네가 아주 굴곡이 심하다.
위아래 경사도 많고, 이래저래 구불구불 이어져 있어 대회를 개최하기에 딱 좋다.
거리는 총 5마일(8km 정도).
― 레디! 출발!
이제는 알렉스의 다리도 다 나았다.
마음껏 버려 두고 뛰었다.
저 앞에 마커슨이 뛴다.
내 뒤로는 오디와 알렉스가 뛰고, 저어쪽 뒤 어디쯤에 헤나가 있을 것이다.
조나단은 아직 나이가 안 돼 참석 못 했다.
크로스컨트리는 7학년부터다.
평소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녀서인지 뛰는 게 힘들지는 않다.
한 명씩 한 명씩 내 뒤로 밀려났다.
막판 스퍼트
마커슨이 코앞이다.
“헤이. 마커슨.”
“히익. 제이든! 언제 따라잡은 거야?”
“지금?”
“이것마저 너에게 질 순 없어. 간다.”
― 다다다닥.
마커슨이 저 앞으로 달려간다.
어이가 없다.
점점 숨이 가파오지만 이를 악물었다.
1등으로 달리고 있는 마커슨의 등만 보고 뛰었다.
마커슨은 흑인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달리기나 몸 쓰는 걸 잘한다.
특히 점프 같은 건 무릎에 스프링이 달린 것처럼 높이 뛸 수 있다.
의외로 구기 종목은 잘 못하는데, 이유가 공이 무섭단다.
한동안 놀려 먹었던 게 기억난다.
“헥헥. 야. 마커스은!”
“히익. 또 왔어? 씨바. 간다.”
― 쌔엥.
이제 마커슨 앞에는 아무도 없다.
이 대회를 위해 중간중간 비치해 놓은 가판대에서 이온 음료를 하나 집었다.
“야아! 물도 마시면서 달려어!”
“너나 마셔! 바빠!”
젠장.
아무래도 오늘 1등은 못 하겠다.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뛰는 코스 모두에 삼각콘이 1미터 간격으로 늘어 서 있으니까.
뒤를 돌아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놈들이 보인다.
우리 학교 러닝복이 아니다.
1등은 못해도 2등은 놓치지 말아야지.
먹던 음료를 길가에 비치되어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다시 뛰었다.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짓던 놈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진다.
경사가 높은 굴곡진 골목이다.
나도 모르게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헥헥거리며 멀리 쳐다보니 저 뒤쪽으로 온갖 색들의 러닝복들이 뒤엉켜 달리고 있다.
그 옆으로 학부모들과 동네 사람들이 열띤 응원을 보낸다.
여기랑 비교되네.
― 달려!
― 조금만 달리면 돼! 거의 다 왔어!
― 할 수 있다!
내가 있는 선두 쪽엔 군데군데 심판관들이 서 있고, 몇몇 아저씨 아줌마들이 집 앞에 나와서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앞쪽을 보니 마커슨이 성공의 브이자를 그린다.
저 골목을 돌아가면 처음 출발했던 고등학교가 나온다.
진짜 거의 다 왔다.
막판 스퍼트(last―minute spurt)라는 게 있지 않나.
갑자기 죽자고 달리자 여유를 부리던 마커슨이 기겁을 하고 달아난다.
이제는 진짜 손 뻗으면 닿을 거리.
골목을 딱 꺾으니 눈앞이 갑자기 확― 트인다.
고등학교 뒤편 운동장이 골목의 끝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 와아아아!!
우리가 들어서자 엄청난 고함소리가 들린다.
여러 학교에서 모였지만 본인 학교 학생들만 격려하는 건 아니다.
그래 봤자 7, 8학년 중학생들.
상을 받으면 좋지만 완주하는 모든 이에게 박수를 보내는 거다.
마커슨이 죽어라 달리고, 뒤로 내가 바로 따라붙었다.
더 속도를 붙였다.
어림도 없다.
마커슨이 더 빨리 뛴다.
막판에 와서 1등 자리를 놓치고 싶진 않겠지.
그럼에도 어깨 위치가 비슷해졌다.
마커슨이 발을 쭈욱 뻗는다.
나보다 다리가 긴 녀석이다.
그렇게 마커슨이 Finish 선을 끊어냈다.
하. 진짜 간발의 차이다.
아깝다.
― 으아아아!
저 앞쪽까지 Finish 선을 끌고 간 놈이 두 손을 번쩍 들고는 폴짝폴짝 뛰며 괴성을 내지른다.
나도 잠시 동안 같이 뛰다가 천천히 걸으며 박수를 쳐주었다.
“내가. 캡틴을. 이겼다아!”
미친놈.
그래.
니가 이겼다.
우리는 동시에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마커슨. 제이든. 고생했다. 니들이 기록 깼어. 42분이야. 42분. 중학생이. 5마일을. 흑. 말이 되냐?”
“둘 다 진짜. 잘 했어! 고생했다.”
크로스컨트리 코치들이 와서 땀에 쩔은 우리를 끌어안고, 토닥거린다.
덥고 힘들어서 그런지 코치가 좀 빨리 떨어지면 좋겠다.
보통 학교에서 연습할 때는 걷다가 뛰다가 한다.
매일 뛰는 거라 오늘처럼 죽어라 달리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한다.
학교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 때는 4바퀴나 5바퀴 정도를 정해 주지만 동네를 돌 때는 시간으로 계산한다.
보통 1시간 30분 정도쯤 된다.
그런데 오늘 우리 둘이서 42분 만에 끊어 버린 거다.
12학년쯤 되면 30분대라고 하긴 하더라만 중학생 치곤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 와와와와!
5―6분쯤 후.
다시 환호성이 울린다.
우리 후발주자들이 골목을 꺾어 학교로 접어든 것이다.
박수와 환호성이 끊이지 않고 계속 울려 퍼지는 것이 그 뒤로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다.
“헥헥. 미친 것들.”
“크로스컨트리는 경기를 위한 게 아니고, 트레일을 즐기며 건강을 위해 뛰는 거라고! 몰라? 코치가 맨날 해 주던 말인데? 누가 그렇게 미친 듯이 뛰래?”
“그런 코치가 한참을 좋아하다 갔어.”
“…….”
1시간 만에 들어온 알렉스와 오디가 욕을 해 댄다.
헤나는 보이지도 않는다.
참가자들 반 이상이 저 뒤에서 걸어오는 중이라고.
결국 1시간 40분 만에 모든 학생들이 도착점에 도착했다.
완주를 한 모두의 손에 완주 증명서가 들렸다.
수상은 3등까지.
마커슨이 1등, 내가 2등, 파란색 러닝복을 입은 학교의 여학생이 3등을 가져갔다.
개인들에게 나눠 주는 건 메달 하나뿐이고, 학교에 전시해 둘 수 있는 트로피를 나눠 주었다.
3개의 트로피 중 2개가 우리 학교 차지가 되었다.
코치들의 입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 와와와와!
― 굿 잡 가이즈 (Good job guys)!
.
.
.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박수를 쳐 준다.
우리 학교에선 학생들을 따라온 학부모들이 거의 없지만 어떤 학교는 반 이상의 학부모들이 따라왔다.
토요일 아침부터 애들이 뛴다니까 응원 삼아 온 것이다.
시상식이 끝나고 우리는 단체 사진을 찍었다.
나와 마커슨 둘만도 찍고, 코치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좀 힘은 들었지만 상쾌하다.
* * *
1주일 후.
마커슨과 내가 웃으면서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진이 학군 이메일 소식지에 큼지막하게 나왔다.
단체 사진을 올릴까 하다가 우리 둘만의 사진을 최종 선정했다고.
“왜. 왜 모델 UN 대회에선 2등을 해도 이름만 띡― 올려주더니 크로스컨트리는 왜 2등까지 사진씩이나 올려주는 건데에! 이 소식지, 뉴스페이퍼 클럽 놈들이 만드는 거지? 내가 고등학교만 올라가 봐. 내가. 뉴스페이퍼 클럽 정복하면 1등은 빼고 2등부터 꼴등까지만 사진 올릴 거라고오!”
알렉스가 절규한다.
공부방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사실 이번 소식지는 좀 놀라긴 했다.
학교에 워낙 이런저런 행사들도 많고, 수영이나 테니스 같은 건 1등하는 경우들도 자주 있기에 2등들은 그저 이름만 올리는 경우가 많다.
아니.
수상했다고 해서 다 올라오지도 않는다.
동네에 재미있는 이벤트가 있었으면 수상자들은 신경도 안 쓴다.
덕분에 우리 집 거실엔 액자 하나가 더 걸렸다.
“한 10개는 사다 놔야 할까 봐. 호홍.”
엄마의 요상한 콧소리는 덤이었다.
* * *
어느새 10월의 마지막 날, 할로윈 데이가 찾아왔다.
6학년들 중 70% 정도는 할로윈 복장을 하고 학교를 왔고,
7학년들은 50% 정도, 8학년은 30% 정도만 할로윈 복장을 하고 온다.
쿨한 8학년은 할로윈 따위 신경 쓰지 않는 게 맞다.
그런 건 어린애들이나 하는 놀이인 거지.
학교에선 할로윈 복장을 하고 오는 건 각자의 자율에 맡겼다.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나 기괴하거나 끔찍한 건 금지 조항이다.
개인적으로 할로윈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21세기에 귀신 놀이 하는 것도 별로인데다, 하루 잠시 입고 말 것을 비싼 돈을 주고 사는 게 너무 아까워서다.
“헤이! 캡틴!”
“…….”
알렉스가 마리오 카트의 빨간색 마리오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그 옆으로 오디가 마리오 카트의 초록색 루이지 복장을 하고 있다.
“둘이 짰냐?”
“으헤헤. 둘 뿐이겠냐? 너 아침에 마커슨 못 봤지?”
“어. 오늘은 할머니가 데려다준다던데?”
“차마 창피해서 스쿨버스까진 못 탄 거지. 아. 저기 온다. 으하하하하.”
“으헤헤헤헤.”
마커슨이 마리오 카트의 공룡 요시를 타고 있는 마리오 복장을 하고 나타났다.
엉덩이와 다리 부분이 빵빵한 풍선(?)이다.
덩치가 산만 한 녀석이 저러고 나타나지…무섭다.
“허얼. 뭐냐. 니들? 작년엔 안 했잖아.”
“야. 청춘을 즐겨야지. 고딩되면 진짜 창피해서라도 이런 거 못 한다고. 작년엔 니가 안 한다고 해서 우리도 안 했지만 이번엔 아니야. 우리 셋이 이렇게 하고, 딱 붙어서 돌아다닐 거야. 분명 뉴스페이퍼 클럽 애들이 사진 찍을걸?”
“사진?”
“모르냐? 해마다 제일 눈에 띄는 핼러윈 복장 입은 애들 사진 찍어서 학군 소식지에 올린다는 거?”
“…어디 대회 나가서 1등해서 소식지에 올라가는 게 목표 아니었냐?”
“어. 아니야. 무조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식지에 올라가는 게 목표야. 어차피 소식지엔 웃기거나 잘났거나 둘 중 하나는 해야 올라가잖아. 우리 셋이 이러고 돌아다니면 웃겨서라도 올려줄걸?”
“…….”
“캡틴. 너도 원하면 끼워 줄게. 우리 집에 누나가 입던 피치 공주 있다. 으헤헤헤.”
“오호. 이쁘겠는데?”
“꺼져.”
“오냐오냐. 우리 꺼지게 훅― 불어 줘.”
“…미친 거야? 근데 너네 설마 저녁에도 그러고 돌아다닐 거 아니지?”
“뭐래. 당연한 걸.”
“캔디 많이 받으러 다녀라.”
“오냐. 재미없는 애늙은이 제이든아. 넌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라. 우린 캔디 싹 쓸어 담아서 1년 내내 먹을 거니까.”
알렉스의 깐족거림이 시작된다.
저렇게 말하니까… 가고 싶다.
약이 바짝 오른다.
그렇다고 저런 복장을 할 수는 없다.
올해 따라 유난히 코스튬에 신경 쓴 놈들이 많다.
가면은 안 되니 얼굴을 파랗게 페인트칠하고 다니는 놈도 있는가 하면, 머리를 블루와 핑크로 반 딱 나눠 물들인 놈도 있고, 해리포터 복장은 애교 수준인 데다 일곱 놈들이 똑같이 노란색 양복을 맞춰 입고 돌아다니기도 한다.
노란색 양복은 BTS 버터 복장이란다.
한마디로 학교가 요란뻑적지근하다.
선생님들도 하루 종일 마녀 모자를 쓴 채 수업하고, 할아버지 선생님은 초록색 체육복을 입고 왔다.
어디서 많이 본 거다 싶었더니 오징어게임 1번 참가자란다.
다들 재미있게 즐기는데, 나만 너무 답답하게 굴었나?
그래도 이 나이에 마리오카트 복장은 아니지.
* * *
[Treat or Trick 시간은 오후 5시부터 6시까지.]타운십에서 공지가 내려왔다.
공부방 놈들은 오디네 동네로 가겠단다.
그 동네가 잘사는 집이 많아 나눠주는 캔디나 초콜릿의 품질이 좋다.
가끔 어떤 할아버지는 초등학생 이하에게는 25센트를 주고, 중학생 이상에게는 1불짜리를 건네주기도 한다.
해마다 문전성시를 이루는 집이다.
우리 골목엔 꼬마 손님들이 몇 왔다가 갈 뿐이다.
어차피 사정 뻔히 다 안다.
오디 집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되돌아왔을 때도 남아있는 캔디가 있으면 수집하면 된다.
“제이든! 진짜 안 갈 거야?!”
“빨리 나와. 시간 없어.”
밖에서 마커슨과 알렉스가 부른다.
학교에서 본 모습 그대로 왔다.
집에 가서 가방만 던져 두고 온 게 확실하다.
마커슨과 알렉스의 목소리에 조나단이 튀어나온다.
작년과 거의 비슷한 키의 조나단은 이번에도 보안관 복장이다.
헤나는 마녀 복장에 채찍을 들었다.
저런 건 어디서 사는 건지 궁금하네.
“제이든, 이리 와 봐.”
이미 고양이 모습으로 변장을 끝낸 엄마가 나를 잡아끈다.
“왜요?”
“나는 엄마 고양이, 아들은 아기 고양이지.”
“네?”
“페이스페인팅 해 줄 테니까 친구들이랑 캔디 수집해 와. 내년 되면 진짜 부끄러워서 못 해.”
“…그럴까요?”
“호호. 당연하지. 이리 와. 마커슨, 알렉스. 5분만 기다려!”
엄마가 창밖으로 냅다 소리를 지른다.
놈들이 창문에 다닥다닥 붙는다.
스멜리 캣
저럴 거 그냥 집에 들어오면 될 텐데.
굳이 창문에 얼굴을 들이미는 이유를 모르겠다.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데.
분장을 다하고 밖으로 나오니 놈들이 낄낄거린다.
“잘 어울린다.”
“그러게. 이제부턴 캡틴의 별명은 스멜리 캣(smelly cat)이다.”
“캣이면 캣이지 스멜리는 왜 붙어?”
― Smelly cat, smelly cat,
What are they feeding you?
Smelly cat, smelly cat,
It’s not your fault~
옛날 90년대 중반에 방송된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 피비가 부른 노래다.
전생에서 어릴 때 가끔 보던 거다.
너튜브를 둘러보다가 발견하곤 추억에 잠겨 있었는데, 이놈들에게 딱 걸렸었지.
알렉스가 홀릭해서 며칠 밤을 새우다가 결국 엄마한테 등짝을 얻어맞았다고.
지금은 시즌 4 보는 중이란다.
“그만하지.”
“큭큭큭. 안 간다더니 쓰윽 나오는 거 봐. 우리끼리 가니까 배 아픈 거지?”
“…그 꼬라지로는 못 가겠다는 소리였거든?”
“우리가 뭐 어때서!”
“진정 몰라서 묻는 거냐?”
“시끄럽고. 빨리 밟아! 이러다 오디가 동네 캔디 싹쓸이한다고!”
“오키오키.”
알렉스의 깐족거림은 무시해야 하는데 요즘 따라 잘 안 된다.
예전엔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요즘엔 약이 오른다.
아무래도 내 수준이 내려간 것 같다.
참지 못한 마커슨이 냅다 소리를 질렀고, 우리는 자전거를 밟았다.
가을바람에 엄마가 볼에 붙여 놓은 고양이 수염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
쩝.
짝짝이라고 놀림당하겠네.
오디의 동네에 들어섰다.
우리 골목과 달리 아주 애들이 떼거리로 몰려다닌다.
부모님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3―4살짜리들도 많다.
“요~ 왔냐들?”
“큭큭. 제이든은 안 온다더니. 얼굴 꼬라지는 그게 뭐냐?”
“…니들보단 낫거든.”
“그건 그래. 암튼 빨리 돌자. 니들 마크 못 봤지?”
“마크? 고딩이라 이제 이런 거 안 한다던데?”
“개뿔. 매튜랑 제이콥까지 가세해서 아주 난리다. 단체로 베테랑 군복 입고 돌아다닌다고. 크리스틴은 어디서 군장까지 구해 가지고 그 큰 가방에 캔디를 싹쓸이하고 다닌다니까. 할아버지들이 완전 좋아하면서 막 퍼줘. 막. 다들 미친 거 같아. 헤나. 넌… 그런 채찍은 어디서 사는 거냐?”
“니가 입고 있는 건 뭐 다른 줄 알고?”
“날씨 탓이야. 날씨 탓. 곧 아포칼립스가 터져서 외계 생명체들이 지구를 덮칠 거야.”
“그… 나랑 조나단은 크리스틴 있는 데로 갈게.”
“와. 헤나. 너 그러는 거 아니다. 걔들 군복 입고 왕창왕창 받는다니까 따라붙으려는 거지?”
“…나중에 좀 나눠 주면 되잖아.”
“오케이. 가라. 조심하고.”
“어. 바이바이.”
똑똑한 헤나.
어디 붙어야 제대로 콩고물이 떨어질지 아는 거다.
사회생활 잘할 거 같다.
조나단은 헤나가 이끄니 입이 헤벌쭉해져서 그대로 따라붙었다.
그렇게 또 우리 넷만 남았다.
거칠 게 없다.
긴 자루를 들고 성큼성큼 다니며 캔디들을 쓸어 담았다.
다리가 기니 행동들도 재빠르다.
꼬맹이들이 위기감을 느낀 것 같다.
“엄마! 쟤들이 우리 사탕 다 가져가!”
“…손가락질하지 마.”
“야. 니가 더 많구만. 우리 요거밖에 없어.”
“힝. 너희는 자루가 크잖아. 난 요만한데.”
“자루만 큰 거야. 이거 봐봐. 양은 비슷하다고.”
“…니들이 빨리 걸으니까 사탕이 빨리빨리 없어진다고! 천천히 걸어!”
오디와 동네 꼬맹이가 시비가 붙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힐끔거린다.
모양새가 꼴사납다.
이겨도 져도 무조건 오디가 손해다.
안 되겠다 싶어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안녕. 넌 이름이 뭐야?”
“…제이든.”
“어? 나도 제이든인데. 인심 썼다. 요만큼 너 줄 테니까 맛있게 먹어.”
“와. 진짜?”
“어. 그리고 저기 저 집 할머니가 사탕을 많이 줘. 예쁘게 인사하면 더 줄지도 모르지. 가 봐.”
“앗싸. 땡큐.”
오디의 자루에서 캔디를 한 주먹 꺼내, 아이의 호박 바구니에 넣어 주었다.
입이 헤 벌어지는 아이.
“아씨. 야. 주려면 니 걸 줘야지, 왜 내 걸 줘?”
“당연히 니껄 줘야지. 쟤랑 너랑 시비 붙었잖아.”
“…몰라. 각자 자루에서 캔디 하나씩 내놔.”
“옛다.”
우리는 각자의 자루에서 캔디 하나씩을 꺼내 오디의 자루에 던져 줬다.
오디는 단 걸 싫어한다.
초콜릿도 사놓고 안 먹는 놈이 왜 이런데 연연하는지 모를 일이다.
다음 집 앞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집 현관문의 불이 꺼진다.
“뭐야? 지금 우리 차별하는 거야?”
“사탕이 다 떨어졌나 보지.”
“그래. 그래. 그런 걸 거야.”
“아냐. 저기 뒤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불 켜는지 지켜보자.”
“가자. 괜히 상처받는다.”
집 안팎의 불이 켜져 있으면 우리 집은 이 이벤트에 동참하니 문을 두드리라는 뜻이고, 불이 꺼져 있으면 우린 참석 안 하니 지나가란 뜻이다.
준비한 사탕이 모두 동이 나면 중간에 불을 끄기도 한다.
물론 지켜보고 있다가 주기 싫은 애들이 오면 저렇게 불을 확― 끄기도 한다.
후자가 아니길 바랄 수밖에.
현관문 앞에 초콜릿이랑 캔디를 바구니째 놓고 하나씩만 가져가라는 사인을 붙여 둔 집도 많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들이 주로 하는 방식으로, 본인들도 아이들 데리고 남의 집에 사탕 받으러 가야하기 때문에 이렇게 해 두는 거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하나씩 까서 입에 넣고, 또 하나씩 집어서 자루에 넣었다.
“그 할아버지 집 상태는 어떠냐?”
“말도 마라. 줄이 너어무 길다.”
“그러게. 왜 돈을 줘서. 첨부터 버릇을 잘못 들였어.”
“참나. 끝까지 줄 서서 받아 갈 때는 언제고. 1불 한번 받겠다고 줄 서다가 시간 끝나버려서 캔디도 못 챙기고, 돈도 못 받았던 거 생각하면. 크. 생각만 해도 열 받는다.”
“그건 그래. 이제 거의 시간 다 됐지?”
“어. 5분 남았네. 그만 가자.”
“오디. 집에 누구 있어?”
“아무도 없어. 부모님 둘 다 오늘 같은 날은 번잡스럽다고 늦게 퇴근하시잖아. 우리 집으로 가자.”
“그래.”
같은 캔디라도 선호도가 모두 다르다.
우리는 오디의 집으로 들어가 받은 캔디들을 주욱 늘어놓았다.
커다란 식탁이 고마운 순간이다.
“앗. 이거. 캐러멜 들어간 거다. 극혐.”
“이건 코코넛 들어간 거. 나랑 바꿔.”
“오케이.”
“민트 맛이다. 으악.”
“나. 나. 나랑 바꿔. 피넛버터 맛은 극혐이지.”
“넌 왜 피넛버터를 싫어하냐? 이 고소한걸. 알러지도 아니고.”
“넌 왜 민트를 싫어하는데? 이 상쾌한 걸.”
“어? 이거 뉴스에 나온 거다. 이거 똑같은 거 받은 사람 있어?”
“나. 있네.”
“나도.”
“버려. 마리화나 들은 거야.”
“에잇! 나쁜 놈들!”
.
.
.
일명 ‘캔디 트레이드 시간’이다.
입맛이 다 달라 어찌나 다행인지.
서로 좋아하는 캔디들과 싫어하는 것들을 늘어놓고, 맞바꾼다.
이 동네가 아무리 안전한 동네라고 해도 서로를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세상이다.
인터넷을 뒤져가며 버려야 되는 캔디들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그 와중에도 우리 입속으로는 계속 캔디가 들어갔다.
“흐음. 올해 성과가 꽤 괜찮은데?”
“이제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이걸로 버틸 수 있겠지?”
“크리스마스? 실화냐? 난 1년 먹는데.”
“오디. 너야 단 걸 워낙 싫어하니까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적선 좀 해 주라. 난 단 거 좋아한단 말야.”
“마커슨. 이 썩어요. 입 한번 벌리면 100불은 그냥 나간다. 미리미리 예방해야지.”
“…그냥 주기 싫다 그래라.”
할로윈에 나눠 주는 캔디는 품질이 저렴할 수밖에 없다.
이 동네는 잘 사는 동네라 좀 낫다.
그럼에도 예전엔 싸구려 캔디 맛이라 잘 안 먹었는데, 요즘엔 가끔 입 심심할 때 한두 개씩 꺼내 먹는다.
별거 아닌데 없으면 또 아쉽긴 하더라.
집에 가져가니 엄마가 쌍수를 들고 반긴다.
저럴 때 보면 완전 애 같다.
컨테이너 하나에 쓰윽― 쓸어담더니 본인 방으로 가져간다.
엄마의 몇 달치 일용할 간식이 마련되었다.
* * *
11월.
땡스기빙데이부터 크리스마스 시즌까지 정신이 해이해질 수 있는 연말이다.
학교에선 학생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 좀 빡세게 굴린다.
“와. 오늘 같은 날도 숙제를 내주네?”
“왜? 오늘은 숙제 내 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당연하지. 오늘 우리 유닛 테스트했다고. 자그마치 74포인트다. 알지브라 2는 어때? 할 만해?”
“뭐. 그럭저럭.”
“…지오메트리 선생님은 미쳤어.”
“맞아. 미쳤어. ELA(English Language Arts)도 마찬가지야. 다음 시간까지 500자짜리 에세이를 2개나 써오래. 다음 시간이 언젠 줄 알아? 이틀 후라고! 야! 제이든. 너 고개 젓지 마.”
.
.
.
한국의 중학생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보여 주고 싶을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럴 때다.
방과 후 1시간 정도만 빡세게 투자하면 끝나는 숙제들이다.
나도 모르게 쯧쯧거리며 고개를 저었더니 바로 화살이 날아온다.
― 드르륵.
라즈닉과 나타샤가 들어선다.
오늘은 디베이트 클럽이 있는 날이다.
지난 대회에서 내가 1등, 알렉스가 2등? 을 하면서 오디와 마커슨도 구경한다고 쫓아왔다.
1년 후 고등학교에 가면 서로 클럽을 품앗이하기로 했다.
클럽마다 신입 멤버 수가 중요하다나 뭐라나.
오디가 들어가려는 HOSA는 의대 쪽이라 돈은 많지만,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은 역사가 짧은 클럽이다.
마커슨이 들어가려는 TSA는 HOSA보다 더 신생인 데다 돈도 별로 없고, 역사도 짧지만 HOSA 보단 체계가 잡혀 있단다.
어쨌든 오늘은 모두 디베이트에 가입해 긴 역사를 자랑하는 디베이트 클럽을 견학한다며 온 것이다.
평소 6―7명 앉아 있는데, 오늘은 10명 가까이 앉아 있으니 라즈닉과 나타샤의 표정이 밝아진다.
“큼. 얘들아. 다음 달 초에 모델 UN 대회 있는데, 같이 갈 사람?”
모델 UN 대회는 지난 9월에 참석한 후 지난달은 스킵했다.
우리 학군에선 모델 유엔 트립을 한 달에 한 번 정도씩 간다고.
디베이트는 피크 시기엔 매주 트립을 간다.
가끔은 금요일에도 열리는 디베이트.
디베이트 속의 스피치 파트도 매주 열리는데, 모델 UN은 좀 멀리 가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참석한다.
문제는 갈 때마다 참가비가 만만찮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하는 거면 무료지만 멀리 가는 건 보통 숙박을 해야 하기 때문에 최소 150불 이상이 든다.
아너스 밴드 트립 비용만 버는 데도 생난리를 쳤다.
피곤하다.
모델 유엔 시스템이 어떻게 굴러가는 건지 알았기에 굳이 벌써부터 참석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8학년에 한 활동들은 대학 입학 원서에도 쓸 수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하면 된다.
“아니.”
“헉. 왜?”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할게.”
“그. 그건 그렇지. 그래. 그럼. 내 후임 임원에게 너 말해 둘게. 잘하면 9학년부터 바로 QRT로 초대할 수도 있을 테니까.”
“QRT? 그게 뭔데?”
“홈베이스 같은 건데 클럽으로 묶인 거야. 아무나 들어올 순 없고, 클럽에서 오피서나 임원 같은 걸로 활동해야 들어올 수 있어. 클럽 프레지던트가 특별히 초대할 수도 있고.”
“…….”
“QRT를 몰라?”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나이 터울 많이 나는 형제가 있는 알렉스가 아는 척을 한다.
그마저도 정확히는 모르는 것 같다.
라즈닉이 설명하려는데, 나타샤가 나선다.
“고등학교 가면 라스트 네임 알파벳으로 홈베이스 정해지거든. A부터 C, D부터 G 뭐 이런 식으로 한 반에 묶이는 거지. 제이든 라스트 네임이 패터슨이니까 P로 시작하고, 마커슨은 워녹이니까 W로 시작하잖아. P는 S까지 한 홈베이스일 거야. 고등학교 4년 동안 담당 선생님이랑 홈베이스 친구들은 안 변해. 그대로 4년 내내 가는 거야.”
4년 내내 같은 애들 얼굴을 보며 살아야 한다고?
수업은 다 다를 테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좀 괴롭기도 할 거 같다.
QRT
선생님하고 사이라도 틀어지면?
괜찮은 대학을 가려면 홈베이스 선생님의 추천서는 필수라고들 하던데.
오디가 곧바로 반응한다.
“근데 4년 내내 라면 좀 지겹겠다. 사이 안 좋은 애가 있으면 더 괴롭겠고.”
“뭐. 다른 방법이 있겠지. 계속해 봐.”
“그래. 라즈닉이 말한 것처럼 우리 학교엔 QRT라는 게 있어. 주요 클럽의 임원을 맡으면 10학년부터는 자기 클럽 홈베이스로 갈 수 있거든. 그걸 QRT라고 해. 매일 오전 7시 20분부터 50분까지, 첫 수업 들어가기 전에 30분 정도 QRT 시간이 있는데, 그때 클럽 임원들이 다 모이는 거야.”
“클럽 멤버도 아니고 임원들이 모두 모이는 거면 학생 수가 얼마 안 될 텐데? 설마 11학년이나 12학년도 같이 모이는 거야?”
“당연. 만약 너희들이 지금 10학년이면 매일 아침 QRT 시간에 우리를 만날 수 있어. 10학년부터 12학년까지 같은 클럽이니까. 당연히 담당 선생님도 계시고. 우리는 라틴 담당 선생님이 우리 디베이트 클럽 담당이셔.”
“와. 그럼 10학년 숙제 모르는 거 있으면 12학년들한테 물어봐도 되겠네?”
“당연하지. 학교의 온갖 소문들을 다 들을 수 있다고. 특히 저학년에선 잘 모르는 어떤 선생님이 학점을 잘 주는지 같은 정보는 천금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지.”
10학년부터 12학년까지가 한 반에 모인다고?
이건 몰랐던 거다.
“한 QRT에 몇 명이나 있는데?”
“그건 QRT마다 달라. 클럽에 소속되어 있다고 다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피서 같은 작은 임원이라도 안 하면 회장에게 초대를 받아야 들어올 수 있거든. 지금 우리 디베이트 QRT는 17명이야.”
조촐하네.
나이로 자르는 게 아니라 같은 관심사를 가진 학생들끼리 한 반을 만들어 준다니.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미국이 이럴 때는 참 괜찮은 것 같다.
나이가 훈장인 곳에서는 10학년은 심부름꾼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10학년이든, 12학년이든 서로가 동등하다.
나이 몇 살 많다고 꼰대질 한다면 그 즉시 온갖 야유를 받을 거다.
여기서 나이가 많다는 건 동생들이 모르는 것이 있으면 끌어 주고, 알려 주는 역할을 하는 거다.
굉장히 이상적인 관계다.
특이하고 신선하다.
QRT 소속이 되면 학교생활이 같은 학년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클럽활동이 더 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친구들을 다양하게 많이 사귈 순 없어도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는 소리.
단점보다 장점이 많을 것 같다.
갑자기 고등학교 생활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QRT는 학생회부터 HOSA, TSA, 뉴스페이퍼 클럽 등등 우리 학교엔 한 10개 정도밖에 없어. 우리 QRT에 있다고 해서 다른 클럽 못하는 건 아냐. 멤버로는 활동할 수 있어. QRT 없는 클럽은 임원도 가능하고.”
라즈닉과 나타샤가 QRT의 장점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 준다.
쟤들한테 뭘 배울까 싶었는데, 의외로 귀한 정보를 접했다.
헤일리나 클로이에게선 들을 수 없었던 거다.
11학년인 제이콥이나 매튜은 물론이고, 현재 10학년인 마크나 크리스틴도 QRT에 대해선 말한 적이 없다.
관심 없는 일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에 모르고 있을 가능성도 크다.
엉뚱한 곳에서 귀한 정보를 받네.
그날 밤.
공부방 놈들이 모였다.
알렉스가 먼저 입을 연다.
“니들. 왜 QRT에 대해 말 안 해 줬어?”
“그건 또 어디서 들었대?”
“라즈닉이랑 나타샤가 말해줬어.”
“뭐. QRT는 한마디로… 너드들이 하는 거야. 우리하곤 상관없어.”
“맞아. 그거 너드들만 하는 거야. 지들끼리 똘똘 뭉쳐서 다른 일에는 별 관심도 없다고.”
“걔들 좀 재수 없지 않냐?”
“…재수 없는 건 잘 모르겠지만 관심이 가진 않아. 왜? 니들 QRT 들어가게?”
“고민 중이야.”
“그거 10학년 되기 전, 9학년 3쿼터쯤에 결정하면 돼. 9학년 때 여기저기 클럽들 들어가서 살펴보고 자신한테 맞는 거 찾으면 되는 거지. 가끔 클럽 회장이 뽑아가기도 하는데, 거기 혹하면 안 돼. 본인이 좋아하는 걸 찾아야 해. 아. 니들. 괜히 관심도 없는데 캡틴 따라 들어가면 개고생한다.”
“우. 우리가 뭐!”
“작작 좀 붙어 다니라고. 니들. 다른 친구들은 없지?”
“있거든!”
.
.
.
보는 시각에 따라 관점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한쪽에선 QRT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하고, 한쪽에선 QRT의 단점을 듣는다.
재밌네.
* * *
새해가 밝았다.
춥다.
올여름엔 평년보다 덥더니, 겨울은 또 평년보다 더 춥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인데, 올해는 눈도 별로 안 온다.
눈이 올 수 있는 기온보다 온도가 더 내려간 탓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전기가 나갔다.
보통은 3―4시간 있으면 복구되는데, 가끔 이틀까지 가기도 한다.
집이 오래되어 히터가 고장 나면 기온이 뚝뚝 떨어진다.
“제이든. 전기 나갔어!”
“으. 추워. 네. 장작 가져올게요.”
“어. 부탁해.”
집 뒷마당엔 항상 장작이 준비되어 있다.
한동안 전기나 가스를 이용한 벽난로가 유행했지만, 요즘엔 예전 벽난로로 돌아오는 추세기도 하다.
우리 집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쭈욱― 옛날 방식의 벽난로였다.
이번 겨울이 예년보다 추울 거란 전망이 많아 지난주에 굴뚝 청소를 했었다.
다행이다.
그거 안 해서 연기가 잘못 들어오면 집이 엉망이 된다.
벽난로에 불을 붙이니 집안이 다시 훈훈해진다.
엄마가 토치를 이용해 가스 오븐에 불을 붙인 후 빵을 굽는다.
집 온도를 빨리 올리기 위함이다.
― 덜컥.
1시간쯤 후 삼촌과 메디슨이 추위에 떨며 들어왔다.
삼촌 집 벽난로는 전기로 돌아가는 거다.
이사하면서 큰맘 먹고 바꿨는데, 후회를 많이 한다.
“누나, 제이든.”
“삼촌, 숙모, 어서 와요. 전기 나가서 벽난로 안 되는 거예요?”
“어. 으. 기다리면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안 들어오네. 길가에 있는 집이라서 더 추운 것 같아.”
“이쪽으로 오세요. 장작 좀 더 가져올게요.”
“어. 부탁해.”
내가 장작을 쌓고, 불을 피우는 걸 구경하는 삼촌과 메디슨.
“와. 누나. 아들 다 키웠네.”
“제이든은 어릴 때부터 손 가는 일이 없었는데 뭘.”
“그렇긴 해.”
“이거 먹어. 방금 꺼낸 거라 좀 뜨겁긴 한데 그래서 더 맛있어.”
“어.”
― 탁탁.
가슴을 치는 메디슨.
빵이 걸린 모양이다.
후다닥 일어나 오렌지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제이든, 고마워. 큭.”
메디슨의 얼굴이 창백하다.
추워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숙모. 괜찮아요?”
“어? 모르겠어. 몸이 좀 안 좋네.”
“타이레놀 드릴까요?”
“어, 부탁할게. 리사, 손님방에 가서 좀 누워도 될까요?”
“무슨 소리야. 전기 안 들어와서 거기 추워. 힘들면 그냥 거기 소파에 누워. 괜찮아.”
약을 먹은 후 곧바로 소파에 드러눕는 메디슨.
평소엔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 집 소파에서 드러누운 적은 없었다.
진짜 몸이 안 좋은 모양이다.
엄마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가만히 다가가 메디슨의 손을 잡는다.
“이번 달에… 했어?”
“네?”
“그러니까 그 기간 지난 거 아니냐고?”
“…어? 그… 러게요?”
“집에 임테기 없어?”
“있어요. 화장실 캐비닛에.”
“리암, 가서 가져와.”
“어? 어.”
둘의 대화를 들은 삼촌이 크게 당황해 허둥댄다.
한쪽에 걸어둔 두툼한 코트를 꺼내 삼촌에게 입혀 주었다.
“삼촌. 같이 가요.”
“아냐. 혼자 가도 돼.”
“아니에요. 바로 앞인데요. 뭐. 혼자 보내다가 빙판길에 넘어지면 큰일 난다구요.”
“제이든, 그래 주라. 어우, 리암! 정신 차려. 그냥 체한 걸 수도 있다고!”
“어? 어. 그렇지.”
메디슨이 말한 곳에 임테기가 있었다.
몇 개나 쌓여 있는 걸 보니 자주 체크하는 모양인데, 왜 이번엔 체크를 안 했을까?
“아. 이게 임테기야?”
“모르셨어요?”
“어. 그냥. 여긴 메디슨 전용 구간이라서 신경 안 썼지. 근데 넌 어떻게 알아?”
“여기 쓰여 있잖아요. 이렇게.”
“아. 그렇구나.”
평소 똑소리 나던 모습은 어디 갔나.
이 동네 미국인치고는 좀 늦은 결혼이긴 했다.
비혼주의자들은 아예 결혼에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지만, 하고자 하면 보통 20대 중후반에는 결혼을 한다.
삼촌은 30대 중반에 결혼을 했다.
결혼한 지 이제 1년 반 정도 지났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가.
제법 마음을 졸이며 아이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잠시 후.
엄마와 나, 삼촌은 메디슨이 화장실에서 나오기만 기다렸다.
안에서 뭘 하는지 한참 후에야 나오는 메디슨.
눈가가 젖어 있다.
“리암. 병원 예약 잡아야겠는데?”
“지. 진짜 두 줄이야?”
“어. 흑.”
“우와와와와! 추. 축하해. 아니지. 잘 됐어. 아니. 고마워. 하. 뭐라고 해야 하지?”
삼촌이 두 팔을 번쩍 들며 할 말을 찾는다.
“다 맞는 말이지. 축하하고, 잘됐고, 고맙고. 메디슨. 리암. 진짜 축하해.”
“축하해요. 삼촌. 숙모. 사촌 동생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많이 예뻐하면서 키울게요.”
“그래. 그래. 이렇게 든든한 사촌 오빠가 있으니 얼마나 좋아.”
“하하. 이미 딸로 확정된 거예요?”
“으하하. 병원 예약 잡아야지. 지금은 너무 늦어서 전화 안 받겠지? 당장 예약 잡아도 한 달은 걸릴 텐데. 아. 인터넷도 안 되잖아. 어우. 왜 하필 지금 전기가 나가냐고.”
“메디슨. 내일 아침에 한 번 더 테스트해 봐. 알았지?”
“네. 리사. 고마워요.”
“고맙긴. 어서 누워. 추우면 안 되니까 여기 불 옆에 앉고. 진짜 전기는 왜 이렇게 안 들어오는 거야? 메디슨.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지금은 없어요. 그냥 얼떨떨할 뿐이에요.”
“그래. 속이 안 좋을 테지만 안정을 취해야 하고….”
.
.
.
엄마의 당부가 이어진다.
엄마는 사실 아이를 출산해 본 적이 없다.
전 남편과는 한 4년 살았는데, 노력했지만 안 생겼다고.
그 후엔 재혼은커녕 데이트조차 하지 않고 나만 보고 살았기에 아이를 가질 기회가 없었다.
메디슨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엄마의 등이 괜히 짠하다.
어느새 40대 초반이 되어 버린 엄마.
내가 더 잘해야지.
* * *
사촌 동생이 생긴 게 맞았다.
삼촌은 벌써부터 아기방을 꾸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물품들이 배달되고 있었다.
결국 숙모가 짜증을 내고 나서야 멈췄다.
3월이 가고, 4월이 다가왔다.
제이콥은 11학년 말로 접어들면서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매튜는 일찌감치 자동차 정비 쪽으로 눈을 돌렸기에 졸업 후 진로를 걱정하지 않는다.
1주일에 3일씩 수리점 아저씨 밑에서 정비를 배우는 중이다.
제이콥은 매튜의 꼬심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전공은 자동차공학으로 가서 설계 쪽을 하고 싶단다.
정비공으로 살 자신은 없단다.
크리스틴은 본격적으로 사관학교를 알아보고 있다.
기본적으로 공부방 놈들의 성적은 좋다.
다 내 덕이다.
아무튼 아직은 10학년인 크리스틴.
처음엔 가볍게 흘려들었는데, 진짜 관심이 있긴 한 거 같다.
이번 6월에 있을 사관학교 캠프에 이미 지원서를 제출해 두었다고.
추천서와 에세이가 자신이 없기에 캠프라도 들어가야겠다고.
마크는 아직도 갈 길을 못 정했다.
본격적으로 입시 원서를 넣는 12학년에도 결정을 못 하면 그냥 ‘undecided’로 체크해서 넣겠다고.
사실 전공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대학을 입학해도, 학생 한 명당 평균 3번의 전공을 바꾼다는 말도 있다.
Undecided로 입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리고 우리 나머지 중딩들은 아너스 밴드 트립의 마지막 앵벌이 품목, ‘아이스크림 쿠폰’ 팔기에 여념이 없었다.
펀드레이징 금액은 아직도 5천 불이 되지 않았다.
아직 3번째 펀드레이징이 끝나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한 명당 240불은 내야 한단다.
줄일 수 있으면 줄여야지.
이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냥 둘씩 짝지어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
하지만 열어 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학부모들이 학생들을 외면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