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26)
26화 약탈자 (3)
“아이나르, 뭔가 일이 벌어지면 항상 최악을 먼저 생각해라.”
바로 조금 전 일만 봐도 그렇다.
인간 탐험가들과 우연히 조우해서 희망 회로를 돌리다 어떻게 됐던가?
세상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가 그 자리서 도망칠 수 있던 건 그 여자가 놓아 줬기 때문이다. 맘만 먹으면 금방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러니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나답지 않게 말이 길어졌다.
본론만 짧게 얘기하자.
“지금쯤 그 여자는 분명—”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겠지.”
이런 니미…….
난 기껏해야 찾아오는 중일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밑바닥엔 또 밑바닥이 있구나.
아니면, 내 지능에 문제가 있거나.
“비요른!”
나와 아이나르가 배낭을 내려놓고 싸울 자세를 취함과 동시, 어둠 속에서 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복면은 쓰지 않은 상태다.
“아쉽게 됐군, 바바리안.”
…무슨 이런 소름 돋는 년이 다 있지?
“그래도 방금 전의 투쟁은 인상적이었다.”
듣자 하니 노움의 이능이고 뭐고, 한참 전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모양인데…….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포션을 마시고 거동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데 어째서 그때를 노리지 않았지?
대답을 기다리던 찰나.
“으, 으아아아아!”
노랑머리가 바닥에 튕겨져 나가듯 일어나 온 힘을 다해 질주를 하기 시작한다.
사이코패스 년에게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탓에 나와 아이나르는 반응이 늦었다.
다만…….
털썩!
얇은 침 같은 것이 직선으로 날아가더니, 노랑머리의 목에 박힌다.
독이라도 묻어 있었을까?
그리 크지 않은 외상에도 노랑머리는 사시나무 떨듯 경련하더니, 머지않아 축 늘어졌다.
이에 나는 깨달았다.
한가하게 이유나 묻고 있을 때가 아님을.
“아이나르!”
서로 간에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그저 이름을 부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아이나르가 땅을 밀어내며 앞으로 도약한다.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야 도망칠 수 없다면.
싸우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후웅!
약탈자 년이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아이나르의 대검을 피해낸다. 그리고 회피 타이밍에 맞춰 내려찍은 메이스를 단검으로 막아 낸다.
카앙!
이런 미친…….
대체 정수를 몇 개나 처먹은 거야?
메이스를 막아낸 단검이 멀쩡한 건 물론.
여자가 역으로 힘을 주자 그대로 몸이 뒤로 밀려난다.
“무의미한 짓은 그만둬라 바바리안.”
글쎄.
그건 너무 어려운 부탁 같은데.
설령 무의미한 짓일지라도.
“베헬—라!”
나는 바바리안이다.
물론 아직 정신은 현대인의 때를 전부 벗어내지 못했지만.
카앙!
매일이 두렵고, 아픔은 익숙해질 기미가 없으며, 여전히 도망칠 길부터 떠올리는 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그들과 일치한다.
카앙!
남은 길이 단 하나뿐이라면.
나는 그 너머로 나아가길 택한다.
주저 없이.
카앙!
단검과 부딪치는 동시 메이스를 버리고 태클을 시도했다.
예상대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탐색꾼인 주제에, 육체 능력이 뭐 이리 높아?
볼멘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넘어뜨리는 건 못해도, 물고 늘어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아이나르! 지금이다!”
내가 외치기도 전에, 아이나르의 대검은 이미 호쾌한 직선을 그리며 휘둘러지고 있었다.
이에 내내 무표정하던 약탈자 년도 처음으로 얼굴에 감정을 드러냈다.
“……!”
당황, 혹은 짜증.
음, 어쩌면 분노일지도 모르겠다.
푹!
등골에서 통증이 피어났다.
척추를 찌른 건가?
아니, 갑옷은 대체 어떻게 하고?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힘이 쭉 빠진다.
「캐릭터가 [마비] 상태에 빠집니다.」
어떻게든 바짓춤을 잡고 늘어지려 해 봤지만, 목을 찔리고도 괴물처럼 날뛰었던 몸은 내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
푹!
그때 연속적으로 또다시 피륙음이 들렸다.
쩔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나르의 대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눈알만 위로 움직여 확인해 보니, 아이나르의 팔목에 단검이 깊게 박혀 있다.
여기까진가도 싶었지만…….
아이나르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몸을 멈추지 않았다.
“으아아!”
무기를 잃고 무력화된 오른팔 대신 왼 주먹을 휘두른다.
그 투쟁심을 보고 있자니 새삼 알 것도 같다.
외형적으로 덩치가 큰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바바리안이, 어째서 모두에게 괴물 취급을 받는지.
다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후웅!
유연한 몸놀림으로 주먹을 피해 낸 여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이나르의 팔목을 잡고 비틀더니…….
쿠웅!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아 버렸다.
아이나르는 즉시 지면을 짚으며 일어서려 했지만, 자꾸만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힘줄이 돋아난 팔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여자가 차게 읊조렸다.
“포기해라. 바실리스크의 마비독에 당한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마치 사망 선고가 내려오듯.
머릿속이 하얘지고, 눈앞은 캄캄해진다.
장비도, 실력도, 경험도…….
모든 부분에서 극명한 차이가 나고 있다.
암만 머리를 굴려 봐도, 현 상황을 뒤집을 수단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단어가 뇌리에 새겨지던 그때.
“그러게 순순히 말을 들었으면 좋았지 않나.”
여자가 허리를 굽히더니 바짓단을 잡은 채 굳어진 내 손을 풀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바바리안, 오늘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치 않겠다고 맹세해라. 그럼 살려 주겠다.”
…뭐?
* * *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 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바로 도망간 것만 아니라면 처음부터 이 제안을 할 생각이었다. 바바리안에겐 빚을 진 일이 있으니까.”
이게 유일한 살길임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지만…….
이해가 안 간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여자가 짧게 설명했다.
“되도록이면 바바리안은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지 않다.”
내 손으로 직접이라…….
설마 그래서 내가 노랑머리한테 뒈져갈 때도 그냥 지켜만 본 건가?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겠다 싶어서?
“비요른… 약탈자의 말이다. 믿지, 마라……. 우리를 갖고 놀려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선택지가 없지 않나.
농락 당하고 뒈지나, 그냥 뒈지나.
어차피 내겐 별반 다를 것도 없다.
일단 목 끝까지 차오른 피를 거하게 토해 내고서 물었다.
“제안을 거절하면, 어쩔 생각이지……?”
“물론 죽인다. 애초에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약속이라니… 대체 누구와?”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평소와 똑같은 톤이었지만, 그럼에도 왠지 조금 더 까칠한 목소리처럼 들린다.
“선택해라. 조금은 시간은 주겠—”
“전사의, 명예를 걸고서 맹세하겠다.”
시간은 필요 없다.
선택지가 달리 있는 것도 아니고.
“…확실히, 너는 조금 특이하군.”
묘한 눈길로 나를 잠시 내려보던 사이코패스 년이 무언가를 뿌렸다.
치이이이익, 익숙한 이 고통.
더 볼 것도 없이 포션이다.
「회복 포션(상)을 복용하셨습니다.」
「캐릭터의 마비 상태가 해제됩니다.」
굳어 있던 근육들이 풀리며 서서히 몸의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여자 바바리안, 너는 어쩔 테지?”
내게서 시선을 뗀 여자가 입을 물었다.
아이나르는 짧은 침묵 후에 답을 내놓았다.
“…거절한다.”
“그렇군.”
여자도 재차 되묻지 않았다.
단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에서 더욱 선명하게 와닿았다.
무기를 꺼내 들지도, 달리 위협적인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니지만…….
이제, 이 여자는 아이나르를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를 막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아이나르, 맹세를 해라.”
“비요른?”
“날 전적으로 따르겠다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전사의 맹세란…….”
씨바, 그깟 자존심을 지켜서 뭐 하겠다고?
“프넬린의 두 번째 딸 아이나르!!”
내 고함에 아이나르가 흠칫 굳었다.
나는 목소리를 줄이고,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차분히 얘기했다.
“지금은 날 믿어라. 이게 올바른 선택이다.”
잠시간의 정적이 이어진 후, 아이나르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알겠다. 맹세를 하겠다.”
“잘 생각했다.”
이후 아이나르까지 맹세를 하자, 사이코패스 년도 포션까지 써 가며 치료해 주었다.
이게 진정한 채찍과 당근인가?
무력에 의해 선택을 강요받는 기분은 예나 지금이나 썩 다를 게 없었다.
매우 심히 역겨울 정도로, 좆같다.
“…몇 층이지?”
치료가 끝나자마자 등 돌려 떠나려는 여자를 향해 황급히 물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여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짧게 대답해 주었다.
“8층.”
역시 5층 정도가 아니었구나.
어쩐지, 탐색꾼인 주제에 존나 세더라.
아마 내가 10명이 더 있었어도 이년에겐 상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르륵.
연기처럼 눈앞에서 사라지는 사이코패스 년을 보며 나는 다짐했다.
다음에는, 다를 것이다.
* * *
“아이나르, 괜찮나?”
“…나는 괜찮다. 혼자 일어날 수 있다.”
아이나르가 내 손을 밀어내고는 스스로 일어섰다.
나한테 실망한 건가도 싶었지만, 어쩌면 실망의 대상자는 내가 아니라 본인일지도 모른다.
바바리안들은 우직한 면이 있으니까.
“…….”
복잡한 눈빛의 아이나르는 잠시 냅두기로 하고, 일단 내 상태도 점검해 보았다.
우선은 이것부터…….
철컥.
갑옷을 벗고 뒷면을 확인하자, 단검 크기의 구멍이 나 있는 것이 보인다.
관통면이 아주 깔끔하다.
…설마 ‘오러’인가?
니미.
겨우 2층에서, 그것도 이렇게 넓은 망자의 땅에서, 하필 이런 괴물을 딱 만나다니? 뭔 이런 개같은 경우가 있단 말인가!
하루라도 빨리 더욱 강해져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고 뭐고, 이 개같은 세상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다.
“비요른, 이제 어쩔 것인가?”
“…1층으로 내려간다.”
망자의 땅은 나쁘지 않은 사냥터다.
하지만 저 미친년이 돌아다니는 이곳에 계속 체류할 생각은 없다. 마음이 바뀌었다며 다시 찾아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가… 알겠다.”
한껏 풀이 죽은 아이나르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내 말에 따랐다.
멘탈 케어는 내 전문이 아니지만…….
후, 일단 내려가면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야지.
무슨 세상이라도 무너진 표정이다.
“잘 따라와라.”
피할 수 있는 전투는 대부분 피하며 표식을 따라 이동했다.
그로부터 약 6시간쯤 흘렀을까.
우리는 마침내 1층으로 내려가는 포탈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쿵-!
이번에도 나는 멀쩡히 착지한 반면 아이나르는 바닥을 굴렀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다만 그녀는 신음도 뱉지 않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일어났다.
“…아프지 않은가?”
“아프다.”
“그런데 왜…….”
“전사가 아닌 내겐 아파할 가치도 없다.”
…생각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하구나.
목숨을 구걸하듯 맹세한 게 그토록 치욕스러운 건가?
음, 하긴 게임에서도 그랬었지.
“저, 아이나르……?”
“왜 부르는 것인가?”
“살아남는 전사가 강한 것이다. 한 번의 패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승리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 아닌가!”
“너무 길게 말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일부러 기운 넘치게 말했지만, 아이나르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울했다.
“그렇지만, 살아남는 전사가 강하단 말이 무슨 뜻인지는 왠지 알 것만 같다.”
“그, 그런가?”
“이런 굴욕과 당장에라도 자결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 내다니, 틀림없이 강인한 전사란 뜻이겠지. 비요른, 너처럼.”
아니, 나는 그런 거 전혀 없는데……?
자결이라니, 무슨 사무라이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의미로 한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껏 얻어걸린 걸 굳이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아이나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다.”
“내가 이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 보겠다.”
“그래, 언젠가 치욕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진심 어린 응원을 해주며, 우리들은 다시 이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적당한 곳에서 야영하기로 결정을 내린 뒤 아이나르부터 재웠다.
“2시간 뒤에 깨우겠다.”
“…이번만큼은 배려를 받도록 하겠다.”
배려라…….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07 : 39]시간으로 치자면 3일 차 아침.
벌써 20시간은 넘게 자지 못했다.
게다가 그만한 일들을 겪었더니 정신적 피로가 엄청나다.
하지만 분명 눈을 감았아도 어차피 나는 한참 동안 자지 못했을 것이다.
“…….”
아이나르처럼 극단적인 충동에 휩싸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만…….
기분이 더러운 것만큼은 같았으니까.
포션을 마실 때의 통증과 비슷하다.
이러한 종류의 기분은 몇 번을 겪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까드득.
지난날, 금발 일행에게 구원을 받았을 때도 오늘과 비슷했다.
신관은 내 눈을 보며 치료를 거절했다.
검사는 아깝다는 듯 포션을 장난감처럼 집어던졌다.
그걸 보면서도 나는 개처럼 엎드린 채 포션을 받아먹었다.
물론 살아남아서 기쁘기야 했지만…….
그만큼 형언키 어려운 감정도 치밀어 올랐다.
“후우…….”
잡념을 털어내듯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지금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감정에 휘둘려 괴로워하는 건 나답지 않다.
어쩌면 슬슬 그걸 꺼낼 때일지도.
눈을 감고, 어릴 적 존경했던 사람이 해 준 충고를 간만에 떠올렸다.
‘명심해,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절대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언제나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던 마법의 주문.
그래, 이 감정조차 원료로 삼자.
늘 그래 왔듯이.
그쪽이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