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61)
제 222화
82화. 떠나다
도주에 성공하고 닷새가 지났다.
진은 혼자서 쟌 왕국 남부 국경지대의 숲을 걷고 있었다. 무라칸은 이틀 전 그를 이곳에 내려다주고 티칸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온 세상이 그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있었다. 특히 쟌 왕국은 휴페스터 연합국과 가까운 만큼, 누군가에게 노출되었다간 곧장 룬칸델 수호기사들이 들이닥칠 터였다.
물론 진이 평범한 여행객이나 국경수비대에게 잡힐 일 따윈 없겠지만, 마주치기만 해도 죄 없는 그들을 제압해야 하니 조심하고 있는 것이다.
‘약간 헷갈리는군. 이쪽이었던가.’
숲길을 헤매는 건 지루한 일이었다.
진은 기억을 더듬어 물꼬리족 수인들이 사용하던 비밀 통로를 찾고 있었다.
멀쩡한 길을 이용할 수 없는 데다, 이곳 지리에 능통하지 않았으니 헤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숲 곳곳에 자그마한 냇물이 흘러 식수가 끊길 일이 없었고, 짐승도 흔하게 보이니 식량이 떨어지는 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진이 생선 굽는 냄새를 맡고 미소를 지은 건,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이런 오지에서 생선을 구워 끼니를 해결하는 이들은 하나뿐이었다.
슬쩍 다가가서 살펴보니 동화 속 이야기처럼 아기자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졸졸졸…… 타닥, 탁…… 웅성웅성.
대여섯 명의 물꼬리족 수인들이 물가에서 막 잡은 생선을 굽고 있었다. 그들은 진이 다가온 줄도 모르는 채 소곤소곤 노래를 부르며 흥겨운 모습이었다.
“이봐.”
진이 목소릴 내자마자 일제히 얼어붙는 물꼬리족.
그들은 당연히 진이 사냥꾼이라 생각했다. 국제법으로 엄격히 금지된 일이지만, 간혹 물꼬리족의 박제를 고가에 거래하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있는 것이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혹시 너희 중에…… 아, 저기 있군.”
진이 일부러 두 손을 들고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운 좋게도 물꼬리족 무리 속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어둠불꽃.”
“어어, 진, 룬칸델, 또. 만났다? 놀랐다. 깜짝.”
어둠불꽃이 인사를 받자 다른 물꼬리족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중엔 어둠불꽃뿐만이 아니라, 적호족에게 금품을 갈취 당했을 때 도움을 받은 물꼬리족들도 있었다.
그 일화와 더불어, 최근 킨젤로를 엿 먹인 ‘바멀’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진은 물꼬리족 사이에서 영웅으로 통하고 있었다.
또한 룬칸델과 지플이 진의 목에 현상금을 총 4억이나 내건 사실은 수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된 이야기였다.
“잘, 지냈나. 그보다, 건가, 괜찮은? 너, 금화, 4억.”
어둠불꽃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에게 다가왔다.
“괜찮아. 그,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번에도 도움 좀 받을 수 있을까? 사실 너흴 찾고 있었거든.”
“설마, 가나, 또? 대사막.”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둠불꽃은 그 무리의 대장이었고, 흔쾌히 진을 돕기로 결정을 내렸다.
“매번 신세만 지는군.”
“아니, 그때, 준, 보석들. 아직까지, 우리, 넉넉.”
물꼬리족에게 진이 처음 라프라로사로 향하며 준 수고비는 그들 부락 전체가 몇 년은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재화였고, 물꼬리족들은 아직도 그것을 요긴하게 써먹고 있었다.
“그리고, 왕코, 왕눈, 도와줬다, 적호족, 한테. 다시, 돈도, 돌려줬다. 없다. 돕지, 않을, 이유.”
왕코와 왕눈이라 불린 물꼬리족들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진은 왠지 쑥스러워 어색하게 웃다가 그들과 함께 구운 생선을 먹었다.
식사를 끝내고 물꼬리족을 따라 그들의 비밀 동굴로 향하기 시작했다.
묘인족이 만들었다는 동굴은 여전히 신비로운 미로 같았고, 끝에 다다르자 이번에도 물꼬리족과 금설족이 한데 모여 낮잠을 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야, 물꼬리족! 여기 저런 걸 데려오면 어떻게…… 오, 뭐야. 진 룬칸델이잖아?”
“뭐라, 진 룬칸델이라고?”
누워있던 수인들이 죄다 벌떡 일어서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초대형 현상수배범의 등장에도 경계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저 신기한 생명체가 나타난 것처럼 모두 진을 둘러싸고 있었다.
“룬칸델이랑 지플에 찍혔으니, 살길이 막막하겠구만…….”
한 금설족이 걱정스러운 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그의 이름은 ‘팽이’였는데, 나침반 탈취 작전 당시 진의 머리를 물들여준 금설족 염색사였다. 진이 그와 눈을 맞췄다.
“팽이, 너희 금설족이 아주 좋아할 만한 거래를 하나 제안하지.”
“설마 여기서 살게 해달라는 건 아니지? 그건 각 부족 대표들과 상의가 필요한 일이고, 우린 대부분 널 좋아하지만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행여 네가 발각되면 거대 가문들이 우리까지 싹 죽일…….”
횡설수설 늘어놓는 팽이를 보며 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런 부탁 할 생각 없어. 간단한 거야. 날 변장시켜줘.”
“변장?”
“대사막으로 갈 거다. 그런데 수인들 중에도 나를 알아보는 이들이 많을 테니, 제대로 된 변장이 필요해.”
“대사막은 왜? 이 친구는 저번부터 좀 이상하단 말이야. 남들 다 기피하는 그 척박한 땅을 왜 자꾸 찾아가는지…… 이번에야말로 여생을 정리하려는 건가?”
“가능해?”
“으음, 어렵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네가 붙잡혔을 때 우리가 변장시켜준 사실이 알려지면, 룬칸델이 우릴 몰살하지 않을까……?”
진은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진 본인만이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이내 진이 검을 뽑으려는 듯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댔다.
“히익!”
“으아! 왜, 왜 이래! 해, 해주면 되잖아!”
“어, 어어!”
한순간에 작은 수인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진은 발검하는 대신 허리춤에 묶인 두 자루의 검 중 하나를 풀어헤쳐 바닥에 내려놓았다.
“까, 깜짝 놀랐잖아! 우릴 협박하려는 줄 알고!”
“했다, 기겁, 우리도.”
“어, 음. 놀라게 해서 미안하군. 변장에 대한 보수는 이 검이다.”
진이 내려둔 검은 브라다만테였다.
“……이걸 주겠다고?”
검을 뽑아 확인한 금설족들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브라다만테는 검을 잘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도 굉장한 물건이었다. 돈이라면 환장하는 금설족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
“세상에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룬칸델에 연락을 취해 이 검을 넘겨. 상상 이상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우리 가문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명검이거든. 쟌 왕국 남부의 오지에서 발견했다고 말하고.”
“룬칸델이 그 말을 믿어줄까?”
“믿어줄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너희에게 위해를 가할 일은 없어. 어쨌거나 가문의 입장에선 검을 찾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니까. 막대한 보상금을 주지 않으면 가문의 체면이 안 서. 오히려 너흴 보호해주기도 할걸.”
“설마. 진짜?”
“그럼. 대신, 값을 흥정하겠다고 룬칸델이 아닌 다른 가문과는 절대 협상을 하지 마. 협상한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보상금은 고사하고, 너흰 다 죽어.”
팽이와 금설족들은 다소 망설이는 분위기였다.
변장의 대가로 엄청난 물건을 받는 셈이지만, 차후 룬칸델이 폭력적으로 자신들을 추궁할까 봐 걱정이 되는 것이다.
진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래서 거절하면 그냥 대사막으로 향할 생각이었다.
“탐나긴 하지만, 어쩌면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 있는 물건이니…… 어?”
“어엇.”
“엇!?”
작은 수인들이 돌연 깜짝 놀라며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진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엔 처음 보는 한 수인이 서 있었다. 물꼬리족, 금설족처럼 진의 허리에나 겨우 닿을 것 같이 작은 수인이었다.
고양이를 닮은 얼굴에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 새하얀 털.
묘인족이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던 건지, 묘인족은 진과 수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얹혀사는 입장에서, 이 동굴의 주인 종족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거절할 수가 없겠구만. 하, 참나. 너, 죽지 않을 운명인가 본데? 인간이 묘인족의 가호를 받다니…… 세상에, 내가 뭘 본 거야? 4억짜리 인간은 역시 남다르다는 건가?”
“가호?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잖아?”
“인간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 작은 수인들 사이에선 묘인족의 호감을 얻은 자는 이유와 종족을 불문하고 무조건 환대가 원칙이야. 받도록 하지, 그 거래.”
갑작스런 묘인족의 등장이 신기한 건 진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돕는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새에, 묘인족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심안으로 살펴봐도 기척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신기하군.’
왠지 일이 다 잘 풀릴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보상금은 물꼬리족과 반으로 나눠라.”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팽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싫어. 팔 대 이.”
“오 대 오.”
“칠 대 삼.”
“육 대 사. 그 정도로 나눠도 충분히 많을 테니, 욕심 그만 부려.”
“흠, 알겠다! 변장은 언제 해주면 되겠나?”
“지금 바로.”
“그럼 잠깐만 기다려, 필요한 물건들 준비해올게.”
팽이와 몇몇 금설족이 어디론가 호다닥 사라졌다.
다시 돌아온 그들의 손엔 염색약과 가발,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괴상한 물건들이 쥐어져 있었다.
“대사막에 가는 동안 아무도 널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그들은 곧장 작업을 시작했다.
한 시간쯤 뒤 변장이 끝나고 거울을 보았을 때, 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거울은 익히 알던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웬 노인을 비추고 있었다.
“금설족 화장술에 안 되는 건 없다구. 신기하다고 얼굴을 만지지는 마, 화장 무너진다. 은퇴한 특급 용병이 여행을 다닌다는 설정 정도로 변장시켜봤어.”
“마음에 드는군. 너희들은 내가 룬칸델의 기수가 된 다음에, 본격적인 사업 이야기를 좀 하도록 하지. 그럼 다들 반갑고 고마웠어, 난 간다.”
“어, 가나, 벌써!? 조, 조심, 해라. 몸!”
진이 짧게 인사하고 유카유카 시장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로 빠져나가자, 남은 수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어깨만 으쓱였다.
“거 참, 다시 생각해도 신기하네. 묘인족이 나서다니.”
“한다, 동감.”
옛날부터 묘인족이 인간에게 호감을 표하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었다.
인간이 ‘고양이의 신’과 계약한 경우, 혹은 묘인족 특유의 감이 그를 ‘작은 수인들을 보살펴줄 인간’이라고 가리키는 경우.
당연히 진은 후자였다.
“어쨌거나 묘인족이 진 룬칸델을 축복했다는 건, 우리도 안전하다는 의미니까…… 땡잡았다! 보상금 받으면 뭐 하지, 우리!?”
팽이가 소리치자 금설족과 물꼬리족 수인들이 서로를 얼싸안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 * *
‘그 녀석들의 말처럼, 묘인족의 가호라는 게 진짜로 있는 건가. 순찰 도는 적호족들의 눈에 띈 것만 다섯 번이 넘는데, 한 번도 검문을 당하지 않았다.’
유카유카 시장을 빠져나온 후, 진은 그 어떤 시비에도 휘말리지 않고 무사히 미트라 대사막에 닿을 수 있었다.
터무니없이 펼쳐진 상앗빛 사막, 무엇이든 말려 죽일 기세로 무섭게 이글거리는 태양.
처음 찾아왔을 때와 달리, 진은 그 삭막한 풍경에 전혀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친숙하고 다정하게 느껴졌다.
마치 고향, 혹은 자신의 땅을 찾아온 기분이었다.
그 기분대로, 사막은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을 반기듯 진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끔찍한 신기루 대신 진이 다니는 길마다 이상하리만치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밤이면 부드러운 달빛이 그의 천막을 덮어주었다.
“왔군, 진 형제.”
나흘이 지나자, 처음 그랬던 것처럼 탄텔이 모습을 드러냈다.
“탄텔 형제.”
“다들 목 빠지게 널 기다렸다고. 그래, 재미있는 이야기 좀 가져왔나? 라프라로사가 오랜만에 분주해지겠군!”
탄텔이 검을 휘둘러 라프라로사의 문을 열며 보석주를 내밀었다.
그러곤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진 형제, 각오는 되어 있겠지? 투신 형제와 투왕 형제들이 널 얼마나 지독하게 수련시키려고 계획을 세웠는지, 그걸 다 들으면 들어가기 싫어질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형제들이 먼저 질리도록 만들어주지.”
진이 보석주를 들이켜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후 6개월이 지나 금설족이 룬칸델에 브라다만테를 가져다주고 보상금을 받자.
세상엔 진이 사망했다는 소문만이 무성하게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