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14)
제 333화
96화. 과거, 혹은 미래의 잔상(1)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방금, 내 이름을…… 불렀어?’
진, 자신의 이름을 뜻하는 그 한 글자를 발레리아의 목소리로 듣기까지.
무려 19년이 흘렀다.
발레리아 히스터.
회귀 전, 룬칸델에서 추방당해 아무 희망 없는 폐인이 되어 세상을 쓰레기처럼 굴러다닐 때, 그녀가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면.
진의 전생은 오로지 비참하고 어두운 나날로만 가득했을 것이다. 그녀는 스승이면서 친구였고, 든든한 동반자이자 연민의 대상이었으며, 구원자였다.
정적이 흘렀다.
몇 초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 지나는 사이, 진은 뭉클해진 가슴에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뜨거워진 머리가 멍했고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대답하고 싶었다. 전생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을 붙잡아야 했다.
‘스승이 날 기억하고 있을 리 없다. 스승은 나와 달리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을 거다.’
다짜고짜 한껏 반가워하고 애정을 드러냈다간 자칫 상황이 우스워질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건 혼자만의 재회이기 때문이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를 보여선 안 된다. 경계심만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설령.
발레리아 역시 진과 마찬가지로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한들, 감상적으로 접근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진이 생각하기에 발레리아는 어떤 면에선 아버지보다도 냉정한 인간.
만약, 그녀가 전생의 기억을 가졌는데도 먼저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다 치밀한 계산에서 비롯된 행동일 터였다.
혹은 전생의 좋았던 시절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나.
그녀가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든, 갖고 있지 않든.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어설픈 감정에 취해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진은 발레리아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으니 말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하거나,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아니면 결코 심도 깊은 대화나 거래를 하지 않았다.
그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는 충족해야 했다.
“꽤나 화려한 등장이군. 조직 보스를 이렇게 막 죽여도 되는 건가? 아리아 아울하트. 아니, 아리아 히스터라고 불러야 하나?”
‘아울하트’와 ‘히스터’라는 성을 모두 말했으나 발레리아는 달리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감정을 억누른 것인지,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당신이 날 찾은 시점부터 요크의 목숨은 없던 것 아닌가.”
착.
가볍게 로비로 착지하는 발레리아.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이어도 자신에게 잘 협조해준 인간을 죽이는 건 께름칙한 일이니 말이야. 대신 손을 써줬으니, 고맙다고 인사나 하는 게 어때.”
발레리아가 뒷말을 이었다.
그리곤 거북할 것 없다는 듯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염색된 갈색 머리카락, 붉고 총기 가득한 눈동자, 살짝 다물어진 입술. 아직 열일곱에 불과한 만큼 애티가 있으나 함부로 다가서기 어려운 인상이었다.
전생에선 열일곱 시절의 발레리아를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스물여섯이던 전생보다 지금의 발레리아는 더 약하고 견고하지 못할 것이다. 진이 기억하는 것보다 작고 여린 모습이었다.
다만 오히려 성장이 끝난 전생보다도 날카로운 기세가 있었다. 마치 상처받은 짐승의 어금니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군. 그보다, 얼굴을 이렇게 쉽게 보여줄 줄은 몰랐는데.”
“미리 경고 하나 하지. 혹시라도 날 공격한다면 난 호기심 대신 안전을 택할 거다.”
“안전이라. 날 상대로 도망칠 자신이 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자신이 없다면 요크를 죽이고 당신 앞에 나서지 않았겠지.”
둘 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나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경우의 수들이 회전하고 있었다.
“4년 전, 이 도시에서 날 찾았다는 인간이 대체 누구일까 궁금했지. 그게 당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한 번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발레리아는 진이 중급반 임무를 수행한 직후, 마미트로 들어와 2년을 살았다.
이 무법자들의 도시에도 ‘히스터가의 전승지’가 하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승지를 찾는 과정에 마미트에서 몇 번쯤 기록 마법을 사용했고, 그 결과.
전승지의 위치와 더불어 4년 전 누군가 선술집에서 히스터를 찾았다는 기록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윽고 발견한 마미트의 전승지에서는 그자가 1799년 3월 무렵에 반드시 자신을 찾아오리라는 ‘미래의 기록’을 엿보기도 했다.
그녀가 마미트에 있던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내가 널 찾은 사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군.”
“그건 내가 해야 할 질문이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지?”
“이곳은 휴페스터 연합국이다. 룬칸델이 모르는 게 있을 것 같나.”
“룬칸델이 히스터를 찾고 있었다면 당연히 극비였을 거고, 그 당시의 당신은 열다섯 중급 생도에 불과했어. 기수도 아니었던 당신이 알 수 있을 만한 정보가 아니었다는 뜻이지.”
“글쎄, 극비라.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 아닌가?”
“과대평가가 아니라, 진짜로 대단한 게 맞지. 천하의 진 룬칸델이 이렇게 직접 행차한 것만 봐도 말이야. 날 찾은 이유를 말해.”
진이 미소를 지었다.
“부탁이 있어서 왔다.”
“어떤 부탁이지?”
“기록 장치 복원.”
“기록 장치라면, 내 선조들이 남긴 것인가?”
“그건 네가 내게 긍정적인 결정을 내린 다음에 알려주지.”
그러자 발레리아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히스터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군.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당신을 도울 이유는 없어.”
“이유야 만들면 돼. 가령, 생존을 위한 협조라든가.”
“당신은 날 못 죽여.”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건 지플과 당신의 경쟁자들에게 이로운 일일 테니까.”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군.”
스릉, 삭-!
눈 깜짝할 새에, 진이 시그문드를 뽑아 발레리아의 눈가를 베었다. 염색된 갈색 머리칼 몇 가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발레리아는 기가 막힌 듯, 떨어진 머리칼을 보며 눈동자를 끔뻑였다.
“이렇게 시시한 인간일 줄이야…… 부탁을 하겠다고 찾아와서는 기껏 한다는 게, 무력을 통한 협박이란 말이냐? 고작!”
발레리아가 상기된 얼굴로 진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 대목에서 진은 속으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진으로서는 무척 생소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전생의 발레리아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발레리아의 입장에서 현재로서는 적에 더 가까운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다니. 전생보다 거의 열 살이나 어린 만큼, 아직 감정을 억누르는 게 서툰 것일지도. 그래도…… 뭔가 이상해. 지나치게 실망스러워하는 느낌인데.’
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협박이 아니라 충고로 받아들여 주면 좋겠군. 이 자리에 내가 아닌 다른 룬칸델이 있었다면, 머리카락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당신이 지금 내 앞에 있을 수 있는 건. 내가 당신을 만나기로 결정했기 때문일 뿐이야. 룬칸델도, 지플도. 오늘 이후론 절대 날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말이 빠르고 가늘게 떨렸다.
그만큼 발레리아는 격양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내게 뭔가 기대하는 바가 있었던 사람처럼 행동하는군.’
물론, 진이 발레리아라는 인물을 모른다고 가정하면.
지금 발레리아가 보여주는 행동이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저 오랜 도피 생활에, 자신을 노리는 거대 가문이라면 신물이 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의 생각대로.
발레리아는 진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다.
사실, 발레리아는 지금보다 더 어릴 적부터 ‘진’이라는 인간에 대한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기억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인지할 무렵부터.
혹은 히스터로서 기록이라는 것의 의미를 알아갈 무렵부터, 발레리아는 한 가지 꿈을 반복해서 꾸어왔다.
단순히 이유 없는 꿈인지, 일종의 긴 예지몽인지 알 수 없으나.
그 꿈은 강렬한 잔상처럼 줄곧 이어져 왔다.
어느 알 수 없는 도시의 어둑한 길거리에서, 성장한 자신이 웬 폐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꿈의 주된 내용이었다.
계속 그렇게 쓰러져 있을 건가?
꺼져.
한심하긴. 진, 당신 잘난 형제들이 좋아하겠어.
뭐야,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궁금한 게 남은 걸 보니 아직 세상에 미련이 있군. 따라와, 기껏 손을 내밀어준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눴던 건 용서해줄게.
거의 매일같이 이어진 그 꿈은 오랜 기간 동안 발레리아에게 큰 숙제였다.
도대체 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가 자꾸 꿈에 나오는 것인지, 꿈속의 그 비참한 남자와 자신이 대체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는 와중.
감정만은 선명했다.
꿈속의 자신은 분명 그 남자를 연민하고 있었다.
때로는 현실보다 꿈이 더 생생하게 느껴져,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 다음엔 꿈속보다 열댓 살은 어린 자신을 보고 소스라치기도 했었다.
꿈속 폐인의 정체가 진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성국 사건이 세상을 발칵 뒤집은 때.
온 세상에 진 룬칸델의 얼굴이 공개된 순간이었다.
덕분에 발레리아는 세인들이 칭송하는 룬칸델의 막내가, 바로 꿈속의 진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속에서 마주하던 얼굴보다 여러모로 훨씬 좋아 보였으나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영문도 모른 채 안아주던 그 남자가 바로 진 룬칸델이라고.
그녀가 처음 진을 보자마자 이름을 말한 건, 십여 년 동안 늘 꾸어온 그 꿈 때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매일같이 꿈속에서 이름을 부르던 습관이 튀어나온 것이다.
‘실수다. 혼자만의 꿈속 인물에게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고, 실망스러운 마음에 괜히 흥분해버렸어. 하지만 기록 장치라…… 한 번 살펴봐서 나쁠 것 없지. 진 룬칸델, 이 인간이 날 어떻게 찾았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고.’
발레리아가 뒤돌아섰다.
냉정을 되찾고 상대의 요구 사항과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을 저울질해야 할 때였다.
“아리아 아울하트. 그냥 갈 건가?”
“더 할 말이 남았나? 기록 장치 복원이라면 다른 사람한테 가서 알아봐.”
“난 슈지엘 히스터의 마법서를 갖고 있다.”
우뚝.
발레리아가 걸음을 멈추며 다시 진 쪽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진이 품속에서 슈지엘의 마법서를 꺼냈다.
“이 암호 체계는 진짜배기 히스터의 것이라더군.”
다음 순간, 발레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진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부우욱-!
“무슨 짓을……!”
진이 대충 중간쯤 되는 페이지를 펼쳐, 마법서를 절반으로 찢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확인해봐라. 진짜 히스터가의 마법서인지.”
발레리아에게 반으로 찢은 마법서 한쪽을 건네는 진.
마법서를 받아든 발레리아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진은 그 모습에 무척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굳이 이런 식으로 행동한 것엔 이유가 있었다.
‘스승이 잔머리를 굴리게 만들면 안 돼. 아직 어려서 기억 속 스승보단 허술한 구석이 보이지만, 만만히 대했다간 나도 모르는 새에 스승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될 거다.’
암호 체계를 확인한 발레리아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왼쪽으로 치우쳐지고 있었다.
그건 발레리아의 버릇이었다. 혼란스럽거나 마음이 다급해질 때 드러나는.
“……어디서 구했지?”
“아킨 왕국의 지하 경매장. 이젠 사라진 곳이지. 내가 가진 기록 장치들을 복원해주면 나머지 반쪽 마법서를 보상으로 주겠다. 아울러, 룬칸델과 지플로부터 널 보호해줄 것도 약속하지.”
“룬칸델과 지플로부터 날 보호해주겠다고? 룬칸델 12기수에게 그만한 권력이 있는 줄 몰랐군. 본인 앞가림하기도 정신없을 텐데. 그리고 나는 당신의 보호를 받아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아.”
“약하지 않다면, 당장 내게서 나머지 반쪽을 빼앗아봐라.”
“그건 불가능하지만, 내 손에 있는 반쪽을 챙겨 도망치는 건 가능해.”
“지금껏 내게 보인 태도를 보아하니 거짓말 같진 않군. 원한다면 그렇게 해. 대신, 이 반쪽은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을 거다.”
화륵!
진이 손바닥에 마력으로 불꽃을 일으켜 반쪽 남은 마법서에 가져다댔다.
“네가 협조하지 않겠다면 이건 내게 의미가 없어지거든. 선택해라, 날 도울 건지, 도망칠 건지. 대신 한 가지는 약속하지. 날 돕기로 결정하면, 내 사람이 되기로 결정하면…….”
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곤 감정을 다시 한 번 정리한 다음,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난 네가 원하는 것 중, 내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네게 줄 것이다.”
그건, 오늘 진이 발레리아에게 보인 말과 행동들 중.
유일하게 진심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