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15)
제 333화
96화. 과거, 혹은 미래의 잔상(2)
발레리아의 두 눈이 점점 더 왼쪽으로 치우쳐지고 있었다.
긴장과 혼란이 가속되고 있다는 뜻. 그녀는 자신의 오랜, 그러나 거의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적 습관이 진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 진을 만나기 이전에, 그 습관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키워준 회색부엉이 용병단의 단원들밖에 없었으니까.
진도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라도 발레리아가 마법서의 나머지 반쪽을 포기할 경우엔 차후 관계 개선의 여지가 별로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화르륵, 화륵…… 뚝, 뚝.
조용한 가운데 진의 손바닥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와, 죽은 요크의 몸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일단 그 불 좀 끄고 이야기하지.”
됐다.
“확답을 주기 전엔 못 꺼.”
진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쐐기를 박았다. 질렸다는 듯, 발레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 좋아. 당신을 돕도록 하지. 그 기록 장치가 내가 만질 수 있는 종류의 물건이라면, 복원해주겠어.”
“현명한 선택이군.”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일 뿐, 내가 당신의 사람이 되겠다는 뜻은 아니야. 그건 확실히 해줬으면 좋겠는데.”
후우욱.
진이 손을 움켜쥐어 불꽃을 꺼뜨리자 발레리아의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지속적인 동맹이라는 건 결국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지. 후회할 일은 없을 거다.”
“물건을 보여줘.”
진이 품속에서 두 개의 영기 구슬을 꺼냈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구슬들을 보자마자, 또 한 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색깔만 다를 뿐, 영기 구슬들이 전승지에서 본 여러 기록 장치 중 한 가지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었다.
“영기로 이루어진 장치로군. 당신과 계약한 신, 솔더렛이 만든 것인가?”
“그래.”
“그렇다면 솔더렛에게 직접 장치를 복원해달라고 하면 될 텐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솔더렛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그럼 이게 기록 장치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저 동그란 영기 덩어리라면?”
“내가 그 안에 담긴 기록 영상을 직접 본 적이 있기 때문이지.”
“어떻게?”
“꼭 그 이유를 알아야 일을 할 수 있는 건가? 단지 거래 관계일 뿐, 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요구하는군.”
발레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렇군. 그것들, 잠깐 줘봐.”
영기 구슬을 받은 발레리아가 손바닥에 마력을 일으켰다.
수우우우……!
그러자 그녀의 손과 영기 구슬 근처에 묘한 파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발레리아가 펼치고 있는 것은, 히스터가의 기록 마법이었다. 그녀의 마법이 과연 영기로 이루어진 장치에도 효과가 있을지 궁금했다.
진은 모르는 척 잠자코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즈즛, 즈즈즉…….
치직!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처음 구슬들을 얻었을 때, 장치가 가동되던 것과 똑같은 소음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발레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기록 장치로군. 훼손된 상태이기도 하고. 구동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렇게 확인해볼 수 있으면서, 굳이 따졌던 거냐.”
“그 덕에 난 당신이 솔더렛과 소통이 끊겼다는 정보를 알게 됐지.”
“야무지다고 칭찬이라도 해줘야겠어. 복원할 수는 있겠나?”
“음…… 아마도.”
발레리아가 영기 구슬을 테이블에 내려두며 답했다.
“선수금을 이미 받은 것치고는 대답이 미적지근하군.”
“이봐, 진 룬칸델. 기록 장치라는 건 말이야, 당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게다가 이건 내 선조들이 만든 것과 완전히 동일한 물건이 아니라서, 내게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진이 알고 있는 발레리아의 습관은 긴장했을 때 눈동자가 미세하게 왼쪽으로 치우쳐지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팔짱을 낀 채 검지와 엄지로 머리카락 끝을 살살 매만지는 것.
그건 발레리아가 어떤 사물이나 상황에 큰 흥미를 느낄 때 드러나는 습관이었다.
‘스승이 솔더렛의 기록 장치에 흥미를 보이고 있다는 건, 복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혹은 자신에게도 필요한 물건이라는 뜻.’
필요하다면, 아마 히스터가의 기록 마법을 되찾는 일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터.
진은 솔더렛의 안배가, 그가 남긴 기록이, 그리고 오늘의 이 만남이.
묘하게 운명처럼 느껴졌다. 얼핏 보기엔 우연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은 발레리아와 다시 만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다. 딱딱 들어맞는 퍼즐처럼.
“알겠다, 시간을 주지. 얼마나 필요하지?”
“그것도 정확히는 알 수 없어.”
“그건 아직 네 기록 마법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인가?”
진이 회귀하기 직전, 스물여섯의 발레리아조차 히스터의 기록 마법을 다 복원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내 기억대로라면 현시점의 스승은 이제 겨우 세 개 정도의 전승지를 찾았을 것이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 거야.’
열일곱의 발레리아가 가진 기록 마법은 극히 한정적이었다.
“……룬칸델이 생각보다 나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나 보군?”
“적어도 내 보호가 필요할 정도는 될 거다.”
“아까도 말했지만, 당신 보호는 필요 없어.”
“내 어머니와 큰형님이 널 찾고 있다. 네가 현재 사용하는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더군. 아리아 아울하트라는 이름 말이야.”
“내 가명은 그것 하나뿐이 아니야. 행적도 잘 지우면서 움직이고 있고.”
“안카 로프먼, 라일린 해저드, 루실 스코프, 하르티아 벤.”
발레리아의 또 다른 가명들을 말하자 그녀의 눈동자가 움찔거렸다. 습관을 제외하면, 타인을 상대할 때 거의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것들은 네 가명이 아닌가? 그리고 행적을 잘 지웠다고 말하기에는, 너와 내가 이렇게 만나서 잘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나.”
룬칸델은 물론이고, 지플조차 아직 ‘아리아 아울하트’를 제외한, 발레리아의 다른 가명들을 알지 못했다.
발레리아 본인을 제외하면, 그 가명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오직 진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발레리아로서는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에 흔적을 남긴 거지? 확실하게 지웠다고 생각했건만.’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발레리아는 자신이 어디에서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딘지 확신할 수 없다는 건, 곧 어디에도 흔적이 남았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발레리아의 마음속에 스멀스멀 불안이 피어났다. 아무리 단단한 내면을 가졌다 한들, 아직 열일곱에 불과하니 말이다.
“……내 이름을 몇 개를 알고 있든 그들은 날 잡지 못할 거다. 그리고 당신이 날 찾은 건 아까도 말했듯, 내가 당신과 대화를 나눠보기로 결정했기에 가능했던 거야.”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보기 좋지만, 더 조심할 필요가 있지 않겠어? 룬칸델이 이 정도라면, 지플은 분명 너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아냈을 거다.”
“걱정해주는 마음에 눈물이 다 날 것 같군.”
“네가 갖고 있는 그 영기 구슬은 내게 슈지엘 히스터의 마법서나 네 목숨보다 훨씬 귀중한 것이다. 네가 행여 복원 도중 붙잡혀서 그것을 잃게 될까 봐 하는 말이지.”
“룬칸델과 지플의 눈을 피해 숨는 건, 총 현상금 4억의 예비 기수 진 룬칸델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니야. 어쨌거나 더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는 받아들이도록 하지.”
발레리아가 영기 구슬을 로브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이만하면 이야기는 대충 끝난 것 같군. 내가 편지할 수 있는 주소를 하나 줘. 안전한 곳으로.”
“티칸 자유도시 중앙수비대의 수비대장 알리사 뱃저에게 보내면 된다.”
“돌아가서 복원 작업에 진전이 생기면 편지를 보내도록 하지.”
“내가 네게 연락할 수 있는 주소는?”
기대하지 않고 말한 것이었다. 도망자 신세인 그녀가 주소를 내어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슥슥.
하지만 의외로, 발레리아는 종이를 꺼내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리고 진은 주소를 보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여긴 사밀의 중심부잖아?”
암살 집단 무명의 도시, 사밀.
그곳의 중심부는 무명 살수들의 가족이나 특별한 은인만이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밀 내의 유일한 금살 구역이자, 진이 과거 오울과의 내기를 이기기 위해 사용했던 곳이기도 했다.
발레리아에겐 가족이 없다. 그녀는 은인 자격으로 사밀 중심부의 집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얻은 상태였다.
‘하긴, 전생에서 지플이 무명에도 한 번쯤은 스승을 찾거나 암살하라고 의뢰를 제안했을 법도 한데. 지금까지 스승이 세계 최고 암살자들에게 당하지 않은 게 이런 이유였나.’
전생에선 생각해본 적 없는 문제였다. 사밀에도 발레리아의 은신처가 있다는 것도.
“실제로 거기 머물진 않아. 대신 그 주소로 오는 서신은 확인할 수 있으니, 내게 요구할 것이 있다면 연락을 취해.”
발레리아가 진에게 연락할 수 있는 주소를 알려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진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꿈속의 남자와는 분위기가 너무나 달라 실망스럽던 건 사실이나, 어딘지 모르게, 가만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그리웠던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났다.
죽은 회색부엉이 용병 단원들을 제외하면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무명이 은인으로 대우하는 중인 줄은 몰랐군.”
“당신 반응을 보아하니 이곳은 룬칸델도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네. 설마 직접 찾아오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겠지.”
발레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이만 돌아가겠어. 장치를 복원해서 돌려주기 전까지, 선조의 마법서를 소중히 여겨주면 좋겠군.”
“기록 장치 복원에 필요한 것 중, 내가 구해줄 수 있는 것은 언제든 요구해도 괜찮다. 그리고, 돌아가면 사밀로 물건을 하나 보내도록 하지.”
“물건?”
“갈색으로 염색했지만, 원래 붉은 머리인 게 다 보이거든. 변장 수준이 썩 높지 않은 것 같으니, 좋은 염색약과 분장 도구를 주겠다. 독 같은 거 묻혀놓지 않을 테니 안전장치를 추가한다고 생각해.”
“……염색약과 분장 도구라고?”
“써보면 알아. 천의 얼굴로 살 수 있을 거다.”
피식.
발레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실없는 소리도 할 줄 아는군.”
일어선 발레리아가 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만남이었던 것 같네.”
물끄러미 그녀의 작고 가는 손을 쳐다보는 진.
‘단지, 회귀 전의 스승보다 어리기 때문에 이런 면모가 남아있는 것일까?’
그가 기억하는 발레리아라면 이런 상황에 결코 악수를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내 발레리아의 손을 맞잡자 온기가 전해졌다.
“아리아 아울하트.”
“왜?”
“처음 날 봤을 때. 왜 성을 빼고 이름만을 불렀지? 꼭 나랑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꿈에서 밴 습관 때문이다.
발레리아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 다음에 보자고.”
* * *
진이 검의 정원으로 돌아오자마자 회의가 열렸다.
기수뿐만이 아니라 원로회의 장들과 주축들도 회의장에 모여 있었다. 단순 임무가 아닌, 가문의 중대사를 다루는 회의라는 의미.
로사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사는 눈짓 한 번으로 그들을 다시 자리에 앉힌 뒤,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안건은, 아리아 아울하트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