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46)
제 333화
106화. 기록자들(5)
* * *
벌떡!
활시위가 튕기듯, 발레리아가 확 몸을 일으켰다.
정신을 가다듬거나 상황을 살필 여유도 없다는 듯, 그녀는 곧장 주위를 살피며 자신의 지팡이를 찾았다.
그리곤 지팡이가 보이지 않자 즉시 양손에 공격 마법을 띄우며 경계 태세를 취했는데, 이 모든 게 이뤄지기까진 불과 2초가 걸리지 않았다.
후우, 후, 후……!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는 발레리아.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여긴 어디지? 난 갇힌 건가?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회색부엉이 용병단과 지내던 때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엇, 일어나셨군! 나리! 나으리! 아리, 아니지. 손님이 일어나셨습…… 허, 이 친구야! 그 마법 설마 날 조준하고 있는 건가? 에헤이, 내려놔. 기껏 병수발 들어준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지. 암.”
제트를 노려보는 발레리아의 눈동자가 붉었다.
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럴 테지만, 그녀는 정신을 잃는 것에 병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회색부엉이 용병단이 몰살당한 이후부터 말이다.
“이 개 같은, 찢어죽일 지플 새끼들.”
“이, 이봐. 난 지플이 아니라 티칸의 귀염둥이 제트거든. 좀 진정하고.”
“다, 죽인다. 내가, 모조리……!”
샤아악!
발레리아의 손에서 한 줄기 마력 광선이 쏘아졌다. 다행히 제트는 그 광선에 맞지 않고 잽싸게 문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왜, 왜 이러셔! 차, 차가운 물이랑 나리 좀 모셔올게!”
제트가 나간 뒤로도 발레리아는 한동안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혼란스러운 정신,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 때문에 계속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깨어나자마자 덫에 걸린 짐승처럼 구는군. 이곳엔 지플도, 널 해할 사람도 없으니, 도와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쪽이 좋아 보이는데.”
진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놓을 수건을 가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진. 진 룬칸델……?”
진이 수건을 협탁에 내려두며 발레리아와 눈을 맞췄다.
“진정해. 이것 좀 마시고.”
발레리아는 진이 내민 물 잔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제 이마를 짚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군, 미안하다.”
“다친 사람은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 걸로.”
“내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지?”
“이틀. 이런 상황에 꽤나 보편적인 수치지.”
발레리아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는 사이 또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섰다.
“몸은 좀 어떤가요?”
“……성왕 폐하?”
“그대는 성국의 신민이 아니니 그렇게까지 높여 부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진의 친구처럼 대해주세요. 그대 또한 그의 동료라고 들었으니.”
라니였다.
발레리아가 쓰러진 뒤 진은 곧장 라니에게 연락을 넣었다. 동료가 위급하니 당장 좀 와달라고 말이다.
일국의 왕, 그것도 성왕을 이런 상황에 부를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 진 한 사람뿐이었다.
“몸은,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두 분이서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으니, 전 나가 있겠습니다. 저는 오늘 내로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혹시 그 안에 치료가 더 필요하다면 언제든 편하게 요청하도록 하세요.”
라니가 자리를 비켜주자 방에는 다시 진과 발레리아만 남았다. 발레리아는 이제야 좀 진정이 된 듯 차분한 눈빛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마력 역류가 심각해서 어쩔 수 없이 라니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네 정체를 알리진 않았으니 안심해.”
쇳물이 부어진 듯, 발레리아는 가슴 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감사하는 것은 말이다. 회색부엉이단이 몰살당한 이후, 그녀는 단 한 번도 타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물에 잠기듯, 두려운 마음이 함께 찾아왔다.
그녀는 늘 사람과 가까워지면 약점이 늘어날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만하면 내가 널 해할 의도가 없다는 건 확인되었겠지?”
발레리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거나 납치할 계획이었다면 자신이 잠든 사이 수천 번도 실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쓰러지기 전, 확인한 기록 속에도 별다른 것은 없더군. 괜히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어 미안하다.”
“허비라고 생각하면 허비고, 나름대로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하면 유의미할 테지. 난 후자 쪽이 더 괜찮다고 보는데.”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진을 쳐다보는 발레리아.
그녀는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에 본 기록’을 떠올리고 있었다.
발레리아가 어깨로 흘러내린 자신의 붉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그리고 진의 기록 속, 르엣의 붉은 머리를 떠올렸다. 히스터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런 붉은 머리를 갖고 태어난다는 사실도.
‘고대 요정족이 히스터 가문과 관련이 있다고……?’
스스로 히스터임을 자각한 이후, 발레리아는 늘 선조들의 마법과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왔으나.
단 한 번도 고대 요정족과 히스터가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변절하지 않은 자들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그만한 진실을 설마 진을 통해 알게 될 줄도 당연히 예상치 못했고 말이다.
심지어 진의 기록을 엿보며 확인한 충격적인 사실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히스터의 기록 마법은 결코 거짓을 알리지 않는다. 기록이 알리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훼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진실뿐이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군.’
당혹스럽긴 하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부활, 세상 곳곳에서 전해지는 수많은 전설과 신화 속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두 글자.
그건 이야기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룬칸델에 누메루스의 눈물이 하나 있었나 보군.’
희망의 신 누메루스.
그는 성국 반켈라가 건국되기 전 모종의 사건으로 소멸했다고 알려진 신으로, 눈물 여덟 방울과 백 방울의 피를 유산으로 남겼다.
피는 세상에 비교할 것이 없는 치료제로 사용할 수 있었고, 눈물은 죽은 자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다.
여덟 방울 중 네 방울은 사용 기록이 남았으나 나머지 네 방울은 행방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 발레리아는 그중 하나가 진에게 사용되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왜? 룬칸델의 열두 번째 기수에게 사용하기엔 아까운 물건이 아닌가.’
자신이 룬칸델이었다면 시론이나 루나가 죽음을 맞이한 경우에 사용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아리아 아울하트.”
아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깨어난 직후다 보니 머리가 좀 굳었을 뿐이야.”
“그럼 식사나 한 다음에 이야기하지. 같이 먹기 불편하면 방으로 가져다주겠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군.”
진이 방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길리가 발레리아의 식사를 챙겨주었다.
‘이 여자가 길리 맥로란, 진의 유모인가.’
길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발레리아에게 달리 말을 붙이지 않았다.
다진 고기가 가득 들어간 수프와, 신선한 우유. 후식으로 먹을 딸기파이 한 조각(이 대목에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먹는 동안 발레리아는 진과 어떤 깊이의 대화를 나눠야 알맞을지 고민했다.
‘이제야 알겠어. 녀석은 솔더렛의 기록 장치들을 통해, 고대 요정족이 히스터와 연관이 있다는 정보를 알아낸 거다. 룬칸델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정보를 얻은 거야. 그래서 날 필요로 하는 것이고. 솔더렛의 기록 장치들이 고장난 상태니까.’
룬칸델이나 지플이 자신을 찾는 것과는 목적 자체가 달랐다. 그들은 자신을 협상패로 쓰거나, 죽이려는 목적이지만 진은 말 그대로 자신이 ‘필요한’ 것이다.
‘퍼즐이 맞춰지고 있군. 내 꿈에 계속 진이 보였던 것도, 고대 요정족이나 선조들이 남긴 마법 같은 것일 수도 있어. 아직 내 기록 마법이 완전하지 않으니 그렇게 간접적으로만 드러난 거다.’
진과 자신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대 요정족과 선조들이 남긴 오랜 안배처럼 느껴진 것이다.
이 만남이 선조들의 안배라고 생각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무법도시 마미트에 있는 히스터가의 전승지에 선조들이 남긴 ‘미래의 기록’ 때문이었다.
1795년에 마미트에서 선술집 종업원에게 ‘히스터의 행방을 찾은 한 사람’이, 1799년 3월 무렵에 다시 마미트에 찾아올 것이라는 미래의 기록.
그게 발레리아가 오랫동안 꿔온 꿈속의 ‘진’이라는 걸 확인했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진 룬칸델에게 고대 요정족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더 이상 진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해선 안 돼.’
식사를 끝낸 발레리아가 진을 찾았다.
“머리는 좀 식었나?”
“덕분에.”
“나와 한 약속도 잊지 않았겠지? 넌 앞으로 내게 더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물론이다. 안 그래도 네가 날 이용하고 있듯, 나도 널 더 이용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거든.”
“반가운 소식이군.”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나? 진.”
“얼마든지.”
“네 기록을 확인하는 동안, 난 고대 요정족이 히스터 가문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그저 기록 속의 기록을 엿본 것에 불과하니, 넌 그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고 있을 테지.”
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이건 무슨 소리지, 그런 표정은 간신히 감출 수 있었다.
“얘기해줘. 고대 요정족과 내 가문이 대체 무슨 관계인지. 내 사명에 도움을 주면, 나 역시 진심으로 널 위해 일하겠다.”
“그, 아리아. 잠깐만.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그런 사실을 들은 적이 없다.”
“뭐라고? 기록은 절대 거짓을 말하지 않아. 내가 본 바로는 분명…….”
“원한다면 또 내 기록을 확인해도 좋아. 하지만 난 정말로 처음 듣는 이야기다.”
발레리아는 진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고대 요정족과 히스터에 관련한 것은, 진이라는 인간의 기록 속에 있는, 솔더렛의 기록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니 진은 모르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고대 요정족들이 너의 기록 마법과 비슷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너와 그들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도 했었어.”
“기록 마법과 비슷한 능력……?”
진이 한동안 발레리아에게 요정족들의 능력을 설명해주었다.
진짜 르엣이 설명해준 것은 기억에 전혀 남아있지 않으나, 세 번째 무덤의 기록에서 확인한 것들은 똑똑히 떠올랐다.
“……고대 요정족들의 모습이 담긴 기록 장치를 어떻게, 어디서 보았는지. 내게 알려줄 수 있나? 내게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다.”
“묘인족들의 은신처에서 봤어. 당장 찾아가자고 할까 봐 미리 하는 말인데, 묘인족은 현재 나도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내가 그들을 찾겠다.”
발레리아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