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449)
제 444화
128화. 제피린(6)
“그리고 해독에 능한 치유사와 독술사는 당장 이자를 살펴주십시오.”
흑기사는 이제 몸을 떨지도 않았다. 그저 미약한 숨결을 내뱉는 게 전부여서 곧 죽을 것 같은 모양새였다.
단원들이 흑기사를 들것으로 옮겼다.
“반드시 숨을 붙여놔야 합니다. 이자가 죽으면 흑왕단에게도, 내게도 좋을 게 없습니다. 특히 흑왕단은 난처해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진 경!”
3대장 무르카가 대답하자 치유 전담 용병과 흑왕단 소속 의사들이 들것에 들러붙었다.
“반대로, 살려내기만 하면 내게도 흑왕단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패가 될 것입니다.”
만일 흑기사가 흑왕단의 땅에서 죽는다면, 그건 이유를 막론하고 조슈아가 발카스를 압박할 수 있는 명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대라면 오히려 배상을 요청할 수 있는 쪽은 조슈아가 아니라 발카스였다. 진 역시 가문 최강의 투구 하나를 잃지 않아도 되며, 어쩌면 흑기사와 직접 협상을 시도해볼 수도 있었다.
“이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살려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반드시 숨을 붙여놓겠습니다!”
크지직, 콱!
의료진이 응급 처치하며 달려 나가자마자 별안간 폭음과 함께 흑왕산채 전체가 흔들리는 진동이 찾아왔다.
화산이 터지듯, 좁아지고 있는 아공간의 균열 사이로 오러, 마기, 영기, 뇌기가 분출되고 있었다. 진이 바깥으로 나온 직후부터 전장의 기운이 더욱 격렬해진 것이다.
‘괴물은 괴물이다. 아공간이 무너지며 상당히 수세에 몰린 듯 보였는데도 또 이런 힘을 드러내는군.’
무라칸은 다시 돌아올 필요 없다 했지만 여전히 걱정이 되었다. 최대한 빨리 흑왕단을 대피시킨 후 합류해야 할 것 같았다.
“……대체 안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제피린, 그 망할 녀석이 정녕 저 괴물이었다는 말인가!”
2대장이 참담한 심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으로 변신한 제피린이 단장, 진 일행과 싸우는 모습은 도무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제피린.
최근 그녀는 흑왕단의 사고뭉치 막내로서 모든 선임자와 관리자들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일 욕을 먹고 혼이 나면서도 특유의 발랄하고 쾌활한 기운을 퍼뜨려 미워할 수 없는 막내이기도 했다.
그랬던 제피린이 지금은 흑왕산채를 초유의 위기에 빠뜨리고 있는 괴물로 변한 것이다. 시시때때로 드러났다 감춰지는 거대한 뱀의 형상에 구토감이 치솟을 지경이었다.
“발카스 경께선 2대장님을 포함한 부하 단원들이 저자의 마수에 당했을까 가장 걱정했습니다. 흑왕단원 중 제피린에게 당한 사람은 없는 겁니까?”
“전혀 없소, 12기수.”
“다행입니다.”
발카스가 가장 걱정하던 문제는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확실하게 전원 피해 없이 대피만 잘 시킨다면, 차후 발카스 경과 대화할 때 긍정적인 흐름을 기대해볼 만해.’
캬아아아악-!
아공간 균열 너머에서부터 제피린의 포효가 들려왔다. 먼 소리로 느껴지긴 했으나 직접 겪어보지 않은 단원들도 그 힘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한 포효.
탈출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는 하나, 모든 요새들이 다 그렇듯. 흑왕산채 역시 탈출을 위해 만든 특별한 통로와 장치, 지침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요새 곳곳에 사다리가 펼쳐졌고, 물자를 내리기 위한 마법 기구들이 작동되었다.
급박하고 우울한 상황과 별개로 상당한 장관이었다. 산맥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거대한 성채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진은 흑왕단장의 응접실이 있던 중앙 성채를 빠져나가며 흑왕단이 탈출하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수백 갈래의 특수 밧줄이 성채와 성채 사이를 이어 사람과 물자가 오갔고, 성채들은 쉴 새 없이 정교한 기계 장치처럼 움직였다.
성채를 감싸고 있는 험준한 산맥들엔 대체 무슨 장치를 해둔 것인지, 어디선가 작은 폭음이 들리면 성채 인근에 산사태가 일어나 미끄러지는 길이 생겼다.
물자와 비전투 인원이 그 길을 사용해 산맥을 내려갔고, 그 와중에 성채와 성벽 곳곳엔 방어막들이 펼쳐졌다.
단원들이 아니라 흑왕단이 장치해둔 마법 장비들에서 펼쳐진 방어막이었다. 그런 방어막이 눈으로 좇아 헤아리기도 어려울 만큼 많이 펼쳐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이 정도라, 대체 얼마가 들어갔을지 감도 오지 않는군.’
돈도 돈이지만, 이만한 장비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제국과 루테로 마법 연방의 각 마법 도구 제작자들과 아주 긴밀한 끈이 있어야 했다.
그건 흑왕단이 중립 세력이자 용병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법 도구 제작자들이 룬칸델에 이런 물품을 제공하는 건 이적 행위나 다름이 없으니까. 룬칸델이 얻을 수 있는 전쟁용 마법 도구는 전투 승리의 전리품이 대부분이었다.
탈출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과연 세계 최고의 용병대답게 흑왕단은 처음 겪는 비상 상황에서도 허둥대지 않는 대처를 보여주었다.
산채가 있던 산맥은 거의 통째로 주저앉았다.
그 아래로 벌써 대부분의 단원이 피신을 끝마쳤고, 진과 대장, 간부들은 산사태가 만든 길의 밧줄에 매달린 채 중앙 성채의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정확히는, 중앙 성채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후우우.”
“대장님……!”
아공간을 뚫고 나온 힘들이 중앙 성채를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균열에 붙은 청화의 불길은 아까보다 훨씬 잦아든 상태였으나, 힘들이 계속 균열을 찢은 게 무척 유효하게 작용하는 모양새였다.
‘곧 아공간이 완전히 찢어질 것 같군.’
그다음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제피린이 본모습으로 변신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싸움은 계속 이어질 터였다. 인간 형태의 제피린만 하더라도 최소 10성의 무위를 갖고 있으니까.
다만 그 싸움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제피린은 여러 번 타격을 입어 지친 상태고, 진 일행과 발카스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남은 건 짧은 싸움이었다.
‘여기서 제피린을 죽일 수는 없다. 단원들은 일단 큰 위험에서 벗어나게 했으니, 서로 치명타를 입지 않는 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최고의 결과야.’
지쳤다고 할지라도 제피린에게 또 어떤 수가 남아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가 보여준 충격적인 무위로 미루어보면, 전세는 또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싸움이 ‘아공간 바깥’으로 번지면, 외부 세력에서도 분명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흑왕단은 세상 모두가 눈독 들이고 있는 중립 세력이다. 흑왕산채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싸움이 벌어지면 근처의 세력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리 없었다.
‘애초에 2대장과 부하들을 죽이지 않고 응접실에 아공간을 만든 건, 목적한 바를 조용히 처리하기 위함이었을 테지.’
흑왕산채가 있는 대륙 중앙의 미보호구역, 비세 왕국.
비세 왕국은 4세력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으나 지리적으로는 지플, 비먼트의 영토와 상당히 가까웠다.
그리고 최근 킨젤로는 그들과 그다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다.
‘그것들이 찾아올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면, 제피린은 무조건 도망이라는 수를 택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지이이익!
결국 아공간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과 흑왕단원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무너진 중앙 성채를 올려다보았다.
균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전장의 풍경은 너무 어수선해서 내부 상황을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카하아아……!
가장 먼저 균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라칸이었다.
그는 포효를 내지르며 위엄을 과시했고, 뒤이어 빠져나온 제피린을 향해 숨결을 토해냈다.
그 풍경에 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사했구나!’
그러나 뒤이어 빠져나온 발카스와 샤쿠, 특히 샤쿠의 모습을 보니 속이 찢어지는 마음도 들었다.
샤쿠는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일 정도로 온몸에 치명상을 입은 모습이었다.
전투가 어떠했는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진은 샤쿠의 상태가 희생의 흔적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영혼과 영기로 빚어진 수호자인 만큼, 샤쿠의 죽음과 부상은 실재가 아니다. 따라서 샤쿠로서는 당연히 진과 그 동료들을 위해 제 몸을 희생하는 것에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설령 영기로 빚어진 육신이 아니라, 진짜 육체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명왕족의 형제애란 그런 것이었다.
“샤쿠 형제!”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진의 목소리에 반응한 샤쿠가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치자 씨익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오늘 내가 어땠는지 꼭 이야기해주라고, 진 형제.”
샤쿠의 몸이 영기로 흩어져 갔고, 진은 이를 악물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싸움을 끝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대장과 간부들은 계속 단원들을 보호하십시오!”
함께 싸우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대장들이 합세한다 해서 제피린을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은 없는 반면, 그녀의 공격에 일반 단원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 가능성은 너무 낮은 것이다.
화르륵!
브라다만테에 다시 한 번 영기와 청화가 깃들었다. 마음 같아선 곧장 마검 비기를 펼치고 싶지만 단원들이 휩쓸릴지도 모르는 일.
카각-!
도약한 진의 검이 제피린의 이마로 떨어졌다.
제피린은 손톱으로 어렵지 않게 그 검을 막아냈으나, 코앞에 펼쳐진 청화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눈에 띄게 기운이 약해졌다. 물론 본모습의 그녀에 비해 약하다는 뜻일 뿐, 여전히 엄청난 힘을 갖고 있었다.
쩌엉, 콰가각!
브라다만테와 손톱이 맞물리며 파열음을 일으켰다. 무라칸은 본모습과 인간 형태를 오가며 진을 보조했고, 발카스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샤쿠만큼은 아니지만 발카스 또한 상당한 중상을 입었고 제피린의 독기에 중독된 상태인 것이다.
“진 룬칸델, 네놈……!”
제피린이 진과 힘을 겨루며 말했다.
“아까처럼 자신만만하게 굴어봐. 마치 우릴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었잖아?”
그 말에 제피린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이내 그녀는 다시 웃음기 머금은 얼굴을 되찾으며 이렇게 말했다.
“머잖아 우린 또 만나게 될 겁니다, 진 룬칸델.”
“그래, 네놈들은 꼭 도망치기 전에 그런 말을…….”
진이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돌연 제피린의 온몸이 보랏빛으로 변하며 ‘부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펑, 터져버릴 것처럼.
진 혼자 느낀 직감은 아니었다.
[꼬마!]무라칸이 그렇게 외치기 전에 이미 진은 거리를 벌리며 발카스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럼, 안녕!”
콰아아아……!
마기로 부푼 제피린의 몸이 폭발을 일으켰다.
산맥 전체에 강렬한 지진이 일었고, 충격파에 폭발 시작점 일대의 나무와 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흑왕산채 전부를 무너뜨릴 듯 거대한 폭발이었지만, 실상 그 위력이 초월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제피린은 진을 죽일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단지 탈출을 위해 폭발을 일으킨 것일 뿐.
흑왕산채에 온갖 방어 마법 장비가 구비되어 있다는 게, 그리고 아직 진과 무라칸, 대장, 간부급 단원들에게 여력이 남아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막아라!”
“12기수가 단장님을 챙겼다! 1, 2, 3군은 서로를 보호해!”
마기 폭발에 산맥이 다 부서지고 있었다.
미리 대부분의 단원이 대피하지 않았다면 문자 그대로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진과 무라칸, 흑왕단원들은 필사적으로 폭발과 여파를 쳐냈다.
특히 무라칸은 남은 영기를 쥐어짜내 산맥 곳곳에 장막을 형성했고, 그것이 가장 많은 이들을 구하고 있었다.
[우라질, 마지막까지 같잖은 짓거릴 하고 가네!]폭발과 그로 인한 산사태와 지진 등의 현상이 멎은 것은, 그로부터 거의 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결국 일행은 큰 인명 피해 없이 폭발을 모두 막아내었다.
그러나 위용 넘치던 흑왕산채는 죄다 파괴되어 잔해에 묻혀버렸고, 무너진 산맥 아래 곳곳엔 흑왕단원들의 신음과 통곡이 가득히 퍼지고 있었다.
여전히 영기에 젖어 어둑한 밤하늘에 떠 있는 무라칸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며 흑왕단을 내려다보았다.
사정을 모두 아는 이들에겐 그 모습이 안타까운 마음에 기인한 것이라는 걸 알 테지만.
이제 막 도착한, 전투를 감지하자마자 지플과 비먼트가 급히 파견한 인원과 용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흑왕산채가!”
[무라칸!? 설마, 무라칸이?] [무라칸 오빠……!? 오빠가 이런 거라고?] [무, 무, 무라칸……?]“그렇다면 설마 룬칸델의 12기수가, 흑왕단을……!”
지플과 비먼트에서 온 이들은 파괴의 현장과 무라칸을 보며 크나큰 오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