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76)
제 555화
149화. 하이란의 빛, 혹은(2)
아마 한 시간은 울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선, 단테는 이곳에서 삶이 끝나버릴 때까지 울고 싶었다. 생전에 조부가 보여주곤 하던 미소 같은, 그의 품 같은 저 빛에 안겨 사라지고 싶었다.
그에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면.
가문도, 가문을 위해 싸워준 이들도, 모든 걸 뒤로한 채 한달음에 달려와 준 친구도, 그의 사람들도, 그가 지켜야 할 땅도, 그리고 그 자신도.
그 모든 게 정말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면 단테는 아마 다시 일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이 남았다.
그리고 그만큼이 남을 수 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조부가 목숨을 바친 대가였다. 그야말로 전부를 바쳐서…….
“주저앉을래도 주저앉을 수가 없군.”
단테가 눈가를 훔치며 진을 돌아보았다.
“그대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군, 미안하오.”
두 사람이 만나는 것도 한 달 만이었다. 단테에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진은 보름 이상 기절한 채 집중 치유를 받았다.
탈출 당시 론의 보호 덕에 추가적인 부상은 입지 않았으나, 이미 누적된 충격이 너무 컸었다.
단테는 오늘로 드디어 각오를 굳혔다. 더 이상 슬픔에 매몰되어 있지 않기로. 그렇기에 이곳을 찾아왔다.
진과 함께 조부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론이 남긴 말처럼 영원한 작별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인사를 하기 위해서.
이제 단테는 그간 론이 맡아온 수호의 의무를 계승해야 했다.
그러나 진은, 사실 단테처럼 한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전히 녹슨 쇳덩이 같은 죄책감이 진의 가슴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소.”
진이 입을 열려는 찰나, 단테가 먼저 말했다.
전쟁 당시, 론이 두 사람을 빛의 길 바깥으로 내보내던 마지막 순간. 단테는 진이 인지하지 못한 론의 의지를 전해 받을 수 있었다.
“네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렇게 일러주셨소. 나와 그대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오.”
죄책감에 괴로운 것은 진뿐만이 아니다. 단테 또한 자신이 스스로 지킨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마음에, 때문에 조부를 잃었다는 생각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얼마나 많은 것이 부서졌던가.
“우린 충분히 잘 해냈소. 어쩌면 그 이상 잘할 수 없던 정도였는지도 모르오.”
낙엽에 불이 붙듯, 진의 눈동자가 젖어들었다. 이번엔 단테가 고개를 돌려 진의 우는 얼굴을 피해주었다.
“단지 어쩔 수 없는 슬픔이 있을 뿐이오. 그러니, 이제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은 잊는 게 좋겠소.”
단테는 마치 진의 회귀를 알고 있는 듯 말하고 있었다.
론이 빛이 되기 직전에 그 사실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단테는 그의 의지로부터 어렴풋이 진이 가진 비밀을 엿본 상태였다.
명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자신의 친구가 가진 죄책감이 그 비밀과 관련이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론은 죽음의 순간에 그 모든 걸 알고도 그렇게 전한 것이었다. 자신의 손자에게도, 진에게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정말로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가진 비밀은, 언젠가 때가 되면 알려주시오. 베라딘 공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자리에 없는 또 다른 친구.
진과 단테는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그들도 베라딘이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산드라가 몰래 편지를 보내준 덕이었다.
(사랑하는 진 씨! 안녕?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쓴 건, 다음 데이트 일정을 잡기 위해서! 그리고 아무래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가문의 본대 전부가 검황성을 치지 않도록, 우리 라딘이가 힘 좀 쓴 거 모르죠?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목숨을 걸고 자기와 자기 친구를 돕기로 결정한 것이거든요. 기특하지 않나요? 이 누나의 사랑을 응원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다니! 기특해 죽겠다니까요.
아무튼, 라딘이 아니었으면 이번 싸움, 분명 더 힘들었을 거예요.
승리 축하해요. 우리 가문은 초상집 분위기지만, 나는 뭐 자기가 좋은 게 최고니까.
비록 동생도 죽을 뻔하고, 나도 나대로 혼돈 진압이 아니라 진 경을 돕자고 계속 조르다가 카둔한테 맞아 죽을 뻔했고, 헤도한테 며칠 동안 설교를 듣고, 지금도 자원 복구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지만.
하하, 너무 부담 갖지는 마세요. 그냥 데이트나 한 번 하면 되는 문제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 당신의 하나뿐인 사랑, 산드라 지플)
편지가 다소 어지럽기는 했지만, 베라딘이 자신들을 돕고 있었다는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어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그대, 정말로 산드라 지플과 사귀는 것이오? 비궁의 영애는 그럼.”
“헛소리를 하는 건 산드라 지플 하나로 충분해, 단테.”
두 사람이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이 자리에 베라딘 공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오. 사람들은 지플이 검황성을 공격한 것 때문에 내가 그마저 원망할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소. 그는 언제, 어디에 있어도 나의 벗이오.”
만일 베라딘이 언젠가 정신 조작에 자아를 잃고 괴물이 되어버린다 할지라도, 그래서 자신을 공격한다 할지라도 단테는 그를 미워하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게 그가 생각하는 신뢰의 형태고, 정도였다. 그토록 큰 슬픔과 고통을 겪고도 그는 1차전 때처럼 복수귀가 되지도, 광기에 빠지지도 않았다.
단테 하이란이라는 인간의 단단하고 빛나는 마음은 원형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의 조부가 끝내 마성화를 극복해냈듯이.
“조만간 녀석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자고.”
“꼭 어디로 떠날 것처럼 말하는군.”
“그래, 떠날 거다. 수련하러.”
“언제?”
“바로는 아니고, 상황을 좀 정리하고 몇 가지 일을 처리한 다음에.”
라프라로사로 가서 10성을 달성하는 건 이미 계획되어 있던 일이지만, 지플과 룬칸델이 약해진 것은 진에게 특히 유리하게 작용했다.
‘분명 휴전 협정이 있을 테니, 내가 부재한 동안 동료들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대폭 줄어들었다.’
설령 그가 수련하는 사이에 휴전이 깨진다 할지라도, 바멀 연합은 이제 룬칸델로서도 보호하지 않을 수 없는 세력이었다.
온전히 룬칸델의 세력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진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진은 이번 일로 차기 가주로서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다졌으며, 그가 가주가 되는 순간 바멀 연합은 룬칸델의 힘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거대 가문들의 세력이 약해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이 귀했다.
지플, 룬칸델, 제국, 킨젤로에 이어 제5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바멀 연합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소?”
“탈라리스 님은 그리 길지 않은 수련이 될 거라고 하셨는데, 해봐야 알 것 같다.”
“또 강해지겠군.”
“이제는 내가 널 따라가야 할 입장이지.”
단테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는 아니오. 조부님께서 진기를 전해주시긴 했으나, 온전히 내 힘이 되기까지는 한참 시간이 필요할 것 같소.”
“그보다, 어떻게 할 거냐?”
제국에 대한 질문이었다.
현재 제국의 황좌는 공석이 되었다. 황제가 공식적으로 황위에서 물러난 것은 아니나, 다시 그가 제국을 통치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의 모든 전말이 밝혀지며 민심은 문자 그대로 곤두박질을 쳤고, 지플은 그로부터 약속한 걸 받지 못했으며, 룬칸델과 비궁 역시 그와 지플의 결정에 심대한 타격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거대 세력들은 인재가 귀해졌는데도 공산이 된 제국을 그다지 탐내지 않았다.
제국 최강의 검은 창성에 다다르자마자 전사했고, 제국제이검 존시나 페럴을 비롯한 제국 최고의 인물들도 대부분 이번 전쟁에서 사망한 것이다.
게다가 지금 제국을 차지하는 건 골칫거리만 늘리는 일이었다. 글리엑의 혼돈이 어느 땅을 가장 많이 오염시켰겠는가? 제국을 삼킨 자는 그 오염 지역을 고스란히 감당하고 정화시켜야 했다.
“황제는 살려둘 수 없소. 개인적인 원한과 복수를 떠나, 그는 제국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혔소. 그리고 황좌는, 당분간 내가 차지할 것이오. 허수아비를 앉혀두고, 섭정하는 형태로.”
“그냥 네가 황위에 오르는 건 고려해보지 않은 거냐? 정통성 같은 게 문제라면…….”
“제국이 탄생한 이래, 황실은 백성들에게 단 한 번도 하이란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적이 없소. 정통성과 명분은 차고 넘치오.”
“그럼 왜?”
그러자 단테가 천천히 라시드를 뽑았다.
“이 검은 통치를 위해 존재하지 않소. 라시드가 벼려진 이유는, 이 땅을 수호하기 위함이지. 나는 나의 조부와 선조들이 그래왔듯, 본분을 잊지 않을 것이오. 대신.”
단테가 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국이 정상 궤도에 오르면, 그대가 부탁을 해주시오. 바멀 연합, 티칸 자유국의 국왕 카시미르 경에게. 그가 황좌에 오르도록 말이오. 그때가 되면 나는 섭정에서 물러나 다시 검황성주가 되겠소. 이게 내가 내린 결론이오.”
“네가 복구시킨 제국을 카시미르 경이 맡는다는 건 곧 제국이 나의 땅이 된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어, 단테.”
“제국의 백성들은 모두가 그대가 마지막까지 우릴 위해 싸운 사실을 알고 있소. 그리고, 어차피 제국엔 앞으로도 그대의 힘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지 않소.”
단테는 진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앞으로 제국을 계속 수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미르 비먼트는 이미 죽은 목숨이지만, 황실엔 아직 다른 패가 남아 있을 것이오. 지플과 다시 협상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킨젤로나 룬칸델이 될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어도 오염 지역 복구가 끝나면, 거대 세력들은 다시 제국을 노릴 것이오. 이런 상황에 내가, 누굴 믿어야 하겠소?”
단테의 것을 자신이 취하는 그림이 된다는 게 심정적으로 거북하기는 했으나, 진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대뿐이지. 베라딘 공도 있기는 하나 그는 늘 위협에 노출되어 있잖소. 그러니 염치없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하오.”
진이 단테가 뻗은 손을 맞잡았다.
이어 단테는, 품에서 한 병의 술과 세 개의 잔을 꺼냈다. 술병은 멀쩡했으나 잔은 모두 깨지거나 금이 간 상태였다.
그 잔들은 론이 아끼던 도자기들이었다.
검황성 평야 저 너머에 있던 부서진 오두막에서, 단테가 직접 찾아온 것이다.
“어린 시절 조부님이 나와 놀아주시곤 했던 오두막의 잔해 속에, 기적처럼 도자기들이 몇 개 남아 있더군. 가장 멀쩡한 것들을 고르고 붙여서 가져왔소. 조부님이 즐겨 드시던 약주와 함께.”
퐁…….
단테가 술병 마개를 따며 땅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앉아 있는 검은 땅이, 조금씩 본래의 색을 되찾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론의 빛이 오염된 검황성의 영지를 정화하고 있었다.
아주 느리고, 더디지만.
정도를 걷는다는 게 늘 그렇듯이, 언젠가는 분명 완벽하게 정화될 것이다.
한 잔은 론의 빛 앞에, 한 잔은 자신의 잔에, 한 잔은 진에게.
단테와 진이 론의 빛을 향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싸움이 끝나면 내 어여쁜 손자와 같이 술을 한 잔 기울이도록 하자꾸나, 진은 론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천천히 술잔을 비운 뒤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들은 떠나기 전, 각자의 검을 꺼내 론의 빛 아래에 이런 글귀를 새겼다.
검황 론 하이란.
이곳에서 하이란의 빛, 혹은 세상의 빛이 되다.
‘안녕, 할아버지.’
영지를 나서는 단테는 그 빛처럼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