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714)
제 777화
180화. 각자의 싸움(5)
만약 길리가 룬칸델의 유모가 되지 않고 계속 맥로란의 기사로서 수련을 해왔다면, 반드시 지금 한 말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스는 흑기사다.
비록 길리에 비해 잠재력이 한참 부족했고, 지금은 혼기에 타락한 상태라 할지라도. 그가 쓴 검은 투구의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예언자는 독스의 타락에 아주 공을 들인 상태였다. 그가 무인으로서의 쌓아온 격을 잃지 않되, 딱 증오와 광기에 사로잡힐 만큼만 타락시킨 것이다.
즉, 지금의 독스는 온전히 제 실력을 낼 수 있었다.
[감히 유모 따위가…… 우습구나, 길리. 그런 오만한 소리는 차라리 그 시절에 지껄였어야지. 네가 가문을 떠난 후,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경을 넘나들며 강해졌다. 검은 투구를 쓴 뒤에도 마찬가지였지.]채앵-!
“큭!”
독스의 클로가 길리를 후려쳤다. 막아내기는 했으나 길리는 힘 싸움을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팔목이 통째로 떨어지는 듯한 고통에 절로 이를 악물었다. 독스의 공격을 막을 때마다 온 뼈마디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길리는 얼굴만 고통에 일그러졌을 뿐, 자세를 유지한 채 독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더 이상 떨리지 않는 클로엔 형형한 오러가 맺혀 있었다.
[그간 안락한 시간을 보내며 썩은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만.]쉴 새 없이, 독스의 일방적인 공격이 이어졌다. 길리는 매 순간 사력을 쥐어 짜내야 했으나 독스는 어린애를 상대하듯 여유로웠다.
힘, 속도, 경험.
길리가 지금 독스를 이길 수 있는 영역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 있는 듯 내뱉은 말은 어디까지나 독스를 조금이라도 도발하기 위함이었을 뿐, 현실성이 없다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딱 거기까지다. 대체 내게 뭘 알려주겠다는 거냐?]우드득!
독스가 말을 끝낸 직후, 길리는 자신의 왼 팔목이 비틀리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서로의 클로가 엉키던 와중, 별안간 독스가 길리의 중심을 무너뜨리며 팔꿈치로 팔목을 강타한 것이다.
“카악……!”
길리가 신음을 토하며 황급히 좌측으로 보법을 밟았다. 그러나 독스는 그녀가 빠질 틈을 주지 않고 재차 같은 곳을 공격했다. 재차 으깨진 뼈가 살갗 안쪽을 날카롭게 찔렀다.
[처음이구나, 네 비명을 듣는 건.]“하, 그래서 만족스럽습니까.”
[아니, 실망스러워. 그래도 너라면, 그 괴물 같던 길리라면 아무리 녹이 슬었어도 무언가 대단한 면이 남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있었거든.]“저는 괴물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입니다. 괴물은 오라버니…… 아니, 오라버니를 이렇게 만든 작자들이겠죠.”
[그런데 너무 쉽게 부서지는군. 허무할 정도로…….]독스가 공격을 멈췄다.
길리는 그 틈에 거리를 벌리곤 붕대로 급히 부서진 팔목을 감았다. 독스를 의식하느라 잘 감기지 않았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고, 호흡은 자꾸만 가빠지고 있었다.
하아…….
독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연약한 모습 어디에도 그가 기억하는 길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내 독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길리의 앞으로 던졌다. 길리는 움찔하며 반격하려다, 땅에 떨어진 것이 한 알의 검은 환약이라는 걸 확인했다.
“뭡니까?”
[혼단이라고 하더군, 예언자가 만든 환약이다.]“이걸 먹으면 오라버니처럼 되는 겁니까?”
[일시적으로 몸이 회복되며 기운이 폭발하게 되지. 물론 혼단을 삼켜도 네가 나를 꺾을 가망은 희박하다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무엇보다, 내가 한 번은 다시 보고 싶군. 옛날의 네 모습을.]길리는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혼단을 짓밟아서 뭉개버렸다.
“필요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야. 맥로란 최고의 천재로 칭송받을 땐 자존심 따윈 없는 듯 행동하더니, 이제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고집을 부리는구나.]길리가 호흡을 고르며 다시 독스에게 클로를 겨눴다.
“그때 제가 가문에 미움받고 배척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있던 건, 제가 맥로란이라는 성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없던 게 아니고.”
[넌 한 번도 맥로란이었던 적이 없다.]“가문과 오라버니가 나를 어떻게 여겼든, 저는 한 번도 제가 맥로란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제가 가진 검은 모두 맥로란으로부터 배운 것이고, 제가 살면서 얻은 모든 행복은 모두 맥로란에 거둬졌기에 얻은 것이니까요.”
그렇기에 길리는 이제껏 진과 동료들에게 맥로란 시절의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왜 죄송해?
-제 가문이 도련님께 결례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건 아마 저 때문일 겁니다.
-괜찮아, 길리가 미안할 것 없어. 이번 일로 맥로란에 특별히 악감정을 갖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심지어 길리는 진이 기수가 되었을 당시 사절을 보내지 않으며 무례하게 군 맥로란을 대신해 사과를 했었고, 독스가 진에게 사로잡혔을 때도 행여 도련님이 그를 해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다.
물론 길리는 맥로란에서 지내는 동안 수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 따위는, 자신이 빈민굴을 벗어나 얻은 것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진과 무라칸, 그리고 그들과 예비 기수 시절부터 함께 모험하며 얻은 동료들. 말하자면, 가족. 맥로란이 없었다면 결코 가지지 못했을.
길리의 클로에 맺힌 오러가 진해지고 있었다.
[단번에 승부를 보겠다는 건가. 좋아, 기다려주마.]“기억하십니까? 이건 오라버니가 그토록 배우고 싶어 했던 가문의 결전기입니다.”
[맥로란 66식…… 꽤 반가운 검이로군.]“오라버니는 66식을 아직도 가주께서 만든 검이라 알고 계시겠지요.”
독스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설마 아버지가 아니라 너였다는 말인가.]“예, 가주께서 고안한 검이라 알려졌으나 실은 제가 열일곱에 처음 생각한 기술입니다. 그렇기에 66식의 묘리는 저밖에 알지 못하니, 가주께서도 결국 대성하지 못하셨죠.”
[후후, 아버지도 나처럼 네게 열등감을 느끼셨겠군. 그런데 아쉽구나, 혼단을 삼키지 그랬나. 그 부러진 팔로는 66식을 감당할 수 없을 텐데. 어쨌거나, 보여다오. 정면으로 깨뜨려주마.]독스가 클로를 들어올리며 받아칠 준비를 취하자 길리가 자세를 낮췄다. 청년 시절까지, 독스가 수백만 번은 연습한 자세였다.
‘돌진과 가속, 그리고 이어지는 연격. 구조는 간단하지만 중심 배분이 극단적으로 어려운 검. 이런 걸 열일곱에 처음 만들었다라…….’
이어 길리가 기합을 내지르며 독스에게 쇄도했다.
기술이 시작되기 전에 끝장을 냈다면 모를까, 한 번 66식이 시작된 이상 독스라 할지라도 잠깐은 길리에게 주도권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다만 독스는 완벽하게 길리의 클로를 쳐내고 있었다. 66식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어도 잔상처 몇 개가 남는 게 고작이었을 텐데, 이토록 익숙한 검이니 말할 것도 없었다.
‘여기선 삼연격, 이어지는 하단, 막거나 피하는 순간 회전과 위치 변환.’
이제 66식은 독스도 완벽하게 체득한 기술이었다. 그렇기에 길리는 일방적으로 몰아치면서도 더욱 큰 피해를 받고 있었다. 상한 몸으로 무리하게 사용한 탓에 오러 역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본래도 역류 유발이 심한 검인데, 박살 난 팔로 여기까지 소화한 것도 대단하긴 하군. 이제 마지막인가.’
정말 66식을 길리가 만들었다면, 마지막만 다를 터였다.
독스가 알고 있는 66식의 마무리는 회피였다. 66식의 연격이 전부 끝난 다음에도 상대가 살아 있다면, 후퇴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66식은 아슬아슬한 검이었다. 역류를 감내하면서 오러를 폭발시켜 상대를 몰아붙이다가, 꺾지 못하면 그 상태로 도주해야 하니까.
독스가 66식을 익히며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지점이었다. 때문에 독스는 평소 66식을 사용할 때면 일부러 식의 7할 정도만 펼치곤 했었다. 66식은 분명 뛰어난 검이나, 역류 위험을 안을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까닭이었다.
때문에 독스는 그간 66식의 ‘대성’이 역류를 완전히 배제한 오러 제어에 있다고 믿어왔다. 언제, 어느 때에 끝까지 펼치더라도 역류 위험이 전혀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66식의 끝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자세를 낮춰?’
독스가 마지막 일격을 예상한 순간, 길리는 한 번 더 자세를 낮추며 66식의 첫 자세로 돌아갔다.
그리고 길리는 양쪽 클로를 모두 땅에 박으며 포효하는 맹수처럼 상체를 추켜세웠다.
바로 그 대목에서, 독스는 66식의 진짜 마무리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았다.
‘자폭기였군. 66식이 그토록 극단적인 이유가 그것이었어.’
길리의 몸 속에서 역류하는 모든 오러가 순식간에 땅에 박힌 클로의 칼날로 수렴하고 있었다. 마치 룬칸델의 화산처럼.
맥로란 66식
‘길리 맥로란.’
열일곱에 66식을 처음 생각했을 때, 그 검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언젠가 가문에서 배척당하지 않는 날이 온다면, 독스와 가까워지는 날이 온다면 알려줄 생각이었다.
66식은, 독스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언젠가 그를 살리기 위해 죽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를 대비해 만든 것이라고.
따라서 독스는 66식의 완성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길리 맥로란’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오러 역류를 피할 수 있는 제어력이 아니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했다. 오히려 역류를 끝까지 이끌어서 단번에 폭발시키는 게 66식의 끝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길리는 독스를 위해 죽을 생각이 없었다.
그토록 미움 받고도 여전히 맥로란과 독스에게 애틋함이 남아있기는 하나, 지금의 그녀가 생명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도련님과 무라칸, 동료들 뿐이었다.
[기운이 꽤 사납기는 하나, 굳이 피할 필요도 없겠군. 그게 폭발하는 순간 죽는 건 너뿐이다.]“……이번엔, 오라버니가 결국 이겼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이번에도…… 겠군요.”
[내가 준 혼단을 삼켰다면 조금은 부담스러운 위력이었을…….]스걱-!
별안간 독스의 옆구리가 베이며 핏줄기처럼 혼기가 솟구쳤다. 전장에 막 잠입한 누군가가 독스를 벤 것이다.
이 세상에, 흑기사를 상대로 이토록 완벽한 기습을 성공시킬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이 검은 고기가 우리 딸기파이를 죽이려고 했어?”
요나 룬칸델.
길리는 66식을 처음 펼쳤을 때부터 무명의 지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무명이 킨젤로와 따로 떨어져 지상 침투를 했다고 가정해도 도착할 때가 되었으니까.
요나는 순식간에 독스를 쓰러뜨리며 그의 가슴팍에 검을 내리꽂았다. 요나와 더불어 오울이 함께 독스를 기습했기에 순식간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커헉……!]앞으로 고꾸라진 독스의 눈에, 땅에 클로를 꽂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길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에선 여전히 원한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승리감도 없고 그저 멍하고 우울한 눈빛이었다. 독스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표정.
비로소 독스는 길리가 왜 매번 그런 얼굴이 되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건,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