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26)
제 888화
208화. 바멀 연합은 바멀 연합의 할 일을(4)
붉은 부엉이가 공간 도약을 끝내자 나타난 풍경은 은하수 가득한 해변이었다. 슈체론 왕국, 과거 진이 기수가 된 후 올망고의 계약자를 만나러 찾았던 지역.
“우윽…… 이제 게워낼 것도 없는 모양이군. 젠장, 르엣 놈! 나를 그렇게 능멸해……?”
“바쁜 와중에 너 생각해서 열심히 그리신 건데 너무 그러지 마라, 무라칸.”
“다음에 검의 정원 가면 가만 안 둔다…… 진짜.”
무라칸이 핼쑥해진 얼굴로 해변가에 자리 잡은 주점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주황 불빛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올망고의 계약자, 조거비가 일하는 주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주점엔 올망고뿐만이 아니라 케이탐과 옥스, 텔펜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이 진에게 가고 싶다고 요청한 안전 지역이 바로 이 주점인 것이다.
진과 무라칸은 주점을 바라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티칸 동료들과 처음으로 다 같이 휴가를 왔던 순간과 바닷속 거대 조개에 봉인된 테마르의 두 번째 무덤을 열고 사라를 만난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 진 경!”
[진?] [진이로구만!]올망고의 계약자 조거비와 옥스(액자의 신), 텔펜(연필의 신)이 진을 맞이했다. 그들은 셋이서 카드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오랜만이야. 신들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안녕하쇼.”
[무, 무라칸!?] [무라칸이라고!?]“아, 나 보면 놀라는 것 좀 그만해! 이제 그 옛날 망나니 아니라니까?”
[흠흠. 그렇군.] [옛 힘을 거의 되찾았다는 소식 들었네, 축하하는 바야.]“고맙수다.”
옥스와 텔펜이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진은 그런 두 신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권능이 너무 낮아서 계약자 없이도 인세에 마음대로 현현할 수 있는 신들이라니…….’
옥스와 텔펜은 그야말로 잡신 중의 잡신이었다. 일부 학계에선 이들을 신이 아니라 영물, 혹은 특별한 생물로 분류할 정도인 것이다.
‘이분들도 올망고 님처럼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가.’
궁금증이 든 찰나, 조거비가 눈을 까뒤집으며 올망고를 불러냈다.
[진! 진이로구나! 쿠키, 상큼딱딱 리트라 쿠키는 가져왔나……!]“케이탐 님에 대한 이야기를 검황지에서 들은 탓에 미처 챙기지 못했습니다, 올망고 님. 그런데 티칸에서 정기적으로 꽤 많은 쿠키를 보내고 있었을 텐데요.”
[힝…… 이 친구들 온 뒤로 쿠키가 남아나질 않아. 입이 세 개가 늘었으니 세 배가 필요한 것이지. 덕분에 또 어패류만 먹으면서 지낸다고.]“하여간 조개의 신이라는 양반이 볼 때마다 쿠키 타령만 하네. 난 영기가 제일 좋은데.”
[네 신은 영기 별로 안 좋아할 거다, 무라칸. 솔더렛 그 친구도 분명 영기 말고 다른 거 섭취하고 싶을걸?]“그렇다고 칩시다. 여하튼, 화가의 신인가 뭔가 하는 양반하고 볼일이 좀 있으니까, 후딱 끝냅시다. 이 몸은 바빠. 그러고 보니 그 양반만 안 보이네.”
[케이탐은 저쪽 방에서 계약자와 작업 중이다.]케이탐은 이곳에 새로 온 신들 중 유일하게 계약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작업? 무슨 작업?”
[화가의 신이 무슨 작업을 하겠나, 당연히 그림을 그리겠지. 그러니까 조금 기다려, 작업 중에 건드리면…….]벌컥! 무라칸은 올망고의 말이 끝나기 전에 냅다 문을 열었다. 방 내부는 온통 그림판과 그림걸이로 도배가 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 한 남자와 화신한 케이탐이 골머리를 싸맨 모습이 보였다.
“크아아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작업 중엔 건드리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애원을 했잖아아아!”
[누구냐, 어떤 상놈이 이런 짓을 했나?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 신의 분노를 사는 것이 두렵지 않…… 무, 무라칸? 이, 이봐 올망고. 이 친구 무라칸 맞지……?]“……진 경?”
남자와 케이탐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화를 누그러뜨리고 표정을 풀었다.
“아유, 진 경.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제가 미리 나가서 기다렸을 텐데. 아, 잠시 이상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제가 작업 중엔 조금 예민해서 진 경도 몰라뵙고 이런 실수를. 마침 검의 정원을 그리던 참이었습니다.”
남자는 빌리, 케이탐의 계약자였다.
[그, 반갑네. 무라칸, 나는 화가의 신 케이탐일세. 자네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솔더렛과 나름 막역한 관계였고…… 그의 중요한 부탁을 들어준 신이지. 그러니까 놀라서 소리 좀 질렀기로서니 때리지는 말게.]“거, 뭔가 집중하고 있던 모양인데 미안하게 됐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내가 마음이 좀 급했어.”
[아냐, 아냐. 신경 쓸 것 없어. 진과 그대를 부른 건 나잖나. 오히려 내가 불러놓고 제대로 맞이해주지도 못했군 그래…… 근데 이 새끼가! 네놈이 무라칸이면 다야? 내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 알아!? 빌어먹을 지플 놈들은 마신석인가 뭔가로 염병을 떨지, 작품은 안 나오지, 내 최고 걸작은 갑자기 역병이라도 든 것마냥 난리가 났지, 이 기분을 네놈들이 아느냐고!]“케, 케이탐 님. 진정하십시오.”
[놔, 빌리, 놔! 오늘 저놈 죽이고 나도 죽어!]그 모습에 무라칸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오, 그래. 신이 약하든 강하든 이 정도 성깔은 있어야지. 내가 누군지 알고도 분이 안 풀릴 지경이면, 자 여기 냉수(올망고가 건네줬다). 옳지, 쭉 들이켜쇼.”
[후아! 이제 이성이 제대로 돌아오는군. 이해해주게, 무라칸. 내가 원래 이럴 때 건드리면 좀 돌아.]“그럴 수 있지. 옛날에 예술계 신들 그러는 거 몇 번 봤어. 그런데 무슨 일로 꼬마랑 나를 부른 거요?”
[내 최고 걸작 때문이다.]“걸작?”
[그래, 내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만든 작품이지. 화가의 신인 나조차 다시는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케이탐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무라칸은 자연스레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리고 진은, 작업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품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림들에 압도되어 잠시 넋이 나갔던 것이다. 풍경화, 인물화, 하다못해 낙서처럼 휘갈긴 추상화들까지. 시선이 닿는 곳마다 눈이 트이고 정신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화가의 신이 아니면, 그 계약자가 아니면 절대로 이렇게 그릴 수 없을 터였다.
“여기 있는 모든 작품이 다 그런 걸작처럼 보입니다, 케이탐 님.”
[이것들은 그 아이에 비하면 한낱 졸작에 지나지 않는다.]“어떤 작품입니까?”
[이 작품이다.]케이탐이 가리킨 것은 방금까지 빌리와 손을 보고 있던 작품으로, 그저 검게 칠해진 그림판처럼 보였다.
그의 실력을 보았기 때문인지 검은 그림판엔 왠지 심오한 무언가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냥 검게 칠한 것 아니요?”
[너희들 눈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이건, 그냥 그림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다.]“공간이라고?”
[그래, 무라칸. 이 그림판에 묘사된 공간은 오로지 나와 빌리만이 알아볼 수 있다. 또한 나만이 드나들 수 있고, 나만이 수정할 수 있으며, 나만이 제어할 수 있는 공간…… 이었지.]“알아듣게 좀 설명해보쇼.”
[이 그림은, 솔더렛에게 의뢰를 받아 그린 아공간이라는 뜻이네.]“설마, 테마르의 무덤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확히는 테마르의 무덤으로 이용되었었던 그림이지. 솔더렛은 이곳에 묻혔던 테마르를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으로 이장했어. 그리고 이 작품은 온전히 나의 소유가 되었지…….]무라칸은 과거 피콘이나 올망고에게 솔더렛이 자신 모르게 안배를 남긴 사실에 서운한 마음을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저 진과 함께 진실에 다가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의 뜻을 알 날이 오리라 믿었다.
“……계속 말씀해주십시오.”
[솔더렛은 내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올망고에게 한 것처럼 천 년이 지나면 약속된 계약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그런 예언은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솔더렛은 지친 얼굴로 그렇게 말하더군. 이번 이장은 다른 무덤들과 달리 지플의 추적으로 인한 것이 아니니, 안심하고 지내도 된다고. 지플은 내가 자신을 도운 걸 모른다고 말이야.]지플은 케이탐이 솔더렛을 도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알았다면 그가 소멸하지 않고 지금 진과 무라칸을 만나고 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솔더렛이 왜 테마르를 옮긴 건지는 설명해준 바가 없습니까?”
[없다. 아마 내가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겠지. 애초에 처음 그림을 부탁할 때도 솔더렛은 상태가 좋지 않은 듯 보였으니. 나 또한 역작을 그릴 수 있는 기회인지라 의뢰를 받았으나, 너희들의 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두려웠어. 화가의 신으로서 그저 화가들을 축복하며 지내고 싶었지.]“심경에 변화가 생긴 건, 최근 제가 케이탐 님의 안전을 보장했기 때문입니까?”
[그 이유도 없지는 않지만,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최근 갑자기 작품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망가지면, 내가 작품 속에 담은 천 년 전의 일은 완전히 사라질 테지. 그렇게 되기 전에 마땅한 자격이 있는 존재들이, 한 번은 살펴봐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케이탐이 말한 ‘작품을 볼 자격이 있는 존재’란 솔더렛, 혹은 그와 깊은 관련이 있는 자들이었다. 진과 무라칸, 미샤만이 해당되는 것이다.
“그림 속에 천 년 전의 일을 담다니. 댁도 올망고 양반처럼 대단한 능력을 숨기고 있었구만. 저기 옥스와 텔펜 양반도 그런가?”
[우린 그런 거 없어, 무라칸.] [응, 우린 그냥 케이탐 액자 만들어주고 연필 깎아주고 그런 역할이라구.]“그렇군. 그럼, 케이탐 양반은 작품에 천 년 전의 어떤 일을 담았는데?”
[그게 기억나지 않는 게 문제다. 얼마 전까진 가장 작은 요소 하나까지도 선명했는데, 작품이 오염된 직후부터 떠올리기가 어려워졌어. 그런데 무라칸, 너에 대한 일이었다는 건 확실하다. 그래서 네 소식을 듣자마자 진을 부른 거야.]“나와 관련한 이야기라…….”
“케이탐 님은 작품이 갑자기 망가졌고, 그때부터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지플의 역사 조작일 가능성이 높은데, 지플은 케이탐 님이 솔더렛을 도운 걸 모르지 않습니까?”
[역사 조작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진. 이 작품은 아까도 말했듯이 내 모든 걸 바친 역작이야. 작품 자체가 정신세계와도 밀접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작품이 훼손되면 내 기억에도 문제가 생기는 거다.]“이제 대충 이해가 되는군. 그러니까 나랑 꼬마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댁이 담은 천 년 전의 일이 더 망가지기 전에 확인을 하라는 거지?”
[그렇다네.]“그 과정에 그림을 훼손한 놈이 누군지 찾게 되면 더 좋은 거고?”
[바로 그거지. 찾는다면 아주 요절을 내주게.]“좋아, 쉽네. 우린 바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얼른 준비하쇼.”
[……마냥 쉬운 일은 아닐 것이네, 무라칸. 그림 속엔 내가 그린 수호자들이 있어. 원래는 테마르의 묘로 사용할 그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수호자들은, 그림이다 보니 내 마음대로 무척이나 강하게 묘사를 해두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