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843)
제 888화
210화. 과거의 기억 – 무라칸(3)
지플의 회신엔 항복을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단, 그건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니라 농락이었다.
“가주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이 개자식들이……!”
실더레이가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테마르의 시신을 지플에 인도하고, 모든 십대기사들과 수호기사들 또한 지플의 땅에서 참형을 당하라. 그렇게 하면 손톱만큼도 위협이 되지 않는 식솔들은 살려서 노예로 사용하겠다.
그게 지플이 제시한 조건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다이애나. 애초에 놈들에게 항복을 하겠다고 말한 것부터가 미친 짓이었다고. 그 개자식들에게 우릴 살려둘 이유 따위가 있겠어? 항복 의사를 보인 건 결국 놈들에게 우린 남은 수가 없다는 걸 보여준 꼴이다.”
다이애나로서도 더는 실더레이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녀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실더레이, 네겐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망령화를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묻는 것이었다.
“모르겠다. 언제든 갑자기 무너질 수 있어. 아주 길어야 두어 달이 고작일 테지. 그리고 미쳤을 땐, 내가 미친 사실도 모를 테지. 먼저 간 녀석들처럼…… 어쩌면 지금도 내가 미쳐 있는 건 아닐까 혼란스러울 지경이다.”
“나도 비슷해. 우리가 할 일이 정해졌다. 우리가 미치기 전까지는, 그때까지는 어떻게든 폭풍성과 검의 정원을 사수하는 것이다.”
다이애나는 그 또한 솔더렛과의 약속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지플의 조건을 전부 수용하는 건 항복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저항 없이 유린되겠다는 것밖엔 되지 않았다. 그건 약속을 지키는 게 아니다. 생존을 위한 행동도 아니며, 미래를 위한 선택이 될 수도 없었다.
“그래, 설마 네가 이 조건을 받아들이자고 할까 봐 속이 뒤틀리던 차였다. 확실히 아직 미치진 않았네, 너도.”
“하지만 거절 후 뒷일은 나도 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일 뿐이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가문은 멸망하게 될 거다.”
“기적을 일으켜 봐야지. 가주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넌 계속 폭풍성에 대기해. 우리가 거절하면 곧바로 공격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놈들이 공격하지 않고 역사 조작의 가속화에만 신경을 쓰면?”
“우리 쪽에서 먼저 친다. 괴물이 되기 전에, 이성이 남아 있을 때 싸워서 흠집이라도 내야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금 엘로나 지플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는 사실이다.”
엘로나가 멀쩡한 상태였다면 이토록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지플이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테마르와 무라칸을 제외하면, 룬칸델의 일원 중 엘로나와 ‘전투’가 가능한 존재는 오로지 사라뿐이었다.
그러나 사라는 연이은 전투와 역사 조작에 몸과 정신이 모두 황폐해진 상황이다.
지금이라면 사라조차 엘로나에게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항할 수 있던 시절에도 어디까지나 싸움다운 싸움이 가능하다는 뜻일 뿐, 승리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십대기사 전원이 모여도 엘로나를 이길 수는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지플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엘로나를 보내지 않고 있다는 건, 당연히 그녀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테마르와 십대기사들을 망령으로 만들고 있는 역사 조작.
그 핵심은 당연히 엘로나였고, 그녀는 다이애나의 예상대로 탈진한 상태였다.
“난 당장 검의 정원으로 돌아가서 일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 곧 너를 대신해 가주의 폭주를 제압할 인물도 물색해 볼게. 많이 약해지셨으니, 굳이 네가 직접 가주를 감당하지 않아도 되겠더군.”
“알았다, 다이애나.”
다이애나는 즉시 검의 정원으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동안 지플에 보낼 답변도 준비를 해 두었다. 네놈들 그 개 같은 조건은 수용할 생각이 없으니, 그냥 죽을 때까지 붙어 보자고.
“킨, 내가 없는 사이 집사장님의 소식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대체 어디로 가신 건지…… 무사하셔야 할 텐데.”
“흠, 내 생각에 르엣은 도망친 것 같은데?”
로키아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어둑한 복도에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다이애나는 미간을 좁혔다.
“로키아, 말조심해라. 집사장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른 것도 모자라, 도망을 쳤다는 소리까지 지껄여?”
“아, 또 빡빡하게 구네. 도망이 왜? 솔더렛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르엣으로선 도망치는 게 최선일 수도 있잖아? 우리와 달리 영원이나 다름 없는 세월을 살 수 있는 종족이니 말이야.”
“가문이 쇠약해졌다 한들 법도조차 무너진 것은 아니다. 실언을 멈춰라, 마지막 경고다.”
“네네, 무섭네요 무서워. 하지만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집사장께선 그렇게 판단했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면 그건 집사장님의 뜻이고, 반드시 옳은 선택일 테니 우리가 다 헤아리려 할 필요 없다. 우린 우리의 할 일을 하면 돼.”
“뭐, 집사장님이 우릴 배신할 만한 분이 아니기는 하지. 배신을 할 생각이었다면 이미 더 좋은 기회가 너무 많기도 했고. 지플에서 집사장님과 요정들에게 달콤한 제안을 얼마나 많이 했어? 집사장님은 고민조차 한 적이 없고.”
“그걸 잘 알면서 왜 짜증 나는 소리를 지껄였냐.”
“다이애나, 넌 이 세상이 온당하다고 생각해?”
“뭐?”
“그렇잖아. 이 세상에서 굳이 따지자면 정의와 해방을 추구하는 쪽은 우리인데, 세상의 지배자가 되겠다고 온갖 역사 조작과 패악을 일삼는 지플보다 우리가 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아무도 우리에게 지플과 싸우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가주는, 우리는. 단지 그놈들이 하는 짓거리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어서 맞서 싸우고자 일어섰을 뿐이다.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넌 참 좋겠다, 다이애나. 너뿐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아, 한두 명은 빼야겠군…… 베일 같은 녀석은 그렇게 대단한 마음을 갖지 않고 있으니 말이야.”
“그 한두 명에 네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를 바란다, 로키아.”
“난 배신하거나 도망칠 생각 없어. 오히려 지플이 이번에 우리 항복을 깔끔하게 받아줬다면 도망쳐야 했겠지. 너도 알다시피 난 지플 순혈들 고문을 너무 많이 해서 놈들에게 원한이 쌓일 대로 쌓였으니까. 설령 룬칸델과 지플이 한 식구가 되더라도 내 자리는 없다고.”
“그렇다면 다행이네.”
이어 다이애나는 지플과의 마지막 싸움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 로키아와 함께 계획을 세웠다.
물론 반전을 꾀할 대단한 수는 나올 수 없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긍지를 지키며 최후를 맞이할 수 있는 경우를 고민해야 할 뿐.
“그럼, 난 파들러를 만나러 가야겠군.”
“……파들러?”
이달이 멸망한 이후, 파들러는 복수귀가 되어 룬칸델을 위협하고 있었다. 힘 없는 식솔들이나 평기사들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으나, 남은 십대기사들은 모두 그의 표적이었다. 사라마저도.
파들러는 이달을 테마르 혼자 멸망시킨 게 아니라고 인식하는 중이었다. 가문이 먼저 자신을 배신하고 테마르와 십대기사들이 다 함께 이달을 멸망시켰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역사 조작의 망령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그래. 마지막 항전인데, 파들러가 있으면 싸우기도 전에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어. 무라칸이 동료들을 보내줬듯이, 우리도 그렇게 해야지. 어차피 죽으면 어딘가에선 다 만날 테니 난 무라칸만큼 슬퍼하진 않겠어. 이게 파들러를 위한 일이기도 하고.”
“후우.”
“바로 갈 거야. 솔더렛, 그 빌어먹을 신이 혹 모습을 드러내면 전해줘. 동료가 동료들을 죽일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대체 뭘 준비하느라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거냐고. 가주를 위한 결계를 만들 힘이 있다면, 차라리 남은 사람들이나 더 지켜주라고 말이야.”
그렇게 룬칸델은 최후의 저항을 시작했다.
별다른 희망 없이 시작한 발버둥이고, 결과 또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저 엘로나가 나서지 못하고 있기에 어쩌다 극히 작은 승리를 거둘 뿐, 이미 기울대로 기운 전세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무라칸은 그런 전쟁이 이어지는 와중에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이번에도 한 달 만에 깨어난 것이었다.
옆에는 함께 병상에 누워 있는 다이애나가 있었다.
“다이애나…… 너 왜 그렇게 다쳤냐.”
“지플하고 싸우느라. 다행히 다 치료 가능한 수준이야.”
“아…… 그렇군. 머리가 몽롱해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무라칸은 곧바로 다시 잠에 빠졌고, 이번에 깨어났을 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적막은 순식간에 무라칸의 괴로운 기억을 끄집어냈다.
무라칸이 머리를 움켜쥐며 괴성을 내지르자 복도를 지나던 하인들이 다급히 병실로 뛰어왔다. 무라칸의 눈엔 그들이 자신이 죽인 동료들처럼 보였다.
그의 무너진 정신은 현실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다만 무라칸은 그날 이후 다시 며칠, 한 달씩 잠에 빠지는 일이 없이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했다.
그저 의자에 앉아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게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룬칸델의 일원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다.
어제부터 막, 전쟁에 뜻하지 않은 희망이 생겨난 이유도 있었다.
“무라칸, 오늘은 기분이 어떠냐?”
실더레이가 무라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아아…….”
“말하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린 건 아니지? 하인들한테 들어보니 한 번씩 뭔가 말다운 말을 한다고는 하던데. 요즘 지플 놈들 죽이느라 바빠서 직접 들어본 적이 없으니.”
“우.”
“어제 알게 된 건데, 엘로나 지플의 상황이 우리 예상보다 훨씬 나쁘더라. 그러니까 너만 돌아오면 우리한테도 승산이 있어. 만약에, 만약에 말이지. 솔더렛이 네 심장을 고쳐주고, 네가 정신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진짜로 역전을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무라칸은 실더레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허공만 쳐다보았다. 실더레이는 실망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엘로나만 나서지 못하면 우리가 꽤 많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요즘 나나 다른 녀석들의 망령화도 약해진 게 확실히 느껴지거든. 미친놈들, 지플이 우리로부터 승기를 잡을 수 있던 가장 큰 이유가 엘로나였는데. 전쟁이 끝나가니까 이젠 지들이 엘로나가 두려워서 배척하고 있단 말이지.”
“아.”
“아무튼, 오늘은 너 좋아하는 과일도 좀 챙겨왔다. 곧 요리사들이 파이로 만들어올 테니까, 먹고 힘을 내라.”
“실더레이!”
별안간 다이애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하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실더레이는 좋은 소식을 직감하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다이애나, 무슨 일이야?”
“폭풍성에서 연락이 왔다. 가주께서…… 잠시 의식을 되찾으시고는 명령을 남기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