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les of Bireido, a parody RAW novel - Chapter 295
0295 / 0343 ———————————————-
천겁혈신(天劫血神)
” 대형께서 부르시는군.”
모용세가(慕容世家) –
절강성에서 단연 첫손에 꼽히는 무림세가이지만, 대외적으로는 무림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 절강여가나 항주 일대의 무림문파들이 웅거하면서 세력을 넓히려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무림문파의 세력은 곧 재력이 되고, 인재가 모이고, 강호에서의 영향력을 넓히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그런데도 모용세가의 인물들은 마치 무림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두문불출해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무당이나 소림이 더 활발할 지경이었다. 이미 속가를 본격화하고 운용한지 기백여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문파들은 속세와 떨어진 곳이 아니다. 속인(俗人) 속에서 도(道)를 찾는다고 여겨질 정도로 모용세가는 은인자중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모용세가의 사람을 무시하는 자는 천하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모용세가의 고수들은 그 숫자는 적었지만 한 번 출도하면 반드시 경천동지할 무위를 선보였고, 그 무예의 근본은 모용세가를 백여년 전부터 부흥시킨 한 검사(劍士)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마치 신선의 선풍도골을 보는 것처럼, 고아하고 청수한 기풍이 흐르는 한 노인 – 그의 이름은 검성(劍聖) 모용정천(慕容正天). 당대 최고의 무인이라고 불리는 천무삼성(天武三星)의 일 인이었다.
검성은 깊은 생각에 잠긴 채로 다시 한 번 말을 되새겼다.
” 대형께서 부르시는건가…”
검성의 머리 속에는 하나의 검로(劍路)가 휘돌고 있었다.
그는 유천영이 죽은 후 팔왕을 견제하기 위해 뒤늦게 절강성에서 종남파까지 달려갔었다. 하도 먼 길이라서 한 달 내로는 못 갈 줄 알았는데, 검성의 신법은 녹록치 않은지 고작 삼 주야만에 도착했다. 검성이 도착했을 때 모든 상황은 끝나 있었고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팔왕 하은천(河銀天)과 유천영의 백초결투(百招決鬪)의 흔적이었다.
검성은 그 흔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감탄했었다.
일 초 일 초의 교환이 범상치 않았다. 유천영의 검술은 이미 종남파 최강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검군이 그에게 복종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유운검법을 통합한 후 새로운 진경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검성이 생각하기에도 살떨리게 넓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이 때 유천영의 무위(武威)는 검성 자신이 전력으로 칼을 맞대도 승산을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승패가 예측되지 않는 상대는 근 백여년 동안 천무삼성 중에서는 검후 정도였다. 유천영처럼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의 검경을 지닐 수 있다니!
물론 그런 유천영을 아이손목 비틀듯이 간단히 제압해 버린 하은천의 무공은 말할 것도 없었다. 틀림없이 천겁혈신(天劫血神)급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대형 무신마의 최종절기, 와 동급에 있는 천의무봉을 깨달았으니 인세의 무신이라고 해도 좋았다.
검성이 그 교환을 신중하게 바라보던 중, 도중에 이상함을 느꼈다.
그것은 무공의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평생동안 검(劍) 하나만을 갖고 살아온 검객만이 느낄 수 있는 기묘함이었다. 신기하게도 유천영이 일백 초 내내 밀리기만 했다는 게 느껴지는데, 유천영의 검로(劍路)는 보면 볼수록 새로움이 느껴지고 웅대(雄大)해졌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강호의 그 어떤 대결에서도 수세(守勢)에 몰린 자의 초수는 좁아지고 소극적으로 변하게 된다. 하지만 유천영이 검로를 전개하는 과정은 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그림을 그리는 중이라서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것처럼 볼 때마다 다른 검로가 읽혔다.
그것은 검성이 평생동안 연마해 왔던 모용세가의 검기(劍技) 어느쪽과도 맞지 않았다. 검성이 기묘함의 정체를 깨달은 것은 바로 마지막 일백 초 때의 교환을 검군(劍君)들의 입으로 전해들었을 때였다.
유천영과 하은천의 마지막 격돌 –
보는 사람의 눈에는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행위 그 자체였다. 하지만 검성은 마지막 일 초를 듣고 되새기고 되새기던 중에 큰 충격을 받았다.
‘ 마, 마지막 검초(劍招)는 대체 뭐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건 자살행위가 아니다, 절대로!’
다른 무림인들이 전부 유천영의 최후의 발악이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검성만큼은 알 수 있었다. 하은천이 마지막에 유천영의 검로를 피해낸 것은 말 그대로 운일 뿐이며, 운이 나빴다면 단 일 검으로 유천영은 하은천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강호상의 그 어떤 구명절초로도 천의무봉을 뚫을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기적같은 일이다.
문제는 검성이 아무리 생각해도 유천영의 검로에 숨겨져 있던 뜻(意)을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저 종남파 유운검법의 필살초식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련만 그렇게 단정할 수 없는 껄끄러움이 있었다. 마치 종남파의 무공 전체를 초월(超越)해버린 듯한 압도적인 기(氣)!
검성 모용정천은 가문에 돌아온 후 계속해서 그 검로 하나만을 생각하며 연마했다.
그 결과 놀랍게도 그의 무공은 이전보다 급증해버리고 말았다. 뜻한 바는 아니었지만 신기하게도 열쇠를 가진 것마냥 검의 움직임이 술술 흘러가버린 것이다. 절대지경이라고 불리는 의념(意念)에 도달한 후로는 처음 느껴보는 성장감이라서 검성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 검로(劍路) 하나만으로도 강호에서 전대미문의 필살기가 될 수 있다!
아니, 종남파에서 이후에 누군가가 이 검로를 깨닫기만 한다면 향후 이백년은 정파(正派)의 태두(太斗)로 군림할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 기억을 회상한 모용정천은 그만 헛웃음을 터뜨렸다.
” 허허허허! 어리석구나, 정천아, 정천아… 하필 이럴 때…”
” 아버님.”
모용정천의 아들이자 당대 모용가의 가주인 모용운(慕容雲)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검성이 칩거하고 있는 조그마한 정자의 앞에서 말없이 시립하고 있었다. 어떤 수하나 세가원도 대동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무신마의 연락이 비밀스럽고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 팔왕이 습격해 온다면 아버님께서도 위험하십니다. 호위가 필요합니다.”
” 끌! 네가 내 신변을 걱정하는 날이 왔단 말이냐?”
검성은 기가막혀서 혀를 찼다. 모용운 또한 무공의 기재였지만 평생동안 검성 모용정천의 무학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정천맹 최고수위의 고수반열에 들었지만 역시 절대지경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무공의 재질이 부족함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모용운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 팔왕의 면면은 하나하나가 새외의 마왕(魔王)이라 불릴만한 자들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덤빈다면 큰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 그래, 그럴 테지… 이놈. 유천영이 죽은 것 때문에 나를 더 걱정하느냐?”
”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 흐음.”
검성 모용정천이 쓰게 웃었다.
물론 아들이 나쁜 뜻에서 호위를 붙이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천겁령과의 결전이 백척간두에 다가온 지금, 천무삼성에게 위해가 다가온다면 그것보다 큰일은 없다. 모용세가의 가주이자 정천맹의 주요요인인 모용운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옳은 행동인 것이다. 검성은 곧 손을 물렸다.
” 되었다. 어차피 팔왕이 두 명 이상이라면 호위가 더 거치적거린다.”
” 하지만…”
” 끌! 팔왕이 두 명이라면 소림사와 무당 본산에 쳐들어가서 대낮에 혈겁(血劫)을 벌일 수 있다. 우리 애들의 실력이 설마 그 정도라고 말하고 싶은게냐?”
” ……”
모용운은 자기 생각보다 높이 평가된 팔왕의 역량에 입을 쩍 벌렸다. 그로서는 그저 팔왕이 천무삼성의 턱밑에 온 실력의 초절정고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얘기로는 완전히 천무삼성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이 아닌가? 저 말대로라면 정말로 호위는 의미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평가가 검성의 입에서 나온 이상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모용운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그러시다면 본가의 정보력을 총동원해서 수상한 움직임을 계속 전달드리겠습니다.”
” 동창 첩형이나, 개방과 육궁방의 정보를 쓸 생각이면 안 하는게 좋을 것이다.”
흠칫
모용운은 미세하게 몸을 떨었다. 반세기 이상 가문경영에는 관심도 없이 검 수련만 하던 부친이었다. 그래서 무인으로서는 존경할 수 있을지언정 이제 세가의 물정에는 어두울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온 말을 보자면 완전히 모용세가의 정보망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 어찌 그렇습니까?”
” 팔왕에는 혈관음(血觀音)이 끼여 있다. 그녀는 무화 어르신의 옛 친구인데 마교의 마지막 교주이지. 이건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모용운은 잠자코 들었다. 거기까지는 정천맹에서 파악한 정보다.
” 혈관음은 마인들을 몰살시키면서 그들이 지니고 있던 정보력과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보유한 문파는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묵룡방(墨龍幇)이라고 불리며 황궁이 삼 할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개방과 육궁방에도 파악은 되지 않았지만 간자가 확실히 존재할 것이다.”
” ……!!”
모용운은 검성의 말에 깜짝 놀라서 손을 떨었다.
정천맹의 최고비밀도 취급하는 모용운도 모른다는 건, 정천맹 소속의 어떤 간자나 첩자도 알아내지 못한 정보라는 뜻이다. 이 정도의 특급정보를 검성이 자세히 알고 있다니! 검성이 말했다.
” 지금까지 팔왕이 제멋대로 움직이는데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고, 활동자금의 내역도 밝혀내지 못한 건 그 때문이지. 묵룡방의 정보력과 은폐공작이 너무 뛰어나서 정천맹과 흑천맹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 그,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알려주지 않으신 겁니까?”
” ……”
퍼억
다음 순간, 대나무숲에서 무언가 관통되는 소리가 났다. 모용운은 짧은 순간에 검성이 출수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출수된 이기어검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잠복해 있던 밀정의 목숨을 끊어놓은 것이다. 검성은 손을 거두며 말했다.
” 방금 나를 감시하던 묵룡방의 고수 다섯 명을 한 번에 절명시켰다. 너는 그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느냐?”
” … 못 챘습니다.”
모용운은 대답하면서도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명색이 초절정고수이며 정천맹의 대표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런데 삼십장 내에 잠복해 있는 자들을 다섯 명씩이나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기척은신이라서 소름이 돋았다.
검성이 말했다.
” 자책할 필요 없다. 저 자들의 귀식대법은 상궤를 달리하는 마교비전의 천영롱(千影朧)이다. 천영롱을 한 눈에 알아볼만한 인물은 강호 전체를 통틀어도 서른 명이 안 된다.”
” 천영롱! 일천년 내 최고의 잔영술(殘影術)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용운은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
천영롱.
마교 최고의 비전잔영술이자, 일천 년 전에 초현한 이래로 누구도 파훼하지 못한 진정한 최고의 은신술이었다. 마교 살왕부(殺王府)에서 대대로 익혔지만 의문의 노인에게 몰살당한 후 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이후 마교멸망 이후로는 천영롱을 익힌 자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천영롱은 소림사의 금강부동신법조차도 이길 수 있었기에 강호인들은 그 전설만으로도 두려워했다.
” 나도 며칠 전부터 기척을 느끼고 있었지만 어제에서야 그들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냈다. 저 정도 고수들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을지 모르는 게 묵룡방이니, 어찌 함부로 네게 말해줄 수 있겠느냐?”
” ……”
검성은 말문을 닫은 아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역시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가 될만한 것은 손자인 모용휘 정도였다. 모용휘의 재능이라면 틀림없이 모용세가의 모든 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을 것이고,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초절정의 벽을 돌파할 것이다.
그는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대형. 죄송합니다. 소제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린 것 같습니다.”
무신마에게서 받은 요청은 선운산에 와서 무신마가 부재할 시에 10명의 기재를 양성해 달란 거였지만, 검성은 사흘 정도 늦게 갈 생각이었다. 지금 너무나 중요한 심득을 앞두고 있어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검로(千年劍路)에 대한 앓이.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검성은 뜻밖에도 유천영의 ‘길’을 발견했고 진심으로 파고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파고들면 들수록 끝이 없는 길을 발견했으니 골수무인인 검성이 놓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선운산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사건에 커다란 파장을 가져다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