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13)
EP.114)유산들 # 5
114 – 마왕의 유산들 # 5
성녀가 말했다.
“태오 가스펠, 그 남자가 절 죽일 거에요.”라고.
아이라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까만 눈동자에서는 마치 “네가 성녀를 죽일 생각이니?”라고 물어오는 듯한 의지가 느껴진다. 나로서는 모함을 뒤집어 쓴 것이라서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이야기에 끼어드는 것은 죄송한 일이지만, 제가 성녀님을 죽일 것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죠? 금시초문입니다.”
“태오야, 이야기를 더 들어보도록 하자.”
아이라의 제지에 나는 여러 이야기를 더 하고 싶은 것을 멈추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때에 따라서는 침묵하고 있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는 법.
그래서 성녀가 무슨 이야기를 더 해올까 기다리고 있자니 그녀는 이 상황이 퍽 재미있다는 것처럼 후후후-하고 간드러지게 웃었다.
“아, 실례. 그러고 보면 이름이 같군요.”
“동명이인이라는 소리겠지.”
아이라는 이해했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서야 나도 이 대화의 방향과 흐름의 갈피를 붙잡을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성녀는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는 소리다. 곧 내게도 짐작 가는 것이 생겼다.
성녀 프리가 나이트폴이 아직 이 아크의 학생이었던 20년 전. 그녀는 모험 동아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그녀와 함께 활동했던 사람 중에는 태오 가스펠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아마 그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세히 설명해보도록 해.”
때마침 아이라가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것처럼 성녀를 향해 설명을 촉구했다. 그러자 성녀는 금잔에 들린 포도주를 들어 홀짝홀짝 마셔 입술을 적셨다.
“제법 긴 이야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가능하면 간략하게 하도록 해.”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쯤이에요. 제가 아직 어리숙하던 견습 수녀였던 시절이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략 22년 전 쯤 되겠군요.”
22년 전이면 성녀가 몇 살이었던 때지?
견습 수녀라고 했으니 대략 10대 초 중반 정도 되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성녀의 나이가 제법 가늠이 되는 것 같았다. 아마 삼십 대 중반 정도….
탁-.
그때 누군가가 손바닥으로 크리스탈 테이블을 내리쳐서 나는 깜짝 놀라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성녀 프리가가 내게로 안대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 몹시도 실례되는 생각을 하지 않았나요? 제 나이를 계산해보려 한다든가 하는 일 말이에요.”
“…….”
성녀는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나?
하긴 그런 능력 하나 정도는 있어야 이 은사주의가 팽배해 있는 교단에서 성녀라는 직함을 달고 있을 수 있을 터다.
이 여성의 앞에서는 생각을 조심해야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성녀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시 제게는 동기가 있었어요. 지금 와서 이런 말 하면 겸손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친구는 저보다 뛰어나고 재능 많은 녀석이었거든요.”
“그 녀석이 태오 가스펠이라는 소리구나.”
“그래요.”
스윽.
아이라의 시선이 다시금 나를 향했다.
“여기 있는 태오와는 다른 존재인가? 확실히 다른 인물이냐 이 말이야.”
“음-.”
아이라의 질문에 성녀는 잠깐 침음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해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태오 가스펠이라는 이름이 교단에서는 흔하기는 하죠. 신의 선물을 뜻하는 테오도로스에서 따온 이름이니까.”
그렇군. 그것은 또 처음 알아낸 이야기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테오도로스 가스펠. 여기 있는 반요정과 헷갈리지 않게 테오도로스라고 말하도록 하죠.”
“그럼 여기 있는 태오와는 아주 다른 인물이라는 소리구나.”
아이라는 흐응-하고 긴 콧소리를 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에 풍선처럼 가득 차올라 있던 흥미가 바람과 같이 빠져나가는 소리였다.
“어쩌면 내 작은 태오의 과거를 알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좋아졌어.”
내 이야기가 아니라서 실망한 듯이 보인다.
그에 성녀가 말한다.
“애초에 테오도로스는 반요정 같은 말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조금 더 어둡고, 까마득한 악의와 같은 것이죠.”
성녀 프리가는 그로부터 제법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는 몰락한 귀족출신으로 교단에 몸을 담게 되었고, 신성력을 담은 주술과 기도술 등의 실력이 뛰어나 아크의 장학생으로 발탁되었다나.
그런 그녀에게는 라이벌 혹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테오도로스 가스펠이었다.
프리가와 테오도로스는 출중한 실력과 신앙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서, 교단의 등불이라는 낯간지러운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본인은 그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요. 그렇지만 무척 훌륭한 소년이었던 것은 틀림 없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와 같이 맑은 남자를 보지 못했었으니….”
“그래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다는 거지?”
“저도 찾고 싶습니다. 20년 전에 제가 불의의 사고로 눈을 잃었던 그 날. 저는 빛과 함께 미래를 잃고 말았죠. 하지만 그에 비하면 나았어요.”
20년 전의 사고라.
소망관이 20년 전 폐건물로 문을 닫아버린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모험 동아리도 그때 폐지되었는데.
내가 개인적인 흥미를 느끼고 있을 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르륵.
성녀의 까만 안대로부터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눈물과도 같아서 그야말로 ‘피눈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느낌이었다.
“성녀 님, 피가 흐르십니다.”
내가 당황하여 손수건을 꺼내려 들자 성녀 프리가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핏물을 슥슥 닦았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면 이렇게 피가 흐르곤 합니다.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죠.”
그런 게 가능한 일인가.
아이라가 물었다.
“어지간히도 끔찍한 것을 본 모양이지?”
“예. 그렇게나 끔찍하고 기괴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나은 편이에요. 저는 두 눈을 잃은 것으로 끝냈지만, 테오도로스는 모든 걸 잃었으니까.”
“흐응-.”
“그는 그것을 본 이후로부터 다른 사람처럼 변했어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좋았죠. 정신에 문제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저를 죽이려고 할 리 없으니까.”
“…….”
아이라는 대답하는 것 대신 침묵했다. 그저 잔을 하나 들어 올리고 그 안에 채워진 포도주를 빙글빙글 돌리며 권태로운 표정을 지을 뿐.
찰랑찰랑.
이 이야기에 별로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뭐, 따지고 보면 아이라와는 아주 관계없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다만 그런 아이라의 기분을 읽었는지 성녀가 말했다.
“아이라 여왕님과 앙그마르 왕국에도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겁니다. 그는 저를 죽이는 것에 실패하고 도망쳤어요. 그리고 세상으로 숨었죠.”
“그래서?”
“그를 마지막으로 봤다고 목격되는 곳이 바로 앙그마르의 수도, 모나크 시티의 노예시장이었습니다.”
“……?”
아이라의 미간이 살짝 움찔했다.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그런 아이라의 관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지 성녀가 말을 덧붙였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곳에서 노예로 팔리고 있었다더군요. 미래의 일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떠벌리면서-. 자신을 높은 값으로 사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랬습니다.”
스르르르-.
순간 내 등 뒤로 개미 여러 마리가 기어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성녀의 설명을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 아니냐.
아니, 성녀는 내가 아니라고 했었잖아.
“하지만 저희가 찾으려고 했을 때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습니다. 그 남자는 모습을 감추고, 정체를 감추고, 어딘가 숨어 있겠죠. 제 목숨을 취하기 위해서-.”
덧붙여지는 설명을 들어보면 모든 정황이 날 가리키는 것 같았다.
어느덧 내 머릿속에는 내가 저지르지도 않았고 기억에도 없는 성녀살해 미수 혐의로 처형대로 끌려가는 내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감히 성녀님을 위협하려 한 죄!!!
─기억에 없습니닷…!!! 살려주시는 겁니닷…!!!
─집행-!!!!
무척 끔찍한 미래인 것이다.
다만 아이라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지부진한 이야기로구나.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야겠어. 태오야, 돌아가자.”
그런 아이라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성녀가 다급히 말했다.
“폐하, 그 남자가 노리는 것은 아마도 폐하일 것입니다. 폐하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내몰았던 것이겠죠.”
“나를 노린다?”
“이미 접근해 있을 수도, 접근해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얼굴과 모습을 뒤바꾸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자니까요.”
“어째서 나를 노리려고 한다는 거지?”
“지금의 폐하께는 그러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 이유라면 아마도 폐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테니-.”
“더 이상 들을 것도 없구나. 이런 시시한 얘기로 시간을 잡아먹다니, 그대에게는 실망이야, 프리가 나이트폴.”
아이라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성녀를 두고 방을 휙 나가버렸다.
나는 떠나버린 아이라의 등과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더 마시고 있는 성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아이라를 따라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 * *
아이라는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제법 걸음의 보폭이 크고 당당했기 때문에 내가 먼저 앞서나간 그녀를 따라가려면 달리는 것처럼 걸어 따라잡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라 님, 중요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냥 이렇게 나가셔도 되는 것입니까?”
나는 성녀와의 대화를 파하고 나간 아이라를 향해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아이라는 “더는 들어볼 것도 없는 이야기다.”라고 내 의견을 묵살했다.
뭔지는 몰라도 성녀의 무언가가 아이라의 심기를 크게 거스른 듯했다.
“프리가 성녀가 여왕님께 혹시 거짓을 말했습니까?”
아이라가 싫어하는 것은 거짓말과 위선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라가 이렇게 화를 내는 이유가 성녀의 거짓말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프리가는 내게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았어. 진실만을 말했지.”
“그러면 어째서 자리를 박차고 나오신 겁니까? 교단의 성녀와 척을 지면, 교단에서 아이라 님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요.”
“나는 여왕이야. 누가 내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이미 내 스스로 나를 인정하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해. 그리고 누구도 내 낮잠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어.”
“낮잠요?”
아이라와의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가서 침대에 누웠다.
내가 무어라 말할 순간도 없이 새근새근-하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졌기 때문에 차마 그녀를 깨울 수도 없었다.
진짜 낮잠을 자네.
너무 졸려서 참을 수가 없었나?
그러고 보면 어제 드레이코 가문의 저택을 찾아오느라 새벽까지 잠을 못자긴 했었지.
그렇다 하여도, 요즘 들어 아이라의 수면시간이 너무 길어진 것은 아닌 가 조금 걱정이 들긴 했다.
식사 시간과 잠깐 일어나 혼자 체스를 두는 시간 빼고는 거의 다 잠만 자는 느낌인데. 건강에 문제라도 있나?
아니, 그래보이진 않는다.
내가 멋쩍게 콧등을 긁으며 방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아이라가 스르륵 눈을 떴다.
그리고는 이불 바깥으로 나를 향해 자신의 다리를 내미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옷을 벗겨 줘. 입고 자는 건 답답하니까.”
“…알겠습니다.”
스르르륵-.
나는 아이라가 입고 있는 스타킹을 끌어내려주었다. 까만 것이 끌어내려지고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는 광경은 꽤 보기 좋았다.
팔랑-.
마구잡이로 누워 주름진 교복의 치마 아래로 까만 속옷이 보였다.
평소라면 그냥 속옷이 보였구나-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을 텐데.
요 며칠 여성들과 관계를 가졌던 내 눈에는 저 너머에도 기분 좋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몹시도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아이라가 졸려하는 이 빈틈이 공략의 열쇠가 되는 것이 아닐까.
앙그마르. 테오도로스 등.
여러 상황들이 급변하는 지금, 한 시 바삐 아이라를 함락시켜두어야 변수가 적다.
그러자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는지 나는 아이라를 향해 말해버렸다.
“여왕 님, 제가 다리를 주물러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놓고도 실수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아이라는 하암-하고 하품을 하더니 의외로 흔쾌히 수락하는 것이다.
“그래. 내가 잠들 때까지 주물러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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