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12)
EP.113)유산들 # 4
113 – 마왕의 유산들 # 4
마르마르가 말했다.
내가 입고 있는 옷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을 봤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이야 이 아크에 차고도 넘치도록 존재하니까.
마법사들은 공기 중의 마력을 감지하고 명상하여 자신과 외부 세계를 조율하기 때문에, 두꺼운 갑옷 같은 것을 입지 못해 대부분 로브를 입는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실력이 있거나 혹은 부유한 마법사들은 평범한 로브가 아닌 주술적으로 인챈트가 부여되어 있는 옷들도 흔히 입었다.
「앙그마르 로브 : 고위 유물. 불길과 마법 그리고 저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해준다. 착용자의 위계에 따라서 그 효능은 더욱 강화된다. 솔로몬의 의상철학이 담긴 역작.」
이 앙그마르의 로브도 그런 식이었다.
솔로몬이 만들어낸 역작이라는 표현이 있는 만큼 내 로브보다 값어치 있는 것은 그리 많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마르마르가 말했다.
“무척 신기한 옷이었어. 동지의 것과 비슷한 느낌의 기묘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이-. 물론 색깔은 아주 새까만색이었지만.”
“그게 정말이야?”
“그래! 무척 대단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었거든.”
이 옷은 앙그마르의 유적에서 획득한 보상 같은 것이었다.
물론 이 세상 곳곳에는 마왕 솔로몬이 아직 왕자였던 당시 세상을 유랑하며 만들어냈던 유적들이 잔뜩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나와 같은 물건을 습득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렇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나는 마르마르에게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자 마르마르는 음-하고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인다.
“몰라!”
“그렇구나.”
“왜냐하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거든! 아주 기묘한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는 기묘한 사람이었어.”
“기묘한 사람들?”
“그래! 관리인을 죽였던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야!”
아, 그렇구만.
마르마르는 사냥꾼 파티를 만났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와 칼리라 영애가 그들과 조우했을 때, 마르마르는 거미줄에 꽁꽁 감싸여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었으니까 말이다.
“그 사람들이랑 얘기를 나눠봤어?”
“아니, 무서운 사람들이었어.”
“그래, 가능하면 접근하지 마.”
“그러지 뭐, 어차피 나도 바빠.”
마르마르와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마르마르가 점심을 먹고 갈 것을 권유했지만 나는 성녀와 아이라가 만나는 오찬에 참석해야만 했기 때문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뤘다.
거대한 에피소드 보스 둘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니.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가 생기지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변수를 조율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는 나로서는 조금 위가 쓰렸다.
별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한 편으로 성녀는 꽤 많은 비밀들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녀를 만나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어떻게 하면 쉽게 빼낼 수 있을까 대화의 시뮬레이션을 그려본다.
* * *
“태오야, 약속 시간은 몇 시인지 아니?”
“열두시 정각의 정오, 대신전에 위치한 광명의 홀입니다. 지금 출발하시면 늦지 않게 잘 도착하실 수 있겠네요.”
아직 여유가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조금의 초조함을 느꼈다. 아이라가 자신의 방에서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여러 까만 스타킹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떤 것이 좋을지 한참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것을 입어야 격에 어울릴지 알 수가 없구나.”
“무엇을 입는다고 하여도 아이라 님의 위광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다 똑같은 색깔처럼 보이는데 아무거나 입어라. 대충 그런 뜻으로 나는 아이라를 향해 재촉했다.
하지만 아이라는 내 고급스러운 돌려 말하기의 어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계속된 고민에 휩싸일 뿐이다.
“흠-. 아무리 그래도 교단의 등불을 만나는 데에 가벼이 하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교단의 등불요?”
“그래, 프리가 나이트폴. 그녀를 만나러 가는 것에는 아무리 나라고 하여도 조금의 예의를 차리는 것이 좋을 것 아니겠느냐.”
시간이 촉박해짐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잠시. 아이라에게서 들려온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이야기에 나는 조금 벙찐 기분이 되었다.
누구를 만나도 방약무인했던 아이라가 격식을 차릴 각오를 한다니. 내가 이해를 못하고 있자 아이라가 “흐응-”하고 긴 콧소리를 냈다.
“태오, 아직 너의 견식에 부족한 면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
슥.
스타킹을 쥔 손의 검지와 중지를 치켜 올려 보이는 아이라.
“교단의 역사에서 대신전의 반석이 된 역십자-파트로스 이후로 교단에서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지. 물론 가짜들도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손에 꼽을 자는 두 명이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프리가 성녀라는 겁니까?”
“그래, 귀족도, 작위도 없었던 노예 계집이 괜히 성녀(聖女)라는 거창한 별명으로 사람들에게 숭상 받게 된 것이 아니야.”
노예 계집인가.
일찍이 성녀 프리가는 소설 ‘빌런 사냥꾼’의 후반부 스토리를 견인하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독자들을 향해 흥미를 끌만한 요소로 던져졌었던가. 노예출신이라는 과거가 밝혀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좋아, 됐다. 어서 입혀 보거라.”
아이라의 재촉에 나는 그녀가 고른 스타킹을 매끄러운 발부터 허벅지까지 능숙한 솜씨로 입혀냈다.
자신의 몸에 탄력 있는 스타킹이 착-하고 감기는 것이 꽤 기분 좋았는지 아이라는 “잘 했구나.”라고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해줬다. 그러면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성녀를 만나거든 언행에 주의하도록 하렴.”
“알겠습니다.”
“아니, 태오야. 너는 몰라. 그 계집애는 어떠한 면에서는 가짜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짜 중에서는 진짜다. 그러니 빈틈을 보이지 않는 게 좋아.”
아이라는 평소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렇지만 아주 가끔은 정말 허를 찌르는 듯한 이지(理智)를 보여줄 때가 있었다.
나는 어쩌면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닌 가 생각하게 됐다. 아이라가 경고를 해줄 정도니 새겨 듣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녀 프리가가 먼저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대신전으로 향했다.
햇볕이 내려쬐는 대신전의 아름다운 정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얗게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낀 늙은 대주교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여왕 폐하, 성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안내를 따라 대신전으로 들어섰다.
예전부터 느끼는 바지만 겸손과 겸허함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교단의 건물답지 않게 화려하고 웅장한 것이 너무 지나칠 정도가 아닐까 싶은 느낌도 든다.
물론 이곳은 원래 거하게 파괴되어 사냥꾼 파티의 보스 레이드 장소가 될 운명이었다. 물론 그 보스라는 것은 절망에 타락해버린 성녀 프리가고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몹시도 기분이 오묘했다.
덜컥, 기이이익.
백색으로 칠해져 금빛이 자개처럼 수놓인 화려한 방문을 사제들이 열어준다.
교단의 최상층 사람들이 누군가를 접대할 때 사용한다는 광명의 홀, 그 안으로는 찬연한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그 안쪽으로 다소곳한 여성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까만 베일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눈에는 검은 안대를 드리우고, 그 아래로는 착 달라붙는 느낌의 검은 수녀복을 걸치고 있었다.
무척 금욕적이고 절조있는 복식이었으나 여성 특유의 굴곡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베일 아래로 빠져나와 흐늘거리고 있는 분홍색 머리칼 덕분인지 어딘가 고혹스러운 느낌이 강하게 풍겨 나왔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베일과 안대 덕분에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인이라는 것을 마치 온몸으로 주장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 여성이 바로 프리가 나이트폴.
교단의 등불이라고 일컬어지는 정신적 지주인, 성녀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프리가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아이라는 그녀의 앞 테이블에 마주 앉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유능한 신하가 있어서 말이지.”
성녀를 향해 존대하진 않는구나. 아이라 다워서 한 편으로는 안심마저 드는 느낌이다.
그것으로 성녀와 여왕이 한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성녀가 손을 들어 주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저희 말고는 다 물러나주실 수 있나요?”
절그럭, 절걱.
그러자 주변에 무장을 하고 있던 신전의 기사단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들의 중무장한 철갑이 당혹감으로 떨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은빛 페이스 가드 아래로 말했다.
“성녀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성녀님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저희의 의무이자 소명입니다.”
“괜찮아요. 이야기가 길어지진 않을 테니까. 물러나도록 하세요. 오늘은 아예 퇴근하셔도 좋아요.”
그러자 기사들은 투구 아래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는 수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다.
“성녀님의 명이시라면….”
그리고는 하나 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는데, 방을 나서며 그들이 저마다 소곤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생생히 들렸다.
─히히, 칼 퇴근이다.
─듀얼 체스나 두러 가자구.
─그보다 방금 그 여자가 아이라 여왕이야? 성녀님의 앞에서도 빛바래지 않는 여자는 처음 봤어.
─더 구경해도 좋았는데 말이지.
구렇구만,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구나.
기사단의 인간미를 느끼고 있을 즈음, 아이라가 푹신해 보이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한 마디 했다.
“나는 사람을 물리지 않겠어.”
아마 나를 염려해두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그러자 성녀는 고개를 돌려서 나를 바라봤다. 아니, 사실 ‘바라봤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녀는 공식적으로 두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까만 안대로 가려져 있는 그녀의 어둠이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걸 알 수가 있었다.
찌르르-.
등이 울리는 감각. 이런 감각을 언제 느껴봤더라.
내가 그것에 생각하고 있기를 잠시 성녀 프리가가 후후-하고 여유롭게 웃었다.
“신기한 존재로군요. 반 요정이라니. 좋아요, 면담을 요청한 것은 제 쪽. 여왕님의 편의를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식사를 시작할까요?”
성녀의 말에 닫혔던 문이 열리고 수녀와 사제들이 접시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라는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접시를 쳐다도 보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는 뭐지? 단순히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선 아닐 텐데.”
그러자 포도주로 입술을 적시고 있던 성녀 프리가가 잔을 테이블 위에 달칵 내려두었다. 그것으로 잠시 오싹한 한기 같은 것이 내 주변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서로 격식을 차리고 대화하고 있지만, 이 둘의 만남은 어딘가 으스스해서 마치 엘가와 미르나가 싸우는 것보다도 치열한 무언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성녀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아이라 님께는 당해내지 못하겠네요. 서로 바쁜 시간 길게 이야기해서 뭘 하겠나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해 봐.”
“저는 아마 곧 죽을지도 모릅니다.”
“…….”
뜬금없는 이야기의 맥락에 아이라는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미간을 치켜 올렸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녀 프리가가 곧 죽는다니. 너무 단도직입적이라서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겠잖아.
물론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원래 그녀는 에피소드 보스였으니까.
그렇지만 원작의 스토리에서 아주 뒤틀려버린 지금, 그녀가 죽게 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일까? 내가 궁금해 할 것도 없이 프리가가 말을 덧붙였다.
“태오 가스펠, 그 남자가 절 죽일 거에요.”
“태오 가스펠-?”
아이라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왜 날 봐.
나도 모르는 이야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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