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43)
EP.344)# 1
344 – 거미 # 1
“아, 해 봐.”
내 말에 아이라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 새 하얗고 가지런한 치열과 작고 앙증맞은 혓바닥을 향해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수저를 움직였다.
찰랑거리는 수프.
그것을 아이라의 입에 떠먹여준 뒤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는 걸로 마무리.
“잘했네.”
“…….”
물론 아이라의 반응은 없었다. 그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거나 주변을 쳐다보거나 할 뿐.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르나가 말했다.
“그 여왕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렸네요. 이런 걸 보고 유아퇴행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르나의 말처럼 아이라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손이나 얼굴을 씻겨주는 것도 스스로 할 줄 몰라, 전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어린아이.
생각해보면 그건 이런 상태가 되기 전에도 비슷했나?
“아이라, 여기 손 집어넣어.”
나는 아이라에게 긴 로브를 입혔다.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갈 때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경비들이 난리를 부리지 않도록 모습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 엘가가 말했다.
“태오는 잘 따르네. 내가 손대려고 하니까 막 부들부들 떨면서 거부하던데. 아까 싸울 때 내가 못살게 굴었다고 생각한 건가?”
어린아이처럼 변해버린 아이라는 엘가나 미르나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허락하는 것은 나정도.
어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뭐, 아이라는 기분파니까.
그때 저 멀리서 병사들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성내는 다 찾았는데 안 보여! 이미 바깥으로 빠져나간 걸 수도 있으니까 인원들 나눠서 왕궁 바깥으로 나가 봐! 도시도 샅샅이 뒤지고! 도시 문 차단하고!
우르르르르.
제법 많은 병력들이 왕성을 빠져나가는 발소리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가 이미 이 성을 빠져나갔기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빠져나갈 기회가 아닐까?
모두 그렇게 생각한 건지 우리들은 계획을 짜 작전을 수행하기로 했다. 우리가 기대에 걸고 있는 것은 님프 여왕이 보여주었던 지도와 그 중앙에 표식 되어 있던 상자.
아이라가 의지를 잃은 지금 우리의 목표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수상쩍어 보이는 곳으로 찾아가서 내용물을 확인해 보는 것 정도뿐이다.
문제는 지도를 가진 님프 여왕의 협력을 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는데.
“좋아.”
님프 여왕은 의외로 속이 넓은 녀석이어서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같이 가지 뭐. 사실 가장 문제였던 게 상자를 지키고 있던 괴물이거든. 그 녀석 때문에 계획이 계속 미뤄지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그 아이라 여왕을 제압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아무래도 플러스 요인이 된 모양이었다. 괴물을 쓰러트려 달라고 할 생각이겠지.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걸 잘 아는 것이리라.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었다.
하긴, 머리가 좋지 않고서야 이 편리한 비밀창고가 있다 하더라도 궁정에서 홀로 숨어 살아간다는 일은 실행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리하여 우리들은 기묘한 파티를 맺게 되었다.
달그락, 달칵.
이런저런 장비를 잔뜩 챙긴 님프 여왕이 말했다.
“내가 길을 알아. 지하감옥까지만 가면 그 뒤로는 경비들도 없을 테니까 잘 따라오면 돼. 오늘이 아니면 기회도 없을 것 같으니 다들 잘 해야 해.”
제법 비장한 태도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단 한 번의 기회가 될지 모른다.
아이라에게 약을 먹여 잠을 재운다는 반역적 행위까지 하면서 일을 벌인 이상. 절벽을 등진 것과 마찬가지로 돌이킬 수가 없다.
문제는 아이라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으….”
아이라는 이 안전구역이 퍽 마음에 들은 것인지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기둥을 손으로 붙잡은 채 때를 쓰듯이 으르릉거리기까지 한다.
“으으…!”
그 모습이 꼭 사람에게 상처받아 버려진 들짐승 같았다. 그 고고한 아이라가 이런 일까지 한다니. 동영상으로 찍어두고 싶을 만큼 신기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조금 조바심이 났다.
“아이라 님, 가야만 해요. 계속 여기 있을 수만도 없어요.”
어떻게 해야 아이라를 설득할 수 있지?
이게 육아의 고통?
이런 곳에서 부모의 괴로움을 알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 * *
“야, 그렇게 가서 괜찮겠냐?”
엘가가 내 상태를 물어왔다.
그 이유란 내가 아이라를 팔에 안아들고 있기 때문이겠지. 내 목을 꽉 붙잡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아이라는 내게 있어서 그야말로 짐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단순한 짐 치고는 좋은 냄새도 나고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볍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가벼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아이라 님께서 자신의 발로는 바깥에 나가고 싶어하시지 않으니까요.”
방에서 나가기 싫어하는 아이라를 옮기기 위해 낸 고육지책이 바로 이렇게 아이라를 들고 가는 것이었다.
내가 안아들자 매우 불안해 보였던 아이라의 태도가 비교적 침착해졌다. 평소 힘을 길러두길 잘했네.
“거기 너희들, 잡담할 시간 없어.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까 어서 가자.”
님프의 손짓에 우리들 모두 벽 바깥으로 나섰다. 이것저것 불타는 냄새가 나는 궁정 안의 공기를 느끼며 우리는 어두운 궁정 복도를 재빠르게 거닐었다.
병사들을 피해 숨기도 하고 때때로 그들을 쓰러트리기까지 하니 마치 진짜 반역자라도 된 기분이라 무척 묘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이 님프 여왕과 만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오랜 시간 이 왕궁에서 들키지 않고 생활했다는 녀석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는지 병사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길부터 시각의 사각지대까지를 전부 꿰고 있었다.
“여기가 왕궁 지하 감옥 입구야.”
진짜 안 들키고 왔네.
이 님프와 만나지 않았다면 일이 한층 더 어렵고 복잡해졌겠지. 아니 단순히 그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덕분에 일이 수월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가볍게 감사함을 표하자 녀석은 맘에 들지 않는 것처럼 쯧-혀를 찼다.
“아직 진짜 일은 시작도 안했어. 여기 밑으로 내려가서가 진짜야. 너희들이 해줘야 할 일도 이 밑에 있고.”
님프는 굳게 잠겨 있는 자물쇠에 긴 핀 같은 것을 집어넣어 이리저리 만졌다. 한참 달칵거리던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자물쇠가 분리되어 바닥을 뒹군다.
“됐어. 이제 다들 따라 와.”
기이이익.
무거운 철문을 열자 지하 특유의 습기 찬 곰팡내가 내 코에 화악 끼쳐왔다. 또 거기에 섞인 기묘하고 이상야릇한 냄새들이 매우 신경을 거스른다.
그 때문인지 내 목을 끌어안고 있던 아이라가 더욱 나의 품으로 파고들어 와들와들 떨었다.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그때서야 나는 아까 전 내가 생각했던 걸 정정할 수 있었다. 아이라는 안전구역을 나가는 게 싫었던 것이 아니구나.
이곳으로 오는 게 싫었던 거야.
“…지독한 곳이군요.”
누가 말했을까.
아마 미르나였던 것 같다. 그녀의 말대로 이 지하 감옥은 매우 지독한 곳이었다.
여기저기 묻어있는 핏자국과 뽑힌 이빨들 손발톱들이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이 만들어졌는지 쉽게 유추할 수 있도록 했다. 누구 한 명 빠져나갈 수 없는 감옥.
희망의 끝.
최근 나도 님프 열병 코로노이 사건으로 이곳에 갇혀본 적 있었지만, 그때도 이 정도로 끔찍한 곳은 아니었다.
그때 엘가가 나의 등을 민다.
“감상에 젖을 시간 없어. 우리가 이 지하로 침입했다는 것도 금방 들킬 수 있으니까 얼른 가야 해.”
확실히 그 말도 맞았다.
일일이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위는 없다. 어차피 이것은 현실도 아닌 꿈의 재현일 뿐. 그래서 우리는 그저 철창 너머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님프의 등을 따라 올곧게 나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걸었을까.
“내부가 마치 미로 같네. 안으로 들어와서 수 십 분은 걸은 것 같은데 전혀 끝이 보이질 않잖아. 왕궁의 지하가 이렇게 넓었다고?”
엘가가 의문을 표했다.
나 역시 엘가처럼 의문을 느끼고 있었다. 왕궁 지하 감옥의 끝이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랜 시간을 걸었는데 우리들은 아직도 비슷비슷한 자리를 돌고 있었으니까.
혹시 님프가 우리를 함정에 빠트리려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즈음 미르나가 침착히 말했다.
“무의식의 깊은 부분이 미로처럼 변모해 있는 건 흔한 일이에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가둬두는 곳이니까 그 안의 것이 함부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심리적 방어기제가 이런 구조를 이루는 거니까요.”
그런 미르나의 말을 증명하듯 깊숙한 곳으로 점점 다가갈수록 역겨운 냄새는 점점 더 지독해지고 발밑은 질척질척해진다.
“…뭐야 이게.”
엘가는 자신의 발목까지 잠긴 물을 보며 몹시도 찝찝해 했다. 바닥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만 물.
안으로 갈수록 그 수위는 점점 더 높아져서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벅지까지 참방참방 까만 물에 잠기고 만다.
“지독하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것 같잖아.”
엘가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 투덜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던 건지 앞서서 걷고 있던 님프가 하아-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왕성의 쓰레기와 하수들이 모이는 곳이니까 당연하지. 모두가 버린 쓰레기가 모이는 곳이니까. 이 정도도 못 견딜 거면 그 괴물은 상대할 수도 없어. 돌아가.”
“흥, 그냥 그렇다고 했지 못 견딘다고는 안 했다.”
그런 느낌으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우리들은 거대한 철창 문 앞에 도착했다. 그 틈새는 어린 아이 한 명 정도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
“안 되겠다. 가슴이 걸려.”
엘가는 그 틈을 빠져나가보려 했지만 가슴이나 엉덩이 때문에 어림도 없었다. 미르나 역시 이곳저곳 걸리는 곳이 많아 철창을 빠져나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나는 넘어갈 수 있나?
하지만 아이라를 안고 이 좁은 틈을 통과하는 건 밧줄이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일 터. 결국 이곳을 자유롭게 넘어갈 수 있는 건 도둑 님프 뿐.
우리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가장 먼저 의견을 낸 것은 엘가로 “철창 따위, 휘어버리면 그만이지 않나?”라고 호기롭게 말했다.
하지만 철창은 생각 이상으로 단단해서 엘가의 힘으로도 꿈쩍하질 않았다.
그에 주변을 살피고 있던 미르나가 가볍게 눈을 좁히더니 벽 근처에 새겨져 있던 무늬와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매만진다.
“이제 보니 이것, 봉인식이네요. 이렇게 쐐기문양으로 그림을 그려 넣는 건 북부 마녀들의 솜씨죠. 마녀들이 이곳에 무언가 봉인한 것 같군요.”
마녀들의 봉인.
그 이야기에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타란테라 가문에서 아이라의 몸속에 아르스 노바를 인위적으로 집어넣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가설.
이 철창과 봉인식의 문양들은 그 가설에 살을 붙여주는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이대로 기다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물러서세요.”
모두를 물러나게 한 뒤에 나는 아이라의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을 앞으로 펼쳤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대로 머뭇거리고 있을 수만도 없는 법.
─벨리알.
내가 읊은 것은 솔로몬이 직접 고안한 무효화 주문이다.
마녀들의 봉인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를 넘어설 수는 없을 터.
쩌적, 쩌적.
실제로 나의 주문이 읊어짐과 동시에 철창은 금이 가 아주 깨져버리고 말았다.
“아, 안 돼….”
그때 내게 안겨 있던 아이라가 크게 몸을 떨었다. 무엇이 되었든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한 것이겠지.
찰팍 찰팍.
나는 그런 그녀를 안고 더욱 깊숙한 미로 안으로 들어가 마침내 검은 폭포가 흘러넘치고 있는 홀에 당도했다.
솨아아아아아아.
바깥에서 내리는 비와 왕궁의 모든 하수가 사방에 난 파이프로부터 쏟아지는 어둠의 웅덩이. 못자리. 연못. 폭포. 뭐라고 불러도 좋을 곳에─.
녀석은 웅크리고 있었다.
수많은 뼈가 엮여져 만들어진 몸. 길게 뻗은 다리는 열 개 정도. 그 새하얀 몸의 정면에 사람의 얼굴이 여덟 개 정도 거미 눈처럼 붙어있다.
마치 인간을 기괴한 모양으로 합쳐서 만들어낸 거미 같았다.
크기는 수 미터 정도로 매우 거대하고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기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소름을 느꼈다.
괴물(怪物).
녀석을 표현하는 데에 그것보다 더 정확한 말이 있을까.
대화가 통하기는 하려나?
온몸에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한 꺼림칙함을 떨쳐내며 내가 물었다.
“네가 1위의 바엘이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