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441)
EP.442)# 3
442 – 유전(遺傳) # 3
짧지만 강렬했던 고민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결론을 말하기에 앞서서, 이 일을 나 혼자 결정지어 버리는 것은 너무 독단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괴상한 장소까지 함께해준 영애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로 했다.
“일단, 각자의 생각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영애들 모두 각각의 개성과 주관적 본성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이라면 내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로 의견들을 말해오겠지.
예전 같았으면 혼자서 전부 결정해버렸겠지만.
또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했겠지만.
그런 게 싫어서 아내를 다섯 명이나 둔 것이니까 말이야. 가족이 있다는 것은 이런 위급한 상황에 의지하거나 물어볼 사람이 있다는 말 아니겠어?
“저는.”
가장 먼저 입을 열은 것은 미르나였다.
“고민되네요. 하지만 드레이코 가문의 오랜 역사에서 선택은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었죠. 자칫 외도(外道)로 보일 수 있는 강령술이나 흑마술을 들여올 때. 이런 고민을 했다고 들었어요.”
시체를 되살려 내거나 저주 혹은 주술을 사용해 상대를 못살게 구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꺼림칙함을 불러일으키기 마련.
강력한 힘과 세간의 시선.
그 사이에서 고민하던 드레이코 가문의 선택은 미르나르미 자매로 알 수 있듯이 결국 강력한 힘이었다.
“또, 저희 아버지도 선택을 해야만 했었겠죠. 저와 나르미가 하나로 합쳐지는 걸….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에요.”
만약 미르나와 나르미가 하나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니?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듯했다.
내 생각을 읽은 건지 미르나가 말한다.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죠. 하지만 정말 그랬다고 해요. 저와 나르미는 태내에서 서로를 흡수하고 있는 중이었고. 그대로 갔다간 둘 다 위험했다죠.”
미르나는 그 이상 자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이 기묘한 쌍둥이로 태어난 것이 단순히 미친 강령술 실험 때문이 아닌, 깊은 고민과 선택에 의한 것임은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르나가 말했다.
“역시 저라면 아이의 목숨을 구할 것 같네요.”
그러자 아이라가 의외라는 것처럼 “흐응?”하고 긴 콧소리를 냈다.
“미르나, 너라면 이기심에 타인을 희생해선 안 된다고 고지식하게 말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꼭 타인이 희생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이 세상은 옛날과 달라요. 마법이나 마력이 없어도 인간은 마물들에게 당하거나 하진 않아요.”
그에 스텔라가 말을 받는다.
“그건 그렇지. 마물들에 대한 연구도 그 동안 활발히 진행됐고. 인구수도 많고. 무기를 만드는 법이나 전술도 발달했지. 이제 와서 마법사들 없다고 인류문명은 붕괴하지 않아.”
슥.
스텔라가 무언가를 바지춤에서 꺼낸다. 그것은 사람 손가락 정도 크기의 가늘고 긴 원통형 물체다. 그 색깔은 누런빛으로 번쩍번쩍했다.
“이런 것도 있잖아.”
그건 총탄이었다.
스텔라가 어디서 저것을 구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스캐빈저들의 주둔지인 팔렌 마을에서 하나 슬쩍 해온 모양이다.
손가락 사이로 총알을 빙글빙글 돌리는 스텔라.
“양산만 할 수 있게 된다면 마법사의 자리는 충분히 대체하고도 남아. 벨호크에는 충분한 기술력도 돈도 인재도 넘치거든. 그러니까 나도 찬성이야.”
“나도 찬성해!”
나르미가 와락 손을 든다.
“딱히 이유는 없어!”
딱히 이유는 없다고 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의미있을 것 같잖아. 세상 어디서 이런 경험을 또 해보겠어? 이제 내 발로, 내 손으로 하늘의 끝을 보고 싶어.”
허공에 손을 꽉 움켜쥐어보는 나르미. 무척 나르미다운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설명은 듣지 않아도 될 듯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엘가나 아이라 정도인가.
아이라가 말했다.
“괜찮다면, 나는 에르가네스의 의견을 들은 후에 말하고 싶구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이제 엘가에게로 향한다. 엘가는 몹시도 침울한 표정으로 그냥 낡은 돌기둥에 앉아있을 뿐이었는데. 자신의 차례가 되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는….”
하지만 언제나 시원스럽게 결정을 내려왔던 엘가도 이번에는 제법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엘가는 선택의 당사자 중 한 명이니까. 아무래도 부담이 큰 것이겠지.
그렇게 짧지만 긴 망설임의 시간이 끝나고 엘가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뭘 선택해도 후회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뭘 선택해도 결국 후회할 거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래. 나도 본다. 하늘의 끝이라는 거.”
슥.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는 엘가에게는 제법 의지와 힘이 담겨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이라의 의견 정도.
아이라는 가볍게 “이미 과반이 넘었구나. 내 의견은 굳이 필요 없을 거야.”라고 차례를 두루뭉술하게 넘겼다.
언제나 앞서서 의견을 밀어붙이던 것과는 조금 다른 태도였기에 우리들 모두 살짝 놀라기를 한 차례. 마침내 하나로 좁혀진 의견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녀는 탄식했다.
“당신들, 정말 악당이 따로 없네요.”
악당.
그 말이 무척 우스웠던건지 누군가가 푸흐흐-웃는다. 곧 모두가 그 웃음소리에 따라 하나 둘 폭소했다.
물론 성녀는 “뭐가 그리 우습죠?”라고 정색했지만. 웃음소리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세상을 저울질하는 중요한 대목에서 이기적인 선택을 결정짓고 웃음을 터뜨린다니. 그야 악당이라 부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은 원래 악당들이었다.
내 이야기 속 악당 영애들.
그녀들은, 그저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이기적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깨닫자 나도 웃고 말았다.
악당영애들을 길들인다니.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야기였던 거야.
* * *
나는 성녀의 이마를 안수하듯 붙잡았다.
그러자 내 안으로 강렬한 힘이 흘러넘치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몸으로 들어오는 것은 권능이자 힘이고 동시에 개념이었다.
「아가레스 : 고위 언령주술.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힘을 싣는다. 문자와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높아진다. 술자의 위계가 높아질수록 그 영향이 증대된다.」
성녀 프리가가 몸에 봉인해두고 있던 2위의 주술 아가레스는 심플한 효과였다. 사용법은 성녀의 말처럼 자신의 말에 ‘힘’을 실어 강제력을 부여하는 것일 터.
그리고 아가레스를 사용하면 마법의 주문이나 영창에도 위력을 더할 수 있으리라는 걸 마법사의 직감으로 깨우칠 수 있었다.
지금 내 위계가 대략 7위계 반 정도에 도달했으니까.
아가레스의 언령으로 영창을 강화하면 대략 8위계 이상으로 마력을 쏘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명을 깎지 않음에도 마력의 위력을 높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히오옹…!
나도 알아, 바엘. 대신 긴영창이 필요하겠지. 앞으로 내가 마주해야 할 상대가 내게 그런 영창을 읊을 시간을 줄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음, 아-.”
언령을 시험 삼아보기 위해 내가 목을 가다듬고 있을 때. 바닥에 초연히 앉아 있던 프리가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제 안에서 아르스 노바를 추출한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저는 딱히 변한 게 없는 것 같군요.”
“그야….”
가미긴을 추출당한 발란 교수도. 바사고를 추출당한 요승 테오도로스도, 바엘을 추출당한 아이라도 사실 기적적으로 성격이나 성질이 변화하진 않았다.
주술의 숙주가 된 이상 그 영향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 성녀 프리가도 그 사실을 깨달은 건지 모르겠지만 다소 심란해 보였다.
“아가레스의 마수에서 벗어나는 것만 생각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부질없는 짓인 모양이었군요. 저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다무는 성녀 프리가. 그녀도 나름대로 사정과 고민이 있겠지. 하지만 그것을 들어주고 있을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다시 낡은 신전으로 진입했다. 잔뜩 각오를 다졌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처음 신전에 들어섰을 때와 지금은 분위기가 꽤 달리 느껴졌다.
한층 더 웅장하고 우중충하고 위험해 보인다.
이제 우리는 두꺼운 돌벽으로 이루어진 문 앞에 섰다.
그 앞쪽 바닥에는 아이라의 조모 이사벨 폰 타란테라가 피로 적어둔 글자가 선명히 눈에 밟힌다.
사어(死語)라고 불릴 정도로 고대의 언어였지만. 방금 아가레스를 획득해 언어적 지식이 풍부해진 내 눈에는 그 뜻이 머릿속으로 자연히 입력되고 있었다.
『우리는 이 문의 너머에 역사를 묻었다. 각오 없이 문을 여는 자. 가진 것을 전부 빼앗기리라.』
미르나가 언급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다. 이 문을 각오 없이 여는 자는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리라는 경고.
그러나 내 시선을 붙잡아 끈 것은 그 아래 추가적으로 적혀 있는 글자들이다.
“몇 마디 더 적혀있네요.”
내가 가볍게 말하자 영애들 모두 바닥을 바라봤다.
고개를 젓는 미르나.
“몇 마디 더 적혀있다니…. 제게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걸요? 아마 태오 경의 눈에만 보이고 있는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그런 듯했다. 아가레스를 손에 넣지 못했다면 읽지 못했을 글자라.
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궁금한 나는 천천히 눈을 글려 그 단어와 문장들을 하나씩 이해해갔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태오야, 뭐라고 적혀있어?”
나르미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답했다.
“주문 같은 게 적혀있네요.”
“주문…?”
“깨우는 주문이래요.”
나는 그 글귀들을 넘어서서 돌문에 양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살짝 힘을 줘 밀어본다.
물론.
단단한 돌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손에 망설임이 가득히 들어있기 때문이겠지.
이 문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지는 미지수.
덕분에 나의 몸은 본능적으로 이 문을 열어젖히는 걸 거부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 내 옆으로는 수많은 글자들이 떠올랐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돌아가라.』
아무래도 나를 이 문의 너머로 보내주지 않을 생각이 다분한 모양이다.
『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돌아가라.』
눈앞이 글자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 귀는 누군가 외치는 함성으로 시끄럽게 왕왕 울렸다. 팔에서는 힘이 빠지고 다리는 후들거리지만.
까득.
나는 턱이 으스러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를 악문 채 몸에 힘을 주었다.
이제 이 문을 열고 묻는다.
내게 말을 걸어왔던 당신은, 아니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다리를 무겁게 죄는 망설임. 하지만 내 등 뒤에 서 있는 가족들의 시선이 느껴져 나는 다시금 힘을 낼 수 있었다.
꾸우욱.
팔에 힘을 주자 내 뱃속으로부터 다시금 뜨거운 열 같은 게 뻗어져 어깨와 팔로, 허벅지와 발끝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삐걱.
마침내 돌문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문틈 사이로 서서히 새어나오는 빛과 바람이 내 머리칼을 휘날린다.
“윽-.”
“무슨 바람이….”
뒤쪽에서 소란을 떠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의 발은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더욱 굳건히 몸을 지탱했다.
기이이익. 철컹.
마침내 모든 문을 활짝 열리며 쏟아지는 빛줄기와 거대한 천좌의 군상이 내 앞에 나타난다.
그 존재가 뿜어내는 박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개념들로 인해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을 때.
입구에서 보았던 주문의 글귀가 번개처럼 내 눈을 스쳐가는 듯했다.
나는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오랜 하늘이여, 질문에 답하라.”
낯선 글귀들이 이미 경험한 바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곧, 거대한 그림자가 감았던 눈을 뜨며 광채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