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88)
EP.89)동아리 # 8
089 – 모험 동아리 # 8
파스스슥.
무언가가 풀숲을 가르고 나타났다.
네 발로 기어오는 것에서 흡사 몸이 길고 날렵한 고양이과의 짐승으로 착각할 뻔 했지만.
이내 두 발로 몸을 쫙 일으키는 그것은 온 몸에 검은 붕대를 칭칭 감고, 그 위로 망토를 두르고 있는 괴상한 차림새의 인간이었다.
휘오오오-.
불어오는 바람에 찢어진 붕대와 긴 검은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모습은 마치 어린애들 악몽 속에 나타나는 유령과도 같았다.
그 붕대 사이로 보이는 몸은 매우 탄탄하게 조여진 근육질에 팔다리도 길쭉해서 그야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
인간이라기보다는 극한으로 단련시켜서 가늘게 늘어뜨린 사마귀 같은 체형이었다.
키는 거의 2미터 가까운 것처럼 커서 그야말로 압도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위압을 갖추기에 충분했다.
붕대 사이의 까만 눈동자가 나를 향할 때-.
“태오 님, 제 뒤로 오시죠.”
칼리라 영애가 채찍을 고쳐 잡으며 나의 앞에 섰다. 그러나 나는 이들과 맞서 싸우면 안 된 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절대 공격하지 마세요, 칼리라 아가씨. 먼저 공격해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저들과 싸워선 안 됩니다.”
“저들요…?”
칼리라 영애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 물었을 때. 곧 뒤에서 파스슥-거리는 소리와 함께 수풀 바깥으로 몇몇 사람들이 모습을 더 드러냈다.
절그럭, 절그럭-.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가슴팍에 붉은 십자가가 커다랗게 새겨진 재색의 풀 플레이트 갑옷이다.
무겁고 둔탁한 재색의 갑옷은 본디 은빛으로 예쁘게 반짝였던 때를 잊은 것처럼 피와 먼지가 잔뜩 묻어서 몹시도 흉흉했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것은 둔중한 건틀릿에 꽉 붙들려 있는 망치였다.
사람 몸통의 절반 크기 정도 되는 거대한 망치는 오로지 파괴를 위해 무게를 늘린 것처럼 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날것의 쇳덩이 그 자체다.
저것에 맞으면 성문이든 성벽이든 바위에 으깨지는 계란처럼 박살나겠지.
“사냥꾼 씨, 그렇게 먼저 가버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만 그 강철의 갑옷 아래로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여성의 것으로 매우 친절하고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실제로도 그런 성격일 터다.
자신의 편에게 있어서는.
“어라? 사람이?”
스륵. 절그럭.
이내 건틀릿으로 자신의 투구 그 페이스 가드를 치켜 올리는 여성.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칼리라 영애를 향한다.
“우와, 굉장한 미인.”
그 나른한 웃음소리에 기분이 나빠진 것일까? 칼리라 영애가 손에 쥐고 있는 채찍의 손잡이를 더욱 꽈악 조여 붙잡는다.
“…성기사? 장벽의 성기사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죠?”
“장벽의 성기사를 알고 있다니. 교양있는 아가씨네요. 그렇지만 저는 성기사가 아닌, 치유사제랍니다. 좀, 남들보다 힘이 강할 뿐이죠.”
고양이처럼 날렵한 푸른 눈동자는 오롯이 칼리라 영애만을 향했다. 여성을 좋아하는 호색한 여사제라는 설정은 역시 변함이 없는 걸까?
실제로 이 여사제는 암살자 칼리라에게 쉬이 유혹당해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적이 있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말이다.
“루비처럼 붉은 눈이 예쁘네요. 아가씨, 이름은 무엇인가요?”
“…….”
다만 스토리 라인이 달라서 그런지, 칼리라는 자신에게 추파를 던져오는 여사제가 영 못미덥고 수상한 듯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의 갑옷과 무기에 묻어있는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때 뒤쪽에서 둔중한 기척이 하나 더 느껴졌다.
“뭐야, 벌써 싸움이 끝났어?”
드륵, 드르르륵-하고 밭을 가는 쟁기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마침내 모든 모습을 드러낸다.
그녀는 노출이 많은 가죽옷을 입은 남만의 야만 여전사였다.
쇠와 가죽을 덧댄 그리브나 건틀릿 정도를 제외하면 상체와 하체는 중요한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는 수준.
덕분에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몸매는 마치 튼튼한 통나무같이 그을리고 꽉 조여져 온갖 상처와 푸른 문신이 파도무늬처럼 새겨져 있었다.
스릉, 콰직.
여전사가 자신의 몸만큼 커다란 철판의 대검을 바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흩날리고 있는 갈색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에라이 늦었나.”
피 묻은 얼굴로 와락 찌푸려지는 인상이 마치 도깨비 같다.
“모처럼 몸을 좀 풀어볼까 했는데.”
하지만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무척 영롱해서 신비로울 정도. 잘 정돈하고 가꾸면 상당한 미인이라는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검은 붕대를 감은 사냥꾼.
재색의 여사제.
그리고 거대한 대검을 든 야만의 여전사까지.
원작 소설 「빌런 사냥꾼」을 읽었던 사람이라면 도무지 까먹을 수 없는 조합이었다.
실제로 그 모습을 내가 바라보고 있자니 일종의 감격적인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문제는 내가 그들이 사냥하는 ‘빌런’에 가깝다는 것 뿐.
“…….”
파티의 유일한 남자는 과묵하게 나를 내려다 봤다. 2미터에 가까운 꺽다리가 나를 내려보는 광경은 가히 소름이 끼치고도 남았다.
실제로 그를 마주한 악당들은 이 기묘한 분위기와 압도적인 체구에 위압을 느낀다고 했었던가.
그에게 몰입하고 있던 때는 무척 통쾌했는데 내가 그걸 직접 겪고 있으니 긴장된다.
이게 정말 인간이 맞긴 한가?
“…….”
과묵한 남자의 눈이 나를 슥슥 훑는다.
아마 판단하는 것이겠지.
그의 까만 눈에 세계는 죽여도 되는 것과 죽이면 안 되는 것. 두 가지로 구분되는 법이니까.
내가 지금 그에게 있어서 죽여도 되는 놈인지 아닌지 구분하고 있는 것이리라.
“너….”
못으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끔찍한 음성이 갈라진 붕대 사이로 들려왔다.
무심코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갈퀴 같은 손이 내 목을 잡아챌까 가만히 있을 때였다.
파스슥.
무언가가 수풀을 가르고 나타났다.
“사냥꾼 씨. 어딜 갑자기 그렇게 뛰어가신 겁니까? 얌전히 제 안내에 따라야 이 요정 숲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방금까지 등장한 인물들이 한 덩치 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에 등장한 사람은 작았다.
덩치가 나랑 비슷한 정도.
검은 로브를 몸에 걸치고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복장과 신분은 파악할 수 없었으나, 목소리가 밝고 또랑또랑한 것을 보니 꽤 나이도 어린 것 같았다.
누구지.
내가 알기로 주인공 파티에 저런 인물은 없었을 텐데.
“후으, 후으으으-.”
예상 밖의 남자는 헐레벌떡 뛰어온 것이 힘들었는지 무릎에 손을 얹고 계속해서 숨을 골랐다.
그런 남자의 등을 팡-하고 내려치는 여전사.
“길잡이 주제에 몸이 그렇게 허약하면 짐승들에게 잡아먹히고 말 걸.”
그렇구만.
저 녀석이 그 길잡이인가.
그때 내 앞에 서 있던 검은 붕대의 사냥꾼이 휙 몸을 돌렸다.
“…시시한 잡졸인가. 경험치도 얼마 되지 않겠어. 돌아간다.”
그가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 수풀로 들어서자, 주변을 살피고 있었던 동료들도 하나 둘 걸음을 돌렸다.
“루비 눈의 아가씨, 다음에 또 봐요-.”
“다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지. 여기 학생 식당이라는 곳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한 마디씩 내 뱉고 가는 여사제와 여전사의 뒤로 남은 것은 숨을 고르고 있었던 소년이었다. 그가 로브 아래로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이내 나를 향해 말했다.
“많이 놀랐습니까? 제가 일행들을 대신해서 사죄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막 아크에 도착해서 다들 정신이 없는 모양이거든요.”
“그렇습니까.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나 역시 적당히 대답했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지만 나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주인공 파티에 끼어있는 이놈은 대체 뭐지?
빌런 사냥꾼에 대한 정보는 거의 다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과 엮이지 않고, 베드엔딩에 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솔직히 자신이 있었다.
악행을 쌓지 않는 것.
그게 일단 가장 큰 회피법이니까.
악행을 쌓으면 더 큰 악당이 될 것이고, 더 큰 악당이 되면 커다란 경험치를 노리는 사냥꾼에게 사냥당할 터.
방금은 그러한 의미에서 사냥꾼의 숙청을 피해갈 수 있었다. 내가 아직 그에게 사냥 당할 만큼의 악당이 아니라는 소리겠지.
그러나 이 길잡이라는 녀석은 내게 있어서 큰 변수였다.
대체 뭐하는 놈이냐? 스토리가 뒤틀렸기 때문에 빌런 사냥꾼 파티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궁금해 죽겠다.
그래서 내 쪽에서 먼저 접근하기로 했다.
“매우 기이하고 강인한 분들이신 것 같더군요. 앞으로도 인연이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서로 소개나 좀 하죠. 저는 태오 가스펠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태오 가스펠이라….”
“예. 그게 제 이름입니다.”
“푸흐흐흐흐-.”
내 이름을 듣더니 로브 아래로 웃는 남자. 그에 내가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그가 손바닥을 좌우로 붕붕 흔들며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듣던 것과는 너무 다른 이미지라서 말입니다. 태오 가스펠, 앙그마르의 요승은 키가 2미터에, 팔이 여덟 개, 다리도 여덟 개 달린 괴물이라고 들었거든요.”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듣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정말 당신이 그 태오 가스펠이 맞습니까? 여왕의 비첩, 앙그마르의 정원사. 노예들의 해방자 태오 가스펠-.”
남자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물론 소문과 좀 다른 점도 있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은?”
“저는, 그냥 길잡이라고 해두죠. 어차피 이름도 없는 몸. 그보다 동료들을 따라잡아야 해서. 이만-.”
남자는 내 이름만을 들은 채 휙 걸음을 돌렸다. 내가 소개를 했으면 자기도 소개를 해오는 게 매너 아닌가. 이름도 없는 몸은 뭔 소리야?
이렇게 된 거 《십리안》을 발동시켜봐야지.
그런 느낌으로 가느다란 눈을 뜰 때였다.
우뚝.
남자가 걸음을 갑자기 멈춰서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덕에 나의 집중은 삽시간에 흐트러지고 만다.
“아, 가스펠 경. 세상에는 보고도 못 본 척 해야 하는 것들도 있지요.”
“……?”
“방금 저희와 만났던 것은 비밀로 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저희는 아직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몸이니까.”
파스슥.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아주 모습을 감춰버렸다.
* * *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아이라에게서 선물 받은 단검. 그것으로 고치를 가르자 그 안에서 파랗게 질려 있는 마르마르가 보였다.
“흐아아, 죽는 줄 알았어.”
“괜찮아?”
“응-. 뭐, 괜찮은 것 같네. 그보다 누가 왔던 것 같은데? 누구였어? 거미는 어디갔고?”
“위험한 놈들이었어. 아무튼, 우리도 얼른 여기를 벗어나자. 진짜 곧 있으면 해가 저물 수도 있겠다.”
우리는 해가 저물기 전에 얼른 이 요정 숲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같이 숲을 거닐고 있을 때, 한 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던 칼리라 영애가 말했다.
“대체 뭐하는 사람들이었죠? 태오 님, 당신은 그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던데요.”
설명하자면 길다.
그보다 나는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칼리라 아가씨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죠? 그들에 대해 느낀 바를 좀 알려주세요.”
“느낀 바라….”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한 영애가 한 수 초 뒤에 파르르 몸을 떨며 천천히 이야기했다.
“별로 적으로 돌리고 싶은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솔직히 싸우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특히 그 꺽다리의 남자는…마치.”
“마치…?”
“설명하기 힘들지만. 위험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은 태오 님 말고는 처음인 것 같네요.”
“그렇군요.”
칼리라 영애의 감은 좋았다.
근데 내가 그렇게 위험해 보였나?
물론 나의 위험함과 사냥꾼의 위험함은 궤가 다르겠지.
“정공법으로는 이기지 못하겠어요. 상대한다면 따로따로. 암살이든 간계든 사용해야겠죠.”
아무튼 그 정도면 칼리라 영애의 설명은 아주 정확하다고 볼 수 있었다. 악당들에게 있어서 그들보다 위험한 사람들은 없겠지.
마치 나쁜 짓을 하면 천벌을 받는다-라는 속담의 천벌을 의인화 한 것이 바로 그 사냥꾼이었으니까.
후-.
아무튼 사냥꾼을 만났음에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묘한 안도감으로 나의 몸을 지릿지릿 덮쳤다. 그럼에도 찜찜함은 남는다.
“칼리라 아가씨, 하나만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요?”
“아까 저와 대화를 나누었던 길잡이. 그에 대해서, 들키지 않는 선에서 조사를 좀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소한 정보든 무엇이든.”
“그거야, 어려운 일도 아니죠.”
“그리고….”
잠깐 말을 흐리다 나는 결심한 것처럼 운을 뗐다.
“태오 가스펠에 대해서도 조사해주세요.”
“태오 님에 대해서요?”
“아마 20년 정도 전에 이 아크에서 활동했던 사람 같은데. 저라고 볼 순 없겠네요. 동명이인일 확률이 높으니까….”
내가 애매하게 말을 흐리자 누군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르마르였다.
“나도 도와줄게! 내가 더 잘 할 수 있어!”
“그렇구만. 그럼 부탁 좀 할게.”
나는 나에게도 의지할 수 있는 동료라는 게 생긴 것 같아서, 어수선했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 사람은 마음에 상당한 안정감이 생기는 것이구나.
“누가 더 많은 정보를 찾는 지 승부하자, 빨간 눈!”
마르마르가 시끄럽게 구는 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등을 팡팡 쳐줬다.
“그래, 우선 돌아가면 마르마르, 네 숙소부터 구하자. 내일은 주말이니까.”
“정말?”
마르마르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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