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60)
* * *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도로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훅 들어오네.
이미 눈치챈 듯하니 숨길 것도 없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
루체는 고개를 숙이고는, 동요 없이 내 옷소매를 손가락으로 붙잡고 슬쩍 끌어당겼다. 그 손 약지에서 흑해 여제의 반지가 흑진주빛을 뽐냈다.
뇌신조 토벌전에서 살아남고 루체를 다시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마치 그때를 재현하는 것 같았다.
연이어 루체가 내뱉은 말은.
“날 좋아해줘, 아이작.”
내밀한 음색이 공기를 간질였다.
“그 선배보다, 날 더 좋아해줘.”
고개를 들고 애틋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루체.
“그거면… 될 것 같아.”
내게 아무것도 감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
한동안 나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말없이 루체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이윽고, 루체의 얼굴은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는 꼴을 보니 자신이 무슨 말을 꺼냈는지 이해한 듯 보였다.
‘가슴 만질래?’라고 내게 물었을 때 보였던 반응과 유사해서.
그녀가 감정부터 앞섰던 탓에 내게 낯부끄러운 말을 꺼냈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그….”
무어라 얼버무리려는 루체.
일단 떠볼까.
“방금 고백이야 뭐야?”
“애정 호소…. 우린 친구니까.”
루체는 어색하게 싱긋 웃었다.
참…. 이런 반응이라면 가볍게 받아치고 끝내는 편이 좋겠다.
얘도 굳이 도로시와 신경전을 벌이고 분위기가 안 좋아진 상황에서, 나한테 자기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루체의 어깨를 살살 툭 치고서 미소를 지었다.
“바보야, 친구끼린 그런 말 안 해.”
“…그렇지?”
“저녁이나 먹자. 뭐 가져 왔어?”
“아, 고기랑 샌드위치. 아이작 좋아하는 거만 싸 왔어.”
대충 환호해주고 고마워했다.
루체가 들고 온 바구니 안에서 돗자리를 꺼내 깔고 앉아, 그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동안 루체는 내 눈치를 슬쩍슬쩍 봤다. 시종 어색한 분위기였다.
그 불편한 정적 좀 풀려고 루체에게 장난치니, 그녀도 점차 내게 장난치며 예전 분위기로 돌아가려고 했다.
“근데 루체.”
하나 궁금한 게 있었는데. 이건 진짜로 물어봐야겠다.
루체는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 침 냄새는 어떻게 알았냐?”
“…….”
루체의 입이 뚝 멈췄다.
…다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
아침. 마법학부 수업동, 오르핀관.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강의실에서 자리잡고 수업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2학년 B 클래스 강의실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안 페어리테일과 마테오 조르다나, 트리스탄 험프레이 같은 녀석들이 보였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A 클래스 수석인 루체가 내 옆자리로 와서 온갖 애정행각을 펼칠 타이밍인데.
오늘은 안 보였다. 어째 오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 일 때문인가.’
도로시보다 자길 더 좋아해 달라고 루체가 그랬지.
나라도 부끄러움을 느꼈을 법했다. 이해가 가.
B 클래스 강의실에 루체가 찾아오면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댄다. 그러면 학생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감내해야 했는데.
확실히 혼자니까 자유롭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루체가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애가 내 옆에 와서 실컷 나를 아껴주는데 어떻게 싫어하겠나.
학생들의 부담스러운 시선도 이제는 익숙해지도 했다.
그래선지 뭔가, 허무감이 좀 드네.
“교수 데이지, 강림.”
그때 마법학부 2학년 B 클래스 여교수가 문을 강하게 박차고 들어왔다. 흠칫 놀라는 학생들이 여럿 보였다.
중2병 교수, 데이지였다. 오리엔테이션 시간 때 첫 마디가 “내게 수업은 살인이다.” 따위여서 괴짜 이미지가 꽤 굳건히 박혀 있었다. 뭐, 실력은 출중해서 나는 그녀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교수 데이지는 책을 겨드랑이 사이로 끼운 채 강의실로 들어와 교탁 앞에 섰다. 학생들도 분주히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공지사항이 있다.”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는 교수 데이지.
이제 슬슬 그 시기였지.
“조만간 대련 평가가 치러질 예정이다. 작년처럼 대련 신청권을 한두 장씩 써서 원하는 상대에게 대련을 거는 방식이지.”
대련 평가는 매 학기마다 한 번씩 치러진다.
학생들에게는 대련 신청권이 두 장씩 주어지며.
티켓 한 장 쓰고 같은 학년 내에서 원하는 인물에게 대련을 신청할 수 있다.
이때 상대는 거절할 수 있는데, 티켓을 두 장 다 쓰면 상대는 무조건 대련을 받아줘야만 한다.
즉, 룰 자체는 작년과 비슷하다. 하나 빼고.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 이번에 대련 신청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로는 마법학부 1학년생도 포함된다. 그 점을 유념하길 바란다.”
학생들은 “예에?”하고 놀란 눈치였다.
이번에 메르헨 아카데미에서 1학년생도 대련 상대에 포함시킨 연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내 후배들이자 현 마법학부 1학년은 황금의 세대라 불리는 기수. 강한 녀석들이 널려 있기 때문.
적당한 밸런스 조절을 위해 1학년 강자들의 시선이 선배 쪽으로 분산되도록 만들기 위함이겠지. 그러면 얼추 밸런스가 맞거든.
그리고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2학년 이안 페어리테일은 1학년 후배인 무녀 미야에게서 대련 신청을 받게 된다.
이안이 ‘빛 속성’이자 마족을 처치해온 영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많은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서브 이벤트였지.
전에 베르가를 쓰러뜨리고 서브 이벤트가 경험치를 꽤 쏠쏠히 준다는 사실은 확인했으니, 그 이벤트도 예외는 아닐 터.
물론 여기서 마족을 처치해온 자는 이름 없는 영웅. 그래선지 미야는 이안에게 별다른 관심을 내비치지 않았어.
즉, 서브 이벤트는 물 건너간 셈인가.
그렇다고 미야에게 대련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해도 서브 이벤트가 발생할지 확신이 없고, 당장에 걜 이기기도 어려울 것 같으니까. 괜한 모험이지.
서브 이벤트 노리려다 호되게 당하지만 않으면 다행이리라.
‘어쨌든, 난 누구랑 뜨냐.’
다른 애들이랑 떠도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건 명백하다. 전투 경험은 다다익선이다.
지금 내 실력으론 A 클래스도 넘볼 수 있으니, 케리드나 화이트클락 같은 애한테 대련을 걸어볼까.
마테오 녀석도 적당해 보이네.
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트리스탄은 나한테 대련을 걸 게 확실하고.
뭐, 아직 시간은 많다. 천천히 고민해 보자.
……
“안녕, 선배. 대련하지 않을래?”
“…….”
[천리안]과 [심리 간파]가 있음에도 누군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기겁할 때가 간혹 있다.마법학부 수업동 오르핀관 야외 복도를 거닐던 중, 1학년 교복 차림의 검은 머리 여학생이 내 앞을 가로막더니 내게 대련을 거는 상황이 그런 경우일까.
그래, 지금처럼 말이다.
“…싫다면?”
“두 장 다 쓸 건데. 이러면 무조건 받아줘야 하는 거, 맞지?”
접힌 검은 부채를 입술에 갖다 댄 채 대련 신청권 두 장을 흔드는 그 후배는, 무녀 미야였다.
[ 미야 ]Lv : 156
종족 : 인간
속성 : 불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을 쓰러뜨리고 루체 엘타니아의 관심을 사고 싶어 합니다. ]
주위를 돌아다니던 학생들이 전부 나와 무녀 미야 쪽을 쳐다보았다.
“무녀 님께서 벌써 대련 상대 정하신 것 같은데?”
“저거 뭐야? 신청권 다 쓰시는 거야?”
“저 선배가 누군데?”
“아이작 선배. B 클래스 1등.”
“아이작한테 1학년 수석이 왜…?”
야외 복도를 거닐던 학생들이 소곤대는 소리.
미야는 언제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살았던 탓인지, 학생들의 이야기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나랑 대련하고 싶은데?”
“선배가 궁금해졌거든. 그뿐이야. 나랑 대련하자, 선배. 선배랑 하고 싶어.”
온화한 초여름 바람이 피부를 쓰다듬고 지나갔다.
미야는 어여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리 간파] 덕분에 나를 처참히 짓밟아주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설마 겁먹은 건 아니지?”
“…….”
아무래도 미야는.
루체와 트러블을 겪고 나서 그 애의 역린인 나를 제대로 건드려볼 작정인 듯했다.
대련 같은 공식 행사에서라면 내가 미야에게 얼마나 호되게 당하든지 루체가 끼어들기 어려워지니까.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한테 좋은 뜻을 품었을 리는 없겠지.
어쨌든, 아무래도 서브 이벤트는 챙길 수 있을 듯한데….
‘이건….’
너무… 예상 밖이지 않냐.
* * *
“얼음 왕국, 뒤펜도르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제르베르 황국 북부, 화이트클락 공작령엔 하루도 빠짐없이 눈이 내린다.
화이트클락 공작 가문. 태초의 빙제가 사역마로서 부렸던 백룡을 상징으로 삼고 있으며, 이 세상을 크게 뒤엎을 비밀이 그 가문 대저택 지하실에 숨겨져 있었다.
화이트클락 대저택, 지하 원탁 회의실.
고급스럽고 호화로운 외관. 그러나 발광 램프만이 미약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기에 회의실은 어두운 편이었다.
원탁을 중심으로, 각 상석에는 원소로 이루어진 형상이 앉아 있었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형상. 염제.
번개로 이루어진 형상. 뇌제.
물로 이루어진 형상. 도제.
응축된 바람으로 이루어진 형상. 풍제.
진행자이자 분홍빛 머리칼의 차기 북부대공녀, 에이첼 화이트클락은 세계를 쥐고 흔들 수 있는 강자들을 앞에 두고 정중한 자세로 서 있었다.
원왕 회의.
정기 회의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며, 간혹 세계적인 규모의 안건이 생겼을 시 한 명 이상의 발의로 긴급회의가 열리기도 한다.
원왕 회의의 진행자로서 발탁된 자가 바로 화이트클락 공작 가문의 에이첼 화이트클락.
긴급회의에는 대체로 모든 원왕이 참석하지 않는다.
자기 나라에 해가 될 만한 사항이 아니라면,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기로 한 게 그들만의 약속이었기 때문.
애당초 흥미로운 사안이 아니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 적어도 세계멸망을 상정할 수준이 아니라면 위기감조차 못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긴급회의 안건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이례적으로 현 원왕 4명이 모두 참석했다.
“차기 빙제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뒤펜도르프라…. 하긴, 모르는 편이 이상하겠구만. 껄껄….]나이를 지그시 먹은 노인, 염제의 목소리가 원탁 회의실을 울렸다.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 소리를 흘리는 염제. 그는 길쭉하게 흘러내리는 턱수염을 가볍게 짜내듯 쓰다듬었다. 그러자 불꽃이 일렁였다.
얼음 왕국, 뒤펜도르프.
강대한 얼음 마수들과 강력한 힘을 지닌 서리종족 인간 후예들로 구성된 나라.
천변이나 지변의 경지에 이른 얼음 마수들, 빙퇴웅이나 상귀, 태동악도 뒤펜도르프를 고향처럼 여기고 있었다.
태초의 빙제가 생을 마감한 이후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왕의 자리는 공석이었고.
뒤펜도르프의 국민들은 줄곧 새로운 빙제의 탄생을 고대하고 있었다.
평화를 사랑하는 에이첼 화이트클락은 뒤펜도르프의 행적을 매 순간 감시해 왔다. 그리고 최근 들어 그 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황을 포착한 것이었다.
“백룡과 빙결의 원옥마수가 주인으로 섬기는 자, 차기 빙제, ‘이름 없는 영웅’.”
에이첼은 눈을 내리깔았다.
“작년부터 메르헨 아카데미에 마족이 출현할 때마다 퍼져 왔던 빙제의 기운을, 뒤펜도르프에서 못 느꼈을 리 없습니다. 특히 원옥마수의 마력이 잠시간 퍼졌던 게 결정적이었죠.”
태초의 원왕마저 초월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물 중의 괴물.
이 자리에 있는 원왕들조차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강자, 차기 빙제.
원왕이 다스리는 각 나라는 제르베르 황국과 웬만해선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기로 조약을 맺었다.
부유섬이 제르베르 황국에 출현했든 말든, 그 피해가 자기 나라에까지 미치지 않는다면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차기 빙제는 제르베르 황국 소속인 메르헨 아카데미에 있다.
그 사실은 분명하나, 원왕은 아무도 아카데미에 찾아가지 않았다.
조약 문제와 더불어 차기 빙제를 존중하려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한번 보고 싶네에. 기왕이면 가냘프게 생긴 남자애였으면 좋겠네요. 그럼 성심성의껏 귀여워해 줄 텐데….]자기 뺨을 쓰다듬는 물의 원왕, 도제. 성숙한 여인의 형태와 목소리였다.
[도제, 차기 빙제는 자네의 변태 성욕을 들이밀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네.]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자울 씨. 전 단지 새로운 빙제에게 잘 보이고 싶을 뿐이랍니다.]번개 원소 형태의 남성 형상, 뇌제의 지적에 도제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꽤 위험할 것 같거든요, 차기 빙제는.]도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마도, 조만간이겠구만.]“예. 뒤펜도르프가 새로운 왕을 맞이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염제의 말에 대답하는 에이첼.
공기가 가라앉았다. 이 세계의 최강자들도 긴장감을 품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에이첼은 애써 놀라움을 숨겨냈다.
메르헨 아카데미 2학년생, 아이작.
얼음 왕국, 뒤펜도르프의 국민과 대량의 병력, 재앙의 얼음마수들이 일제히 그를 왕으로 섬기리라.
백룡과 원옥마수까지 품은 그가 얼마나 강대한 원왕이 될지는 그 누구도 가늠할 수 없었으니.
세계를 이루고 있는 힘의 균형이 새로운 형국을 맞이하게 될 터.
어쩌면 조만간,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원왕이 탄생할지도 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