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90)
* * *
‘힐드. 틈 보다가 몰래 벗어나서 카야 데려와.’
[어쩔 셈이냐? 저 여자는 네 힘으론 이길 수 없을 텐데?]‘내가 이길 거야.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
[…알았다. 반드시 살아남아라, 주인. 돌아가면 내 애교를 마음껏 맛보게 해주겠다.]‘필요 없어.’
[……!]옷깃 속에 작은 마력의 형태로 숨어 있는 빙설룡-힐드에게 명령을 내렸다.
미야의 감시꾼 하수인은 내가 야외 대련장에 이르자마자 사라졌으니 이제 빙설룡이 움직여도 문제는 없으리라.
가장 주의해야 할 괴묘-체셔는 지금쯤 폐막식의 열기에 흠뻑 빠져 있을 터.
중요한 건 무녀 미야에게 들키지 않고 빙설룡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미야는 저번 대련 때처럼 방심하지 않고 처음부터 구미호의 힘을 발현했다.
이미 구미호의 힘을 개방한 그녀는 나 혼자만의 힘으론 이길 수 없었다. 전투 경험 차이도, 신체 능력 차이도, 알량한 전술도, 저리도 강한 힘 앞에선 그저 무의미할 뿐.
‘꼬리 세 개….’
그렇다고 저 모습이 미야의 전력인 것도 아니었다.
구미호의 꼬리에는 많은 양의 마력이 저장되어 있으며, 마법 출력을 높여주는 효과를 가진다.
즉, 꼬리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미야의 힘은 강화되며.
마지막으로 아홉 개째 꼬리가 나왔을 때가 그녀의 전력이 온전히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조금씩 압박할 작정인가.’
꽤 악질적인 심리였다. 바로 꼬리 아홉 개 다 꺼내지, 영 시원하지 못하네.
지금 미야의 그림자 속에는 그림자 마족이 숨어 있다. 그녀 자신도 모르는 틈에 숨어든 것이었다.
그림자와 일체화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지만, 미야가 구미호의 힘을 온전히 발동한다면 그 힘을 잠식할 것이었다.
그리 되면 나는 마족 한정 깡패가 되어 미야와 마족을 동시에 박살 낼 수 있다.
따라서 미야가 아홉 개째 꼬리까지 모두 꺼낼 수 있도록.
녀석의 공격을 버텨가고 반격하며, 이 싸움을 고양시켜야만 할 터.
‘나쁘지 않아.’
바보 같게도 어째 흥분감이 느껴진다.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
목숨을 건 전투는 수백 번의 대련보다도 좋은 자양분이 된다.
악신을 쓰러뜨리기 위한 여정에서 이런 경험 하나하나는 무척이나 귀중했다.
화르륵!
검은 부채에 화염을 휘감는 미야.
이제 저 지겨운 새끼와 결판을 낼 때가 왔다.
* * *
카가광! 화르륵!!
“계속 도망쳐 다닐 거야, 선배? 그때처럼 날 병신으로 만들어 보라고!”
오로지 두 사람만 있는 야외 대련장. 미야의 붉은 화염이 어둠을 몰아냈다.
구미호의 힘을 일부 발현한 미야는 강력한 화염을 사방으로 퍼뜨렸다. [화염 폭풍]을 제 주위로 상시 머금은 것이었다.
마력이 멈추지 않고 빠르게 소모되겠지만, 그조차도 문제 되지 않을 만큼 미야의 마력은 차고 넘쳤다.
아이작은 주위를 내달리며 빙결 마법과 바위 마법으로 반격했고.
대련장에서 벗어나 관중석으로 뛰어올라가곤, 관중석을 밟아가며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미야의 화염을 피해 다녔다.
어느새 오른손은 마법 주머니에서 꺼낸 잔야의 지팡이를 움켜쥔 채였다.
새벽녘의 자연 마나를 머금은 마석에 빙결 마력이 깃들었다. 난이도 높은 마력 운용을 삽시간에 해낸다.
강도 높은 빙결 마법이 미야의 화염에 맞대응했다. 붉은색과 연푸른색이 한밤의 풍경에 덧칠된다.
콰아앙! 하는 폭음과 함께 불길이 상쇄되고.
피어오르는 새하얀 수증기 속에서 아이작과 미야는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새 강해졌네? 마력이 더 정갈해졌어.”
미야는 화염을 갈무리했다.
느끼기로, 아이작의 마력은 저번 대련 때보다 밀도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구미호의 꼬리를 세 개 개방했지만, 이 정도로는 저 청은발의 선배를 이길 수 없으리라.
순수한 마력량은 자신이 우위라고 해도 그 차이를 좁힐 수 있는 부가적인 능력이 아이작에게 있었다.
분노라는 감정을 어느 정도 몰아낸 뒤로 미야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 이성이 그녀에게 이르길.
아이작, 저 남자는 천재다.
단지 자신의 재능을 늦게 개화한 것뿐.
‘아니면.’
저 남자가 이름 없는 영웅이라든가.
즉, 진정한 힘을 천천히 개방하며 일부러 성장한 척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힘을 숨기고 있다면, 행동 제약을 완화시키는 데 ‘성장’이라는 핑계만큼 좋은 것도 없잖은가.
영 탐탁지 않은 가정이었으나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이기도 했다.
자기 몸과 마음을 바치고 싶은 남자가 저런 비실이라니. 상상만 해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절로 조소가 튀어나오고 만다.
미야는 당연히 그 가능성이 틀릴 거라 여기며 아이작을 쏘아 보았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
미야의 손에 들린 고급스러운 검은 부채 끝자락엔 붉은 화염이 모닥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 뒤에선 화염 꼬리 세 개가 춤추듯 살랑거리며 유유히 빛났다.
“선배가 싫었어. 어떻게든 대련 때 날 모욕한 죗값을 치르게 만들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감정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그러니까… 선배가 꽤 쓸 만한 버러지처럼 보이더라구.”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아이작이 숨을 고르며 묻자, 미야는 화염을 머금은 검은 부채로 입을 가렸다.
그녀가 눈웃음을 흘렸다.
“내 밑으로 들어와.”
“뭐라는 거냐…?”
“내 밑으로 들어오면 부와 명예를 약속할 수 있어. 화봉국-호란의 무녀로서 맹세해. 선배같이 앞뒤 분간 못 하는 천민한텐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지?”
“하.”
한숨이 푹 꺼졌다.
아이작은 바로 뒤에 있는 관중석에 앉고는 잔야의 지팡이를 어깨에 걸쳤다.
[심리 간파]가 주는 힌트 없이도 미야의 의도를 헤아리기란 무척 간단했다.“야. 묻는 게 늦었는데, 너 폐막식은 어쩌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
“정말로 늦긴 했네, 묻는 게.”
미야는 경기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정 밖인 이 먼 곳까지는 폐막식의 신나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축제의 열기만큼은 피부에 전해져 오는 듯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미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 분신이 알아서 해 줄 거야.”
“네 사역마 능력이야?”
“잘 아네. 맞아. 마에는 온갖 술법에 능하니까.”
“대리 출석할 때 편하겠네.”
“선배…, 너무 긴장감 없는 거 아니야? 폐막식 말고 선배 걱정이나 하지 그래?”
화봉국의 무녀가 구미호-마에를 부린다는 사실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다.
그 구미호의 능력 중 하나, 분신술. 제 주인인 미야 또한 그 힘을 빌려 분신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의사소통은 안 되겠지만, 폐막식에서 단순히 춤만 출 뿐이라면 분신도 충분히 가능했다.
“어쨌든 뭐, 내가 네 꼬봉이 되면 부랑 명예를 준다…. 맞지?”
“웬일로 말이 통하네. 봐. 난 이 세계의 동방을 점한 사람이야.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 …조건이 있지만.”
“뭔데?”
미야는 피식 웃으며 오른쪽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손가락 세 개. 검지랑 중지, 엄지면 되겠네. 그걸로 선배가 버르장머리 없이 군 모든 행위를 용서해주고, 부유한 삶을 약속해 줄게.”
“…….”
“날 건드린 죗값치곤 많이 봐준 거야. 고작 손가락 세 개로 내 화를 잠재우고 일평생 천향국색을 주군으로 섬기게 된다…, 이렇게 수지타산 안 맞는 제안이 또 어디 있겠어?”
미야는 아이작의 손가락만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아이작이라는 인재가 욕심나는 건 사실이지만, 이미 분노와 혐오감이 쌓일 대로 쌓여 버렸으니.
그의 손가락을 날려 보낼 기회가 온다면, 손가락 마디마디를 천천히 날려 버리고 마지막엔 실수인 척 손목까지 없애 버릴 작정이었다.
그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오싹한 쾌감이 느껴질 터. 필시 그녀가 느끼는 분노가 어느 정도는 가라앉으리라.
“어때?”
“흐음.”
아이작은 고개를 들고 고민하는 척하다가, 미야를 향해 차분하게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후후.”
미야는 서늘한 웃음소리를 흘리더니 검은 부채에 흐르던 불꽃의 위력을 드높였다.
화염이 강렬하게 뻗어 나왔다.
화아아악!!
미야가 부채를 휘두르자 불길이 매서운 기세로 몰아쳤다. 아이작은 옆으로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 [화염 폭풍]을 피하고는 원소 마법을 휘둘러 대항했다.
마력 밀도가 드높은 화염이었다.
마치 방어 기제를 가진 무형의 생명체가 그녀를 철벽처럼 지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대를 몰아세우지 못 하는 건 무녀 미야도 마찬가지였다. 꼬리 세 개의 힘만으론 역부족이다. 이대로는 지구력 싸움만 될 뿐.
화력을 두 배로 더한다.
미야는 꼬리 세 개를 더 뻗어냈다. 살랑거리는 화염 꼬리가 여섯 개. 여우 꼬리의 형상이었다.
그리 꼬리가 늘어날 때마다 미야의 마법은 그 위력과 온도가 기세를 더해갔다.
이제는 그저 태우는 불꽃이 아니다. 깨부수고, 휩쓸어 낸다.
화르르륵! 콰아앙!
“선배! 난 갖고 싶은 걸 못 가지면 부수고 싶어 지거든! 저항할 수록 불리해질 뿐이라고! 평화롭게 가자! 응?!”
“…….”
아이작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의 표정엔 일말의 당혹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의 선한 눈매와는 대조되는 냉철한 눈매가 전황을 살피고 있었을 뿐.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면 그에 맞춰 대응할 뿐이었다.
이어지는 미야의 불꽃을 아이작은 능숙하게 대처했다. 마치 예전부터 그녀와 수도 없이 싸워 본 사람처럼 공격 패턴을 속속들이 꿰차고 있었다.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관중석을 가로지르는 아이작. 미야 주위를 에워싸고 소용돌이치는 위협적인 [화염 폭풍] 탓에 접근이 차단되는 것을 넘어, 점차 행동반경이 좁혀져 갔다.
맞닿을 뻔한 화염은 고강한 빙결 마법으로 어떻게든 상쇄했다.
“정말이지…. 그 정도야? 고작 그따위 실력으로 나한테 대든 거였어?!”
복잡한 감정이 미야를 흥분시켰다.
그녀는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올 만큼 두 눈을 부릅뜨고 깔깔대며 일곱 번째 꼬리를 뻗어냈다.
“큭!”
화염 원소 마법에 직접 닿지 않더라도 피부가 이글거리며 타들어 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이작은 온몸에 휘감은 냉기를 더욱 거세게 퍼뜨려 화상을 완화했다.
“크흐, 우습네.”
미야는 흙먼지와 매캐한 연기를 해치며 계속 도망쳐 다니는 추레한 사내를 두 눈으로 쫓았다.
극명한 마력 차이. 구미호의 힘을 머금은 자신이 저 청은발의 선배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빼어난 전투 감각과 관찰력으로 그 차이를 어떻게든 메우고 있었다.
저런 인재는 찾아보기 어렵다.
화봉국을 다스리는 무녀의 지위에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며 폭력적으로 이득을 취해온 폭군, 미야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라는 족속은 몸값이 매우 비싸다.
이곳이 메르헨 아카데미라, 재능 있는 녀석들이 모여 있어 마법을 잘 다루는 사람이 흔할 뿐이지.
외부로 나가면 6성급 마법만 휘둘러도 평민이 준귀족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더군다나 7성급 이상의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 용역은 부르는 게 값이거늘.
저 남자는 무엇인가.
이미 6성급 마법을 익힌 데다 마법사 지망생답지 않은 뛰어난 신체 능력까지 겸비했다.
거기다 저번 대련 때 미야 자신을 몰아세웠던 전투 감각까지 갖추었으니.
저만한 능력이라면 얼마 안 가 7성급 마법을 다룰 수 있는 경지에도 이르겠지. 가히 말도 안 되는 잠재력이었다.
‘갖고 싶다.’
훌륭한 인재다.
하물며 저 남자를 가지면 루체 엘타니아라는 압도적인 천재까지 딸려 올 터.
그러므로 어떻게든 아이작을 가져야만 했다.
좋다. 우열을 가리자.
내가 더 강하다는 사실을 여기서 증명해 주마. 내 힘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겠다.
나는 이 세상을 지배할 여자다. 군주로서 군림할 신녀다.
이 아카데미는 그 목적을 위해 한번 거쳐 갈 과정일 뿐.
그러니 내게 용서를 구하고 내 밑으로 들어와라.
설령 네놈이 원치 않더라도 상관없다. 이 몸의 방식을 고수하면 될 터이니.
그의 소중한 사람을 인질로 잡는다.
눈을 뽑거나 피부를 벗기거나 팔다리 하나 정도 가져가면 알아서 빌빌 기며 사정하지 않겠는가.
부디 자신을 수하로서 써달라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내 말을 듣지 않는 네놈이 맞이할 미래란 그런 것이다, 아이작.
미야는 그리 속으로 말하며 아이작에게 연신 화염 마법을 퍼부었다.
“이든!”
[구우!]바위 골렘 사역마, 이든이 아이작 주위로 나타났다.
이든은 제 몸에 바위 갑주를 덧씌워 전투형으로 몸집을 키웠고, 아이작 손에 바위 방패를 만들었다.
이든은 관중석을 박차고 미야를 향해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크기를 키운 바위 주먹이 미야를 노렸다.
다른 방향에선 아이작이 바위 방패를 내세우고 도약했다. 최대 출력으로 온몸에 냉기를 휘감으며 [서리불꽃]을 발산한다.
아이작이 뿜어 대던 [서리불꽃]은 [화염 폭풍]과 함께 소용돌이치며 잠시간 수증기를 만들어내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한편, 잔야의 지팡이에선 빙결 마력이 응집되어 연푸른빛 마법진이 따라오고 있었다.
5성급 얼음 원소 마법, [빙결 폭발]의 법진.
아이작은 바위 방패를 내세워 화염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며 [빙결 폭발]을 시전할 셈이었다.
“후후! 기껏 한다는 게 그거야?”
무모한 선택이다.
미야는 여덟 번째 꼬리를 내보냈다. 그녀에게서 붉은 화염이 증기처럼 뿜어져 나와 아이작과 이든을 뒤덮었다.
파아아아!!
“끄윽!”
아이작은 온몸을 웅크려 바위 방패에 몸을 숨겼으나, 거친 화염이 그를 공처럼 날려 보냈다.
[빙결 폭발]은 발동되다 말고 고온의 화염에 잡아 먹혀 무력화되었다.이든도 속수무책으로 화염에 밀려났고, 제 주인과 함께 관중석에 처박혀 버렸다.
콰앙! 하고 관중석이 박살 나고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바위까지 녹여내는 화염 탓에 이든은 삐걱거리며 끄욱, 하고 신음을 뱉어냈다.
그때, 대련장에서 스으으 미끄러지며 미야를 향해 나아가던 단검이 있었다.
화르륵!
그러나 그 단검은 지면에서 솟구친 화염 원소 마법 [불기둥]에 무력하게 튕겨 나갔다.
“또 그 수작…. 질리지도 않나 봐?”
아이작은 이든과 함께 미야의 시선을 교란하며 몰래 재해의 검집을 날렸으나.
이미 그 마도구에 당한 적이 있던 미야는 그의 수작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재해의 검집에 새겨진 마법진이 연푸른빛을 뿜어 내다 허무하게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마법진의 빛은 금세 사그라졌다.
아이작은 뜨겁게 달아오른 바위 방패를 옆으로 내던졌다. 텅텅,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던 방패는 이내 마력의 형태로 변해 공기 중에 흩날렸다.
팔을 휘둘러 흙먼지를 날려 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을린 교복. 청은발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다.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고.
머리칼 사이로, 서리처럼 가라앉았으나 전의를 머금은 칙칙한 적색 눈동자가 오롯이 미야를 향했다.
담담하고, 우직했다.
‘그 기개다.’
미야는 그 모습이 탐스럽게 익은 나무 열매처럼 보였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가득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데다 자신처럼 힘의 차이가 압도적인 적을 상대로도 주눅 들지 않는다. 의지를 다지고 오로지 적을 쏘아본다.
훌륭한 기개였다. 역시 갖고 싶었다.
“선배, 이제 어쩔…?”
아이작이 잔야의 지팡이를 내밀었다. 마석이 빛을 뿜어낸다.
고오오오….
미야는 머리 위에서 묵직한 마력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치켜들었다.
[화염 폭풍] 속에서 어느새 연푸른빛 마법진이 완벽하게 전개된 상태였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이작은 시간을 들여 6성급 얼음 원소 마법의 전개식을 연산했던 것이다. [서리불꽃]이 [화염 폭풍]에 휩쓸리며 잠시간 일었던 충돌이 마법진이 구축되는 과정을 가려 냈고.미야는 마지막으로 재해의 검집에 신경이 쏠려 아이작의 마지막 수를 단번에 깨닫지 못했다.
마법진 아래로 무언가 튀어나와 있었다. 위험해 보이는 연푸른빛 구체였다.
미야가 그것을 목격했을 때는 이미, 마법이 발동되고 있었다.
화아아아아!!!
미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6성급 얼음 원소 마법, [서리혁작].
고밀도의 두꺼운 얼음 송곳이 소나기처럼 빗발친다. 구미호의 힘을 머금은 [화염 폭풍]으로도 저 공격은 막을 수 없으리라.
“…후훗.”
그러나 이내, 미야는 히죽거렸다.
마지막, 아홉 번째 구미호의 꼬리가 튀어나오며 순식간에 강력한 방어 체계가 구축되었다.
지면에서 화염 마력이 수 갈래의 줄기로 튀어나와 나선형으로 뻗어 나갔다. 눈 깜박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기가 뜨겁게 달구어진다.
화염 마력은 화르륵, 타오르며 응집되었고.
곧, 폭발적으로 화염을 쏟아 냈다.
콰아아아앙!!
화염 기둥이 광선처럼 맹렬한 기세로 치솟아 [서리혁작]을 몰아내고, 고밀도의 마력으로 뭉친 구체를 잡아먹는다.
6성급 화염 원소 마법, [폭렬파].
엄청난 수증기 폭발에 관중석이 우르르 박살 났다.
아이작은 다급히 바위 마력이 깃든 얼음의 벽, [화석빙]을 전개했으나 폭발의 여파는 그 벽마저도 풍비박산 내고 그를 날려 보냈다.
“으윽!!”
아이작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대련장 끝자락에 몸을 부딪혔다. 벽이 무너져 내리고, 그 틈에서 아이작은 신음을 흘렸다.
뼈가 부러진 듯했다. [기초 보호 마법]을 칭칭 둘러대도 큰 충격에는 어찌할 수 없는 법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힘이 쭉 빠져나갔다. 이를 악물고 애써 온몸에 힘을 주었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아이작을 짓눌렀다. 이제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마력량 차이.
고개를 들었다.
대련장을 메운 [화염 폭풍]은 온화한 꽃잎 바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7성급 화염 원소 마법, [앵화]였다.
저 꽃잎 하나하나에 닿으면 [화염 폭풍]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폭발에 휩쓸리고 말 터. 아무리 방어 마법을 칭칭 둘러대도 신체가 날아갈 각오를 해야 했다.
[앵화] 속.밤하늘 아래, 대련장 가운데.
아홉 개의 화염 꼬리를 살랑이며 불꽃을 휘감은 소녀가 있었다.
연한 붉은빛으로 변한 머리칼은 끝자락이 화염의 형태가 되어 이글거렸고.
붉은 눈동자는 성스러운 기운마저 느껴질 만큼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동방국의 주인이자 신녀로 인정받는 존재, 홍련의 무녀.
갖고 싶은 건 가져야만 직성이 풀리는, 동방의 폭군이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게. 아니…, 명령이야.”
구미호의 힘을 모두 개방한 무녀, 미야가 말했다.
“내 밑으로 들어와. 내 수하가 돼서 빌빌 기라고. 부와 명예를 제시해도 그렇게 꺼려한다면, 나도 폭력적인 수단을 쓸 수밖에 없어. 그건 너무 슬프잖아?”
“…예를 들면?”
아이작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피 가래 섞인 목소리로 애써 대답해 본다.
“선배의 소중한 사람을 건드릴 거야.”
“왜…?”
“선배 정 많은 거 대놓고 티 냈으면서 뭘. 보잘것없는 년 하나 조져 놨다고 눈에 불을 켜고 나한테 달려 들었잖아. 그런 선배의, 스노우화이트 황녀보다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을 건드리면…. 선배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싱긋 웃던 미야의 표정이 싹 굳었다.
“선배 엄마 찾아내서 눈구멍을 내줄까 해. 그런데도 선배가 내 밑에 들어올 생각이 안 든다면, 다음엔 가죽을 벗겨낼 거야. 그래도 내 말을 안 따른다면….”
“지랄…하지… 마….”
털썩.
아이작의 목소리가 흩어졌다.
그는 눈을 감고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미야는 잠시 당황했으나, 할 말은 마치고 보냈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꼈다.
“후후, 벌써 기절하면 시시하잖아. 아직 재미 보려면 멀었….”
미야는 아이작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때.
그녀의 뒤, 칠흑 같은 어둠이 지면에서 암살자처럼 슬그머니 치솟았다.
마력은 발산되고 있지 않았다. 기척조차 없었기에 미야는 깨닫는 게 늦어졌다.
깜짝 놀란 그녀는 냉큼 고개를 뒤로 돌렸고.
[그 힘, 내놔라.]어둠의 형상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미야를 집어삼켰다.
“끄아악…!”
미야는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했다. 그녀의 육신과 마력이 점차 어둠 마력에 휩싸여 갔다.
그림자 속에서 비죽 튀어나온 사람 머리에선 세 쌍의 눈과 삼각형처럼 새겨진 세 개의 입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미야! 미야!! 으윽, 네놈은 뭐냐?!]구미호의 다급한 외침이 대련장을 울렸으나, 그 마수 또한 얼마 안 가 목소리를 잃어 버렸다.
뻗어 있는 아홉 개의 꼬리가, 미야의 몸을 휘감은 화염이, 모두 어둠의 색으로 물들었다.
주위를 휘감고 있던 7성급 화염 원소 마법, [앵화]의 색도 아름답고도 영롱한 붉은색에서 혼탁한 검은색으로 뒤바뀌어 갔다.
그림자 마족은 무오오오, 하고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마침내 미야의 힘을 온전히 흡수했고.
검은 마력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미야의 얼굴에서, 세 쌍의 눈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그 마족에게서 미야가 옆으로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미야의 힘을 취한 마족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성취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마족…!”
미야는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며 화염 마법을 휘두르려 했으나,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아 충격에 빠졌다.
그림자 마족의 희기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
아이작은 한쪽 눈을 슬쩍 뜨고 그 광경을 목도했다. 일부러 기절한 척한 것이었다.
시야각이 잡힌다. 각도를 상정해서 쓰러졌으니 당연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8막 2장, 홍련의 무녀」에서 미야를 저지하다 보면, 그녀는 구미호의 아홉 번째 꼬리까지 모두 뻗어 마침내 전력을 드러낸다.
그리 되면 그녀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마족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놈이 바로 8막의 최종 보스인 그림자 마족이었다.
[신밀의 에르메토나]Lv :180
종족 : 마족
속성 : 어둠, 불
위험도 : 최상
심리 : [ 무녀와 구미호의 힘을 빼앗는 데 성공하여 기뻐하고 있습니다. ]
‘나왔네.’
「8막 3장, 그림자 무녀」.
8막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드디어, 모든 힘을 꺼냈구나….]“커헉!”
신밀의 에르메토나는 미야의 목을 움켜쥐고 그녀를 일으켰다.
미야는 에르메토나의 팔을 붙잡고 괴로워했다. 제 형태를 쏙 빼 닮은 어둠의 존재에게 수 차례 발길질을 해보았으나,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눈이 뒤집혀 갔다. 숨구멍이 꽉 막혀 눈물과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화염 마법을 휘두를 수 없는 미야는 그저 약해 빠진 한 명의 소녀에 불과했던 것.
힘의 원천이 죽어 버리면 에르메토나는 기껏 얻어낸 힘을 잃고 말 것이었다. 따라서 미야를 죽일 순 없었다.
단지 그 마족은, 미야를 상대로 누가 우월한지 실감시켜 줄 작정이었다.
[기다리느라 힘들었다.]퍼억!
“으극…!”
목이 졸린 미야의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는 에르메토나.
[지쳤다. 자살할 뻔했다. 난 참을성이 없으니까. 내 목숨을 끝낼 뻔했어. 난 지능이 없다. 난 멍청하다. 난 한심하다. 하지만 빼앗았다. 이 힘을 빼앗았다…! 하지만 내가 혐오스럽다…! 난 미련하다! 난 초라하다! 난 죽어야 마땅하다!!]“그윽, 으그아악…!”
찰싹! 퍼억! 콰악! 퍼억! 콰작!
에르메토나는 빠른 속도로 한마디씩 내뱉으며 미야의 얼굴을 반복해서 후려쳤다.
무릎으로 미야의 복부를 가격하고, 발차기로 미야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끄우우욱…!!”
미야는 목이 졸리고 있는 탓에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고개가 돌아가지도 못했다. 그저 충격을 온전히 받으며 숨 넘어가는 소리만 껄떡일 수밖에.
그녀의 아름다웠던 얼굴은 어느새 흉측한 피 떡이 되어 있었다.
그림자 마족, 신밀의 에르메토나는 음침하며 자기 혐오가 심하다. 그는 내내 혼잣말로 자기 비하를 할 뿐이었다.
그 어떤 생물이라도 자신을 쳐다 보면, 자신을 무시하는 줄 알고 처참하게 찢어발겨 버린다. 극단적으로 낮은 자존감 때문이었다.
‘더럽게 힘들었네….’
어차피 에르메토나는 미야를 죽이지 않는다. 오히려 힘의 원천인 그녀를 아끼기 위해 선을 지킬 것이었다.
그러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처맞아라.
에르메토나는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 미야가 숨 막혀 죽기 전에 목을 풀어 주고, 다음엔 팔을 잡아 연신 그녀를 샌드백처럼 걷어찼다.
상하 관계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힘의 진정한 주인인 미야를 매일 폭행함으로써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매일 그녀의 힘을 착취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아이작.
그의 몸에 붙어 있던 부스러기들이 떨어지며 투둑투둑 지면에 부딪혔다.
[……?]그림자 무녀, 신밀의 에르메토나는 “꺼허억….”하고 처절한 숨소리만 흘리는 미야의 팔을 놓았다.
철퍼덕, 하고 미야의 육신이 대련장에 널브러졌다. 피멍으로 부풀어 오른 얼굴, 뒤틀린 관절, 더러운 의복. 너덜너덜한 걸레짝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콰직. 에르메토나는 미야를 짓밟고서 세 쌍의 눈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뭐냐? 내가 머저리라고, 한심하다고, 추잡하다고, 날 무시하는 건가? 날 깔보는 거냔 말이다!]콰악, 콰악.
“악, 아악….”
에르메토나는 미야를 연신 짓밟으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 탓에 그나마 멀쩡했던 뼈마저 가뿐히 부러졌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이성적인 사고조차 불가능했던 미야는, 그 고통을 마지막으로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뭐, 이제 됐다.
아이작은 한쪽 어깨를 잡고 목을 돌려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 후, 입안에 머금어진 핏물을 가래침처럼 퉤 뱉었다.
싸늘한 적빛 눈동자가 마족을 훑었다.
한편.
폐막식이 진행되던 경기장.
형화처럼 자그마한 백옥빛 형상이 카야 아스트레앙에게 이르러 그녀의 머릿속에 말을 걸었다.
빙설룡-힐드였다.
그 사역마는 아이작이 내린 지시사항을 카야에게 전달했고.
“아이작 님….”
카야는 표정을 굳히더니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뒤에 있는 통로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도로시가 [천라만상]의 힘으로 춤추는 무녀가 가짜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관중석을 떠나려는 때.
고오오오오.
그 누구의 것과도 비교되지 않는 무거운 마력이 경기장에 내려앉았다.
시끄러웠던 폐막식이 일순 조용해지며,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도로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멈칫했다가, 온몸에 별빛 마력을 휘감고 붕 떠올랐다.
루체나 팔라딘은 놀란 얼굴로 막대한 마력이 느껴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석에 있던 앨리스는 두 눈을 감고서 생각을 정리했고.
그녀 옆에 있던 괴묘-체셔는 올 게 왔다는 듯 기괴한 미소를 흘렸다.
교직원, 황실 기사단은 다급히 상황 파악에 나섰다.
그렇게, 순식간에 축제의 현장은 혼란과 수군거림으로 들어찼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히 알아차렸으니.
희대의 대마법사.
이름 없는 영웅이 나타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