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90)
나는 루체에게 옷을 빌려주었고.
그녀는 젖어 있는 원피스와 속옷을 벗은 뒤 내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과정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인간적인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시간이 흘러, 현재.
루체는 내 침대에 앉아서 조용히 방안을 관찰하듯 고개만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나는 부엌에서 타온 홍차가 든 찻잔을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주거침입자에게 건넨 뒤.
내 찻잔만 들고 책상 의자에 비스듬히 앉았다.
지금 그녀는 하얀 교복셔츠와 바지 차림이다. 내가 빌려 준 옷이다.
남성용 셔츠라 소매가 그녀의 손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아이작 방 처음 와봐. 생각했던 것보다 깔끔하네.”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내는 루체. 따스하고도 아름다운 음색이었다.
자연스럽네. 뭘 진짜로 초대받은 손님처럼 감상을 늘어놓고 앉았냐.
나는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너 여기 오면 안 되는 건 아냐?”
“그, 나도 나름 계획이 있어서 그런 건데….”
제 딴에는 서프라이즈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
아까 루체가 준 종이봉투에는 쪽지가 한 장 붙어 있었다. [저번 일은 미안했어 – 루체가]라는 내용을 읽고서, 그녀가 내 방에 몰래 찾아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보다,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루체는 각오에 찬 눈빛을 보내 왔다.
역시나, 그게 목적이겠지.
비장한 태도를 보이는 거야 물론 이해한다. 타인에게 마음을 닫은 후로 사과다운 사과는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하물며 아예 사과 자체를 목적으로 나를 찾아온 경우가 처음이니. 나름대로 이것저것 준비해왔을 테지.
나는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사교회 때 일 때문에?”
루체가 내 손에 구속구를 채웠던 일을 떠올렸다.
“응. 네가 싫어한다고 한 일, 해 버렸잖아.”
“기억하곤 있네. 뭐, 해봐.”
“이걸로 네 기분이 풀릴진 모르겠지만….”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했지만, 어서 루체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루체를 살갑게 대해 버리면 그녀가 사과하러 찾아온 의의가 시원찮게 변해 버린다.
그녀의 각오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쌀쌀맞은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것.
잘 받아주자. 현실 나이는 내가 더 많으니까, 연장자로서 침착하게, 차분하게, 태평양처럼 드넓은 이해심으로 루체의 사과를 받아주자.
그리고 웃으면서 그녀와 대화를 마치고….
‘대련이나 부탁해야지.’
마침 잔야의 지팡이를 실전에서 써먹어 보고 싶었다.
루체는 지나치게 강한 상대지만, 되려 그렇기에 내가 어느 경지에 올랐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성장에도 도움이 될 터다.
나는 홍차를 들이키며 그녀가 내뱉는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가슴 만질래?”
푸헉──!
홍차가 뿜어져 나왔다.
미친 거야…?
“제정신…?”
콜록콜록, 헛기침하며 가까스로 물었다.
잘못 들었을 리 없었다. 루체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듯하면서도 사람의 정신을 끌어들이는 마성이 있으니까. 저절로 집중하게 만들어 단어 하나라도 무조건 귓구멍에 쑤셔 넣고 만다.
아무리 친구끼리 지켜야 할 선을 가늠할 줄 모르는 루체라고 해도, 기본적인 성적 지식까지 모르고 있진 않을 텐데.
루체는 뺨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꺼냈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책에서 이러면 남자가 좋아해 준다고…. 아니, 됐어. 미안해. 잊어줘.”
“어떻게 잊…?”
“잊어줘!”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굉장히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
목소리가 워낙 곱상하다 보니 고함마저도 찬연한 달빛처럼 은은했다.
‘루체야….’
절로 이마에 손이 턱 짚어졌다.
이토록 흐트러진 루체는 처음 본다. 내게 미움 받고 있을까 봐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고해성사하자면, 루체의 흉부에 눈이 간 적은 몇 번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저 굴곡을 봐라. 이는 남성으로서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숙명의 영역이었다.
아마도 루체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겠지. 그 탓에 나보고 변태라고 한 전적도 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을 서슴지않고 하면 어떡하냐….’
루체는 그 말을 뱉자마자 후회한 모양이지만.
안 되겠다. 그냥 내가 나서는 편이 효율적이겠다.
“아무튼, 나한테 미안한 거지?”
루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대련이나 하자. 그거면 충분히 용서될 것 같다. 괜찮지?”
“……!”
루체의 푸른 대양을 담은 듯한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얼른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이러면 얼마나 편해.
……
주말 오전 아카데미 길거리는 고요했다. 대부분 학생은 여러 시설에서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인적이 없는 나비 정원 구석.
콰가강──!
푸아아아아───!
수 시간 동안, 나와 루체의 원소 마법이 매섭게 교차했다.
아무리 잔야의 지팡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들, 루체의 원소 마법 앞에서는 위력이 천지차이였다.
온갖 속임수와 전략을 응용하지 않고선 루체에게 대항조차 할 수 없었다.
이윽고, 우리는 쉬었다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무 한 그루에 나란히 기대앉아 땀을 식히고, 조용히 숨을 골랐다.
“아이작, 굉장하다. 벌써 지팡이 다룰 수 있게 된 거. 다루기 시작했다고 한 지 얼마 안 됐잖아.”
국어책 말투로 칭찬하는 루체. 물론 진심으로 하는 칭찬이란 건 [심리 간파]로 간단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것도 1학기 때에 비한다면 어투가 상당히 자연스러워진 편이었다.
루체에게 잔야의 지팡이에 관한 얘기는 진작 했었다.
이런 지팡이를 다루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고유 특성 [무기술사] 덕분에 잔야의 지팡이를 손쉽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루체에게는 재능충처럼 보이고 있을까.
“아이작은 노력하는 것도 엄청난데, 성장 속도까지 빠른 것 같네.”
“1학기 때에 비하면 어떠냐, 나?”
“그때는 개미였다면, 지금은… 쥐 정도?”
“…….”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
슬슬 정오임에도 바람은 서늘했다.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터라 따뜻할 줄 알았는데.
“추워 보인다.”
나는 입고 있던 케이프숄을 교복셔츠 차림의 루체에게 둘러 주었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오늘 아이작 옷만 잔뜩 껴입네. 내 몸에 아이작 냄새 다 배겠다.”
루체는 즐거운지 헤헤, 하고 웃었다. 귀여워 죽겠네.
“그런데 아이작.”
“응.”
“내가 너 잡아두는 거, 그게 그렇게 싫어?”
그건 이미 얘기 끝난 줄 알았는데.
“전에도 말했잖아.”
“그러면….”
루체는 내게 팔을 내밀었다.
“한번 나 묶어볼래?”
…예?
“복수… 같은 거지. 아이작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궁금해지기도 했고. 그리고 이러면, 우리 문제 완전히 청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니까….”
대련하면서 내내 골똘히 생각했던 걸까. 고민 끝에 내뱉은 말이라는 티가 역력히 났다.
이제는 별생각 없었는데…. 아직 루체에게는 마음에 응어리가 져 있었나 보다.
나야, 그 행위로 루체의 마음이 풀린다면 좋은 일이지. 애당초 그녀가 역지사지하게 만들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있었고.
“…진짜 한다?”
“응, 얼마든지.”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루체의 양 손목을 붙잡고 그녀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얄찍한 팔. 루체는 조금도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
루체와 얼굴 거리가 가까운 탓에,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내심 긴장한 모양이었다.
“밧줄 같은 건 없으니까, 대충 원소 마법으로 떼운다?”
루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그녀의 양 손목을 맞붙이고, 마력을 흘려보냈다.
「바위 생성 (바위 속성, ★1)」
쿠우웅─.
루체의 양 손목에 두꺼운 바위 수갑을 채우고.
쿠우웅─.
맞붙어 있던 루체의 양 발목 쪽에도 마찬가지로 바위 족갑을 채웠다.
비록 루체의 물 마법에 가볍게 떨어져 나갈 원소 마법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단지 뚱한 표정으로 내 얼굴만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을 뿐.
나는 구속된 루체의 팔을 머리 뒤로 굽히게 하고, 그녀를 지근거리에서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위험하고 매혹적인 자태라 루체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무척 사랑스럽다. 그렇다고, 지금은 내 애정캐의 미모를 멍하니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아이작, 얼굴 가까워.”
별안간 루체는 뺨에 홍조를 띠고 은은한 미소를 내보였다. 여느 때처럼 여유로운 태도지만, 이번엔 쉽사리 당황하고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루체.”
“응….”
“마음대로 못 움직이겠지? 네가 나한테 한 게 이거야. 난 이게 싫은 거야.”
선생님이 학생을 타이르듯, 친절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다만, 미간을 살짝 찌푸려 진지한 인상을 내보였다. 내게서 미움 받기를 진절머리나도록 싫어하는 루체이니 필시 효과가 있을 터였다.
“남의 뜻대로, 내 몸을 마음대로 못 움직인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이제 좀 감이 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생각에 잠기는 루체.
이윽고, 그녀는 무슨 말을 할지 정했다는 듯 잔잔히 입술을 달싹였다.
“…솔직히, 나쁘지 않아.”
어째 새로운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들뜬 기색이 엿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눈빛.
루체는 평소에 내게만 보이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조곤조곤 속삭였다.
“이렇게 있으면 아이작이 매일 나 챙겨 주는 거지?”
폭력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음색이 내 귓가를 간질이고.
“그런 것도… 나쁘지 않겠다.”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당신을 독점하고 싶어 합니다. ]
‘어?’
역지사지 교육이, 의도와는 다르게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한 불길한 감각이 내 전신을 음산하게 감싸 돌았다.
루체의 음습한 습성이 수면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재촉함과 동시에, 새로운 속성까지 겸비시키게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고.
식은땀이 내 뺨을 타고 한 방울 뚝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