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51
51화
일주일 전, 펜릴의 집무실.
펜릴 백작은 가브의 발언에 순간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크흐,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용병 생활 15년이면 구렁이 열 마리는 똬리를 틀고 있을 텐데 신출내기 기사 놈 취급을 했어.”
펜릴은 금세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가브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힘, 그게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지는 알겠지?”
“전 백작님 조언대로 행동할 겁니다. 금전적인 부분 이외의 보상을 원하신다면 절 돕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렁이 같은 놈. 내가 뭘 하면 되냐?”
“저와 함께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내가 수락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구나.”
“예.”
“가자. 그래도 명색이 마법산데 호위병들은 데리고 가야지. 내 집에 들르자.”
“음…….”
“아, 이거 은근히 자존심 상하네. 내가 어디서 이렇게 비굴한 적이 없는데, 두 번이나…….”
“가시죠.”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감독관은 기사 시험관 둘과 함께 펜릴 백작의 저택까지 호위했다.
통치하기 귀찮다며 일부러 영지를 받지 않은 펜릴의 저택은 오래전에 지어졌는지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펜릴은 도착하자마자 가브의 눈치를 보며 빠르게 집으로 들어가 호위병들을 준비시키고 그사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앞섶의 단추가 밀려서 끼워져 있는 것을 보니 급하게 입고 나온 티가 역력했다.
“왜, 뭐?”
“아닙니다.”
“가자, 급하다며.”
펜릴은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하얀색 준마를 타고 먼저 앞장섰다.
번쩍이는 백금갑옷을 입은 기사 네 명과 그에 못지않은 중갑을 걸친 병사 스무 명이 말을 끌고 그 뒤를 따랐다.
가브는 펜릴의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며 물었다.
“호위가 많습니다.”
“마법사는 호위병 월급을 국가에서 챙겨 준다. 써먹을 수 있을 때 써먹어야지.”
그래서 전에도 그렇게 많이 데리고 지나간 것으로 추측된다.
예상보다 늦어져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가브는 별말 없이 따랐다.
수도 카르마에서 아이드 영지까지는 강행군을 해도 나흘은 걸린다.
그동안 가브는 펜릴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 주제는 보통 마나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나를 보고 만질 수 있게 되면 단전에 마나 핵이 생긴다는 거군요. 백작님도 여기에 마나 핵이 있는 겁니까?”
“예끼! 어디 남의 소중한 배에 삿대질을 해? 당연히 있지, 없으면 마법사겠냐?”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되십니까?”
펜릴은 한 손을 들어 모양새를 만들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아주 정확하게 느껴져. 이게 클수록 마법을 빠르게 완성시키고, 더 위력적으로 만들 수 있지.”
“핵은 마법을 만드는 매개체 역할이군요.”
“또 있어. 핵의 크기만큼 마나를 저장할 수 있지. 그 마나만큼은 마법을 즉시 시전할 수 있다, 전에 네 앞길을 막았던 실드처럼.”
“아…….”
“그걸 내가 뾰족하게 만들었다면 손이 잘렸을 거다.”
“모양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군요.”
“기사 놈이 뭐 그렇게 마법에 관심이 많냐?”
가브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앞을 보며 대답했다.
“적이 마법사가 아니리란 법은 없잖습니까?”
“무슨 세상 사람들하고 다 싸울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평생 마법사랑 마주치기도 힘들 거다. 쓸데없는 걱정 말아.”
“…….”
가브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펜릴에 의하면, 마나를 보고 만질 수 있게 되어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췄다면 본능적으로 마나 핵을 생성할 수 있다고 한다.
마법사가 되는 정형화된 방법은 따로 없다.
살다 보면 우연히 마나에게 선택받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점으로 보이는 마법사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은 있다.
마나 핵을 만들면 기사처럼 신체 곳곳에 마나를 깃들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나는 오로지 마나 핵에만 모을 수 있는 것이 마법사의 유일한 단점이자 약점이었다.
마법사는 기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기사가 마법사가 될 수는 있습니까?”
“한 명도 못 봤어. 아마 그게 마나에게 선택받는 조건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그렇군요.”
가브는 펜릴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귀담아들었다.
그레이 남작의 별장 안에도 강력한 흑마법사가 존재한다.
리치는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만 아니라 흑마법도 자유자재로 다룬다.
발튼을 무너트린 결정적 이유도 마법이었다.
흑마법사를 찾을 순 없으니 마법사를 상대하는 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놈들의 대가리를 으깨 버려라!”
“와아아아아아!”
뒤이어 들려오는 함성 소리. 가브와 펜릴의 눈이 마주쳤다.
“니네 성 좀 급해 보인다?”
“예, 이럇!”
가브는 대답과 동시에 말을 전속력으로 끌었다.
훨씬 튼튼한 말을 탄 펜릴은 금세 그의 옆에 붙으며 말했다.
“마법 보고 싶다고 했지? 보여 줄게.”
추켜든 지팡이 끝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화염구가 둥둥 떠 있었다.
‘움직이면서…… 마법을 시전해?’
화염구는 부피가 급속도로 늘어나 언덕에 다다랐을 때는 지름이 2미터는 되었다.
신기하게도 매우 가까이 있는데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기 저놈들한테 던지면 되냐?”
“예!”
“알았다. 잘 봐라, 마법의 위력을!”
펜릴은 지팡이를 휘둘러 화염구를 던졌다.
펜릴과 화염구가 떨어지자마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바닥의 잡초들이 바싹 말라 버리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다.
츠즈즈즈즈.
지나가는 길에 흔적을 진하게 남긴 화염구는 내성의 다리 너머에 모여 있는 헤이달 남작의 사병들에게 정확히 꽂혔다.
쿠과과과과광!
화염구는 바닥에 꽂히자 굉음과 함께 폭발하여 사방으로 10미터가 넘게 퍼져 나갔다.
화염에 휩싸이자, 일반적으로 접하기 힘든 그 초월적인 온도에 병사들의 갑옷과 살이 녹아내렸다.
“끄아아아악! 내 팔!”
“이것 좀 꺼 줘! 불이 안 꺼져!”
“뭐, 뭐야, 이게!”
“화염구……. 마법사……?”
화염구를 정통으로 맞이한 병사들은 즉사하고, 불똥이 튄 자들은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헤이달 남작과 필립은 얼이 빠져 화염구가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엇, 저 새끼는!”
“저놈을 죽여야 해!”
“저놈부터 죽여라!”
눈앞에서 병사들 절반이 한꺼번에 타 죽어 버리자, 순간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한 헤이달 부자는 가브를 발견하자 생각이 완전히 멈췄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화염구든 마법사든 사라져 버리고 가브를 죽여야 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목적만이 남았다.
“어어!”
“도, 도망쳐야 해!”
그러나 병사들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마법사가 자신들의 적이라는 심리적 압박에 이미 전장을 이탈하는 자들도 많았고, 본능적으로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도 있었지만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사…….’
단 한 방, 몇 초 만에 만든 화염구 한 방으로 전장을 초토화시키고, 그 존재만으로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다.
가브는 마법사의 위험도를 뼛속 깊이 각인시키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퍼석!
착지와 동시에 팔꿈치로 아래에 있던 병사의 얼굴을 함몰시키고, 중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보니 중간중간에 정신을 차리고 초점이 잡히는 자들도 몇몇 보인다.
가브는 몸을 숙이며 수십 명의 병사들 틈으로 파고들어 갔다.
마법사 펜릴은 호위 기사 한 명을 제외한 전부를 전장으로 보내고 전투를 지켜보았다.
“아주 날아다니네, 날아다녀.”
푹, 푹, 퍼석, 서걱!
펜릴의 시점에서 가브는 말 그대로 병사들 위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한 놈의 머리를 자르고 뒤로 넘어가는 놈의 가슴팍을 밟고 뛰어올라 그 너머에 있는 놈을 세로로 가른다.
뒤에도 눈이 있는 것처럼 보지도 않고 머리를 숙여 검을 피하고는 심장에 자신의 검을 찔러 넣고 다음 표적을 찾는다.
호위 기사들도 나름대로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자들인데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저놈들은 또 뭐야? 여기 성, 대체 뭐야?”
내성 입구에서는 화염구에 길이 막혀 남은 병사들 열댓 명이 두 명의 사내와 악에 받친 혈전을 치르고 있었다.
차림새가 기사로 보이는 자는 그저 그런데, 오크 같은 덩치의 사내는 가공할 괴력으로 병사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피융! 퓩!
그 와중에 위험해 보이는 순간마다 성 위쪽에서 어김없이 화살이 날아와 병사의 미간에 꽂혔다.
소수지만 견고한 느낌을 주는 성이었다.
전투, 아니 일방적인 학살은 금세 끝이 났다.
애초에 화염구가 떨어진 순간부터 승리는 정해져 있었다.
불이 꺼지고 회색 재만 남은 내성 문 앞, 헤이달 남작과 그의 아들 필립이 두 손과 발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
이엘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는 세실리아가 준 세검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쥐고 있었다.
“네, 안 무서워요.”
그녀는 싸늘하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바로 세검을 그의 아래턱에 꽂았다.
그리고 천천히 위로 올렸다.
푹, 즈즈즈즈.
“꺼, 꺼어어…….”
헤이달은 눈을 까뒤집고 부들부들 떨다가 검 끝이 정수리를 뚫고 나오자 완전히 멈추었다.
“으, 으악, 아악! 살려 줘, 살려 주세요! 한 번만 제발! 나, 나에겐 처자식이 있어!”
아버지가 죽는 모습에 분노는커녕 겁에 질려 몸부림치는 필립이었다.
이엘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브와 눈을 마주했다.
가브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는 왜 죽였죠?”
“그, 그것 때문에 그래? 그거 아버지가 전부 시킨 거야! 나는 반대했어! 정말이야!”
너무나도 쉽게 시인하는 필립의 말에 이엘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검을 추켜올렸다.
“거짓말.”
“아냐, 안 돼! 아아악-!”
스겅.
세검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던 건지 이엘이 검에 소질이 있는 건지, 필립의 두꺼운 목은 단번에 잘려 나갔다.
그녀는 세실리아에게 터덜터덜 걸어가 세검을 건네고는 펜릴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덕분에 목숨도 유지하고 아버지의 성을 지켜 낼 수 있었어요.”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허헛, 참…….”
이엘과 펜릴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가브는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엄청 늦은 겁니다. 저 아가씨가 하두 불안해해서 태연한 척했지만 쫄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대장이 오실 줄 알았습니다! 하하!”
발튼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세실리아는 작은 주먹을 쥐어 그의 옆구리를 때리려다가 그 꼴을 보고는 다시 내렸다.
“어깨 떨지 마라. 냄새나.”
“내, 냄새?”
“멜론 경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야 뭐……. 발튼이 다 했지요.”
멜론은 펜릴의 눈치를 보고는 가브에게 존댓말을 썼다.
동료들과 회포를 나누는 동안 이엘과 펜릴의 대화가 마무리되었다.
이엘은 다시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뒤돌아서 이쪽으로 걸어왔다.
펜릴은 가브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돌아섰다.
“펜릴 백작님, 바로 가시는 겁니까?”
“그럼 하인도 한 명 없는 곳에서 우리 애들 어떻게 다 먹이고 재우려고? 얼른 가야지. 마법사 모양 빠진다.”
가브는 잠시 침묵하고 그의 뒤를 따르다가 입을 열었다.
“제 말이 거짓이었으면 어쩌려고 바로 화염구를 날리셨습니까?”
“감히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을 해?”
펜릴의 말대로 어차피 나중에 밝혀질 거짓말을 해서 마법사와 척지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간단명료하군요.”
“사실 이유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가츠라는 놈이 재밌어서 친분 좀 쌓으려고 온 거니까.”
“충분히 쌓였습니다. 언제든지 불러만 주십시오.”
“왠지 부르면 안 올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군.”
“기분 탓입니다.”
“그만 가. 그 꼴을 하고 따라오니까 무섭잖아. 가.”
가브는 얼굴까지 빠짐없이 피 칠이 된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춰 묵례로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일은 깊이 기억해 두겠습니다.”
펜릴은 고개를 돌려 씨익 웃어 보이고는 자신의 호위병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