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92
92화
잎이 나지 않은 나뭇가지에 쌓인 하얀 눈이 바람에 흩날린다.
타다다다닥-.
하얀 얼음 숲 아래에 방한 복장을 갖춰 입은 대원들이 무기도 내던지고 죽을힘을 다하여 달리고 있다.
발소리 외에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표정에 드러난 긴박함과 두려움으로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할 뿐이다.
퍽, 퍼석-.
무로지는 뒤에서 들려오는 머리 터지는 소리에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뒤늦게 생각난 지원탄을 뽑아 대충 던지고는 달리는 데 집중했다.
지원탄은 손바닥만 한 원통으로, 위아래를 분리하면 자동으로 발화되어 안에 있는 토끼 똥을 태워 연기가 피어오르게 하는 것이다.
“헉, 헉, 헉, 시펄, 시펄, 하필, 나 때, 카…….”
푹-.
무로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을 느꼈다. 시선을 내려 보니 자신의 배에 검붉은 손이 튀어나와 있고, 발은 허공을 차고 있었다.
무로지가 공중에서 허리를 틀어 현재 상황의 주범을 확인하려는 순간, 검은 손이 덮쳐 왔다.
퍼석!
무로지의 머리통은 수십 조각이 되어 허공에 흩뿌려졌다.
같은 시각, 가브는 린과 사제 대원을 데리고 눈밭에 엎드려 있었다. 속도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지, 지나갔나?”
비명도, 머리가 터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자 린이 고개를 들었다. 가브 역시 고개를 들고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말했다.
“카난은, 사냥감을 놓지 않는다.”
정확히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 이상 사냥감을 절대 놓지 않는다. 지금도 카난은 가브 일행이 눈 속에 들어간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늦췄을 뿐이다.
시각, 후각, 청각도 뛰어난 카난에게서 벗어나려면 위협이 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수밖에 없다.
‘어두운 곳, 어두운 곳…….’
주 무기도 없고 주로 검을 쓰는 오른팔도 없고 마나도 제멋대로지만, 가브는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승리의 가능성을 높일 것들을 찾았다.
필사적으로 주변을 훑던 가브의 동공이 커졌다.
“저기, 저기로!”
최대한 나무가 많아서 그늘진 곳을 찾으려고 했는데, 기대도 하지 않던 작은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저, 저 동굴에도 마물이 있으면…….”
“뭐든 이것보단 낫다. 빨리!”
가브는 둘을 일으켜 등을 떠밀며 동굴로 향했다.
사사사삭-.
동굴에 다다랐을 때, 눈밭을 가볍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가브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다. 아까 얼핏 보았던 그 피부색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불안한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발소리가 무섭게 가까워지고 있다. 가브는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아 들며 뒤돌아섰다.
쩌정!
반사적으로 검 면으로 심장을 보호했고, 날카로운 손톱을 바짝 세운 카난의 손은 가브의 검 면을 정확히 때렸다.
검신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쪼개지고 가브의 몸은 뒤로 날아가 동굴 입구에 부딪혔다.
몸을 추스르며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촤악-.
“끄윽.”
린과 사제 대원을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가브는 미간을 좁히며 부러진 검을 들고 급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엎드려!”
가브의 말에 린과 사제 대원은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그 모습에 카난은 바닥을 박차려다가 멈추고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다는 듯이.
린은 괜찮아 보이지만 사제 대원은 호흡이 가쁘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다.
동굴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지름 7미터 정도에 높이도 3미터를 넘지 않았다.
저벅저벅.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카난과 마주한 가브는 절망했다. 진갈색이 아니다. 놈의 피부를 덮고 있는 비늘은 어둠을 빨아들인 것처럼 칠흑 같은 검은색이었다.
‘진…… 카난.’
두 팔 멀쩡하고 장비를 다 갖췄어도 가능성이 희박한 최악의 생명체를, 최악의 상황에서 마주친 것이다.
-카오르…….
진 카난은 낮게 으르렁거리듯이 어떤 말을 내뱉고는 역관절로 된 발로 바닥을 찼다.
가브는 놈이 날 듯이 덤벼들 때, 네 번째 환상성의 보상이 어떤 능력인지 깨달았다.
비틀어지는 어깨근육, 뒤로 젖히는 팔, 살짝 벌린 입안의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동체 시력.’
전투에 큰 도움이 되는 능력이지만 지금처럼 몸이 반응할 수 없다면 반쪽짜리가 된다.
쾅!
가브의 몸이 붕 떠올라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힘없이 엎어졌다. 진 카난은 가브에게 몸을 틀고 자신의 가슴 한 부분을 손으로 쓸었다.
가슴께에는 반 뼘 크기의 비늘이 뒤집혀 있고, 검붉은 피가 살짝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가브는 땅바닥을 짚고 힘겹게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통하네, 이게.”
-카흐아!
진 카난은 사납게 소리치며 가브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가브는 다시 몸을 낮추고 눈을 부릅떴다.
버릇처럼 머리를 향해 손을 휘두른다.
웨어울프를 훨씬 웃도는 속도와 오우거에 필적하는 괴력을 지닌 카난의 손에 맞으면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난다.
한 번의 휘두름에 한 명씩, 그 압도적인 강함을 타고났으니 머리를 써야 하는 상대를 만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가브는 놈이 바닥을 찰 때 어깨근육의 움직임만으로 공격을 예측하고 몸을 틀어 반응 속도의 차이를 메웠다.
그리고 진 카난의 갑옷 같은 비늘을 꿰뚫기 모자란 힘은 놈의 속도를 역이용했다.
놈의 공격은 피하고 몸은 정면으로 부딪치며 검을 찔러 넣는다.
콰직!
원하는 곳에 찔러 넣을 정도의 여유는 없지만, 공격이 통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평소라면 손톱에 생채기도 나지 않을 진 카난이 작은 위협이라도 느끼기를 기대하며.
“큽, 쿨럭.”
그러나 지금 방법은 크나큰 단점이 존재했다. 진 카난과 정면으로 부딪치면 몸이 만신창이가 된다는 것이다.
가브는 피를 한 움큼 토해 내고는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
분노에 찬 울음소리를 내는 진 카난의 가슴팍에는 부러진 검이 박혀 있었다.
타닥!
진 카난이 다시 바닥을 찼다. 가브는 재빨리 옆으로 구르며 소리쳤다.
“린! 검!”
린은 대답하려다가 입을 다물고 가브에게 자신의 검을 던졌다.
가브는 간신히 진 카난의 공격을 피하며 린의 검을 집고 다시 일어섰다. 자세를 마저 잡기도 전에 놈의 공격이 이어졌다.
콰앙!
“커헉!”
가브는 피를 토하며 공중에 떠올랐다.
실패다.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진다.
사람과 비견되는 지능을 가진 카난에게 같은 방법이 두 번 이상 통하리라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진 카난은 지금까지 봐줬다는 듯이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공격을 들어왔고, 휘두르기나 찌르기가 아닌 어깨를 앞세우며 몸통 박치기를 했다.
가브는 보았다, 그 와중에도 마지막에 발끝을 살짝 틀어 검을 피하며 몸통을 부딪치는 것을.
이제 희망은 없다.
쾅!
벽을 향해 날아가는 도중에 등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으며 몸이 반대로 튕겼다.
내장이 모두 찢기고 전신의 뼈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이 뒤따른다.
테라 경갑과 마나로 단련된 몸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수백 조각으로 찢겼을 것이다.
쿵!
가브는 몸이 동굴 벽에 부딪히자마자 무섭게 덮쳐 오는 진 카난의 손을 보았다.
끝이다. 저 잔혹한 손톱에 얼굴은 두부처럼 박살 날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끝이다.
핑-.
죽음을 예감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 단전에 있는 미지의 기운이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가브의 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아갔다.
푸른 파동이 천천히 퍼져 나간다. 동굴 밖으로 나가, 얼음 숲을 건너, 장벽을 넘고 요새를 지나간다.
점점 더 빠르고, 점점 더 넓게, 제국의 수도 카르마를 지나 아이드성을 넘고, 스리시미어스 사막을 건너 대륙을 덮는 것으로 모자라 저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덮는다.
파동에는 한계가 없다. 그것은 모든 것을 덮고 저 높이 하늘로 쏘아져 나갔다.
지금 가브의 모습이, 진 카난이, 장벽이, 제국이, 판테르 대륙이 마치 작은 점 하나처럼 보인다. 그곳은 새까맣고 끝이 없이 광활한 곳이다.
후우웅-.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나아가던 파동은 어느 시점부터 갑자기 기억을 되감듯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장벽과 얼음 숲을 지나 동굴 안으로 돌아온 파동은 가브의 단전에 갈무리되었다.
그 누구도 이런 현상을 경험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마나다.’
가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눈동자에 파란 빛이 순간 스쳤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속성의 마나가 눈에 보인다. 그것은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았다.
모든 마나를 찢어발기며 들어오는 거대한 마기도 보였다. 진 카난의 몸에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마기가 담겨 있었다.
가브는 하나밖에 없는 손을 들어 올렸다. 마나가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몸 안에 출렁거리는 마나가 쏜살같이 팔로 모이고, 몸 밖의 마나도 마치 다른 사람이 들어 올려 주는 것처럼 팔 주변으로 모여 조금 더 빠르게 목적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스윽-.
가브는 코앞까지 다가온 진 카난의 서슬 퍼런 손톱을 옆으로 밀어냈다.
콰직-.
놈의 손톱은 애꿎은 벽을 뚫고 들어갔다. 가브는 놈의 배를 발로 차 거리를 벌리고 심장을 향해 검을 뻗었다.
채앵!
진 카난이 그 순간에 몸을 틀어 옆구리를 스쳤다. 그러나 소리는 마치 금속을 내리친 것만 같았다. 마나를 보고 만지고 조절할 수 있음에도 저 견고한 비늘을 뚫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진 카난은 빠르게 거리를 벌렸다가 금세 다시 공격해 들어왔다.
내장이 격동한다. 마나를 보는 것과는 별개로 죽음은 코앞에 다가왔다.
가브는 날아오는 진 카난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낡은 검으로도 놈의 몸을 한 번에 꿰뚫을 수 있는 곳이 존재할 것이다. 절대, 존재해야 한다.
눈, 입은 가장 본능적으로 방어하는 곳이기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심장은 유독 더 두꺼워 저렇게 대놓고 방어하지 않는다.
‘저곳이다!’
가브의 눈이 반짝였다. 아래로 향하는 비늘이 서로 같은 방향으로 내려가며 비는 공간이 있다. 가브는 몸을 낮춰 놈의 손톱을 피하며 그곳을 향해 힘껏 검을 뻗었다.
츄아아악!
가브의 검 끝은 빈틈이 손가락 두 마디도 되지 않는 진 카난의 겨드랑이에 정확히 꽂혔다. 그것은 가속도가 더해져 더욱 깊이 들어가 어깨까지 뚫고 아예 팔을 절단해 버렸다.
터덕-.
진 카난의 새까만 팔이 동굴 바닥에 떨어졌다.
-끼에에에엑!
놈은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고통에 동굴이 무너질 정도로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고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본래대로라면 쫓아갔겠지만, 지금은 쫓을 여력도, 속도도 달렸다.
터벅, 터벅, 터벅.
가브는 비틀비틀 걸으며 사제 대원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미 생기가 많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가브는 그를 보며 힘겹게 입술을 뗐다.
“왜…….”
뒷말은 꺼내지 못했다. 린의 손이 그대로인 것처럼, 신성력 치료가 전능한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옆구리 살이 완전히 날아가고 내장마저 찢긴 상태라면 출혈만 잡을 수 있을 뿐이다.
턱.
사제 대원은 손을 가브의 손 위에 포개었다. 그의 얼굴은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마, 음……먹은 대로 되면…… 그게 인생이겠습니까? 자책……하지 마십시오……. 전, 이제 그녀를 만날 수 있어…… 진정 기쁘오.”
가브는 마치 자신의 환상을 본 것 같은 그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는 그 여인을 입으로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기쁜 듯했다. 그는 말을 끝내고 눈을 감았다.
가브는 죽는 순간에 사람이 어떻게 저리 행복한 얼굴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털썩-.
그의 생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가브 역시 바닥에 엎어졌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 진한 마기가 스멀거리고 있는 진 카난의 오른팔이 떨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