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10)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
나의 악당들 110화
28. 롱빌(2)
뜬금없이 등장한 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하얀 머릿수건을 두르고 소매가 넓 은 하얀 커틀(Kirtle, 일체형 여성 복), 연두색 튜닉을 입었는데, 하나 같이 고급 원단을 쓴 것 같았다.
작은 체구에 잘록한 허리, 처진 눈 매와 그 아래 찍힌 점이 가냘프고 처연한 인상을 자아낸다. 하얗고 가 느다란 목은 뭔지 모를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어물거리던 문지기가 나타난 여인 을 보더니 얼른 고개를 숙였다.
“부인, 여기까진 어쩐 일로 오셨습 니까.”
“소란스럽기에 무슨 일인가 궁금해 서요.”
뒤따르는 하녀와 호위병들을 보아, 여인은 귀족인 게 분명했다.
아마 영주의 부인이 아닐까?
“이쪽 분은?”
여인이 이쪽을 바라보며 묻자, 나 는 슬쩍 예를 취해 보였다. 그와 동 시에, 다행히 적절한 멘트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인. 저는 울카르 왕자님의 기사인 포이 닉스라고 합니다.”
“울카르 왕자의?”
여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묘한 표정 을 지은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 이런. 만나 뵙게 되어 영 광이에요, 포이닉스 경. 롱빌의 영주 이신 말로리 남작님의 아내, 다이오 네아라고 해요.”
다이오네아. 들어본 이름이다.
강도남작과 그의 부하들에게 붙잡 혀 죽음을 맞은 그 이름.
여인은 자연스레 손등을 내밀었다.
……뭐야, 이거. 어쩌라고?
“경?”
“ 아,”
난 뒤늦게 눈치를 채고 여인, 그러 니까, 남작부인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남작부인은 내가 입을 맞춘 부위를 가만히 매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로스가 결례를 저지른 모양이더군 요.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경.”
“음, 부인께서 그러실 필요 없습니 다.”
“전 영지의 안주인입니다. 마땅히 제가 사과를 드려야지요.”
남작부인의 말에 문지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별로 고소하진 않군.
“포이닉스 경의 일행을 영주관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혹시 괜찮을까 요‘?”
……이거, 거절하면 결례겠지? 뭐, 어차피 영주와 안면을 터 둬서 나쁠 건 없을 거다.
“음, 물론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 사합니다.”
“초대를 받아주셔서 고마워요.”
남작부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병사 하나를 안내로 붙여주곤 씽 사라져 버렸다. 잠시 들를 곳이 있다나.
관문을 통과한 뒤, 페르소 행수가 돈주머니를 건네왔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포이 닉스 경.”
“고생은 행수님이 더 많으셨죠.”
주머니가 예상보다 묵직하다. 기분 좋은걸.
“허허. 저희는 여기서 며칠 머무를 생각입니다만, 경은 어찌할 계획이 십니까?”
“……음, 일단 상황이 어떤지 살펴 볼 생각입니다.”
“상황이라고 하시면, 괴물들 말씀 이십니까?”
지나온 산장에서 우리가 목욕과 식 사, 휴식에 열중하는 동안 페르소 행수는 정보를 모았다. 그가 파악한 바로는, 그라두일 산을 넘어가는 북 쪽 길이 괴물들에 의해 막혀있다고 했다.
산장에 용병들이 많았던 것도, 롱 빌의 영주가 괴물들을 소탕하기 위 해 돈을 풀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였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겝니 다. 넉넉히 이레 정도면 해결이 되 겠지요.”
……글쎄, 그럴까? 난 적당히 고개 를 끄덕거리며 덧붙였다.
“아. 그리고 행수님. 사람들 입단속 좀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한 입단속은 뭔가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냥 피투성이 검사니, 불의 마녀니, 붉은 곰이니 하는 별 명들을 퍼뜨리지 말아 달라는 뜻이 었다.
“물론입니다. 여긴 아직 소문이 퍼 지지 않은 것 같으니, 저희가 조심 하도록 하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페르소 행수와의 대화를 마친 뒤, 여정 동안 안면을 튼 용병들, 상인 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앞으로 며칠 간은 롱빌에서 종종 마주치겠지만, 운이 나쁘면 그러지 못할 수도 없으 니 미리 작별 인사를 한 것이다.
그러고 난 뒤엔, 약간의 위장 아닌 위장을 했다.
“나 말타기 싫어.”
“찡찡거리지 말고 빨리 타.”
입술을 삐죽거리는 엘렌을 점박이 에 태우고, 돌메를 압수당한 우테콰 이로 하여금 고삐를 잡게 했다. 그 것만으로도 마법사와 야만인이 숙녀 와 말구종으로 보인다.
그 상태로, 우리는 안내병을 따라 영주관으로 갔다.
근데 위장이고 뭐고, 우테콰이의 행색이 워낙 특이해서 사람들의 눈 이 떨어질 줄을 모른다. 게다가 말 에 탄 숙녀는 다시 보니 마법사 로 브를 입고 있고, 앞장선 사내는 보 기 드문 장신에 판금갑옷까지 입고 있으니 시선이 끌리지 않는 게 이상 했다.
……에이, 사우스하버에서 여기까 지 조금 먼 것도 아니고. 이 정도로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
“반갑소, 포이닉스 경. 피투성이 검 사로 명성이 드높은 경을 직접 보게 되다니, 영광이오.”
“••••••예?”
“이쪽의 야만인이 붉은 곰이겠군. 뒤의 숙녀분은 불의 여인이시겠고. 소문으로만 듣던 이들을 직접 만나 게 되다니, 기쁜 일이오.”
염병, 바로 알아보네.
인터넷이 있는 세상도 아닌데 뭐가 이리 소식이 빠르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슬 갑옷을 입은 50대의 장한은 흥겨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허, 내 정신 좀 보게. 소개가 늦 었군. 나는 킬리안 제닝스라고 하오. 말로리 남작님의 하나뿐인 기사지.”
“반갑습니다, 킬리안 경.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주 잡은 손이 꽤 억세다. 눈빛이 나 덩치를 보면 이 사람도 꽤 실력 있는 기사일 것 같다.
“헌데, 울카르 왕자님의 기사가 되 었다고 하셨소?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서임을 받고 이틀 만에 여정 에 올랐으니, 경께서 모르시는 게 당연합니다.”
“허어, 그렇구먼.”
마구간에 점박이와 뭉치를 맡긴 탓 에, 엘렌은 결국 내 팔에 앉아야 했 다. 킬리안 경은 그런 건 신경도 쓰 지 않고 수다를 이어나갔다.
“경의 무용담은 익히 들었소. 단신 으로 포위망을 뚫고 서신을 전했다 는 이야기는, 독안왕과 호수의 기사 를 떠오르게 하더군.”
“어, 그러셨군요.”
독안왕(獨眼王)?
들어본 이름인데. 밀라놀의 3대 왕 이랬나, 4대 왕이랬나…….
“베일의 마녀, 강도남작을 한칼에 처리한 걸로도 모자라 기는 용의 목 도 베었다고 들었소.”
“……베진 못했습니다. 정확히 말 하자면 목에 매달려서,”
“허, 겸손하기까지.”
그는 곧 식사가 준비된다며, 그전 까지 아성을 구경시켜 주겠노라 우 리를 이끌었다.
“내 앞에서는 그리 겸양을 떨 필요 없소. 기사들 사이에서 그딴 건 미 덕이 아니지. 물론, 남작님 앞에서는 그러는 게 좋겠소만.”
“조언 감사드립니다.”
“허허, 조언이랄 것까지야.”
기사는 초록빛이 섞인 검은 눈동자 를 빛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만한 게 못 된 다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롱빌은 오가는 사람이 많은 영지 요. 그래서 여러 소식이며,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들려오지. 괴상한 소문 도 거기에 섞여 들어온다오.”
“그렇군요.”
“경만 해도 소문과는 전혀 다른 사 람이지 않소. 호사가들이란 말을 부 풀리기 좋아하는 법이니, 진위를 분 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속아 넘어 가기 일쑤지. 우리 같은 기사들이야 그런 것에 흔들릴 일이 없겠지만.” “아, 예.” 이어지는 대화도 쭉 비슷했다.
킬리안 경은 기사라는 신분에 대해 자부심이 무척 강한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이 영지 유일의 기사 노릇 을 하고 있으니, 다른 기사를 만나 수다스러워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킬리안 경과의 시간이 곤 욕스러운 것이었느냐면, 그건 아니 었다.
그라두일 산에는 벌이 많아서 꿀과 밀랍이 많이 나온다느니, 농노들이 함부로 나무를 베어서 좋은 목재가 남아나질 않는다느니 하는 이야기야 뭐, 그냥저냥이었다.
하지만, 아성에 올라 영지를 내려 다보는 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와.”
이 세상에 떨어진 지 3개월도 넘 게 흘렀지만, 땅거미가 진 영지의 풍경은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켰 다.
목책을 순찰하는 병사들이 일제히 횃불을 들었다. 어둑해지는 거주구 를 가운데에 두고, 점점이 흩어진 불빛들이 저글링 하듯 꼬리를 문다.
뒤늦게 밭일을 마친 농노들이 서둘 러 관문으로 모여든다. 힘차게 짖어 대는 개가 양 떼를 튼튼한 울타리로 몰아간다.
술 취한 용병 한 쌍이 길바닥에서 서로를 더듬어대고, 순진한 처녀들 은 비명을 지르면서도 대담한 애정 행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저 멀리 불 켜진 선술집에선 어쩐 지 익숙한 리듬이 희미하게 들려온 다…….
거기에, 시원한 저녁 바람.
내 가슴에 등을 기댄 엘렌이 작게 중얼거린다.
“……엄청 평화롭네.”
“그러게.” 산등성이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저 그림이나 풍 경과도 같던 영지가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엘렌.”
“응?”
“며칠쯤 푹 쉴까?”
“응. 좋아.”
문득, 이곳에 꽤 오래 머무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하게 좋아졌다.
그런 생각에 금이 간 것은 영주관 의 홀에 들어선 뒤였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은 총 일 곱이었다. 늙은 영주와 그의 젊은 부인, 킬리안 경, 훈련대장, 그리고 우리.
“은왕자의 기사라.”
내 인사를 받은 늙은 영주가 입매 를 뒤틀어 올렸다. 고리십자가로 장 식한 의자에 앉은 영주가 팔걸이를 두드렸다.
툭, 툭.
“무슨 낯짝으로 날 보러 왔는지 모 르겠군.”
“••••••예?”
“그래도 영지의 주인 된 자로서 환 대해 줘야겠지. 다만, 영주관에 머무 를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관문 근 처에 여관이 많으니 거길 이용하면 되겠지.”
말로리 남작의 말에 남작부인이 얼 굴을 굳혔다.
“하지만 남작님, 그래도 왕자의 기 사인걸요. 어떻게,”
“왕자의 기사이지, 왕의 기사가 아 니잖소.”
“어차피 빈방은 많아요. 세 분 정 도 대접하는 건,”
“쓸데없는 말 말고 식사나 하시
오.”
“남작님. 그러지,”
짜악!
말을 하던 남작부인의 얼굴이 홱 돌아간다. 아내의 따귀를 날린 남편 이 씩씩거리며 엄포를 놓았다.
“여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니 닥치 고 있으시오. 닥치고 있기 힘들면 방으로 꺼지든가.”
“……네.”
입술이 터진 남작부인은 조금 을먹 거리며 홀을 떠났다.
……미친, 말이 안 나오네.
지보다 족히 마흔 살은 어려 보이 는 아내를 애지중지해 주진 못할망 정 손찌검을 하다니.
영주와 그 부인이 나란히 앉은 모 습을 보고 내심 도둑놈이라고 욕하 고 있었는데, 진짜로 나쁜 새끼인 것 같다.
“어이쿠, 이런.”
옆에 앉아 있던 킬리안 경이 포크를 줍는 척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내가 이 말을 빼먹었군. 남작님께 선 은왕자를 증오하신다네. 거의 원 수로 여기시지.”
엄청 중요한 걸 빼먹으셨네요, 아 저씨.
홀의 커다란 테이블에 내어진 요리 는, 남작의 태도와는 달리 아주 훌 륭했다.
허브와 어린잎 채소를 섞은 샐러 드, 걸쭉한 닭 육수에 대파와 후추 를 뿌려 끓여낸 수프, 병아리콩을 곁들인 닭고기 스튜, 양의 뒷다릿살 로 만든 생햄과 흰 빵 등…….
하지만 메뉴가 훌륭하다고 해서 꼭 좋은 식사인 건 아니었다.
포도주로 입술을 적신 영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 그래도, 간만에 아주 즐거운 소식을 들었지.”
내가 아무런 대답을 않자, 영주가 주름진 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울카르 왕자와 관련해서 말이오.”
“어떤 소식 말씀이십니까?”
“괴물에게 왼팔을 뜯어먹혔다고 들 었는데. 사실이오?”
“……예, 맞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영주는 테이블 을 두드리며 웃어댔다.
“흐, 흐하하! 일세의 영웅이라는 왕자가 고작 괴물에게 팔을 잃다니, 우스운 일이구먼!”
……으음. 내가 명색이 왕자의 기 사 행세를 하고 있는데, 가만히 있 어도 되나? 랭볼트 경이나 안키르 경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장갑이 라도 던졌을까?
내가 고민에 잠긴 사이, 빵이며 햄 을 게걸스럽게 집어 먹고 있던 우테 콰이가 음식을 삼키곤 입을 열었다.
“맞다. 울카르 왕자는 살면서 본 남자 중에 가장 잘생겼다. 자비로우 면서도 강하고, 부하 잘 챙긴다. 그 런 남자야말로 진짜 영웅이다.”
……이놈, 일부러 이러는 건가?
우테콰이가 뜬금없이 왕자의 칭찬 을 늘어놓자, 박장대소하던 영주가 우뚝 웃음을 그쳤다.
“울카르는 운 좋게 왕자로 태어나 시류를 탄 애송이일 뿐이야. 그런데 그딴 자가 영웅? 개소리.”
영주가 주름진 눈꺼풀 아래로 형형 한 빛을 뿜으며 우테콰이를 노려보 았다.
“그리고, 감히 내 앞에서 그런 말 을 꺼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군.”
w O 으 w —M*.
영주가 사납게 으르렁거리자 우테 콰이는 놀란 듯 허리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