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83)
나의 악당들 183화
43. 발버둥(3)
붉은 비를 맞으며 누워있는데 어째 피비린내가 역겹게 느껴진다.
……음, 이상하네. 헤일라의 피를 빨아먹은 탓에 배가 불렀나?
아니, 아니다. 요 얼마간 지겨울 만큼 전투를, 살육을 반복해온 탓일 터다.
저물어가는 해, 시원한 가을바람, 뜨뜻미지근한 피, 그리고 적막함.
난 가만히 눈을 끔벅이다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는 아탈란테 는 물론이고, 엘렌과 헤일라도 상처 를 입은 상태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을 순 없지.
관문의 잔해 아래쪽에 떨어진 엘렌 에게 달려가 살펴보니, 팔뚝에 멍이 들고 종아리가 조금 긁혔을 뿐 그리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머리를 다쳤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 야지.
녀석을 천천히 안아 드는데, 기다 란 속눈썹이 교차하더니 눈이 뜨였 다. 엘렌이 놀랄 것 같아서 온몸에 뒤집어쓴 피는 얼른 흡수해버렸다.
“……으음, 어?”
녀석은 잠시 흐려진 초점을 잡더니 나를 올려다보곤 멍한 얼굴이 되었 다. 커다란 벽안이 깜빡거리기를 몇 차례, 나는 엘렌을 마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어주었다.
“••••••포이?”
“그래, 나야. 몸은 괜찮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녀석은 내게 와락 안겨 들었다. 뼈가 없는 것처 럼 부드러운 몸이 가냘프게 매달려 온다.
“나, 너무 어둡고 숨이 막히는데, 그 여자가 너를 데려가서, 너는, 난 아무것도-”
엘렌은 내 목에 얼굴을 폭 묻은 채 무어라 횡설수설해댔다. 기절한 동안 악몽이라도 꿨나?
가만히 등을 토닥여주었더니 녀석 은 숨을 고르며 상체를 세웠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는 것 이었다. 내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얘가 왜 이래?
“너, 혹시 머리 아파? 구르다가 어 디 부딪친 거 아니, 읍-”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질끈 눈을 감고 삐죽 입술을 내민 엘렌이 내 목을 끌어당기며 냅다 입 술 박치기를 해온 탓이다.
“갑자기 뭐읍,”
녀석의 입술이 앞니를 짓누르는 통 에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부드러운 입술과 달달한 숨결, 상 쾌한 라임 향이 심장을 마구 두드려 댔다.
으으, 김승수, 정신 차려! 이러면 안 돼!
나는 속으로 고함을 질러대며 엘렌 을 떼어내었다.
“그, 잠깐만. 지금 이럴 때가 아니 거든? 나중에 상황이 정리되면, 아 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이는데, 녀석 은 어쩐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 다.
“어 으.”
그것도 잠시, 핏줄이 비쳐 보이는 하얀 피부가 불에 덴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고운 홍조가 순식간에 목과 귀까지 퍼지자, 엘렌은 갑자기 눈을 감더니 쓰러지듯 내 품 안으로 얼굴을 묻었다.
“엘렌. 엘렌?”
어깨를 몇 차례 흔들어보았지만 녀 석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얘 진짜 왜 이러지? 어디 심하게 다친 건가?
나는 다급한 마음에 녀석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혈기를 끌어올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엘렌의 몸에 대해서는 나만 한 전문가가 없다. 근 4개월 동안 혈조술을 이용해 시 도 때도 없이 스캔을 했으니까.
天天츠
■ —■ — 7、•
부자연스러운 호흡, 가끔 움찔거리 는 손끝, 경직된 허리와 안면으로 쏠린 피.
나는 엘렌의 상태를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녀석은…….
“••••••으휴.”
기절한 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관문의 잔해 아래에 세 여인을 나 란히 눕혀둘 무렵, 아미아스와 스티 드먼이 일단의 병사들과 함께 나타 났다.
그들은 사방에 붉은 개울이 흐르는 것을 보고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인 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빡빡이 스티드먼은 헤일라의 흑마 를 끌고 왔는데, 안장에서 상처치료 의 물약을 세 병이나 발견했다.
콜이 위독한 상태라고 하기에 포션 한 병을 쥐여 보냈고, 나머지 두 병 은 헤일라와 아탈란테를 치료하는 데 쓰기로 했다.
“잠깐, 포이닉스 님. 그 둘을 치료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리더 아미아스는 썩 애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뭐가 문젠데?”
“여기 이 관문을 날려버린 게 바로 아틸리아입니다. 그녀를 막다가 하 탄카 씨가 크게 다쳤죠.”
“……우테콰이가? 지금 어디에 있 는데?”
“교회에 계십니다. 듣기로는 목숨 에 지장은 없으실 거라더군요.”
음, 주변에 인간의 시체들밖에 없 어서 ‘포식의 인장’을 활용하지 못 한 모양이다.
게임에서는 괴물이고 인간이고 구 분 없이 죄다 심장을 뜯어먹으며 체 력을 회복하고 버프를 받았었지.
하지만 현실의 우테콰이는 그러지 않았다. 종교적인 이유 때문일까?
“하탄카 씨 뿐만이 아니라 병사들 도 여럿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뭐, 뮬팅엄군이 더 많이 상하긴 했지만 요.”
« o 으 ’’ — W •
“그리고 헤일라는, 아니, 헤일라 아 가씨는 엘렌 님을 납치한데다가 콜 을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그런데 저 둘을 곱게 치료해주신다니요?” 조금 흥분한 어조로 떠들던 아미아 스는 문득 떠오른 게 있는지 코끝을 긁적거리며 말을 보태었다.
“물론, 헤일라 아가씨는 포이닉스 님의 약혼녀인데다가 저희도 목숨을 빚졌죠. 아틸리아도 포이닉스 님을 구해준 적이 있구요.”
아미아스는 애써 냉정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병사 수 백 명을 눈 깜짝할 사이에 피떡으로 만들어버리는 초인들이잖습니까. 조 금 더 신중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으음, 확실히 맞는 말인데.
나는 고민하면서도 일단 헤일라의 배에 물약을 조금 뿌려주었다. 양 손목이나 발목은 차치하더라도, 흐 룬팅에 헤집어진 배는 당장 치료하 지 않으면 고민이고 뭐고 황천길에 오를 것 같았거든.
그때, 옆에 누워있던 엘렌이 꾸물 럭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으음. 여기가 어디야?”
……꼭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어 조군.
푸흡,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삼키 고 있는데 녀석은 어색한 몸동작으 로 기지개를 켜더니 자리에서 일어 났다.
“어, 음. 마나를 많이 썼더니 잠시 기절했었나 보네……
엘렌의 양 볼엔 아직도 다홍빛깔 꽃이 피어있었다.
에휴, 그냥 조용히 해줘야지. 귀여 우니까 봐준다.
그렇게 적당히 연기를 하던 엘렌은 곧장 의견을 내놓았다.
“둘의 처분은 아주 신중하게 결정 해야 해.”
솔직히, 난 녀석의 말에 조금 놀라 고 말았다. 헤일라든 아탈란테든 둘 다 당장 죽이자고 할 줄 알았거든.
입술을 달싹거리던 엘렌은 작게 숨 을 고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헤일라는……. 함부로 죽였다간 감당하지 못 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감당하지 못 할 일?”
녀석은 주변의 병사들을 흘긋거리 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헤일라의 오라비가 누이의 원한을 갚겠다고 군대를 일으킬 지도 모른 다고.”
아, 그래.
헤일라는 아일란트의 현 공작인 ‘카이시스 오브 발루인’의 하나 남 은 동생이지.
나는 눈썹을 긁적거리다가 입을 열 었다.
“근데, 그냥 놔줄 수도 없어. 능력 도 성격도 워낙 위험한 애라서 여러 모로 후환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포로로 잡고 있자.”
“포로?”
“응. 그러면 군대가 몰려오는 것도 막을 수 있고, 헤일라의 마력을 억 제해서 후환도 막을 수 있어.” 문득 ‘대부’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친구는 가까이, 적은 더 가까이.’
괜찮은 계획 같은데…….
“마력억제의 물약을 계속 만들어야 할 텐데, 가능하겠어?”
“그거야 별 문제…… 음, 돈이 꽤 많이 들긴 하겠네.”
잠자코 물러나 있던 아미아스가 불 쑥 끼어들었다.
“돈이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뭐‘?” “포로가 엄청나게 부자니까요.” 아미아스는 흑마의 안장을 들추더 니 금화와 보석이 잔뜩 담긴 주머니 들을 내보였다. 대충 그 양을 가늠 한 엘렌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정도면 충분할 것 같네.”
그렇게 결론을 낸 뒤, 녀석은 아탈 란테를 돌아보았다.
뭔가를 떠올린 걸까? 엘렌의 파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후우. 아틸리아는 아마,”
녀석이 무어라 말하려고 할 즈음, 서쪽에서 일단의 인마가 달려왔다.
“••••••뭐지?”
“경계태세를 갖춰! 너, 체스터 님 께 기병들이 접근하고 있다고 전 해!”
아미아스의 호령에 병사들이 분주 해졌다. 그러나 롱빌 안에서 지원군 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말을 탄 전사 삼십여 명이 코앞까지 다가왔 다.
뭐, 별로 긴장은 안 된다. 딱 봐도 기사들 같지는 않더라고.
나는 흐룬팅의 퍼멀에 손을 얹은 채 앞으로 나섰다.
말 탄 전사들은 붉은 천을 이마에 감고 쇠고리로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대개 창을 들었으며 허리 춤에는 곡도를 차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누데인족의 차 림새였다.
그리고, 그들 중 선두로 말을 달려 온 중년의 사내는 썩 익숙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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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닉스, 경?”
일전에 아탈란테와 파티를 꾸렸을 때, 그녀는 씨족 최정예 전사를 둘 데려왔었더 랬다.
장창을 다루는 비토리오는 차원의 균열에서 죽음을 맞았고, 장궁을 다 루는 아고스는 무사히 씨족으로 돌 아갔었지.
지금 내 앞에 전사들을 이끌고 나 타난 중년의 사내는 바로 그 아고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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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스는 나를 발견하곤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슬쩍 손을 들자, 뒤따 르는 전사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 면서도 치켜들고 있던 무기를 아래 로 늘어뜨렸다.
아고스는 고삐를 살짝 채어 좀 더 앞으로 나섰다.
“엘렌 님과 아미아스 군도 있었군 요. 콜, 그 녀석도 여기 있습니까?”
의뭉을 떨어대는 아고스 앞에서, 나는 퍼멀을 톡톡 두드리다가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다.
“아틸리아를 구하러 왔나?”
“아니야?”
“……맞습니다, 경.”
“아틸리아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지?”
내가 엄지로 뒤쪽을 가리키자, 관 문의 잔해를 발견한 아고스는 어두 운 표정을 지었다.
“예. 저 멀리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얼굴이 굴욕으로 얼룩진 것도 잠 시, 아고스는 재차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경. 아틸리아 아가씨께선 제 의지대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 다.”
“……뭐라고?”
“금제의 펜던트 때문입니다. 원로 들이 아틸리아 님을 구속하는 도구 죠.”
“내가 본 바로는 그 펜던트가 있어 도 사람을 학살하게 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던데.”
“……금제의 펜던트를 보셨습니 까?”
“뭐, 어쩌다 보니. 근데, 지금 중요 한 건 그게 아닐 텐데.”
“그렇군요.”
고개를 주억거린 아고스는 어렵사 리 말을 꺼내었다.
“원로인 델오토의 만행입니다.”
“델오토?”
“예. 트리스탄 백작의 차남인 도일 공자의 분노를 잠재우고자 관문을 파괴 하겠노라 호언장담했죠.”
“……실제로 그렇게 됐군.”
“아틸리아 아가씨가 원하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델오토는 기이한 술 법을 부려 아틸리아 아가씨를 강제 로 각성시켰지요.”
“각성?”
“머릿속에 공허로 통하는 통로를 뚫는 미친 짓거리지요. 그 증거로 제 3의 눈을 떴을 텐데, 보지 못하 셨습니까?”
내가 슬쩍 돌아보자, 엘렌이 가만 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아. 비전의 힘을 자기 한계 이상으로 뿜어내던걸.”
“아틸리아 님은 그 통로의 유지에 정신력의 대부분을 쏟아붓고 있었 고, 때문에 반쯤 잠든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펜던트를 쥔 자가 내린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상태였죠.”
아고스의 설명에 나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그러니까, 아틸리아에겐 아무 죄 가 없으니 돌려달라?”
“……어떻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원로들의 조종을 당했다고는 해도, 그녀는 알 카다리 씨족의 전사입니다. 씨족의 책임에 서 벗어날 수 없지요.” 그는 거기까지 말하곤 말에서 내려 섰다. 그리고는 앞으로 두어 걸음 더 다가오더니 넙죽 엎드리는 것이 었다.
“……뭐 하는 거지?”
“부디 자비를 청하는 바입니다, 포 이닉스 경.”
아고스를 따라온 삼십여 명의 누데 인족 전사들도 말에서 내려 절을 해 왔다.
“그녀는 반신의 자식이자 누데인족 을 구원할 예언의 딸입니다. 부디 저희 족속에게 자비를,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어이씨. 뭘 이렇게까지 해, 부 담스럽게.
“크흠, 너희들에게 아틸리아를 돌 려줘 봤자 또다시 원로들의 꼭두각 시가 되지 말란 법이 없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고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아틸리아 아가씨는 이미 강제로 각성을 한바, 원로들의 도움 이 없으면 삶을 이어나갈 수 없습니 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들으신 대로입니다. 아틸리아 아 가씨는 아순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공허에 집어삼켜질 겁니다. 그리되 면 경께도 해악을 끼치겠지요.”
하, 이거 완전 고약하게 됐구만.
학대 아동을 가정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사회복지사의 기분이라고 할 까.
나는 엘렌을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때?”
녀석은 잠시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조물거렸다. 자세히 보니 만지작거 리고 있는 것은 비단으로 짠 조그만 손수건이었다.
“••••••보내.”
“뭐?”
“보내자고.”
엘렌이 고개를 들었다.
“저 여자가 공허에 집어삼켜지면 괴물이 되어버릴 수도 있어. 이제 사람들이 다치는 건……
녀석은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얼마쯤 기다려주었지만, 엘렌은 계 속 비단 손수건을 만지작거릴 뿐 더 는 입을 열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잠시 내버려 두는 게 낫겠군.
나는 아고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 덕 거렸다.
그는 화색을 띄운 것도 잠시, 표정 을 수습하며 다른 전사 서너 명과 함께 아탈란테를 조심스레 부축하여 말에 실었다.
“감사합니다, 포이닉스 경.”
“……고맙긴. 아탈, 음, 아틸리아는 내게도 좋은 친구였으니까.”
“그래도 감사드립니다.”
그는 말머리를 돌리다가 문득 고삐 를 당겼다.
“혹시, 아틸리아 아가씨께 전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전할 말?”
“예. 어쩐지 여쭤봐 두어야 할 것 같아서.”
난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내가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아고스 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푹 고개 를 숙였다.
“말씀 전하겠습니다. 그럼.”
안장에 아탈란테를 실은 아고스를 선두로, 누데인족 전사들이 농경지 를 크게 돌아 서편으로 향했다.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른 가을.
평화가 어울리는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