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84)
나의 악당들 184화
43. 발버둥(4)
시간은 가을바람을 타고 빠르게도 흘러갔다.
롱빌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보름쯤.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소 슬히 메말라가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먼저, 트리스탄 백작의 군대는 뮬 팅엄으로 물러났다. 병력의 태반이 죽거나 다쳤으니 당연한 일이었지 만, 명목은 따로 있었다.
영주관의 홀에는 여남은 명의 사람 들이 모여있었다.
“트리스탄 백작이 독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독살을 당해요?”
노기사 아리아드 경은 내게 편지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암살자의 배후에 도일 공자가 있 음을 확인했다는군요. 증거도 명확 하다고 하니 빠르면, 이달 안에 목 이 잘릴 거랍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군요.”
편지를 대충 훑어본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일이 트리스탄 백작을 죽일 이 유가 없잖습니까? 자리를 잡는 동안 유일하게 뒷배가 되어줄 아버지를 죽이다니.”
“누이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겼으 니 원한을 품었을 수도 있지요.”
내가 ‘그거 진심입니까?’ 하는 눈 으로 바라보자, 아리아드 경은 쓴웃 음을 지어 보였다.
“어차피 남작부인은 클라리사 아가 씨, 아니, 백작님과 한배를 탔습니 다. 한때 적이었던 사내에 대해선 관심을 접어두지요.”
……그래, 뭐. 뮬린 백작가의 후계 니 정략이니 하는 것들이야,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는 랭볼트 경은 콧수염 끝을 매만지며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전투가 너무 격렬했던 것이 마음 에 걸리는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죽은 이가 600명도 넘지 않나. 남 작부인과 클라리사 백작이 손을 잡 으면 그 아래로 불만을 품은 자들이 생기겠지.”
“……저희가 싸운 건 도일, 그 새 끼 때문이잖습니까?”
“그야 그렇네만, 도일 하나 참수한 다고 해서 원한이 다 풀리겠나?”
«으 W
고리십자가 의자에 앉아 잠자코 이 야기를 듣고 있던 다이오네아가 입 을 열었다.
“관문과 목책의 보수가 끝나는 대 로 군대부터 재건해야겠군요.”
끔찍한 전쟁을 겪은 탓일까? 그녀 는 전보다 초췌해 보였다.
사실 지금은 그나마 괜찮아진 거 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거의 식 음을 전폐한 채 침실에만 틀어박혀 있었거든.
내가 부지런히 들르며 위로해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히키코모리 흉내를 내고 있었을걸.
“병력을 적어도 두 배, 아니 네 배 까지는 늘려야겠어요.”
다이오네아의 선언에 청지기 에디 타가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부인. 일전에 말씀드렸지 만, 영지의 예산은 이미 바닥났습니 다.”
“그러면 금광 채굴을 재개하죠.”
“부인.”
롱빌의 재산과 토지를 관리하는 중 년 여인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부군께서 실종된 이후 롱빌은 아 누파드의 공격을 받았고, 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얼마 남 지 않은 수확이라도 거두기 위해 다 들 분주하지요. 당장 영지에 필요한 것은 광산 개발이 아니라 평화와 안 정입니다.”
“아니요. 안정은 없습니다.”
다이오네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 저었다.
“우리는 전쟁을 준비해야 해요.”
“부인, 그게 무슨.”
에디타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당황했다가 언성을 높였다.
“광명의 주께서 노하실 만한 말씀 입니다! 평화가 아닌 전쟁을 바라십 니까?”
“평화를 바랍니다. 아주 간절하게 요. 그러니 전쟁을 준비할 겁니다.”
“부인••••••
다이오네아는 랭볼트 경을 돌아보 았다.
“뮬팅엄에서 들끓고 있을 원한은 시간에 흐려지고 대화에 흩어지리라 고 믿어요. 하지만 언젠가 그 믿음 이 배신당하고 다시 한번 창칼을 맞 대게 된다면, 그때는 울카르 왕자님 께 중재를 청하겠습니다.”
처진 눈매와 자그만 눈물점 때문에 썩 가련한 인상이었음에도, 다이오 네아는 나름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 었다.
잠시 아리아드 경과 눈을 마주친 랭볼트 경은 씩 웃으며 고개를 숙였 다.
“기꺼이 섭정의 말씀을 전하겠습니 다. 주군께서 기뻐하시겠군요.”
문득 다이오네아와 시선을 마주쳤 다.
몰래 눈을 찡긋거리니, 그녀는 희 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일이 몇 개 더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사흘이 지났을 무렵 인가? 갑자기 주근깨 미라가 찾아왔 었지.
한창 아침을 먹고 있는데, 입가에 침 자국이 남은 미라가 우다다 달려 왔다. 그러더니,
“포이닉스 님, 저 도저히 못 참겠 어요.”
이렇게 말하며 강렬한 눈빛을 보내 오는 것이었다.
“……갑자기 뭐야?”
“자려고 눈만 감으면 꿈에 나오는 통에 참을 수가 없다구요.”
옆에 앉은 엘렌이 눈으로 시퍼런 불길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소리야?”
“……나야 모르지.” 녀석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나는 얼른 미라에게 되물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무슨 헛소리야? 꿈에 뭐가 나온다고?”
“장비들이요. 마도구들!”
그렇게 말하는 미라의 갈색 눈동자 는 물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누파드 놈들, 열에 하나는 마도 구를 들고 있었던 거 아시죠?”
“열에 하나는 무슨. 그 정도는 아 니었어.”
“그 많은 마도구들이 지금 다 어딨 을까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군.
나는 맥주를 삼키며 어깨를 으쓱였 다.
“불탔겠지. 그때 우테콰이가 하도 개지랄해서 다 태웠잖아.”
“시체들은 다 탔겠죠. 하지만 잘 뒤져보면 장비들은 쓸 만한 게 분명 남아있을 거예요.”
“……으음. 뭐, 그래서?”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상행이 다시 시작될 거래요. 그러면 어디서 굴러 먹다 온 상인 나부랭이들이 그 장비 들을 홀랑 주워가버릴 거라구요!”
“그 꼴 보기 배 아프니까 네가 주 워오겠다고?”
“제가 아니라 우리죠.”
“우리?”
“네, 우리!”
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안 가.”
“에? 왜요?”
“귀찮아.”
“……아니, 바로 코앞에 있는 산길 인데요? 그냥 산책 다녀온다고 생각 하시면 되잖아요.”
나는 의자에 눕다시피 늘어져 앉으 며 손사래를 쳤다.
“산책은 개뿔이. 말이 주워오자는 거지, 타다 남은 시쳇더미를 뒤져보 자는 거잖아. 그 산더미를 언제 다 뒤집어보고 앉았냐. 귀찮아.”
“지금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잖아 요, 마도구가 있을 거라구요!”
“마도구라고 해봐야 뭐 얼마나 대단 한 게 있겠냐. 그리고, 내가 이렇게 늘어지게 쉬는 건 좀 오랜만이거든? 방해할 생각 말고 너희끼리 다녀와.”
“……저희끼리는 좀 위험할 것 같 은데.”
“참나, 방금은 산책이라며?”
미라는 울상을 짓기도 잠시, 우테 콰이를 돌아보았다.
상체 곳곳에 붕대를 두른 채 구운 꿩을 뜯어먹던 놈은 뚱한 표정을 지 었다.
“뭘 보나?”
“……하탄카 씨는 어때요? 마도구 들이 탐나지 않으세요?”
우테콰이는 입가에 번들거리는 기 름기를 훔치곤 맥주를 들이켰다.
“크으. 몸 나으면 Lufte kapuQ 고 쳐야 한다.”
“네? 무슨 카푸치요?”
병아리콩과 치즈, 달걀을 넣어 만 든 죽을 떠먹고 있던 엘렌이 대신 대답했다.
“예장모 말이야. 우테콰이가 쓰고 다니던 깃털 모자.”
“아. 그걸 고치신다고요?”
“옳다. 틀이 휘었다. 정성을 들여 고쳐야 한다.”
우테콰이가 선대 하탄카로부터 물 려 받은 ‘리쿠와의 예장모’는 각종 저항력에 보너스를 주는 데다가 건 강을 2점이나 올려준다.
덕분에 어떤 빌드를 타든 광전사에 겐 초반 필수장비로 취급되는 물건 이지. 대체할 만한 장비가 워낙 적 어서 40레벨까지 쓰는 경우도 부지 기수고…….
어, 잠깐.
대체할 만한 장비가…… 있잖아?
내가 떠올린 것은 ‘철의 보관(寶 冠)’이었다. 챕터 3의 보스인 ‘아누 파드 퀸 라마쉬다’가 낮은 확률로 드랍하는 아이템.
게임에선 그 드랍률이 낮지만, 현 실에서야 머리에 쓰고 있던 물건이 갑자기 증발할 리 없지. 그러면 어 딘가 그 장비가 버려져 있다는 건 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주머니를 끌러 은화를 크게 한 줌 꺼냈다. 그리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라 의 앞에 우르르 쏟아내었다.
“어, 포이닉스 님?”
“난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이걸 로 용병이랑 일꾼들을 구해서 수색 해봐.”
“포이닉스 님……
어째 감동한 표정을 짓는 미라를 보며 피식 미소를 흘렸다.
“대신 얻은 마도구는 다 가져와.”
“••••••네?”
“왜, 싫어?”
“아니요, 음, 그게.”
“그게, 뭐?”
“어, 굳이 따지자면 포이닉스 님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게 맞긴 한데요. 또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니까 조금……
무어라 웅얼거리기도 잠시, 내가 은화 더미를 도로 가져갈 듯 쓱 손 을 올리자 미라는 이내 울상을 지으 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을 모으기에 앞서, 미라는 우 테콰이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미라는 내게 귀띔을 받은 대로 예 장모 수리를 위한 쓸만한 물건을 구 할 수 있을 거라고 우테콰이를 꼬셔 댔다.
우테콰이는 결국 제안에 응했고, 붉은 곰이 함께한다는 소식에 사람 은 금방 모여들었다. 주로 근래의 난리 때문에 농사를 망친 농민이나 발길이 묶인 행인들이었다.
그렇게 수색이 시작되었고, 미라는 고작 사흘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마도구를 일곱 개나 발견한 것이다. 첫 번째 마도구는 레어 등급의 장 비인 ‘철의 보관’이었다.
말이 ‘관(冠)’이지 헤드기어처럼 널 찍한 물건이었는데, 고정옵션으로 이차원의 마력에 대한 저항력과 하 급 저주에 대한 면역력을 부여하는 물건이었다.
이건 미리 생각해 둔 대로 우테콰 이에게 줬다. 우테콰이는 마력이 낮 아서 마법 관련 저항력이 좀 부족하 거든.
놈은 마음에 쏙 들었는지 예장모에 달려있던 깃털장식을 철의 보관에 달아버렸다.
……무슨 아이템 합성도 아니고, 저래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잘 지켜봐야지.
두 번째는 ‘라오 가문의 수정구’였 다.
그래, 시렌에게서 받았던 바로 그 수정구다. 엘렌이 꽤 유용하게 사용 했더 랬지.
라-팔라이스 궁전의 마법사들과 전투를 벌이다 잃어버린 물건인데, 수색 도중 용케도 찾은 모양이다. 여기저기 금이 가긴 했는데 못 쓸 정도는 아니라나.
이거야 뭐, 당연히 엘렌에게 돌려 주었다.
다음은 ‘씨앗의 합성궁’이었다.
아누파드의 네임드인 ‘하프블러드 주아마’가 쓰던 물건인데, 옵션은 잘 모르겠다.
생김새나 이름, 레어 등급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는데 정작 효과가 잘 기억이 안 나더라고. 활이야 원래 내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시위가 불에 타고 활대도 망가져서 제 위력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일단은 영지의 활장이에게 맡겨두 었고, 수리가 되면 교회에서 회복 중인 콜에게 줄 생각이다.
네 번째는 ‘참살의 언월도’였다.
생긴 건 평범한 펄션처럼 생겼는데 엄청나게 무거워서 일반인이 한 손 으로 쓰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칼이 었다.
꽤 쓸 만할 것 같긴 한데, 레어도 아니고 매직 등급의 물건이라서 흐 룬팅에 비빌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서 양손으로나마 다룰 수 있는 빡빡
이 스티드먼에게 줬다.
다섯 번째는 ‘불타는 도끼창’이었 다.
네임드인 ‘붉은 프샤카’가 쓰던 무 기로, 그 이름에 어울리게도 휘두를 때마다 불꽃을 일으키는 물건이었 다.
멀대 부니와 얌전한 제네사가 멀쩡 했다면 그 둘 중 하나에게 줬을 텐 데…….
팔이 잘린 부니는 내 장원인 라발 턴에서 대관(代官)으로 일하기로 했 고, 제네사는 폐의 상처가 아물 때 까지 용병일을 접기로 했다.
주인을 찾지 못한 도끼창은 내가 잠시 보관해 두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와 일곱 번 째는 나도 뭔지 모르겠더라.
각각 장검이랑 반지였는데, 그리 대단한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게 임이었면 그냥 상점행이 아니었을까 싶은 정도.
이것들까지 가져가면 미라가 울음 을 터뜨릴 것 같아서 그냥 가지라고 했다. 어째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수고했다며 금화도 한 줌 쥐여줬고. 어쨌든, 미라의 제안으로 시작된 수색은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 다.
그리고 이게 또 입소문을 타서 할 일 없는 농민들이 근처의 산이며 숲 을 뒤지는 게 유행이 되었다.
용병이나 괴물의 시체에서 쓸만한 쇠붙이나 옷가지라도 주워다 팔면 나름 벌이가 된다나. 뭐, 근방의 괴 물들은 씨가 말랐으니 별로 위험하 지도 않겠지.
그나마 생각나는 위험요소라고 한 다면 헤일라를 따라온 혈기사들 정 도일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헤일라를 포로 로 잡은 지 보름이나 지났는데 혈기 사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를 헤일라에게 물어봤더니 꽤 골 때리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 다.
“내가 부르지 않았으니까.”
“••••••뭐?”
“내가 부르지 않았으니까.”
헤일라는 팔에는 쇠고랑을, 발목에 는 철구가 이어진 족쇄를 찬 채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헤일라는 영주관의 쪽방에 감금된 상태였는데, 깔끔한 옷차림과 고귀 한 외모, 침착한 분위기 탓에 별로 죄수 같아 보이진 않았다.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지금 어딘가 짱박혀서 네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야?”
“짱박혀서?”
“숨어 있냐고.”
헤일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가 없네.” 나는 눈썹을 긁적거리며 재차 질문 했다.
“그러니까, 호위 대상에게서 아무 런 소식도 없는데 잠자코 숨어만 있 는다고?”
“내가 명령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말라고 했어.”
“그러다가 네가 죽기라도 하면?”
“아일란트로 돌아가 카이시스에게 보고를 할 거야.”
“지금 하는 꼴을 보니까 네가 죽든 말든 모를 것 같은데?”
“알 방법이 있어. 내 심장이 멈추 면 에오르단이 알아차릴 테니까.”
‘에오르단’은 발루인 가문에 속한 중년의 혈기사로, 헤일라의 삼촌이 었다. 포이닉스에게도 당숙 되는 사 람이니, 직계 중에서도 쌍왕가의 로 열블러드에 아주 가까운 자다.
“……그럼 네가 이대로 롱빌을 떠 나버리면 에오르단은 어떻게 행동하 지?”
“보름을 더 기다리다가 나를 찾아 나설 거야.”
“보름……. 그때 널 찾지 못하면?”
“아일란트로 돌아가 카이시스에게 보고를 할 거야.”
“ O 으”
내가 침묵하자 헤일라는 가만히 앉 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는 양 손목과 오른 발목에 붕 대를 감고 있었다. 내가 너무 무자 비하게 으스러뜨린 탓인지 헤일라는 좀처럼 회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장애로 남아도 이상하지 않 은 부상이었으니 별다른 치료 없이 뼈가 붙고 있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긴 하다.
나는 잠자코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