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85)
나의 악당들 185화
43. 발버둥(5)
망설임이 무색하게도, 내가 꺼낸 말은 별것 아닌 질문이었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여느 때와 같이 정물화처럼 앉아있 던 헤일라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 것이 었다.
어째 입안이 껄끄러워서 난 잠시 혀를 굴리다가 말을 건넸다.
“손목이랑 발은? 사제라도 불러줄 까?”
“ 괜찮아.”
그녀의 짧은 답변에 이어 또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헤일라와 마주하고 있노라면 포이 닉스의 기억들이 팝콘처럼 툭툭 튀 어 올랐다. 쌍왕가의 본성인 ‘타우 즈 덴’에서의 기억들 말이다.
기억 속의 포이닉스는 형제와 사촌 들 사이에서 검을 휘둘렀고, 커다란 말을 타고 호밀밭 사이를 달렸으며, 허리에 바위를 매달고 연못에 빠졌 고, 억지로 쥐게 된 단검으로 개와 돼지를 찔렀으며, 욕탕과 성벽 사이 에 숨어 책을 읽었다.
주황색 꽃 한 송이를 응달에 말렸 고, 유리창을 두드리는 지빠귀를 응 원했으며, 색이 고운 조약돌을 골라 품에 숨겼고, 유리창이 올려다보이는 정원을 거닐었으며, 그 정원 한구석 에 숨어 코를 훌쩍거렸고, 타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길을 나섰다.
쌍왕가의 적손답지 않게도, 혹은, 외부인의 피가 흐르는 서자답게도 포이닉스의 기억들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헤일라를 볼 때 마다 고함을 질러댔다. 당장 목을 잘라 심장을 꺼내라는, 이성도 논리 도 없는 명령이었다.
나는 포이닉스의 기억과 감정과 욕 망을, 흔히들 ‘자아’라고 부르는 것 을 곱씹어 보았다.
저 아래에 침잠해있던 포이닉스의 자아가 이렇게 미쳐 날뛰는 것은 나, 그러니까, 김승수로 하여금 공포 를 느끼게 만들었다. 걷잡을 수 없 이 부풀어 오른 포이닉스가 김승수 를 모조리 집어삼켜 버리는 건 아닐 까, 하는 공포 말이다.
공포는 나를 갈등케 했다.
자꾸만 포이닉스를 일깨우는 헤일 라를 없애버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 포이닉스 의 자아에 굴복하는 꼴 아닌가?
나는 꽤 오래 고민한 끝에 김승수 다운 결론을 내렸다. 이기적이고 계 산적인 결론 말이다.
침묵이 꽤 길어졌음에도 헤일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느릿하 게 눈을 깜빡거리며 나를 지켜볼 뿐 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난 널
죽이면 안 돼.”
헤일라의 깊고 까만 눈이 천천히 깜빡거렸다.
최근 들어 이틀에 한 번꼴로 대화 를 나눠서 그런지 이제는 그녀에 대 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방금 보여준 깜빡거림이 의문을 표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는 소리다.
“가출한 서자 나부랭이가 금지옥엽 으로 자란 적녀를 죽였다간 뒷일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알지?”
“응.”
빠르고 무미건조한 대답이 썩 얄밉 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풀어줄 수도 없어. 네가 자유를, 마력을 되찾은 뒤에 무슨 짓거리를 벌일지 모르니까.”
헤일라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냐고, 이 뻔뻔함.
“여기서 문제는, 언제까지고 너를 포로로 잡아둘 수는 없다는 거야.”
“왜?”
“뭐, 마력억제의 물약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도 있고……. 내가 앞으로 갈 여정이 짐덩이를 달고 갈 수 있 을 만큼 만만한 게 아니라는 것도 있고.”
“짐 덩이?”
“너 말이야.”
그녀는 말없이 입을 다물었다. 표 정 변화는 없었지만 어째 못마땅한 눈치다.
“그러니 언젠가는 네 포로 생활도 끝날 테고, 그때는 나도 결정을 해 야 해. 너를 죽일지, 아니면 돌려보 낼지.”
“이해했어.”
“그리고, 그 결정의 순간에 난 호흡을 두어 번 고르자 정신이 조 금 더 또렷해진다. 나는 그렇게 포 이닉스를 짓누르며 말을 이었다.
“널 죽이고 싶지 않아.”
“난 지금도 충분히 버겁거든. 네 오빠나 내 아버지의 추격을 받고 싶 지도 않고, 음……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솔직히 말해서, 네가 날 위해, 어,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어떻게?”
“어떻게? 뭐, 그야……
나는 눈썹을 긁적거리며 속으로 말 을 골랐다.
“옆을 지키면서 내 편이 돼주고, 싸워야 할 땐 같이 싸워주고, 아는 게 있으면 가르쳐 주고…… 뭐, 그 런 거.”
“ 아.”
헤일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 다.
“알겠어.”
“……뭘?”
“그렇게 할게.”
……아, 머리야. 진짜 이상한 여자 라니까.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가 로저었다.
“그, 네가 말 한마디 띡 한다고 해 서 좋다고 믿어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거든?”
“왜‘?”
“왜긴 이 미친—”
나는 크홈, 헛기침을 한 뒤에 차분 하게 입을 열었다.
“너, 엘렌을 납치해서 날 협박했잖 아. 콜은 거의 죽일 뻔했고. 그런데 어떻게 말 한마디에 널 믿겠냐.”
“약속할게. 네가 원하면 맹세를 할 수도 있어.”
“맹세?”
“응. 그 대신 내 조건도 들어줘야 해.”
……참나,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당 당하지?
“들어나 보자. 네 조건이 뭔데?”
“내가 도울 테니, 넌 네 의무를 이 행해. 그게 내 조건이야.”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난 아일란트로 돌아갈 생각 없다니까?”
“가법상 잉태의 의식은 타우즈 덴 안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상황이 이 렇게 되었으니 이번만은 예외로 할 게.”
“그게 무슨 소리야?”
“잉태자로서의 핵심적인 역할만 해 도 의무를 다한 걸로 쳐주겠다는 뜻 이야. 카이시스와 원로들은 내가 설 득할게.”
잉태자로서의 핵심적인 역할이라.
그제야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가축 접붙이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그런 걸 조건으로 걸어.”
“왜? 뭐가 문젠데?”
그 태평한 질문에 포이닉스의 자아 가 가슴을 툭툭 두드려댔다.
금방이라도 분노가 타오를 것만 같 았기에 나는 명상을 하듯 숨을 고르 며 헤일라의 얼굴에 집중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그녀는 정말 로 아름다웠다.
새까만 머리칼과 하얀 얼굴은 보기 좋은 대비를 이루었고, 깊은 눈빛과 붉은 입술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이 있었다. 거기에 얇고 긴 팔다리 와 아슬아슬한 굴곡, 차갑지만 고귀 한 분위기까지…….
말하자면, 사람들이 미인을 그릴 때 흔히 떠올리는 요소들을 모두 갖 추고 있는 것 같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랬고, 주관적으 로 봐도 아름다웠다. 나, 그러니까, 김승수의 이상형에 아주 가까운 외 모거든.
내 적극적인 관찰에 힘입어 포이닉 스가 일으키려던 분노가 잦아들었 다. 덕분에 나는 잠시간의 침묵을 끝내고 태연하게 말을 꺼낼 수 있었 다.
“그건 확답을 해줄 수 없어.”
“난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랑, 그것 도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 여자 랑 몸을 섞고 싶지는 않아.”
헤일라가 두어 차례 눈을 깜빡이는 동안 나는 품에서 열쇠뭉치를 꺼내 었다.
“대신, 이렇게 하자.”
“어떻게?”
그녀의 양손을 당기며 대답했다.
“장비는 돌려줄 수 없고, 마력억제 의 물약도 계속 마셔야 해. 그 대 신,”
딸깍, 수갑이 풀렸다.
“운신은 자유롭게 해줄게. 당연하 지만, 절대로 내 동료들을 해치면 안 되고 도망을 쳐서도 안 돼.”
이어서 족쇄가 풀렸고, 묵직한 철 구가 바닥을 굴러 쪽방의 한쪽 벽에 툭 부딪쳤다.
“이걸 어기면 다시 수갑과 족쇄를 채울 거야. 알겠어?”
« O ” 흐.
“이제 운신이 자유로워졌으니, 너 는 신뢰를 쌓아.” “누구의 신뢰?”
“나.”
헤일라의 새까만 눈을 빤히 바라보 았다.
“내가 널 믿게 만들어. 충분히 신 뢰를 쌓으면 언젠가 장비를 돌려줄 거고, 물약도 먹이지 않을 거야.”
조그만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산란하며 옅 고 진하게 층을 나누었다.
“그리고……. 만약 잘만 된다면.”
포이닉스의 자아를 완전히 누를 수 있게 된다면.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도 있겠지.” 헤일라는 감정이 없을 뿐 멍청이는 아니었다. 주홍빛으로 물든 눈동자 가 고요하게 반짝였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손목을 매만 지며 입을 열었다.
“ 맹세는‘?”
“••••••맹세?”
“응. 나 아직 맹세 안 했어.”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 를 쳤다.
“야, 됐어. 맹세니 약속이니 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 그걸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중요하지.”
“맹세는 중요해.”
“……어?”
“마음만큼이나 중요해.”
가을 해 때문인지 눈빛이 더 밝아 진 헤일라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 었다.
“자하크와 발아르의 이름 앞에 맹 세하건대,”
그녀는 자신의 엄지를 깨물었다. 피가 흘렀지만 하얀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너를 도와줄게.”
헤일라의 손길이 내 손에 닿았다. 진한 혈향이 정신을 흩어낸 탓에 끌 어가는 손길에 저항하지 못했다.
“네 동료들을 지킬 거고, 도망치지 않을 거야.”
피 흘리는 엄지가 내 손등에 붉은 곡선을 그렸다. 곡선이 원이 되어 닫혔다.
“그렇게 신뢰를 얻어서.”
붉은 물감이 겹쳐진 곳은 유난히 두꺼워 보였다. 나는 멍하니 그 원 을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거야.”
헤일라의 하얀 손이 붉은 원이 그 려진 손등을 덮었다.
“반드시.” 그녀의 손이 떨어졌을 때, 내 손등 에 그려져 있던 붉은 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롱빌의 영주관과 아성 사이엔 야트 막한 경사로가 하나 있다. 병사들이 가끔 오갈 뿐 썩 호젓한 곳이라 영 주관의 식객들은 이곳에서 바람을 쐬거나 산책하기를 즐겼다.
지금도 예닐곱 명의 사람들이 경사 로에 걸터앉아 간만의 따뜻한 정오 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이 들 중, 주근깨 미라가 미간을 좁히 며 입을 열었다.
“그게 완성품이라고?”
검은 단망토를 걸친 앳된 얼굴의 여인, 뭉치는 풀밭에 앉은 채로 고 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쓰는 건데?”
“이렇게.”
뭉치는 왼손을 앞으로 뻗더니 하박 에 찬 기계장치에 손을 올렸다. 그 러곤 ‘퓨-’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었다.
“……그게 끝이야?”
«으 W 흐.
“그렇게 해서 성곽은 어떻게 오르 는데?”
미라의 질문에 뭉치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미라, 바보야?”
“뭐, 뭐라고?”
뭉치가 팔뚝에 차고 있는 기계장치 는 작은 쇠뇌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녀는 그 장치에 걸린 쇠뇌살을 가 리키며 말했다.
“여기, 줄 이써. 줄 잡고 올라가. 당연히.”
“그게 뭐야. 그냥 갈고리 거는 거 랑 똑같잖아.”
“안 또까짜나. 미라 멍청해.”
“……너, 자꾸 나쁜 말 할래?”
미라가 무어라 언성을 높이려 하자 뭉치는 흥, 콧방귀를 뀌곤 고개를 돌리더니 기계장치를 만지작거렸다.
얼마쯤 옆에서 두 여인을 구경하던 빡빡이 스티드먼이 낄낄 웃음을 터 뜨렸다. 미라는 얼굴을 확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넌 뭐가 좋다고 쪼개고 앉았어? 이 대머리 땅딸보 새끼가.”
“하! 그렇게 당하고도 또 아가리를 털어대는구만. 저년 저거, 말버릇은 못 고친다니까.”
“내 걱정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 해.”
“내 앞가림?”
“그래, 등신아. 포이닉스 님이 말한 물건들, 아직 반도 못 구했다며?”
그 말에 스티드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게 뭐? 은도금 장검이니 성수니 하는 게 그렇게 구하기 쉬운 물건인 줄 아냐?”
“어려울 건 뭐야? 돈을 안 받은 것도 아니고.”
“돈만 있으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 라니까?”
스티드먼의 역정에 리더 아미아스 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티드먼 말이 맞아. 돈으로 해결 안 되는 문제가 많더라고.”
“너는 왜?”
아미아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한 숨을 내쉬었다.
“용병 말이야, 별로 못 모았거든. 포이닉스 님은 적어도 서른은 생각 하고 계신 것 같던데.”
“지금 모인 게 몇인데?”
“딱 열 명. 영지에 남은 용병들이 거의 없더라고. 개중에 쓸만한 놈은 더 드물고.”
“열 명?”
스티드먼이 눈을 반짝거렸다.
“열 명이면 물건이 부족할 일은 없 겠는데? 나, 대장간 안 가도 되는 거 아니냐?” “글쎄? 용병이야 가는 길에 더 구 해도 되지만 네가 구하는 물건들은 여행 중에 구하기 어렵잖아.”
“끄응, 그런가……
스티드먼의 얼굴이 흐려지자, 미라 가 그의 옆에 주저앉으며 뒤통수를 호쾌하게 후려쳤다.
“아윽, 이런 씨-”
“뭘 그렇게 기죽어 있어? 물건 못 구했다고 포이닉스 님이 널 죽이기 라도 하겠냐?”
“그런 게 아니잖아. 이건 책임의 문제라고.”
“지랄,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책임 감이 넘쳤다고.”
“아오, 진짜 이년이.”
스티드먼의 빡빡머리가 붉어지며 핏줄이 솟자, 미라는 얼른 말을 돌 렸다.
“그래서, 포이닉스 님은 왜 그런 걸 준비하라고 하시는 거야?”
“……나야 모르지.”
이어서 미라의 시선을 받은 아미아 스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도 몰라. 별말씀 없으셨어.”
“흐음. 넌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질문을 받은 이는 궁수 콜이었다.
그는 얼굴과 배에 붕대를 묶은 채 기이한 재질의 활을 당겨보고 있었 다.
“언데드를 사냥할 생각이시겠지.”
“ 언데드?”
“뻔하잖아. 은도금 무기, 성수, 화 염꽃 기름, 쇠말뚝……. 언데드를 잡 으려는 게 아니면 이런 걸 왜 구하 겠어.”
콜의 대답에 미라는 미간을 좁혔 다.
“언데드가 어디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놈들이야? 그리고, 어지간 한 놈은 엘렌 님의 화염구 한 방이 면 먼지가 돼버릴걸?”
“글쎄.”
콜은 활시위를 조심스레 원복시키 며 땀이 배어난 이마를 훑었다.
“잡을 놈이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 거나 수가 엄청 많은가 보지.”
“음, 그런가.”
미라가 쩝 입맛을 다시자 스티드먼 이 툴툴거렸다.
“하여튼, 그렇게 쉬운 일 아니니까 괜히 시비 걸지 마. 너는 아가씨 시 중이나 들면서 꿀이나 빨고 있는 주 제에.” “……꿀을 빨아? 이 미친놈이, 설 마 그거 나한테 한 말이냐?”
“그럼, 아가씨 시중이나 드는 게 여기 너 말고 더 있냐?”
미라는 마치 모함이라도 받은 것처 럼 얼굴이 벌게져 항변했다.
“아가씨가 어디 그냥 아가씨야? 너 는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는 주제 에,”
“누, 누가, 누가 눈을 못 마주쳐?”
“너, 이 겁쟁이 땅딸보 새끼야!”
“이게-”
“그리고, 시중드는 게 아니라 감시 하는 거거든? 내가 얼마나 쫄리는지 아냐? 막, 금방이라도 그때처럼 마 법을 부릴까 봐 막 불알이 오그라든 다고!”
여인인 미라가 불알 운운하는 것이 퍽 우스웠지만, 딴지를 거는 이는 없었다. 다들 그녀가 한 말에 공감 한 탓이다.
그러나 재차 시위를 당겨보던 콜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쫄 게 뭐 있어? 마력도 없지, 무 기도 없지, 게다가 이제 그런 짓은 안 벌인다며?”
그의 말에 미라는 헛웃음을 삼켰 다.
“……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가 그런 말을 하냐?”
“내가 왜?”
“왜긴, 여기서 그 아가씨한테 제일 된통 당한 게 너잖아.”
활을 무릎에 내려놓은 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어때. 상처야 포션 덕에 금방 나았고, 고귀한 아가씨한테 사과도 받았고.” “그게 무슨 사과야? 내가 보기엔 꼭 통보처럼 보이던데.”
미라의 빈정거림에 스티드먼이 말 을 보태었다.
“거의 명령이었지. ‘내가 사과할 테니, 넌 닥치고 받아들여라’ 하는 태도였다고.”
“귀족이 다 그렇지, 뭐.”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돌리는 콜 의 모습에, 스티드먼과 미라는 서로 눈을 마주치곤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기를 잠시, 미라는 이번엔 아 미아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미아스, 넌 언제 말씀드릴 거 야‘?”
“무슨 말씀?”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제네사한 테서 다 들었어.”
«……으 ”
아미아스가 입을 다물고 두꺼운 턱 을 매만지자, 미라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
“뭐하러 시간을 끄는 거야?”
“그러다 출발하기 전날쯤 말하려 고? 그•러면 포이닉스 님한테 진짜 얻어맞을 수도 있어.”
“일부러 시간 끄는 거 아니야. 나 도 아직 어떻게 할지 고민돼서 그 래.”
“내가 들은 거랑은 다른데? 훈련대 장 아저씨한테 좋은 제안도 받았다 며.”
“……그것도 고민 중이고.”
“으휴. 제네사도 불쌍한 년이다. 너 같이 우유부단한 새끼랑.”
아미아스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 러지자 미라는 쯧, 혀를 차며 고개 를 돌렸다.
그때, 기계장치를 만지작거리던 뭉 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에.” 그녀는 귀를 움찔거리고 코끝을 씰 룩댔다. 마치 개나 고양이처럼 굴며 한쪽을 주시하던 것도 잠시, 뭉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간 몇 번이고 보아왔던 모습이었 기에 아미아스 패거리는 뭉치가 바 라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미라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 게 영주관 쪽에서 장신의 사내가 모 습을 드러냈다.
스티드먼은 혀를 내두르며 엉덩이 를 털고 일어났다.
“언제 봐도 귀신 같다니까.” 용병들이 분분히 일어나는 동안, 뭉치는 이미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사내 쪽으로 껑충껑충 뛰어갔다.
“포이!”
“뭉치야.”
웃는 낯으로 뭉치의 머리를 쓰다듬 는 사내는, 당연히 포이닉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