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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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 020화
6. 고장 난 것들(1)
나는 오늘도 하수도에 가지 못했다.
해적이나 마적이 쳐들어와서는 아 니고, 경비대가 하수도 입구를 폐쇄 해서도 아니다.
비가 와서 하수도가 범람한 것도 아니고,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났 다는 제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럼 왜 못 갔냐고?
나는 터져 나오려는 한숨, 욕설, 실소 등등을 꾹 눌러 삼키며 모포를 덮고 누워 있는 엘렌에게 물었다.
“괜찮냐?”
“•••괜찮아 보여?”
“아니.”
녀석은 말도 하기 힘든지, 아니면 귀찮은지 반쯤 뜨고 있던 눈을 마저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뭐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 진 짜 딜 한번 세게 박고 싶은데….
참았다. 원래 아플 때 구박하면 백 배로 서러운 법 아니던가?
그렇다.
우리의 잉여 인간, 스킬 못 쓰는 찐따, 완드 없는 완드 받침대께선.
몸살로 앓아누우셨다.
뭐, 흔한 이야기지. 타지로 여행을 와서 고생을 하다 병상에 눕는 게 신기한 일은 아니잖아.
물론, 오금에 창을 찔리고, 군홧발 에 마구 짓밟히고, 스승이 물려준 유물은 박살 나 잃어버리고, 무력해 진 스스로 때문에 마음고생 하고, 삥도 뜯기….
아니, 공정한 기준에 의해 전 재산 을 갹출당하고, 며칠 동안 명상한답 시고 잠도 제대로 못 잔 것이 흔한 고생이라는 건 아니다.
•••그러고 보면, 녀석이 스킬을 사 용하지 못하는 거로 보아 스탯도 안 찍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녀석의 현재 건강 점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 이 정 도면 그냥… 일반인보다 조금 건강 한 정도다.
거기에 엘렌의 나이까지 고려하면 뭐, 아픈 게 당연하지.
“ 에휴.”
나는 양동이에 떠 둔 차가운 우물 물에 면포를 적셨다. 그러곤 녀석의 이마에 올려두었던 면포를 치우고 새 면포를 올려주었다.
“으음-”
“차갑냐?”
“아니. 시원해….”
녀석은 앓고 있는 건 몸살 같긴 한데, 의사에게 진료를 받은 건 아 니라서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이 세상엔 전문직으로서의 의사는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어 쩔 수 없지.
성에 머무는 의사가 있다고는 하는 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쪽은 외과의 에 가까운 것 같다.
대신 그라니아, 여관 주인 아저씨, 다리아까지 모두 몸살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라니아 패거 리의 성직자인 올가 수녀님이 몸살 이라고 하셨다. 하루 푹 쉬면 나을 거라고 하시는데… 뭐, 믿어야지.
짧은 상념은 엘렌의 신음 때문에 깨어졌다.
“o O ”
“왜? 어디 불편하냐?”
“팔. 팔 아파.”
“어디?”
녀석이 갑자기 앓아누운 것은 새로 얻은 석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것도 못 하는 잉여 인간에서 그나마 0.5인분이라도 할 수 있게 된 터다. 꽉 조여져 있던 긴장이 조 금은 느슨해진 거겠지.
그리고 지금 팔에 알이 배긴 것도 신나게 시위를 당기느라 이렇게 된 거다.
•••불쌍하긴 한데, 겁나 한심하다.
그래도 나는 말없이 녀석의 오른팔 을 주물러주었다. 흠칫 놀란 녀석은 눈을 감은 채로 슬쩍 미간을 찌푸렸 다.
“뭐 해, 하지 마.”
“앙탈 부리지 말고 잠이나 자라.”
이렇게 병간호를 하고 있으니 문득 군 시절이 떠올랐다.
갓 일병을 달았을 즈음, 감기몸살 을 앓은 적이 있다.
유격훈련 한다고 일주일간 개고생 하고 복귀행군까지 한 다음 날 앓아 누웠으니 진짜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경우였다.
그 서러운 토요일 날, 내 병간호를 해준 건 우리 분대장인 문 병장님이 셨다.
문 병장님은 하루 종일 내 옆에 붙어서 열도 재주시고, 환기도 시켜 주시고, 얼음찜질도 해주셨다. 심지 어 밥도 떠다 주셨다.
근데 그걸 내가 못 먹으니까 PX에 서 죽을 사서 데워주시더라.
내 동기들이 하겠다고 나서는데도 너희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만류하면 서 직접 다 해주셨지.
그때 먹었던 따끈한 계란야채죽의 맛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지, 싶다.
“…이제 괜찮아.”
“어? 그래.”
난 멍해진 머리를 작게 흔들곤 침 대 반대편으로 옮겨가 왼팔을 주무 르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엘렌을 간호하면서 조 금 나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몸살이 나은 후로도 한동안, 나는 문 병장님 같은 분대장을 위해서라 면 목숨도 바칠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내가 위험 에 처했을 때 녀석이 대신 죽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 고 있었다.
조카보다 많아야 세 살쯤 더 먹은 어린 소녀를 두고 말이다.
“•••등신 같은 놈.”
“뭐?”
“아, 아냐. 너 배는 안 고프냐?”
“괜찮아.”
엘렌은 반쯤 풀린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비열한 생각이 읽힐 것 같아서 나 는 재빨리 눈을 피했다.
갈 길을 잃은 시선을 허둥지둥 굴 리던 중, 엘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
“•••응?”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냐고.”
녀석의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입매가 조금 떨린 것 같긴 한데, 못 봤겠지?
“무슨 소리야? 동료니까 그렇지.”
“•••우리 만난 지 열흘도 안 됐거 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서로 목숨을 빚진 사이인데.”
“서로 한 번씩 구해줬는데 남은 빚 이 어딨어.”
아파서 그런가? 녀석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습하게 느껴졌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타지에서 이게 뭔 꼴이냐?”
“혹시 너, 내가 귀족이라고 생각하 는 거야?”
“•••뭐?”
얘가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자, 녀석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며 조그맣게 말했다.
“귀족 집안 아가씨한테 빚 지워두 고 팔자 고치려는 생각이면… 미안 한데, 나 그런 거 아니야.”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나한테 붙어있어 봤자 헛수고라 고.”
“야, 내가-”
그따위 돈 때문에 이러는 거겠냐, 라고/… 화를 내고 싶은데, 화를 내 야 하는데, 화를 낼 수가 없다.
조금 전에 한 비겁한 생각이 목구 멍을 틀어막았다.
내가 엘렌을 신경 쓴 이유는 녀석 이 게임에서처럼 강대한 마법사가 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 사실 이 혀를 마비시켰다.
녀석의 틱틱거리는 태도를 받아준 이유는 조카인 지원이가 생각나서였 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돈도 없어. 날 키워준 사람도, 나 때문에 죽었어.”
“십 년 동안 배웠는데 마법도 못 써. 네 말대로 그냥 잉여-”
엘렌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엘렌은 고개를 돌린 채였지만, 나 는 녀석을 내려다보고 있었기에 울 음을 참기 위해 찡그러뜨린 얼굴이 훤히 보였다.
평소라면 찌그러진 얼굴을 보며 장 난으로라도 한마디 했을 텐데 도저 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이를 서른이나 처먹고 애도 하나 못 달랜다. 내가 아직 애여서 그런 가 보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엘렌의 팔을 계속 주물러주었다.
엘렌이 울다가 잠들고 두 시간쯤 지났을까? 올가 수녀님이 돌아오셨 다.
올가 수녀님은 삼십 대 초반 정도 로 보였는데, 성직자답게 차분하고 자상한 성격이셨다.
그녀가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어쩌지? 도시가 봉쇄되어선지 약 초를 구하기가 어렵네.”
“아… 어쩔 수 없죠.”
“도움을 못 줘서 어쩐담.”
“아닙니다, 수녀님. 나서주신 것만 으로 감사한데요.”
올가 수녀님은 ‘엘 가노어 교단’ 소속의 성직자였다.
미들월드에서 가장 메이저한 종교 가 ‘광명교’고, 그 광명교 안에서도 가장 성세가 큰 곳이 엘 가노어 교 단이었다.
올가 수녀님은 수행을 겸한 성지순 례를 위해 그라니아 패거리와 합류 했다고 한다. 그라니아가 살던 곳 근처의 수도원 출신이라나.
어쨌든 수녀님은 성직자답게 신성 마법을 쓸 줄 알았는데, 그 수준이 그리 높진 않은지 상처 치료와 해독 정도만 가능하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1인분은 할 텐데, 양 손검도 꽤 잘 다룬다고 한다.
수도원에서 검술을 배웠다는데… 대체 무슨 수도원이길래 살인기술을 가르치는 거야?
상념을 털어낸 나는 잠시 망설이다 가 주머니에서 동전 몇 푼을 꺼내 들었다.
“저, 제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이지만 헌금을 드려도 될까요?”
내가 공손한 태도로 묻자, 올가 수 녀님은 잠시 놀란 표정이더니 이내 온화한 미소를 지으셨다.
“뭐, 고맙게 받을게. 빛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수녀님께도 빛의 가호가 함께하시 길.”
나는 수녀님을 따라 가슴과 입술에 차례로 손을 대며 고개를 숙였다.
이게 광명교의 인사법인가 보다. 기억해 둬야지.
“아는 잡화상에 한번 가보고 싶은 데, 엘렌을 잠시만 부탁드려도 될까 요?”
“물론이지. 마침 방에서 쉴 생각이 었거든.”
“예,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무장을 챙겼 다. 잡화상 가는데 무장을 뭣하러 하냐고 묻는 사람은 없겠지. 지금처 럼 흉흉한 분위기에 무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평상복 위에 장비를 모두 차려입곤 슬쩍 내 몸을 훑어보았다. 돈을 거 의 다 써가며 장비를 맞춘 덕에 퍽 든든했다.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가죽장화 에 목이 긴 가죽장갑, 아마포로 짠 모자와 둥근 철투구, 철판을 사슬로 이어붙여 만든 흉갑까지.
하나같이 품질이 상당히 좋은 물건 들이었다. 부둣가 전투에서 해적의 장비들을 노획해서 팔았는데도 돈이 빠듯할 지경이었으니 말 다 했지.
특히 가죽장화랑 가죽장갑이 엄청 비쌌다. 두 개 세트로 은화 여덟 닢 이나 냈다. 그래도 돈값은 하는지 상당히 튼튼하고 착용감이 좋아서 별로 불만은 없었다.
이어서 벨트를 차고 펄션과 버클러 를 매달았다.
원방패는…… 너무 커서 거슬릴 것 같은데.
에이, 가져가자.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원방패까지 어깨에 메고 1층으로 내려갔는데, 바 쪽에서 다리아가 말 을 걸어왔다.
“어, 포이! 엘렌 씨는?”
“올가 수녀님께서 잠시 맡아주고
계셔.”
“아하. 넌 어디 가는데?”
“약 구하러. 오레그 씨 잡화상에 가볼까 하는데.”
내 말에 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뼉을 쳤다.
“잡화상에? 그럼 교역소도 지나치 겠네? 잘됐다!”
“응? 뭐가?”
“교역소 앞에 곡물창고 있는 거 알 지?”
모르는데. 그런 게 있었나?
“거기서 성주님 지시로 주민들에게
밀을 배급해 준대.”
“성주님이?”
그러고 보니 게임 속의 사우스하버 성주는 조금 멍청하긴 해도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밀 배급이라. 민심을 달래려고 곳 간을 푼 모양이군.
“그래 봤자 나랑은 상관없네. 주민 들만 나눠준다며.”
“그렇긴 한데- 가는 길에 데려다 주면 안 될까?”
다리아가 애교가 담뿍 담긴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깨의 움직임에 맞춰 그 아래 묵직한 무언가가 요동쳤다. 테이블 위에 손을 모아 올리고 있었던 탓에 그 입체감이 한결 도드라졌다.
대화를 할 땐 상대방의 눈을 봐야 하는데- 중력에 이끌리듯 나도 모 르게 시선이 자꾸만 내려간다.
“나, 나랑?”
“응. 요즘 도시가 흉흉해서 혼자 밖에 돌아다니기가 좀.”
연한 붉은 머리칼에 보기 좋게 그 을린 피부, 급격한 굴곡의 몸매까 지… 머리만 금발로 염색하면 미국 하이틴 드라마의 퀸카 역할로 캐스 팅될 것 같은 외모였다.
“그래, 넌 진짜 큰일 나겠다.”
“응? 뭐라고?”
억, 나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 로….
“아, 아냐. 도시가 흉흉한 게 큰일 이라고.”
“ 으흠?”
나는 애써 시선을 올려 다리아와 눈을 맞추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 가 초롱거리고 있었다.
……눈이 초록색이었구나.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처음 알았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정말? 고마워!”
다리아는 활짝 웃더니 앞치마를 풀 어 던지곤 바에서 뛰어나왔다.
이대로 가는 거야? 하긴, 손님도 거의 없으니 상관없는 건가.
“준비할 건 없어?”
“응. 바로 가자!”
그렇게 다리아와 걸음을 옮기는데, 바 뒤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한 소 년이 나타났다.
어린 중노미는 다리아가 여관을 나 서려는 모습을 보곤 어리둥절한 표 정으로 물었다.
“다리아 누님, 어디 가세요?”
“배급받으러!”
“배급? 그거 나중에 주인아저씨께 서 받으러 간다고,”
“다녀올게! 잠시 바 좀 부탁해!”
다리아는 다급히 소리치곤 내 팔을 이끌고 문을 나섰다.
길거리로 나와서야 내 시선을 느꼈 는지, 다리아는 얼굴에 홍조를 띠며 살짝 혀를 빼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줄래?”
나는 멍청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미친, 이거 뭐지?
문득, 가슴 한쪽에서 잠자고 있던 분홍빛의 무언가가 슬쩍 고개를 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