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89)
나의 악당들 289화
53. 한밤의 태양(8)
전투를 준비하라 비장한 고함을 내 지른 것이 민망하게도, 얼어붙은 시 체들은 막벽을 올라오지 못했다.
화르륵
수도원은 불길에 휩싸인 채였다.
얼어붙은 시체와 이성을 잃은 혼령 들이 물밀듯 밀려들자 오색 광채를 내는 장막이 그들을 불로써 집어삼 킨 것이다.
막벽을 기어 올라오던 좀비와 상공 에서 날아드는 스펙터들은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하얀 불꽃에 휩싸 였다. 놈들은 사방에 불티를 튀기며 몸부림을 치다가 한 줌 재가 되어 겨울바람에 흩어졌다.
마치 불 속에 뛰어드는 날벌레들처 럼, 저급한 언데드들은 제 운명도 모른 채 가열히 달리고 날아 신성결 계에 몸을 던졌다.
결국 광명교의 성지인 세테니오라 수도원은 오색 광채의 장막과 거기 에 닿아 하얗게 불타는 언데드들로 인하여 대낮처럼 밝아졌다.
“유황 먹인 횃불을 챙겼는데, 헛수 고였던 모양입니다.”
강철 뿔이 달린 마법의 방패를 등 에 멘 컨휘어는 짧은 활과 화살 몇 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공성전 양상이 될 전투에 대비해 수비대의 무기고에서 빌려온 장비였다. 상태 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막벽 바로 아래로 화살을 날리는 것 정도는 가 능할 것 같았다.
“ 헛수고?”
“예. 장작이 제 발로 뛰어 들어오 잖습니까. 이 정도면 사흘은 너끈하 겠군요.”
난 문루에 놓인 의자에 뭉치를 앉 혀두고 녀석을 간호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시체들이 파괴되며 내뿜 는 ‘부패의 안개’는 혈액독이나 신 경독이 아닌 세균의 작용이었으므 로, 혈조술로 처치하는 건 어려웠다. 그래서 망루에서 대기 중이던 수도 사제를 불러 치료를 받은 참이다.
정화의 기도를 받은 덕에 발그스름 한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 뭉치의 볼 을 어루만지며, 마구 요동치는 신성 결계를 흘긋거렸다.
“저건 장작 같은 게 아니야.”
“어- 예, 그렇지요. 저들도 한때는 사람이었으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저 언데 드들이 땔감 역할을 하는 게 아니란 소리야.”
“예? 그게 무슨.”
의자에 늘어져 눈을 감고 있던 뭉 치는 볼에 내 손이 닿자 ‘히힣’ 하 고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신성결계의 연료는 장작이나 시체 가 아니라 성당에 있는 사제들의 신 성력이야.”
“그럼……
“언데드 하나를 불태울 때마다 그 만큼 연료가 줄어든다는 거지.”
쯧, 혀를 찬 컨휘어는 슬쩍 주변을 훑어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성자님이 없으니 그 연료 자체도 줄었겠군요. 성당기사가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당기사 카바르 경은 막벽에서의 전투지휘를 휘하의 하사관에게 맡긴 뒤, 두 수도사제 중 하나와 병사 일 부를 데리고 성당으로 향했다. 사제 들의 힘이 다해 신성결계가 무너지 면 그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리라고 여긴 것이다.
뭐, 옳은 판단인 것 같다.
성당은 수도원의 비전투 인원들이 숨은 대피소이며, 망자들이 증오해 마지않는 장소다. 신성결계가 무너 지면 지금 밤하늘을 유린하고 있는 밴시, 시귀, 불타는 두개골 따위는 곧장 그리로 몰려들 터였다.
막벽에 들러붙은 좀비들이나 저 뒤 쪽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둘라한, 해골기사는 물리적 실체가 존재한 다. 창칼을 휘둘러 처치할 수 있다 는 뜻이다.
반면 상공을 떠도는 놈들은 대부분 물리적 실체가 없다. 일반 병사가 칼질을 해봐야 허공을 가르며 잠시 흩어지게 할 뿐, 퇴치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강력한 전투기술을 기본으 로 신성력까지 겸비한 성당기사와 퇴마술에 일가견이 있는 수도사제는 이곳, 막벽보다 성당에서 더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나리!”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니 막내 삼 인조가 문루 위로 뛰어 올라오고 있 었다. 아까 심부름을 맡겼는데 이제 야 돌아온 모양이다.
“……왜 너희만 오냐? 헤일라랑 움 베르타는?”
“성당에 계셔요.”
“성당에?”
헥헥대며 숨을 고르는 초장이 골만 과 밀렵꾼 카바스를 대신해, 셰아가 설명에 나섰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자긴 여 기로 오는 것보다 성당에 있는 게 나을 거라고 하셨어요.”
“왜‘?”
“그게,”
셰아는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조심 스레 말을 이었다.
“여기보다 성당에서 더 많은 피가 흐를 거라고……
헤일라는 나와 같은 혈기사이지만 전투기술보다는 혈조술에 특화되어 있다. 그래서 전투에 나서면 육박전 을 펼치는 경우는 전혀 없고, 전장 에 뿌려지는 피를 이용해 마력을 투 사하는 방식으로 싸운다.
그러니 헤일라로서는 썩은 체액만 몸에 가득한 시체들을 상대하는 게 조금 난감할 터였다.
……근데 유령들도 피가 없기는 마 찬가진데?
“더 많은 피라……
설마 구울이나 스펙터에게 당한 희 생자들의 피를 모아서 ‘혈왕의 영 토’ 같은 걸 펼칠 생각은 아니겠지? 피의 장막이 빛의 장막을 대체하는 장면을 사제들이 썩 좋아할 것 같지 는 않은데.
아니, 괜한 걱정이다. 똑똑한 헤일 라가 알아서 잘하겠지.
막내 삼인조에게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제자리로 돌려보낸 뒤, 마법무 기를 지닌 프리츠와 데르비쉬를 성 당으로 보냈다. 원래 성당 쪽은 카 바르 경과 사제들에게 맡기고 신경 을 꺼둘 셈이었지만 헤일라가 가 있 다니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프리츠와 데르비쉬가 떠나고 시간 이 얼마쯤 흐른 뒤.
후르르릉-
마치 거센 비바람에 불꽃이 흔들리 듯, 오색 광채의 커튼이 크게 요동 쳤다.
“포이 닉스.”
“ O ”
흉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우테콰이가 우뚝 일어섰다. 놈은 우 두둑거리며 뼈마디를 풀곤 슬슬 식 어가던 쇠사슬을 손에 감았다.
그 모습을 본 용병들 역시 무기를 들었고, 곧 카바르 경이 남긴 하사 관과 그의 병사들도 긴장된 기색으 로 홍벽에 바짝 다가섰다.
난 샛별을 뽑아 들었다.
신성결계가 흔들릴 때마다 샛별이 뿜는 빛이 점점 더 강해졌다. 그 빛 을 가만히 감상하다 문득 컨휘어를 돌아보았다.
“횃불 말이야, 미리 밝혀두는 게 좋겠는데?”
14년 짬밥의 베테랑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용병들을 돌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곧 신성결계가 사라진다! 횃불 들 어!”
용병들이 횃불을 채 들기도 전에, 상공을 맴돌던 시귀들이 신성결계의 흔들림을 읽어냈다.
여섯, 아니, 일곱 구의 구울이 까 만 연기를 내뿜으며 일제히 날아들 었다. 화르륵, 신성결계가 마지막까 지 불빛을 토해냈으나 구울들은 끝 내 장막을 찢어발겼다.
오색 광채를 뽐내던 결계가 사라졌 다. 어둠이 내려앉은 세테니오라 수 도원을, 섬뜩한 비명이 채웠다.
끼이야아아악—!
“커 헉-”
예배당 단상에 무릎을 꿇고 있던 초로의 성직자, 헤카벤코 주교가 앞 으로 고꾸라지자 주변을 지키던 부 제와 병사들이 일제히 ‘각하!’ 하고 외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카바르, 카바르 경은?”
“여기에 있습니다, 각하!”
부제의 부축을 받으며, 주교는 핏 기 없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교와 함께 신성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사제들은 이미 혼절한 상태였 다. 호두나무로 짠 예배당의 정문엔 버팀목이 여남은 개쯤 대어진 채였 고, 성서의 구절들을 묘사한 색유리 는 못질한 나무판과 엎어진 수레 따 위로 가려져 있었다.
성당기사인 카바르와 수도사제, 그 리고 마흔여 명의 병사들이 예배당 을 지키고 있었다. 다시 보니 병사 들 중 절반은 수도승이고 나머지는 수도단지에 머무르던 신도들이라 주 교는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적기사는 어디에 있소?”
“막벽을 지키고 있습니다.”
“막벽을?”
“예, 성지의 수비대에 그의 부하들 까지 더해 백이십 명이 관문을 지킬 겁니다. 쉽게 뚫리진-”
끼이야아아악—!
“-않을 겁니다.” 촛대를 밝힌 예배당은 아늑한 공기 로 가득했으나, 섬뜩한 비명소리에 이어 슬슬 냉기가 엄습해왔다.
주교는 작게 탄식하더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울카르 왕자, 그 이단 종자의 기 사에게 성지의 수비를 맡기다니. 어 쩌다 일이 이리 되었는지.”
“……포이닉스 경은 믿을만한 사내 이며, 소문대로 무시무시한 기량을 가진 기사입니다.”
중년의 성당기사는 입술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성당기사 둘을 순식간에 살해한 죽음의 기사와 동수를 이루는 걸로 도 모자라, 음, 묘수를 써서 죽음의 왕을 처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그를 믿지 않는다면 속세의 기사 중 누굴 믿겠습니까?”
“속세의 기사에게 성지의 수비를 떠맡긴 것부터 문제요. 마티안베르 백작의 타락을 진즉 알아채 처단했 더라면 이런 흉사는 없었을 것이오. 그가 농번을 이유로 군대를 거둘 때 의심을 품었어야 했어……
“그는 평범한 속세인이 아닙니다. 성자님께 계시를 전달받지 않았습니 까.”
“경은 그의 이야기를 믿소? 꿈 운 운하는 그 허황한 이야기를?”
“성자님께선 꿈을 통해 미래를 보 셨고, 임종 직전 포이닉스 경에게 무언가를 전달했습니다. 저는 이 정 황을 믿습니다.”
주교는 벨벳을 두껍게 깐 의자에 앉으며 한숨만 푹 내쉬었다.
카바르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신 에 찬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말씀하신 마티안베르 백 작을 처단한 게 바로 포이닉스 경입 니다.”
“사술의 부작용으로 힘을 잃고 쫓 겨난 노인을 숲속 선술집에서 만나 요행히 살해한 것 뿐이지 않소.”
“그 일이 요행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도스에 나타난 염계의 대 악마를 처치한 것도, 남부로 향하는 ‘왕의 가도’를 틀어막고 있던 아누 파드들을 물리친 것도, 사우스하버 에서 마녀와 강도남작, 기는 용의 목을 자른 것도, 죽음의 왕 루크의 존재를 교단에 알린 것도 그입니 다.”
“그만, 그만하시오.”
헤카벤코 주교는 힘없이 손을 내저 었다.
“……그래. 사실 나도 그가 불세출 의 용자라고 생각하오.”
“각하, 그럼.”
“하지만 그는 결국 울카르의 기사 요. 왕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의 추종자라고. 이것이 교단에 얼마나 큰 재앙이 될지, 성당기사로서 숙려 해본 적이 있으시오?”
성당기사가 침묵한 동안 밖에서는 재차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곧 예배 당에 스민 신성결계의 흔적이 완전 히 사라지면 망자의 무리가 이곳을 공격할 터였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적기사 는 성지의 수호자가 될 것이고, 패 배한다면 장렬한 순교자가 될 것이 오. 울카르, 그 잘생긴 위선자가 이 를 어떻게 이용할지 상상조차 하기 싫군.”
카바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 에, 헤카벤코 주교는 부제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잡설이 길었소. 슬슬 준비를 해야 지.”
“……예, 각하.”
주교는 단상에 올라 자신을 바라보 는 병사들을 격려했다.
이 성지가 얼마나 중요한 곳이지, 이곳에서 순교하면 신이 어떤 보상 을 내릴지, 신이 그들에게 어떤 승 리를 약속했는지…….
주교는 뻔하지만 감동적인 이야기 를 늘어놓으며 예배당을 둘러보다 가, 덜컥 숨을 삼켰다.
“••••••허어.”
헤카벤코 주교는 평생을 성직자로 살았다. 하지만 지금 막 시야에 들 어온 여인은 그런 그조차도 잠시 번 뇌에 빠질 만큼 아름다웠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채 차를 홀짝이고 있는 미녀에게, 주교는 얼른 정신을 수습하며 질문 했다.
“그대는 왜, 전투 나설 수 없는 자 는 지하에 숨으라 하였는데.”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는 미녀를 대 신하여 카바르가 대답했다.
“비전투 인원이 아닙니다, 각하.”
“그럼?”
“포이닉스 경이 성당의 수비를 돕 기 위해 보낸 자들입니다.”
주교의 시선이 미녀와 그 주변을 훑었다. 그녀의 곁엔 세 사람이 함 께였다.
중갑을 입은 채 의자에 앉아 곡도 를 닦고 있는 덩치 큰 여인, 무료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여 인, 껄렁한 자세로 앉은 말총머리의 사내. 다들 용병으로 보였다.
헤카벤코 주교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으나 미녀는 멀뚱히 마주 바라 볼 뿐 일어나 예를 청하거나 하진 않았다. 하긴, 바깥에 언데드들이 득 시글거리는 와중에 인사를 주고받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담대한 여인이로군. 이런 상 황에서 차를 마시다니.”
주교의 말에, 미녀는 잠시 눈을 깜 빡이다가 입을 열었다.
“필요해서 마시는 겁니다.”
“필요해서?”
“네. 담력은 약해요.”
썩 당당한 말에 주교는 실소를 터 뜨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무시무 시한 어조로 순교를 부르짖던 초로 의 성직자가 웃음을 터뜨리자 다른 이들도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담력 약한 그대를 위해 선물 을 줘야겠군. 무기를 드시오.”
검은 머리칼의 미녀, 헤일라는 대 답 대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주 교는 고급스러운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텅 비어 있음을 깨닫고 이번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 늙은이가 아가씨를 곤란 하게 했군.”
“괜찮습니다.”
또다시 한바탕 웃은 주교는 예배당 으로 모여드는 사기를 느끼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들었 다.
“하면, 이건 그 대신이라고 하지.”
늙은 성직자가 ‘주여’ 하고 중얼거 렸다. 예배당에 든 모든 이들의 무 기가 빛을 뿜으며, 촛대의 불빛을 밀어내고 장내를 하얗게 물들였다.
“이건-”
“오, 주여.”
‘신성한 무기’를 쥔 병사들은 격동 에 차 성호를 그었다.
단상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헤카벤코 주교는 몇 년쯤 더 늙은 얼굴로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부끄럼 없이 싸우세. 주의 품에 안길 때까지.”
성당기사 카바르를 필두로 마흔여 명의 병사가 각자의 말로 기도를, 고함을 질렀다.
조용히 앉아 있던 헤일라가 마지막 차 한 모금을 마무리하던 그때,
꽝!
호두나무로 짠 예배당의 문이 산산 이 박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