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18)
나의 악당들 3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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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아본 후작이 사람들을 불러 모은 건 해가 중천에 뜰 즈음이었다. 나 역시도 부름을 받아 헤일라를 데리 고 응접실로 향했다.
“오, 포이닉스 경. 어서 오시게.”
“각하.”
농구장만큼이나 널찍한 응접실엔 구석에서 대기 중인 시종과 하녀들 을 제외하고도 열댓 명의 가신들로 바글거렸다.
오스 백작과 노기사 기드발 경은 물론이고 피올의 시장, 전투마법사 라프 그리고 제비어 경 등 황금기의 기사들이었다.
에아본 후작과 파나벨 부인에게 차 례로 예를 표하자 후작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손자에게 대충은 들었네. 간밤에 멋진 모험을 했다고?”
“아, 하하……
“경의 배포가 보통이 아님은 짐작 하고 있었네만 마수를 길들이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일세.”
붉은 비단을 씌운 영주좌에 몸을 반쯤 뉜 후작이 장난스레 혀를 내둘 렀다. 눈치를 보아하니 바이콘과 다 이어울프를 잡아 온 일로 시비를 걸 것 같지는 않았다.
“늑대 떼는 모두 도망쳤다지? 고생 깨나 했겠더군. 이 땅의 주인으로서 감사를 표하네.”
“아뇨, 아닙니다. 애초에 바람이나 쐬려고 나간 거였고, 별로 고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경의 입장에서야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도움을 받은 내가 얼렁뚱 땅 넘어갈 수야 있나. 리안 웰에 도 착하면 경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겠 네. 일단은 그 전에,”
에아본 후작은 응접실 구석에 서 있던 어린 시종에게 손짓을 했다. 시종은 신발 상자만 한 궤짝을 가져 와 내 앞에서 열어 보였다.
“이건,”
“내 작은 성의일세.”
번쩍이는 은화가 가득한 것이 족히 삼사백 닢은 넘는 것 같은데, ‘작은 성의’라고요? 금화도 꽤 섞여 있는데?
“번거로우실 테니 경의 부하들에게 전달해 두겠습니다.”
“어-”
어린 시종이 공손하게 건넨 제안에 내가 곤란한 표정으로 눈썹을 긁적 이자, 후작이 짐짓 단호한 투로 말 했다.
“미리 말하건대, 사양은 사양하겠 네. 겸양의 말이 오갈 정도로 대단 한 재물이 아니니.”
……하긴. 에아본 후작은 작은 나 라의 왕이나 다름없는 양반이다. 이 정도야 푼돈이겠지.
뭐,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마침 현금이 마르던 참이라 아이템 을 몇 개쯤 처분할까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게 됐다.
난 ‘작은 성의’를 순순히 받아들였 고, 후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궤 짝을 든 시종을 내보냈다. 그리고 옆에 놓인 벨벳 카우치를 가리켰다.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게. 헤일라 양도. 피올을 떠나기 전에 봉신과 면담을 할 참이라서 말일세.”
그가 말하는 봉신이 누구일진 뻔했 기에, 난 애써 흥미진진한 기색을 숨기며 카우치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응접실의 문이 열리 고, 한 소년이 들어왔다. 예상대로 루얀 남작이었다.
“흠.”
난 그를 보고 새삼스레 놀라고 말 았다. 방이 환해질 만큼 잘생긴 얼 굴 때문이다.
지난밤 흙을 발라 위장하고 있을 때도 대충 짐작은 했지만, 네다섯 살쯤 더 먹으면 그야말로 절세의 미 남자가 될 소년이었다.
내 주관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방금 까지 내 쪽을 흘긋거리며 얼굴을 붉 히고 있던 하녀들이 루얀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진 게 그 증거였다.
“아리아가 가문의 봉신으로서 델리 로드와 체더 성을 지키는 루얀 알더 슨 오브 어스기치가 삼가 주군을 뵙 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예. 오랜만입니다, 각하.”
어깨를 펴고 허리를 세운 자세 때 문일까, 아니면 고집이 엿보이는 눈 빛 때문일까. 곱상한 얼굴과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어린 영주는 썩 당당한 분위기를 풍겼다.
왕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권력 자인 에아본 후작과 한 시대를 풍미 한 늙은 검호인 기드발 경, 기괴한 행색의 마법사 라프, 그리고 건장한 기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와중 에도 기죽은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 다.
역시 보통 초딩이 아니라니까.
감탄과는 별개로 난 루얀을 보며 측은함을 느꼈다. 응접실에 들어오 기 전 헤일라에게서 그에 대한 정보 를 얻은 탓이다.
알고 보니 저 소년 영주의 아버지 는 다름 아닌 알더 백작이었다.
에아본 후작의 봉신으로, 천일전쟁 에 참전했다가 울카르에게 사로잡힌 뒤 국왕의 명으로 처형당한 그 알더 백작 말이다.
백작이 죽은 직후 어스기치 가문은 에아본 후작에게 백작위를 박탈당했 다. 앤트럼 북부의 도시 ‘트럼 웰’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지도 마찬가지였 다.
지금 후작의 손자인 오스 백작이 가진 작위와 영지가 바로 알더 백작 의 것이었다.
어쨌든, 알더 백작의 유일한 자식 인 루얀은 고작 아홉 살의 나이에 영주가 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거라 곤 작은 영지인 델리로드와 낡은 요 새인 체더 성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남편 알더 백작이 참수당했다는 소 식을 듣고 그만 미쳐버렸다고 한다.
결국 루얀은 제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든 어린 나이부터 믿을 만한 가족 하나 없이 척박한 영지를 홀로 다스 려야 했다.
“많이 컸군.”
내 상념을 깬 건 에아본 후작의 목소리였다.
“각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 다.”
“그런가? 난 최근 몇 년 동안 델리 로드에 따로 관심을 둔 적이 없는데.”
“예.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루얀의 당돌한 대답에 후작의 입매 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깔끔히 정리된 수염을 매만지며 자 연스럽게 입을 가린 늙은 대영주는 어린 봉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네가 군대 를 이끌고 영지를 나섰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대체 무슨 생각 이냐?”
“제 영민들을 해친 늑대들을 쫓아 온 것뿐입니다.”
“복수 때문이다?”
“예. 또한 주군의 영지가 평안하도 록 힘쓰는 것 역시 봉신의 도리 아 니겠습니까?”
“봉신의 도리라. 하하!”
후작은 팔걸이를 두드리며 짐짓 유 쾌하게 웃었다.
“네가 이렇게 충직한 봉신이었다 니, 미처 몰랐구나.”
“그래도 넌 아직 어리지 않느냐? 밖으로 나돌다 자칫 잘못되기라도 하면 영주로서의 큰 책임을 저버리 는 꼴이 된다.”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각하.”
“허, 상관없다고?”
가소롭다는 듯 찡그린 미소를 짓는 후작에게, 소년 영주는 태연한 표정 으로 대답했다.
“영주란 가장과 같아서, 품 안에 있는 이들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첫 째가는 의무이며 존재 이유라고 배 웠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늑대들 따위에게 영민 을 잃었으니, 전 제 자격을 증명하 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해야 합니다. 그런 중대한 일에 어떻게 나이를 따 지겠습니까.”
어린아이답지 않은 기개였다. 몸소 병사를 이끌고 숲에 매복을 했던 루 얀이 하는 말이라 허세로 느껴지지 도 않았다.
작게 감탄사를 흘리던 황금기의 기 사들 그리고 하녀들이 에아본 후작 의 싸늘한 눈빛에 뒤늦게 표정을 수 습했다.
“……그래, 장하구나. 하지만 네가 자기만족을 위해 영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무장한 병사 백 명을 끌고 왔 다고? 델리로드에서 그만한 병력을 내는 건 불가능하니 분명 용병일 테 지. 그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서 네 영민들이 어떤 고초를 치를지 뻔히 보이는구나.”
그 단정적인 말에 루얀은 피식 미 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송구하지만 각하, 그들은 용병들 이 아니라 자원한 민병들입니다.”
“민병? 네 영민들이란 말이냐?”
“예.”
대영주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 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나같이 쇠 갑옷을 입고 절반은 권양기가 달린 중쇠뇌를 들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용병이 아니라고?”
“아시다시피 제 영지는 오크델리와 맞닿은 곳이고, 오크델리는 조비언 백작의 무능으로 인해 혼란한 땅입 니다. 덕분에 제 영지는 지난 몇 년 간 수시로 도적 떼와 탈영병 무리, 그리고 그린스킨들의 방문을 받았 죠.” 늙은 후작이 침묵하자 어린 남작은 경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약탈만 당하는 처지 가 지겨워 영민들을 데리고 보복을 하다 보니 자연히 병구(兵具)와 재 물이 쌓였습니다.”
“……설마하니 그걸 정규병도 아닌 민병들에게 쥐여줬다는 건 아니겠 지?”
“제가 쥐여준 게 아닙니다. 그건 온전히 그 녀석들의 소유물이니까 요.”
“뭐라?”
루얀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전리품은 균등히 분배하는 게 제 원칙입니다. 보상이라도 없으면 영 민들이 나서질 않거든요.”
“이런 어리석은!”
얼굴을 와락 구긴 후작이 호통을 쳤다.
“갑옷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쇠 뇌라니, 그처럼 위험한 물건을 농투 성이들에게 허락하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엄한 선동꾼이라도 나 타나 그것들이 네게로 향하면 어쩔 셈이냐!”
격노한 대영주 앞에서 어린 봉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제가 그뿐인 놈인 거죠. 별 수 있겠습니까?”
“영주라는 녀석이 그딴 무책임한 말을 해?”
“고작 선동꾼 때문에 영민들이 등 을 돌린다면, 그딴 게 무슨 영주겠 습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후작이 입을 다물었다. 루얀은 빙글거리는 얼굴 로 말을 덧붙였다.
“용서하십시오, 각하. 험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라 이런 졸렬한 방법이 라도 써야 했습니다.”
“그래도 살 만한 땅이란 소문이 알 음알음 퍼진 덕에 해마다 영지의 호 구(戶P)가 곱절로 늘고 있습니다. 그걸로라도 위안을 삼아야죠.”
얼핏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이 끝날 무렵.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꼬맹이는, 장성하기만 하면 어 떤 식으로든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거다.
슬쩍 둘러보니 응접실 안의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황금기의 기사들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무인들답게, 주군의 눈치를 보 는 것도 잊고 소년 영주가 내는 찬 란한 빛을 눈에 새기고 있었다.
오스 백작과 파나벨 후작 부인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성난 할아버지, 그리고 늙은 남편 앞에서 제 할 말 을 끝까지 하는 루얀의 모습에 감탄 한 기색이 역력했다.
노기사 기드발 경은 뭔가 회상하듯 가라앉은 눈빛이었고, 까만 후드 아 래 붕대를 두른 마법사 라프는 살기 에 가까운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었 다.
피올의 시장을 비롯한 문관들은 후 작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빴고, 내 옆에 앉은 헤일라는-후작부인이 준비한 간식, 그러니까, 호두와 건포도를 넣은 파이에 완전 히 몰입한 상태였다. 소리 없이 입 을 우물거릴 때마다 눈매가 조금쯤 쳐진다. 기분이 좋을 때 보이는 미 세한 변화다.
……그래. 먹어야지. 이것저것 하다 보니 아침도 걸렀으니까.
그때 늙은 대영주가 나지막이 질문 했다.
“……올해 몇 살이라고 했지?”
“해가 지나 열셋입니다.”
“열셋. 열셋이라고.” 탄식하듯 중얼거린 후작은 슬쩍 제 손자를 돌아보았다.
올해 열여섯 성인이 된 오스 백작 은, 입을 반쯤 벌리고 루얀을 바라 보다가 조부의 시선을 느끼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에아본 후작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가 침묵하니 널찍한 응접실 전체 가 고요해졌다.
그리 가벼운 분위기가 아니었음에 도 루얀은 여유롭게 방안을 돌아보 았다. 호의, 감탄, 경계 등 자신에게 향하는 다채로운 시선들을 즐기는 눈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의기양양한 소년 영주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난 나 도 모르게 씩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 었다.
곱상한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질 즈음, 에아본 후작이 눈을 떴다.
“무슨 말을 하든, 복수를 허락할 순 없다.”
단호하지만 알 수 없는 피로가 느 껴지는 목소리였다.
“네 복수의 대상은 여기, 포이닉스 경과 그 친우의 소유가 되었다. 그 리고 그들은 모두 내 귀한 손님이 지. 그의 소유물을 빼앗는 건 허락 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뭐, 죽은 영민들 의 원혼은 다른 늑대들로 달래보겠 습니다.”
목소리에 은은한 노기가 스며 있긴 했지만, 루얀은 반응은 의외로 무덤 덤한 편이었다. 후작의 답을 이미 예상한 눈치였다.
“그리고, 네 중무장한 민병들.”
뭔가 불길한 낌새를 느낀 걸까? 병사들이 거론되자 소년 영주의 표 정이 굳어졌다.
“델리로드에 그만한 병력이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지 못했다.”
“……설마, 각하.”
“유능한 영주 덕에 호구도 늘었다 고 하니, 봉신으로서의 의무를 조금 쯤 더 짊어질 수 있겠지.”
루얀은 에아본 후작의 의도를 눈치 챘는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오크델리는 도적소굴이나 다름없습니다. 놈들이 이곳, 피올이 나 리안 웰을 감히 넘보지 못하는 건 델리로드가 갈까마귀 숲의 초입 을 단단히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 다.”
“그래, 네 노고를 알겠다.”
“그러면,”
“허나 그런 상황에서도 네가 병사 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은, 그 병력만큼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겠 지.”
“어떻게 말이 그렇게 됩니까!”
루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언성 을 높이자, 후작의 뒤에 시립해 있 던 노기사가 나직이 꾸짖었다.
“그만. 자중하십시오, 루얀 남작.”
황금기 기사단의 단장이자 에아본 후작의 심복인 기드발 경은, 조용한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흥험한 기세를 뿜었다.
“오.”
피부가 저릿해지는 살벌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나이답지 않은 기개를 뽐내던 루얀 도 그 기세를 견뎌내지 못하고 속절 없이 물러서고 말았다.
소년 영주가 이를 악문 모습에 후 작은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서부 고원의 전란에 대처하기 위 하여 수많은 사내들이 단델리 언덕 으로 집결하고 있다. 대부분이 병사 들을 보내는 중이지. 너도 그리 해 야겠다.” “영주는 가장과 같아서 그 구성원 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일 중한 의 무이자 존재 이유라고 했나?”
후작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자신이 했던 말을 인용하자, 루얀의 곱상한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서쪽의 전란이 여기까지 번지지 않도록 막는 일이니, 기꺼이 동참하 리라 믿겠다. 지금 나와 있는 민병 들을 그대로 보내면 되는 일이니 수 고도 비교적 덜할 게다.” 에아본 후작은 좀처럼 보이지 않던 저열한 무언가를 선명히 풍기고 있 었다.
그 무언가란, 내가 느끼기에, 어떻 게든 저 어린 꼬맹이를 엿 먹이겠다 는 악의였다. 유치하고 추한.
늙은 대영주에 대한 분노, 함부로 힘을 과시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으 로 어린 영주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생채기가 가득한 두 주먹 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그러느냐? 아, 델리로드까지 돌아가는 길이 걱정되는 모양이군.
호위로 기병들을 내어줄 테니,”
“……아뇨. 괜찮습니다, 각하.”
작게 심호흡한 소년 영주는 후작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 민병들은 겉보기와는 달리 순 한 녀석들입니다.”
뭐라는 거야, 난 처음 보고 산적 놈들인 줄 알았구만.
“용기도, 의욕도 없어서 저들끼리 있을 땐 아무런 힘도 못 쓰죠.”
루얀은 공들여 씹은 단어를 거칠게 뱉었다.
“녀석들을 거느릴 수 있는 건 오직 저뿐입니다. 제가 있어야 제대로 힘 을 씁니다.”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직접 전쟁에 나서겠다는 거 냐‘?”
“ 예.”
“말도 안 되는 소리. 네가 전쟁터 에 나갔다간 우리 군 전체가 비웃음 거리가 될 거다. 인물이 없어 열세 살짜리 어린애를 보냈다는 소리를 듣겠지.”
“그딴 말을 지껄이는 놈이 있으면 제가 직접 입을 찢어놓겠습니다.”
소년 영주의 살벌한 눈빛에, 후작
은 웃는 낯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 렸다.
“흐으음.”
그렇게 고민하던 후작은, 불쑥 날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경의 생각은 어떤가?”
“••••••네?”
“루얀 남작이 전쟁에 나서도 되겠 나? 경의 의견을 듣고 싶네.”
« O ”
왜 또 나한테 지랄이야.
“그게, 전 외부인이라 말을 얹기가 조금.”
“부담가질 필요 없네. 용명 높은 기사의 고견을 듣고 싶은 것뿐이니 까.”
겁나 부담스러운데.
조금 어이가 없어져서 응접실 안을 훑어보았다. 기드발 경을 포함해 황 금기의 기사가 일곱이나 있다. 근데 굳이 나한테 물어본다고?
그렇게 대놓고 눈치를 줬음에도 후 작은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말해보라는 제스처다.
한편 루얀을 살피니, 적갈색 눈동 자가 활활 불타고 있다.
그 눈빛을 보니 어째 기분이 유쾌 해져서, 난 편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들은 말인데, 양이 이끄는 사자들의 군대보다 사자가 이끄는 양들의 군대가 낫다고 하더군요.”
“사자가 이끄는 양들의 군대라. 재 밌는 비유로군.”
고개를 끄덕인 후작은 내가 그대로 입을 다물자 슬쩍 눈썹을 좁혔다.
“……루얀 남작의 참전에 찬성하는 건가.”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경의 눈엔 저 아이가 사자로 보이
나?”
그 질문에 난 선선히 고개를 끄덕 였다.
“네. 어지간한 기사나 지휘관보다 훨씬 낫겠는데요? 앞으로 크게 될 분 같으니 이번에 경험을 쌓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내 솔직한 칭찬에 루얀과 에아본 둘 다 얼굴을 구겼다.
소년 영주는 ‘저 새끼 뭐지? 왜 저 러지?’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었고 늙은 대영주는 마치 배신이라 도 당한 듯한 표정이었다.
참나. 돈 몇 푼 쥐여준 것 가지고 꼬붕처럼 비위라도 맞춰 줄 거라고 생각했나? 웃기는 할아버지네.
“……으음, 그래. 경의 의견은 잘 알겠네.”
금세 표정을 수습한 후작은 결국 소년 영주의 참전을 허락했다. 내가 루얀을 극찬한 것과는 별개로, 이 결정이 썩 나쁘지 않다고 여기는 눈 치였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어린 영주는 볼일 다 봤다는 태도 로 말을 이었다.
“늑대들을 쫓느라 피로가 꽤 쌓였 으니, 지금 병사들이 주둔지를 편 곳에서 며칠 머문 뒤 출정일에 맞춰 단델리 언덕으로 가겠습니다.”
“……알겠다. 그렇게 해라.”
간단한 예를 마지막으로 쿨하게 돌 아서려는 루얀을, 한쪽에 잠자코 서 있던 전투마법사 라프가 거친 금속 성 목소리로 잡아 세웠다.
“잠깐. 행여나 다른 곳으로 샐 수 도 있으니,”
“하찮은 마법사야, 닥쳐라.”
소년 영주는 싸늘한 눈빛으로 라프 를 쏘아보았다.
“난 고작 13년을 살았지만, 운명 앞에서 도망쳐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괴한 행색의 마법사가 음험한 살 기를 뿌렸지만 루얀은 흥,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시시한 놈’.”
그 중얼거림만 남기고, 그는 성큼 성큼 응접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