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81)
나의 악당들 081화
22. 마녀⑴
아리아드 경은 피 묻은 단검을 털 어내며 물었다.
“이제 말할 마음이 드느냐?”
“끄으으….”
우바르는 바닥에 이마를 비비며 이 를 갈았다. 그러곤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들어 노인을 노려보았다.
“으, 흐흐. 알았다. 네놈이 바로 그 놈이구나. 은왕자의 늙은 살무사….”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군.”
아리아드 경이 혀를 차며 단검을 고쳐 쥐자, 우바르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내가 듣고 싶은 건 네 협력자들의 이름이다.”
“흐으, 협력자? 무슨 협력자?”
“밖의 도적놈들이 네까짓 깡패 하 나만 믿고 버티고 있을 리가 없어. 분명 결정적인 역할을 해줄 누군가 가 있겠지.”
주름진 손이 헝클어진 머리칼을 틀 어쥐었다. 노기사의 손에 묻은 피가 우바르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리아드 경이 충혈된 눈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그놈을 말해. 친위대장 쿤리드? 수문관 우센? 무관장인 알프리드?”
“흐흐.”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우바르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난 왕자와 협상할 것이다. 살무사 가 아니라.”
“…아직 교훈이 부족했나 보군. 에 이서, 신발을 벗겨라.”
이 할배 진짜 끝까지 갈 생각인가 보네. 독하다, 독해.
“잠시만요. 아리아드 경, 제가 놈과 대화해 봐도 되겠습니까?”
“자네가?”
노기사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오 자,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놈과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어서 요. 잠시면 됩니다.”
날 가만히 올려다보던 아리아드 경 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녕.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네.”
“피투성이 검사……
“네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다. 쥐 새끼가 꽤 날래더라?”
내가 실실대며 빈정거리자 칼자국 난 얼굴에 핏줄이 불거졌다. 하지만 입을 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 선물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더라고. 내가 따까리 몇 놈 두들겨 팼기로서 니 도시 안에서 불을 지르고, 사람 까지 죽여? 거기다가, 혹시 놓칠까 봐 심복까지 보내?” “개소리를,” “말 끊지 말고 들어. 그래서 의문 이 들더라고. 왜 날 죽이려고 했을 까? 내가 죽길 바라는 이유가 뭘 까?”
“흥.”
이 새끼가 코웃음을 치네, 뒤질라 고.
“마침내 깨달았지. 넌 그냥 양아치 새끼에 불과하다는 걸. 위에서 시키 는 대로 심부름이나 하는 X새끼일 뿐이잖아.”
“이 더러운 용병 새,”
짜악.
내 세찬 귀싸대기에 놈의 입에서 피가 후두둑 흩뿌려졌다.
“닥치고 있으라니까, 좀.”
“•••그으윽,”
“‘빠른 발의 토발드’에게 답신을 쥐여준 사람, L.C가 네놈 주인이잖 아. 맞지?”
“흐으, 흐.”
짜악!
“대답 안 해?”
“성주가 나한테 의뢰를 맡길 걸 알 고 그런 거잖아. 내가 하수도를 통 해서 밖으로 나갈까 봐. 울카르 왕 자님께 서신이 전해지면 귀찮아지니 까. 맞지?”
우바르는 밑바닥에서 굴러먹던 놈 답게 독한 구석이 있었다. 양손이 걸레짝이 되고 얼굴이 퉁퉁 부어올 랐음에도 눈동자엔 독기가 그득했 다.
나는 쪼그려 앉은 채 우바르의 눈 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조 그맣게 속닥거렸다.
“레이디 카밀라. 카밀라 백작부인 이지?” 우바르의 눈가가 움찔거 렸다.
“이 새끼, 이거. 눈깔 돌아가는 거 보게.”
“이, 이-”
“야, 잘 들어.”
지저분한 머리칼을 억세게 잡아채 자, 우바르가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억눌린 신음을 내질렀다.
“흐억.”
“지금 너한텐 두 가지 선택지가 있 어. 첫 번째 선택지는… 아가리를 꽉 다물고 있는 거야.”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추고, 속닥거 리듯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내가 저 뒤에 있는 독한 할배를 설득해야 하는데…. 사실 나 한테 명확한 증거랄 게 없거든. 그 래서 억지를 부려가며 소금성에 쳐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어차피 결론 은 같은데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손해를 보는 일이지.”
“흐흐, 멍청한 놈. 네 약점을 훤히 내보이는구나.”
“사람을 설득하려면 솔직해야지. 근데, 첫 번째 선택을 했을 때의 결 과가 궁금하지 않아?”
“난 기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 고생을 해가며 백작부인 모가지를 딸 거야. 근데 알잖아? 백작부인은 제 정체를 드러내게 돼 있어. 그 흉 측한 몰골을. 그러면 나는 도시의 배신자를 뿌리 뽑은 영웅이 되겠지. 너? 넌 그냥 죽는 거야. 아무런 기 회도 없이.”
우바르는 여전히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휴, 피곤해.
“자, 그럼 두 번째 선택지. 왕자님 과 협상하겠다느니 하는 개소리는 집어치우고 얌전히 자백하는 거야. ‘저는 카밀라 백작부인이 시키는 대 로 한 것뿐입니다’라고 말해.”
“그러면 이야기는 꽤 쉽게 풀리겠 지. 기사들은 곧장 병사들을 몰고 소금성으로 갈 거야. 백작부인 목을 따고, 배신자를 뿌리 뽑는 거지. 너? 넌 단순한 하수인에 불과한 데 다 우리에게 협조했으니 참작의 여 지가 생겨. 나도 왕자님께 잘 말해 줄게. 네 덕분에 마녀를 잡았다고.”
어느새 우바르는 눈알을 굴리고 있 었다. 나는 그 모습이 퍽 우스워서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 결정해. 첫 번째야, 두 번째 야?”
“•••잠깐 고민할 시간을,”
빠악.
“커혹,”
머리가 눌려 바닥에 얼굴이 갈린 우바르가 피가 섞인 침을 흘렸다.
“첫 번째, 두 번째?”
“자, 잠깐,”
빠악.
“끄극,”
“첫 번째, 두 번째?”
빠악.
“그흐으-”
앞니가 몽땅 부러지고 코까지 내려 앉은 우바르는 모깃소리만 한 신음 을 흘렸다.
“알아아, 알아아고. 말하게아.”
“뭐라는 거야? 알았다고?”
놈은 눈이 반쯤 풀린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 드디어. 설득 한 번 하기 드럽 게 힘드네.
수십 개의 횃불이 사납게 불타오르 며 어둠을 몰아내었다. 횃불이 내뿜 는 연기의 파도 아래에서 무기를 쥔 병사들이 흉흉한 기세를 뿌리고 있 었다.
그들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던 랭볼 트 경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 렸다.
“백작부인은 재작년에 성인식을 치 렀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어린 여인 이 내통자라니 믿을 수가 없군.”
이쪽 세상에서 성인식을 치르는 게 열다섯에서 열여섯 넘어갈 때니까… 올해로 열여덟 살이라는 소리군.
음, ‘언베일드 위치’가 그렇게 어렸 나? 그건 몰랐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참 골 때리는 일이죠.”
“깡패놈 이야기 하나만 듣고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일 세.”
“자백도 그렇고… 정황이 확실하니 믿어야지 않겠습니까.”
“정황? 다른 정황이 있었던가?”
“내통의 서신에 적힌 L.C라는 이 니셜도 그렇고, 저번에 경비대의 작 전이 누설된 것도 그렇고….”
“O으”
랭볼트 경은 여전히 찝찝하다는 표 정이었다. 하지만 찝찝한 것만으로 는 대세를 거스를 순 없는 노릇이 다.
한편 아리아드 경은 ‘백작부인을 심문해 보면 알게 되겠지’라고 말하 던데…. 어째 ‘손톱을 죄다 뽑으면 불겠지’로 들린다.
아니, 나야 백작부인의 정체를 안 다고 쳐도, 이 할아버지는 열여덟짜 리 여자애로 알고 있을 텐데…. 으 O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저 앞에 타 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이쪽처럼 수 십 명의 병사가 횃불을 밝히고 있었 는데, “어, 저거?”
수십 명의 병사들 사이로 소금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소금성은 성주가 기거하는 영주관 이자 아성(分城) 역할을 하는 건물 이다.
일전에 봤던 풍경을 떠올려보자 면…. 모퉁이마다 하얀 기와를 올린 궁탑(弓塔)이 서 있었는데, 꼭 사각 형의 탑을 중심으로 조그만 원형 탑 네 개를 뭉쳐둔 것 같았다.
하지만 거센 지진이 도시를 덮치던 날, 소금성도 재앙에 휩쓸리고 말았 다. 근처의 바닥이 갈라지며 벌어진 탓에 궁탑 중 두 개가 중간부터 뚝 부러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성 전체가 약간 기울 어서 거인이 툭 밀치면 뒤로 넘어질 것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 위태로운 소금성 앞에, 커다란 불기둥이 솟구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불타고 있는 것은 커다란 나무 계단이었다. 유일한 출입구 노릇을 하던 바로 그 계단이다.
“이런 제길.”
랭볼트 경은 작게 침음하더니 고함 을 질렀다.
“뭘 지켜만 보고 있나! 어서 불을 꺼라!”
푸른 기사의 고함에도 소금성을 둘 러싸고 있던 병사들은 주춤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알고 보니 불길을 잡기 위해 접근 할 때마다 소금성에서 화살이 쏟아 졌던 것이다.
랭볼트 경은 사정을 알곤 곧장 라 이암 경을 찾았다. 투구 끝을 깃털 로 장식한 기사는 쉽사리 눈에 띄었 고, 우리는 그와 합류할 수 있었다.
“라이암,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 가?”
“성주의 친위대가 갑자기 튀어나왔 다.”
“친위대가?
“그래. 소금성을 감시, 아니, 지키 고 있던 병력들을 참살하고 계단에 불을 질러 버렸지.”
“우리가 들이칠 것을 알고 선수를 쳤단 말인가?”
“아마도.”
잠자코 두 기사의 문답을 지켜보던 노기사가 입을 열었다.
“정보가 샌 겁니까?”
“정보가 새다니, 당치도 않소. 내가 직접 관리하는 정병들이 소금성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단 말이오.”
“오간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까?”
“물론이오. 식량이나 양초 같은 것 들도 전부 내 병사들이 전달했으니 까. 오간 사람이라고 해봐야 백작의 아들 때문에 부른 수녀 둘이 전부 요.”
•••어, 왠지 불안한데. 올가 수녀님, 편지를 들키거나 한 건 아니겠지?
편지에는 일이 잘 풀리면 울카르 왕자의 병사들과 함께 소금성으로 쳐들어갈 거라고 써놨었다. 그때 문 을 열고 투항해서 공을 세우라고 조 언해 뒀는데…….
에, 에이. 용병으로 굴러먹은 짬밥 이 있는데, 설마 아니겠지.
난 괜히 마음이 급해져서 흐룬팅과 방패(우바르의 것을 슬쩍했다)를 들 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 니까? 얼른 들어가시죠.”
한걸음 뒤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하사관, 길버트가 끼어들더니 기사 들에게 조언했다.
“계단이야 어떻게든 치우면 되지 만, 격자문이 내려가 있어서 진입하 기 힘들 겁니다.”
“그야 도끼든 망치든 가져와서 부 수면 되는 거 아닌가?”
내 질문에 길버트는 헛웃음을 지었 다.
“말은 쉽지, 친구. 근데 천장에 있 는 살인공(Murder hole)은 어쩌려 고? 화살에, 끓는 기름까지 맞아가 며 쇳덩이가 박힌 문짝을 쪼갤 수 있겠나?”
“•••어, 좀 어렵겠네.”
팔짱을 끼고 있던 라이암 경이 고 개를 내저었다.
“나도 정면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 다. 성 뒤쪽에 궁탑이 무너지며 생 긴 통로가 있으니, 거길 노리면 되 겠지. 다들 이쪽으로.”
그렇게 말한 라이암 경은 우리를 소금성의 뒤편으로 이끌었다.
소금성은 이쪽을 향해 기울어져 있 었고, 궁탑 한 쌍은 반쯤 박살 난 채였다. 지붕과 외벽이 절반 이상 무너진 덕에 3층인지 4층인지 헷갈 리는 방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주변에는 궁수들은 배치되어 있었 고, 방패를 든 병사들이 사다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준비가 거의 끝났군. 내가 앞장서 지.”
랭볼트 경이 망토의 끈을 조이며 말하자, 라이암 경이 이맛살을 찌푸 렸다.
“무슨 소리지? 여긴 내가 맡은 곳 이니 선두는 내 것이다.”
“이런 상황에는 몸놀림이 잽싼 내 가 제격인 걸 모르나?”
“놈들에겐 쇠뇌수가 여럿 있다. 투 구도 안 챙겨온 주제에 선두에 서겠 다고?”
그 질문에, 랭볼트 경의 어린 종자 가 잽싸게 제 투구를 벗어 주인에게 건네었다. 랭볼트 경은 작게 낄낄거 리며 종자의 머리를 헝클이더니 투 구를 눌러썼다.
“이제 됐나?”
“…짜증 나는군. 억지 부리지 말고 물러서라.”
두 기사가 투닥거리는 모습을 지켜 보던 아리아드 경은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