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1)
나의 악당들 091화
24. 보스 페이즈(1)
높이 솟은 문루(門樓) 위에 서서 갈대밭을 훑어보았다.
한때 천 명이 훌쩍 넘었던 마적단 은 길어진 공성에 반 토막이 나 있 었다. 척후병들의 말로는 약 700명 남짓,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의 두 배 정도였다.
“두 배 정도면 해볼 만한 거 아니 냐? 어차피 수비만 하면 되는데.”
내 의문에 대답한 건 아리아드 경 의 종자, 에이서였다.
“그렇지도 않아. 말이 칠백이지, 어 중이떠중이들을 털어낸 알짜들이거 든. 대륙 중부에서 명성을 떨친, 강 도 남작의 정예병력이지.”
“흐음.”
“게다가 성벽 상황을 좀 보라고.”
에이서의 턱짓에 성문의 양옆으로 뻗은 성벽을 훑어보았다.
얼마 전 있었던 지진의 여파로, 망 루의 절반 이상이 무너져있었다.
게다가, 성문 왼편 오십여 미터 정 도의 지점은 아예 성벽이 와르르 허 물어져 있었다.
앞에 거마창을 깔고 무너진 지점엔 벽돌과 돌멩이 따위를 채워놓긴 했 지만, 단단한 성벽에 비할 바는 아 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포(쪼砲, 발리스 타)에, 마법사들까지 다 빼가다니. 막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에이서의 불만 가득한 투덜거림대 로, 성벽 중간 부분에 뚫린 포안(砲 眼)들은 하나같이 텅 비어 있었다. 원래 이곳을 지키고 있던 5대의 노 포와 3명의 마법사는 모두 항만에 배치된 상태였다.
에이서의 말소리가 컸던 걸까? 흉 벽 사이로 적들을 살피고 있던 기사 가 뒤를 돌아보았다.
“투덜거리지 말거라, 에이서. 항만 의 전투는 이곳보다 곱절은 힘들 테 니까.”
“윽. 죄송합니다, 경.”
아리아드 경이 꾸중하듯 말한 대 로, 주전장은 이곳이 아니라 항만이 었다.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으며 수가 줄 어든 마적들과는 달리, 만 너머의 돌섬에서 주둔하고 있던 해적들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였다.
게다가 해적들의 두목인 ‘심해의 제사장’과 그의 직속 부하들은 아직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상태다.
언베일드 위치의 아비인 심해의 제 사장은, 딸을 잃은 분노로 이를 갈 고 있을 터였다. 분명 쉽지 않은 싸 움이 되겠지.
아리아드 경의 옆에 서 있던 안키 르 경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에이서. 투덜거리려거든 주군을 탓하지 말고 네 옆에 있는 포이닉스를 탓하거라.”
“•••예? 포이닉스를 말입니까?”
“그래. 노포와 마법사를 죄다 항만 으로 돌리자고 제안한 건 포이닉스 거든.”
“예에?”
에이서가 날카로운 눈을 크게 홉뜨 며 날 돌아보았다. 나는 괜히 멋쩍 어져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지하에 내려갔을 때, 어인족들과 마주쳤거든.”
“어인족이 하수도에? 그런데?”
“그, 여러 정황을 볼 때 해적들과 한패인 것 같더라고. 그러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고 왕자님께 조언을 했더니.”
“……하아, 그렇게 된 거였군.”
“뭐, 어차피 마적 놈들이 대단한 공성병기를 쓰는 건 아니잖아? 노포 랑 마법사가 있었어도 그리 큰 도움 O ”
“됐겠지. 어떻게 도움이 안 되냐, 그게?”
“•••그런가.”
에이서가 힘없이 한숨을 내쉬자, 아리아드 경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최종적인 판단은 주군께서
하셨다. 그리고, 두려울 게 무어냐? 불의 여인과 붉은 곰, 거기에 피투 성이 검사까지 여기에 있는데.”
“으, 아리아드 경. 그런 말은 좀,”
내가 얼굴을 감싸 쥐자 아리아드 경과 안키르 경은 폭소를 터뜨렸다.
‘불의 여인’과 ‘붉은 곰’은 각각 엘 렌과 우테콰이의 별명이었다.
엘렌은 소금성에서의 활약으로 도 시 안에서 나름 이름을 날리게 되었 는데, 원래 별명은 ‘불의 마녀’였다. 아리아드 경이 불의 여인이라고 해 준 건, 나름대로 순화를 해준 거겠 지.
우테콰이는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별명이 생겼다. 워낙 덩치가 크고 생김새가 특이한 탓일까.
아니면, 나름 네임드가 된 나와 매 일 아침 무식한 주먹다짐을 한 것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렇지, 붉은 곰이 뭐냐, 붉은 곰이? 피부색 가지고 별명을 그렇게 짓다니, 이 동네 사람들은 하나같이 레이시스트들인 게 틀림없 다.
어쨌든. 나와 엘렌, 우테콰이는 사 우스하버에서 가장 불길하고 오글거 리는 별명을 가진 삼인방이 되었다.
“그건 그렇고. 움직일 기미가 전혀 안 보이는군.”
“놈들도 바보는 아닙니다. 안키르 경. 해적들이 도시를 먼저 흔들길 기다리고 있겠지요.”
아리아드 경의 대답에 안키르 경은 짧게 혀를 찼다.
“쯧,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인데, 각 개격파까지 당하게 생겼군. 성벽을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차라리 선공에 들어가는 게 낫겠소.”
지금 성벽에 있는 병력은 성문수비 대 백오십, 영지군 백오십, 왕자의 직속 기병 스물 정도로 이루어져 있 었다.
쪽수가 모자란 건 물론이고, 영지 군이 개잡병들인 걸 감안하면 평균 적인 질도 떨어지는 구성이다.
이를 잘 아는 아리아드 경이 고개 를 내저었다.
“기병들을 이끌고 돌진이라도 할 생각이십니까? 미리 말씀드리지만, 결단코 안 될 말씀입니다.”
“저놈들을 빨리 쫓아내야 항만 쪽 을 도울 수 있지 않소? 놈들은 굶 주렸으니 기세를 타고 몰아치면 속 수무책으로 쓰러질 거요.” “차라리 성벽을 비우면 비웠지, 그 런 무모한 전술을 쓸 수는 없습니 다. 주군의 당부를 벌써 잊으셨습니 까?”
“…끄웅.”
안키르 경이 불만스럽다는 듯 얼굴 을 찌푸리자, 아리아드 경은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포이닉스와 그의 동료들을 믿어 보지요.”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한 병사가 문루 위로 올라왔 다.
“해럴드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보고를 받은 지휘관은 안키르 경과 아리아드 경을 차례로 살폈다. 두 기사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지휘관 이 목청을 돋웠다.
“북을- 쳐라!”
둥, 둥!
근처의 성벽에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갈대밭에 도사린 마적들 의 진용이 작게 요동쳤다.
쿠구궁!
거친 마찰음과 함께 철판이 덧대어 진 성문이 열렸다. 마차 하나가 간 신히 드나들 정도로 열린 틈.
절도 있는 북소리, 흥분한 말의 투 레질, 겁먹은 병사의 기도, 굶주린 도적의 욕지거리, 높은 깃발의 펄럭 임, 영리한 갈까마귀의 울음소 리…….
그 혼잡한 전장에서도, 내 예민한 청각은 묵직한 소리를 구분해 내었 다. 성문을 나서는 발걸음 소리.
발소리가 충분히 희미해졌을 즈음, 흉벽 사이로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파라락.
희고, 검고, 붉은 깃털이 바람결에 춤을 추었다. 수십 개의 깃털로 장 식된 모자가 날개처럼, 둘로 갈라진 꼬리처럼 휘날렸다.
평범한 사람이 썼다면 종아리 어림 에 닿았을 예장모의 끝은, 그 주인 의 체격 탓에 고작 허리춤에 머물러 있었다.
갈대밭을 굽어보던 사내가 슬쩍 고 개를 돌리더니 문루 위를 올려다보 았다.
깃털 예장모를 쓰고 커다란 돌메를 든 거구의 사내는, 당연히 우테콰이 였다.
성벽을 벗어나 20미터쯤 걸어나가 고도 놈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그저 아무 감정도 묻어나지 않는 작고 새까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어쩐지 웃음이 튀어나와서 씩 미소 를 지어주었다.
그러자 우테콰이는, 바닷새의 피로 눈썹과 볼, 턱과 가슴을 지나는 두 갈래의 전투화장을 한 광전사는, 코 웃음을 치더니 바닥에 가래침을 탁 뱉었다.
……저 개 같은 놈이.
그 순간, 우테콰이의 가슴이 커다 랗게 부풀었다. 그러곤, 도로 고개를 돌리며 고함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나! 리쿠와의 하탄카!”
……진짜, 목청 하나는 죽여준다. 목에 성대 대신 확성기라도 들어있 는 거 아냐?
“우두머리, 나와라!”
우테콰이의 어눌하고 딱딱한 발음 은, 거대한 음성에 힘입어 낯설고 위협적인 선포가 되었다.
“내 부족원들 죽인, 대가를 치러 라!”
후우웅.
때마침, 남쪽에서 해풍이 불어왔다. 마적 떼들에 의해 엉망이 된 갈대밭 이 거센 해풍에 휩쓸려 북쪽으로 몸 을 뉘었다.
“Hatanka’ae! Su-ray!” 언뜻 보면 우테콰이의 포효에 갈대 밭이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목청이 크다고 한들 대지를 휩쓰는 바람을 만들 수는 없음에도, 마적들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 다.
멍한 얼굴로 문루 아래를 내려다보 던 안키르 경이 입을 열었다.
“하탄카에, 쑤레이? 저게 무슨 뜻 이오, 아리아드 경?”
“대전사(代戰士)에게 덤벼라, 도전 하라, 뭐, 그런 뜻입니다.”
“……멋진데.”
어? 잠깐만.
“아리아드 경, 저놈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십니까?”
아리아드 경은 지저분한 턱을 긁으 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젊은 시절에 초원의 어느 부족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거든.”
“그럼, 하탄카가 대전사라는 뜻입 니까?”
“그렇네. 말 그대로, 부족을 대표하 는 전사라는 뜻이지.” 광전사의 포효가 다시금 터지는 동 안, 노기사는 잠시 말을 골랐다.
“초원의 대전사를 이런 곳에서 보 다니, 참 신기한 일이야.”
문루 위에서 느긋한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우테콰이는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우테콰이는 넘치는 기백과 묘한 리 듬을 뽐내며 돌메를 어깨에 턱 하니 걸쳤다. 그러곤 걸음을 옮기는 것이 었다.
‘하탄카에’에 한 걸음, ‘쑤레이’에 한 걸음.
돌메를 어깨에 걸친 채, 어깨와 허 리를 쭉 펴고 뻐기듯이 걸음을 옮기
는 것이었다.
“Hatanka’aO! Su-ray!”
마적들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곡 궁을 든 마궁수 예닐곱 기가 뛰쳐나 왔다. 고삐를 채치며 단숨에 거리를 좁힌 마궁수들이 힘껏 시위를 당겼 다.
쐐애액!
그렇게 날아든 화살들 중 절반은 허무하게 빗나갔다. 그리고 나머지 는 우테콰이의 어깨 문신이 검게 빛 나자 우수수, 머리를 바닥에 꼬라박
았다.
“Hatanka’aO! Su-ray!”
그 신비로운 현상에 맞추어 또다시 포효가 터졌다.
마적들의 사기가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는 게 훤히 보인다.
우테콰이는 어느새 성문보다 마적 떼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때, 어느 흥분한 마적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둥근 투구와 자루가 긴 도끼 등 꽤 충실한 무장을 갖추고 있는 마적이었다.
“이, 목소리만 큰 야만인 새끼-!”
전력으로 내달리는 기마 뒤편으로, 짓이겨진 갈댓잎이 흙먼지에 뒤섞였 다.
……음, 네임드는 아닌 것 같고. 약탈대장쯤 될까?
정면으로 짓쳐 드는 마적을 보고도 우테콰이는 아무런 동요가 없어 보 였다.
그저 돌메를 늘어뜨리며 자루를 길 게 고쳐 쥘 뿐이었다.
“끼야아압!”
약탈도적이 요란스러운 기합과 함 께 도끼를 치켜들 무렵, 돌메가 둔 중한 회전을 시작했다.
“흐읍!”
그 둔중한 회전은, 우테콰이의 괴 물 같은 근력과 추의 무게에 힘입어 순식간에 가속했다.
빠악!
커다란 돌덩이에 귀를 얻어맞은 말 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옆으로 꼬 꾸라졌다.
“이런 개-”
그 기수 역시, 욕을 채 마무리 짓 지도 못하고 머리가 으깨져 버렸다.
우테콰이는 마치 세리머니라도 하 는 것처럼, 돌메를 놓은 채 양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Athar Marta! Shiko rec’ne!”
안키르 경과 나를 포함한 여러 시 선이 아리아드 경을 향했다. 볼품없 는 노기사는 실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어머니여, 나를 지켜보소서!’ 라는 군요.”
웬 야만인의 도발적인 행동에 성깔 더러운 마적들이 줄줄이 튀어나왔 다.
명예도 예의도 모르는 도적놈들답 게, 놈들은 한꺼번에 우테콰이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화살이나 투창은 놈에게 아 무런 피해를 입힐 수 없었고, 가끔 운 좋게 무기가 붉은 피부에 닿을라 치면 검은 오라가 적을 튕겨내 버렸 다.
그렇게 순식간에 열댓 명의 마적들 이 당하자, 드디어 적진의 중앙에서 네임드가 튀어나왔다.
“그르르, *푸릉* 구어어얽!”
가래가 끓는 듯한 거칠고 묵직한 음성.
돌조각이 박힌 것처럼 우둘투둘한 피부와 온몸에 걸쳐 듬성듬성 솟아 난 거친 털.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진 팔과 축 늘어진 뱃살.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탓에 훤히 드러난 흉물스러운 알몸.
보스 페이즈의 랜덤 네임드, ‘스케 일드 오우거 하클리오’였다.
……이런 씨X, 진짜 하클리오가 튀어나오네?
게임 속의 하클리오는, 보스 페이 즈에서 나오는 랜덤 네임드 중에서 도 가장 악질인 놈이었다.
스펙 자체도 깡패인 주제에 귀찮은 특성을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그야 말로 최악의 네임드.
지금껏 ‘포이즌’, ‘아이언본’, ‘골든 몰리’와 싸웠고 ‘제단’도 만났다. 그 런데 이번엔 하클리오라고?
진짜, 랜덤 요소는 제일 엿 같은 거로만 채워져 있는 건가…….
그때, 누군가 망토 자락을 끌어당 겼다.
“포이.”
뒤편에 의자를 깔고 앉아 있던 엘 렌이 었다.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왜?”
“비루먹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 고 있잖아. 재수 없게.”
톡 쏘아붙이는 말과는 달리, 녀석 의 눈빛에는 심려가 묻어났다.
“내가 개 같이 생겼다는 뜻이지, 그거?”
내 물음에 엘렌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속이 어지간히도 꼬였구나, 너. 그 러게 평소에 아무거나 주워 먹고 다 니지 좀 말지.”
“……어떻게 한마디를 안 지냐.”
피식 미소를 흘리며 엘렌의 오금을 받쳐 들었다. 이제 녀석도 슬슬 익 숙해진 걸까? 엘렌은 놀라지도 않고 내 목에 팔을 두르며 기대왔다.
“자, 우리 ‘불의 마녀’ 님도 슬슬 나서야지.”
“제발, 그런 얼간이 같은 별명으로 부르지 마.”
“튕기기는. 지도 좋으면서.”
“……좋아하긴 누가?”
“누구긴, 너지. 그저께 밤에도 잠결 에 ‘불의 마녀, 등장!’ 이랬잖, 켁!”
얼굴이 벌게진 엘렌이 목을 조르는 바람에, 나는 입을 닥친 채 궁탑으 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