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own bear country is mine now RAW novel - Chapter 5
불곰국은 이제 제겁니다 5화
005 2,600% 물가 폭등의 예고/할아버지의 반응
장남인 아버지와 그 아래 두 명의 숙부와 고모.
방안엔 할아버지의 형제 쪽 가족들을 제외한, 성인이 된 직계 자녀들은 다 모여 있었다.
니콜라이는 부모님의 뒤에 있는 의자에 형제들과 앉았다.
사촌들도 각자의 부모 뒤에 조심스럽게 앉았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걸 보면 중요한 얘기가 나올 모양인데.’
다들 이렇게 모인 게 처음인 듯 긴장한 표정으로 할아버지 유리 유수포프의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니콜라이는 담담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목 인테리어로 꾸며진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두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이었다.
여느 부잣집의 과시용으로 쓰는, 두껍고 획일화된 양장서가 아닌 걸 보니 정말 책을 많이 읽는 거다.
‘단순히 가문을 물려받아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란 뜻이군. 그렇다면 갑작스레 이런 자리가 마련된 진정한 의미는 아마도….’
니콜라이가 홀로 고개를 주억거릴 즈음, 유리 유수포프가 입을 열었다.
“여태껏 어른들끼리만 회의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나라가 급변하고 있는 이때, 너희들도 유수포프 가문 사람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어서 모이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촌들.
유수포프 가문 사람들은 대부분 모스크바 대학교에 다니거나 졸업을 했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모스크바 대학 출신들이었다.
딱 두 명만 빼고.
니콜라이와 그의 형 데니스.
니콜라이는 천재적인 머리를 가지고도 미대에 진학했고, 데니스는 영국으로 유학을 갔었다.
유리 유수포프도 이런 가문 사람들의 학력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혹,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견을 듣고자 모이라고 했다.
또, 그의 머릿속엔 이미 어느 정도의 완성된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나 자신의 판단에 더욱 확신을 얻고자 의견을 묻는 거였다.
“그러니 부담스러운 자리라고 생각지 말거라. 자, 그럼 시작하자꾸나.”
그러자 아버지 이반이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작년 8월 쿠데타로 인해 고르바초프에서 옐친 쪽으로 권력이 이동하리란 건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습니다.”
“행정부와 군부를 순식간에 장악했기 때문이야.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면 국영기업들을 민간에 팔겠다는 건 옐친 대통령 개인의 뜻이겠군요?”
장남 이반의 물음에 유리 유수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방 세계의 힘을 빌려 정권을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않느냐. 놈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겠지.”
“개혁개방은 고르바초프 서기장부터 진행해 왔지만 이처럼 파격적이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그는 ‘공산주의 중앙 계획 경제’에서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 옮기는 체제 전환을 너무도 급진적으로 해치워 버린 인물이다.
‘충격요법’이라는 미명하에 이뤄진 무분별한 민영화와 올리가르히(oligarchs: 신흥 재벌) 들을 위한 국가 자산 매각.
이러한 개혁은 수많은 혼란을 초래하여 러시아를 쇠퇴의 길로 몰아넣었다.
‘국민들의 은행 예금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회안전망이 휴짓조각이 되고, 부정부패가 판을 치게 되지.’
그리고 올 연말까지 2,600%에 이르는 물가 폭등으로 러시아 경제는 지금보다 더 박살 나게 된다.
안 그래도 파탄이 난 상황에, 범죄자들은 이 혼란을 이용해 조직범죄(지역 마피아)를 저지르기까지 한다.
이 때문에 치안은 아프리카와 남미 국가들과 비견될 정도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니콜라이는 이런 사실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떤 말이 나올지 더 귀를 기울였다.
“말했듯이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겠다는 정부 방침이 떨어졌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기업은 두 개야.”
기업을 인수한다는 말에 몇몇은 마치 자기 것이 된다는 것마냥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반, 예고르, 안턴, 올가. 너희들 생각은 어떠하냐?”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둘째인 예고르였다.
“아무래도 자동차가 좋지 않겠습니까? 초기 자금은 많이 들어가더라도 성장 가능성은 자동차가 제일 클 겁니다.”
이어 셋째 안턴과 딸 올가도 의견을 내보였다.
“그보단 산업에 철이 안 들어가는 분야가 있습니까? 저는 철강 쪽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 지금 같은 때엔 안정적인 사업이 좋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보면 식품기업이 최고예요.”
기업 인수에 관한 의견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빈약하다.
마트에서 쇼핑하듯 내놓은 의견에 유리는 눈살을 찡그렸다.
한편, 이반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평소에도 신중하기 그지없는 장남인지라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하다.
“이반, 너는 왜 말이 없느냐?”
유리의 물음에 이반은 천천히 의견을 제시했다.
“국영기업을 매각하려는 건 정부의 재정적자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겠지.”
“국영기업들을 민간에 팔아서 적자를 메꾸려는 모양인데 과연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이건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건 아닙니다.”
“…흐음.”
“아버지, 어쩌면 오늘 이 자리가 우리 가문의 사활이 걸린 자리가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 신중히 판단해야 합니다.”
이반의 말이 끝나자 셋째 안턴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선다.
“이미 정부 방침이 떨어졌잖아요. 우린 다섯 기업에서 둘을 선택해야 하는데 지금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안턴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신중한 것도 좋지만 어차피 우린 1주일 안에 결정해야 합니다.”
둘째 예고르도 신중함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어떤 기업을 선택할지가 먼저라고 말했다.
오가는 말들을 쭉 들어보니 핵심은 하나다.
다섯 기업 중 두 개를 1주일 안에 선택해야 한다.
자동차 기업.
에너지 기업.
철강 기업.
건설 기업.
식품기업.
그렇게 대화는 30여 분간 더 이어졌다.
그럼에도 결론이 나지 않자 유리 유수포프의 이마엔 주름이 깊이 잡혔다.
과열된 분위기를 식히려는 것인지 할아버지의 시선이 손자 손녀들에게로 향했다.
“무슨 얘길 하는지 쭉 들었으니 너희들도 의견을 말해 보거라.”
하지만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면 너부터 말해보거라.”
가장 먼저 지목을 받은 사람은 둘째 숙부의 장남이었다.
“저는 아버지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는 종합 기계 산업이니 우선 자동차부터 인수하고 가능하면 철강 기업까지 인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에너지보다 자동차와 철강이 우선이란 말이냐?”
“정부의 최우선 산업이 에너지 분야입니다. 우리가 인수한다고 해도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얼핏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러나 앞서 나왔던 어른들의 의견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리 유수포프는 이렇다 할 말없이 다음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는 어떠냐?”
“저, 저요?”
“그래 너 말이다.”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멍때리고 있었는지 할아버지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이는 셋째 숙부의 장남이었다.
아까 도망갔던 사촌인데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을 해 나갔다.
“지금처럼 어지러운 때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라가 바뀐 마당에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하던 사업의 내실을 더 다지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부의 요구를 묵살하란 말이냐?”
“꼭 그렇다기 보다….”
머리에 든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첫 번째 대답보다는 그나마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지금처럼 혼란스러운 시기엔 누구나 움직이길 꺼려한다.
‘소나기는 일단 피하라.’는 말처럼 가만히 있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랄 수 있었다.
유리의 시선이 이번에는 니콜라이의 형, 데니스에게 향했다.
집안의 장손이기에 마지막으로 들어보겠다는 거였겠지만 표정에는 영 미덥지 않다는 티가 팍 난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가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네 생각은 어떠냐?”
“할아버지, 우리가 꼭 두 기업을 인수해야만 합니까?”
“…?”
“저도 아버지 말씀처럼 왠지 불안합니다. ‘혼란기에는 현금을 확보하라.’는 말은 경제의 기본입니다. 그런데 두 기업을 인수하자면 엄청난 자금을 써야 하는데, 그게 과연 올바른 선택인지 모르겠습니다.”
“유학 가서 아주 놀고만 있진 않았나 보구나.”
데니스의 말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뜻이었으나 말과는 달리 유리의 표정은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식들과 손자들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의견이다 보니.
그나마 장남 이반과 장손 데니스의 말에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그게 가문의 앞날을 결정지을 만큼 결정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아들들은 두 기업을 인수하면 본인들이 운영하게 될 테니, 어떡하든 사려는 것이다.
그러나 손자들은 그것과 한 발 떨어진 시선으로 의견을 제시했기에 유리의 생각과 일견 비슷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유리 유수포프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는 건 무리였나.’
그는 시선을 돌렸다.
오늘 기업 인수 건으로 기대와 실망을 해서인지 잠시 이야기의 주제를 돌리고 싶었다.
마침 이번에 로마노프 가문과의 파혼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던 손자가 보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구경은 잘했느냐?”
일 얘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묻는 말이었으나 니콜라이는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즉각 대답했다.
“네, 여러 곳을 구경했습니다.”
“그래. 원치 않는 기억을 잊기엔 여행만 한 게 없지.”
아들의 운명이 정해질 수 있는 자리.
아버지 이반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어머니 마리아의 얼굴엔 걱정스러움이 물씬 풍겼다.
그녀는 유리의 단호한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온몸이 떨려왔으나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묘하게도 니콜라이와 가문의 운명이 오늘 한 자리에서 가려지게 되었다.
니콜라이는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면서 적당한 타이밍을 기다렸다.
“어디 네 말도 한번 들어 보자꾸나. 너도 네 아버지와 같은 생각이냐?”
“정부를 바라보는 관점은 같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세히?”
“네. 정부에서 국영기업을 매각하려는 건 아버지 말씀처럼 정부에 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폐개혁을 통해 통화량을 점점 늘리려고 했던 거죠.”
“그런데?”
“이는 곧 화폐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이고, 그 결과로 물가 폭등이 있을 겁니다.”
“흐음.”
지금까지는 묻는 말에 답을 했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니콜라이는 당돌하게도 되려 할아버지에게 질문을 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기 전에 할아버지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정부의 요구를 묵살하고 두 기업을 인수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으음… 얼굴을 붉히게 되겠지만 내가 인수하지 않겠다고 하면 안 할 정도의 힘은 있다. 어차피 다른 곳에서 사게 하면 되니까.”
이빨 빠진 호랑이라도 맹수라 이건가?
“그러면 할아버지는 우리 가문의 힘을 사용해서 다섯 기업을 우선적으로 받아 내셨던 거군요?”
“그런 셈이지.”
알짜배기를 선점해 뒀으니 다른 가문에서 눈독 들이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로마노프 가문에서도 가져갈 생각이 있겠네요?”
유리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그 모습을 본 니콜라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그럼, 양보한다는 식으로 해서 그냥 줘버리십시오.”
약혼녀였던 제냐의 로마노프 가문에 치명타를 줄 절호의 기회다.
“뭐라? 줘버리라고?”
유리 유수포프는 물론 친척들도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네. 때가 되면 이 다섯 기업뿐만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아주 싼 값에 사들일 수 있을 테니까요.”
“무슨 근거로?”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니콜라이는 과거 자신이 공부했던 내용과 지금의 현실을 예로 들며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예로 든 것이지만 그의 말은 원 역사에서 분명히 일어났던 사실이다.
“며칠 전, 국영상점에 들렀는데 호밀빵과 밀가루와 설탕 가격이 한 달 전보다 15%나 올랐더군요.”
“가격 자유화를 시행했으니 그 정돈 오를 수 있지.”
‘그 정돈 오를 수 있다.’니.
지금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고 있는 건가?
앞으로는 나라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일부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두 달 후부터 폭발적으로 오르는 물가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화폐가치로 인해 러시아 국민은 지옥을 경험하게 되는데도.
아니면 위험이 다가왔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부인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니콜라이는 잘못하다간 꿈을 펼쳐 보기도 전에 가문이 거지꼴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 더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화폐개혁 하나만으로 화폐가치 폭락과 물가 폭등을 불러올 위험이 있는데,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공산주의 중앙 계획 경제’를 버리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택했습니다. 또, 할아버지 말씀대로 가격 자유화까지 시행했고요.”
“….”
“이것뿐만 아니라 ‘고정환율제’를 버리고 ‘변동환율제’까지 택했습니다. 정부는 이 모든 걸 순식간에 진행했죠. 여기서 틀림없이 두 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될 겁니다.”
“두 가지 부작용?”
“앞서 말씀드렸듯이 첫 번째가 화폐가치 폭락이고 두 번째가 물가 폭등입니다. 이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가 일어나면 나머지는 자동이죠. 그러니 지금의 15%는 단순한 15%가 아닌 겁니다.”
“네 말대로 여러 조치를 함께 진행했고 나라까지 바뀌었으니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생길 수 있는 일이다.”
할아버지 말처럼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범위가 엄청난 차이로 벌어진다면?
“수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가 아니라요.”
“…!”
“과장이 아닙니다.”
나라에서 손꼽히는 재벌가 인물이라고 해서 경제를 빠삭하게 아는 건 아니다.
일반인들처럼 유리 유수포프와 가족들도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는 처음 겪는 일이다.
유수포프 가문은 덩치가 큰 만큼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댐이 무너지는 건 작은 구멍 하나를 놓쳤기 때문이고, 거대지진이 일어나기 전엔 수많은 전조현상이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이 그 순간입니다.”
니콜라이의 말을 듣고 있던 둘째 예고르가 피식 웃으며 나섰다.
“아주 그럴듯해. 우리 니콜라이가 그림 그리면서 책으로 경제를 좀 공부한 것 같네. 그런데 현실은 책과는 달라. 네가 아는 걸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라고 생각하냐?”
“아직 어리잖아. 세상 돌아가는 걸 알기엔. 그림만 그리던 애가 뭘 알겠어. 적당히 해.”
나무라는 셋째 안턴보다 돌려서 까는 둘째 예고르가 더 밉게 느껴진다.
“그러면 좀 전에 두 분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철강과 자동차 기업을 사면 되는 겁니까? 샀다가 앞서 말씀드렸던 요인들 때문에 가문이 흔들릴 만큼 손해를 보면 두 분께서 책임지는 거고요?”
여기서 책임은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나는 거다.
니콜라이의 말에 막내 고모가 입술을 꽉 깨물며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얼굴은 눈에 띌 정도로 찌그러졌다.
둘째 예고르가 눈을 부릅뜨고 막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할아버지가 먼저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하잔 말이냐?”
“지금은 보유한 현금을 모두 달러나 금과 같은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가능하면 가진 돈 외에 돈을 빌릴 수 있는 대로 죄다 빌려서요.”
“…!”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빌린 원금과 이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겁니다. 또, 포기한 기업들은 때가 되면 헐값으로 다시 시장에 나오게 될 테니 그때 사들이면 되고요.”
여기까지 말을 마치자 방 안은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유리 유수포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그만 나가 보거라.”
손자 손녀들은 나가고 어른들만 남으라는 말이었다.
이렇게까지 확실한 의견을 내보였는데도 다른 판단을 한다면 그건 유수포프 가문의 운이 여기까지란 뜻이다.
니콜라이는 할 말은 다 했기에 홀가분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어떤 걸 선택하느냐는 할아버지의 몫이다.
* * *
방안엔 유리 유수포프와 자식들만 남았다.
니콜라이의 말대로 여러 상황이 빠르게 바뀐 터라 부작용들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손자의 말은 자신이 생각한 예상 범위를 너무도 크게 벗어났다.
유리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자식들을 바라보며 결단을 내렸다.
“니콜라이 말대로 하거라.”
“아버지! 이런 중요한 일을 어떻게 손자 말을 듣고 결정합니까?”
“모두 포기할 순 없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우리 가문은 주류층에서 상당히 밀리게 될 겁니다.”
둘째와 셋째의 강한 만류에도 유리 유수포프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니콜라이 말대로 모든 보유자금으로 달러와 금을 사들이도록 해. 지금은 몸집을 불릴 때가 아니야.”
“아버지!”
“아버지!”
둘의 불만 섞인 외침과는 달리 니콜라이의 부모님은 유리 유수포프의 결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한심한 것들. 욕심에 눈이 멀어서. 쯧. 어떻게 그림만 그렸던 니콜라이보다 안목이 없어. 당장 시작해!”
유수포프 가문에서 유리의 말은 곧 법이다.
명령이 떨어졌으니 아래 사람들은 법을 집행할 수밖에 없다.
* * *
두 형제는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며 정원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모든 자금을 쏟아붓기엔 좀 그렇지 않나?”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회사 운영 자금도 일부 빼놔야 하는데, 자금 대부분을 투자하기엔 너무 위험할 것 같단 말이죠. 아버지가 니콜라이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신 것 같은데….”
“아버지는 그런 것도 생각 안 하시고 지시를 내렸겠어?”
둘째 예고르의 나무라는 듯한 말에 셋째 안턴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할 거요?”
“안 하면?”
“하아. 이걸 어떻게 한다. 아버지 말씀을 거스를 순 없고. 그렇다고 니콜라이 말대로 하자니 영 안 내키고. 에잇, 아버지도 이제 늙으신 거지, 어떻게 손자 말에 설득당하셔서는.”
“네 맘대로 해. 뒷감당할 자신 있으면.”
형 예고르의 경고에도 안턴은 불만 섞인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향하는 큰형 이반 가족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니콜라이의 조언이 있었으나 그 말을 깊이 참고하느냐 마냐는 개인의 몫.
누군가는 유리 유수포프의 명령에 반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냐의 ‘로마노프 가문’이 파혼을 결정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