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283)
제283화
“허억, 허억….”
거칠어진 노인의 숨소리.
“쿨럭, 쿨럭! 우웨엑!”
노인은 기어코 생명이 시들어가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붉은 피를 토해냈다.
눈처럼 새하얀 천에, 황금의 사자가 수놓인 화려한 성복은 이미 피투성이로 변한 지 오래였다.
가지런한 머리를 정갈히 올린, 보기만 해도 거룩했던 모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봉두난발이 된 노인의 모습은, 도저히 평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평상시 누구보다 정갈함을 강조하던 노인은, 처참해진 자신의 모습에 조금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 럴… 수가….”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참상에 넋이 나간 상태였으니까.
노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한한 신성력은 교단의 병력을, 죽지 않는 무적의 군대로 변모하게 만들 수 있었다.
신의 준엄한 심판을 내리기 위한, 말 그대로 그 어떤 악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신의 군대였다.
한데, 그런 신의 군대가.
어째서.
이런 끔찍한 참상을 겪어야만 한단 말인가.
리비아의 옆에 있던 노인이 조용히 끌어 올린 마력을 분출했을 때, 자신은 노인을 가소로이 여겼다.
어디서 감히 그런 삿된 기운으로, 자신의 신성력에 대항한단 말인가.
교황은 확신했다.
노인의 부정한 기운은, 신의 축복을 받은 교단의 군대에게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못하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노인의 마력은, 믿을 수 없게도 주께 은총을 받은 힘을 너무도 우습게 통과해 버렸다.
저벅, 저벅!
넋이 나간 교황의 앞으로 리비아가 천천히 걸어갔다.
“하하하! 교황 성하. 많이 놀라신 모양입니다. 으음, 그럼 조금 힌트를 드려볼까요.”
“……?”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시야를 가린다.
“교황 성하, 이상하지 않으셨습니까?”
힘겹게 핏물을 닦아낸 프란체스코 교황이 고개를 들자, 해맑게 웃고 있는 리비아의 모습이 보였다.
“…무, 엇이 말인가.”
“이런, 이런. 정말이지 성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교황의 눈높이에 맞게 쪼그리고 앉은 리비아가 신전을 한 바퀴 쭈욱 훑으며 말했다.
“애초에, 왜 신전에 불이 났을까요?”
“……!”
리비아의 한마디에 프란체스코 교황은 마치 등줄기에 벼락이라도 떨어진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신전은 시골 영지에 있는 작은 신전이 아니다.
수도, 바티칸에 위치한 최고의 성세를 보이는 황금사자교의 본단이었다.
당연히 그 방어 결계 또한 최고 수준이었다.
대주교급 인사들이 설치한 최고의 신성결계가 몇 겹이나 중첩되어 있는 판국이니, 고작해야 기습해서 야밤에 지른 불 정도로는 신전에 있는 작은 깃발 하나 태우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이다.
한데, 이들은 마치 볏짚에 불이라도 붙이는 것처럼 너무나 손쉽게 신전 곳곳을 불태웠다.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신성력을 압도하는 힘을 가졌거나, 또는 신성력을 무력화할 수 있는 수단을 준비해 두었을 터.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한 ‘가능성’에 대해, 교황은 조금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허, 허허허.”
프란체스코 교황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전장으로 향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교단의 역사상 최고로 깊은 신성력을 가졌다는 평가에 자만했다.
오랜 세월 위기에서 떨어져 있던 눈은 세월의 풍파에 전장의 공기를 읽는 감각이 흐려져 있었다.
그것이, 오늘 자신이 패배한 이유 중 가장 큰 요소였다.
‘…아니, 의미가 없었을지도.’
설사 교단의 성기사들이 더 배치되어 있더라도.
설사 자신의 신성력이 더욱 강했더라도.
설사 자신이 방심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리비아의 뒤편. 저 ‘괴물’의 힘은, 신성제국의 천적이었으니까.
‘도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이데아에 다다른 이들도 아니었다. 그만한 역량을 가진 대마도사들은 이미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 중 저런 외견을 가진 이는 없었으며, 역용을 했을 가능성 역시 낮았다.
이데아에 다다른 자들의 마법은 강대하나, 자신의 신성력을 흔적도 없이 녹여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설마?’
뒤늦게 떠오른 가능성에 교황의 눈이 커졌다.
교단의 모든 성경과 역사서를 읽은 그는, 지나가듯이 보았던 한 줄의 문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제국의 모든 것을 부정하며 주의 은총을 거부했던 마법의 악마를 기억하라. 그 악마는 교단의 적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을 뒤흔들 자이니.
“…마법의 악마.”
교황이 내뱉은 단어를 들은 리비아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오? 과연. 황금사자교의 주인다우신 안목이십니다요. 설마 교단의 성서 중에 저 영감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 줄이야.”
마법사, 제노스의 이야기는 황금사자교에 있어서는 수치나 다름없었다.
그런 비사(祕史)에 대한 기록마저 접했을 줄은 몰랐다.
“미, 쳤구나. 신성제국, 그것도 명색이 황궁의 주인이라는 자가. 제국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대적(大敵)을, 제 손으로 불러냈단 말이냐!”
“에이. 그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하. 저희가 알아서 잘 해먹을 테니까요.”
이죽대는 리비아를 보며 프란체스코 교황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보병궁, 리비아 대주교! 설사 나를 쓰러뜨리고 교단을 장악한다 하더라도, 주께서는 그대에게 결코 이 거룩한 힘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대는 결코 주의 사랑과 은총을… 커헉!”
“에이, 쯧쯧. 가엾은 늙은 양이시여. 소리가 너무 큽니다만?”
교황의 일갈에 눈살을 찌푸리며 귀를 만지작거린 리비아의 손이, 순식간에 교황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어… 어헉….”
“친애하는 교황 성하.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찡긋!
눈을 부릅뜬 교황에게 리비아가 가볍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저 역시 비록 성하에 비하면 부족합니다만, 제법 많은 성서를 탐독했습니다. 그중 재밌는 구절이 있더군요?”
아, 아.
목소리를 가다듬은 리비아의 입에서 천천히 성서의 구절이 흘러나왔다.
“양들을 이끄는 목민관이 쓰러져 양들이 방황할 때, 목민관의 뒤에 내 안배한 어린 양 하나가 그 뒤를 이어 아이들을 이끌리라.”
“……!!”
핏물을 뚝뚝 흘리던 교황이 다급하게 리비아를 바라보았다.
“그… 문구를 어떻게…?”
그 문구는 교황의 그림자와 더불어, 황금사자교의 이단심판관만이 볼 수 있는 붉은 사자 복음에 기록된 문장이었다.
일반 신도, 설사 대주교라 해도 결코 볼 수 없는 금지된 비술의 문장.
“글쎄요, 어떻게 알았을까요?”
쭈우우우욱!
리비아가 능청을 떨며 팔을 잡아당기자, 교황의 박동하는 심장이 가슴팍 밖으로 튀어나왔다.
일반인이었다면 진즉에 즉사했겠지만, 교황의 정순한 신성력이 그의 죽음을 막고 있었다.
“……!!”
“교황 성하. 성하의 신성력은 가히 대륙 역사에 보기 드문 이적(異蹟)입니다. 이는 곧 교단의 흥복이요, 귀중한 재산일지니. 성하의 신성력은 제가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하지요.”
콰직!
심장을 입가에 가져다 댄 리비아의 입 주변에 붉은 피가 감돈다.
“또한 약속드리지요. 이 대륙 전토에, 황금사자교의 복음이 가득할 것임을 말입니다.”
살아 있는 신의 아들이라 칭해지는 교황이라 하더라도, 심장을 빼앗기고서는 살아 있을 방도가 없었다.
교황의 더운 심장을 게걸스럽게 취하는 리비아.
그 모습은 흡사, 성서에 등장하는 악마(惡魔)를 보는 것같이 두려웠다.
꿀꺽!
심장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집어삼킨 리비아는, 체내 구석구석까지 차오르는 황홀한 감각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오, 오오오!! 이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에요!”
주의 은총.
주의 사랑.
거룩하고 거룩한, 성스러운 힘.
이 힘이야말로, ‘주’께서 가장 사랑하는 인간에게만 허락하는 힘.
고오오오오!
리비아의 몸에서 더없이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신전을 넘어, 황궁까지 닿을 만큼 밝은 빛이.
“흘흘흘! 거, 황홀해하는 건 좋네만. 이제 그쪽이 내가 부탁한 걸 이행해야 할 차례 아닌가? 나이를 먹으니 이제 조금만 움직여도 쑤시는구먼.”
이번 일을 계획했던 리비아는 여전히 프란체스코 교황의 무한한 신성력을 흡수하느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기에, 노인의 눈은 자연스럽게 카이저 공작에게 향했다.
“그대가 찾는 이는 오시리스 왕국으로 움직였소.”
“음? 이상하군. 지난번에는 분명 올리비아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노인, 제노스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분명 얼마 전, 황제는 목표가 올리비아에 있다고 대답했는데.
그 때문에 자신이 상당히 골머리를 앓지 않았던가.
하필이면 신성제국에서도 골치 아픈 난적 중 하나인 이케니아, 그것도 가장 최남단인 영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제국이 병력이나 공작들을 지원해줄 것은 기대하지 않았었지만,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제노스도 쉽게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두메산골에 틀어박혀 있던 제노스였지만, 당금 대륙에서 가장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올리비아에 옆집 담 넘듯 드나들기란 쉽지 않았으니 말이다.
‘미리 알았다면, 이 귀찮은 장난질에 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제노스는 이바렐라에게 말했다. 옥좌에 오른 이를 파견해줄 수 있겠냐고 말이다.
기대하지 않았던 그 요청에 황제, 이바렐라는 흔쾌히 자신의 부탁을 수락했다.
대신, 이바렐라가 지원해줄 옥좌에 오를 이를 탄생시키는 일을 도와달라 말했었다.
눈엣가시인 프란체스코 교황을 제거하고, 자신의 심복인 리비아를 새로운 교황에 올리는 계획을 말이다.
그리하면, 리비아와 카이저 공작, 제1성기사단을 ‘올리비아’에 파견하는 것을 도와주겠노라 약속했다.
한데 지금 갑자기 뜬금없이 오시리스 왕국이라니?
“흐음, 그렇게 보아도 곤란하오만. 우리라고 목표가 갑자기 움직일 줄 알았겠소?”
제노스의 눈길을 받은 카이저 공작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 이런 어린애 장난질 같은 방법에 넘어가다니.’
이바렐라는 분명히 ‘올리비아’에 저 인원을 지원한다 약조했지, 오시리스 왕국에 지원한다고는 약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올리비아 왕국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이 웃기지도 않은 광대 짓에 참여하며 지원을 요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옥좌에 오른 변변한 무인 하나도 없는 나라 따위, 자신을 위협할 존재는 없었으니까.
“…이번 일, 내 두고두고 기억하겠네. 명심하게나. 내가 한 마나의 맹세는, 어디까지나 제국이 내 ‘뒤통수’를 치지 않았을 경우에 한정한다는 사실을 말일세.”
어설픈 수작을 피워 자신을 이용해먹지 말라는 서늘한 경고.
그 기운에 몇몇 1성기사단이 무릎을 꿇을 정도였지만, 카이저 공작은 살벌한 제노스의 위협에도 넉살 좋게 답했다.
“아아, 그거야 이를 말이겠소. 이번 일은 정말 우연이오, 우연. 참, 폐하께서 이것을 전해주라 말씀하시더군.”
스윽!
카이저 공작이 옆의 기사에게 손을 내밀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공작의 손 위에 조심스럽게 작은 주머니를 올려두었다.
휙!
주머니의 끝을 잡은 공작은, 마치 더러운 오물이라도 만진 것처럼 서둘러 제노스에게 주머니를 던졌다.
“본의 아니게 그대를 속이게 되어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원래 약속했던 데몬 쥬얼의 3배를 사례하겠다 전하셨소.”
“…….”
제노스가 말없이 주머니를 열어보자, 불온한 기운을 뽐내는 보석들이 안쪽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흠.”
이바렐라라.
‘제법, 마법사들의 성품과 생각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정도 보상이라면, 자신에게 친 장난질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가줄 수도 있었다.
“아 참, 그리고 이번 일로 고생하셨으니 두 달 정도 몬스터 부대의 연구는 쉬어도 좋으니 원하는 연구에만 집중하시도록 윤허가 떨어졌소. 당분간 건드리지 않을 테니 원하시는 대로 보내시오.”
카이저 공작이 마지막에 이야기한 것은 다분히 형식적인 포상이었다.
아무리 이바렐라가 몬스터 부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제국의 근간인 황금사자교의 수습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교황의 목이 떨어졌으니, 당분간은 황가에 충성할 주교들을 골라내는 시간이 필요할 터.
게다가 어차피 마법사들이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족속들이다.
휴가를 주든 말든 알아서 연구에 매진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음? 정말이오?”
놀랍게도 제노스는 카이저의 말에 반응했다.
“그렇다면 당분간은 자리를 비우도록 하지. 마침 다녀올 곳이 있었으니 말일세.”
“음? 다녀온다고? 어딜 말이오?”
제노스의 뜻밖의 반응에 카이저 공작이 무심코 물어보았지만, 제노스는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단지, 빙그레 웃으며 품 안에서 수정구 하나를 꺼내 들 뿐이었다.
“흘흘흘! 간만에, 오래도록 거래하던 단골손님이 찾아온 것 같아서 말이오. 휴업을 길게 했으니 이제 다시 영업을 시작해야지.”
“……?”
선문답 같은 제노스의 말에 카이저 공작이 의문을 표했지만.
수정구를 보며, 제노스는 눈빛을 빛낼 뿐이었다.
수정구 안쪽에서는,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울창한 숲을 몇몇 사람들이 열심히 헤쳐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