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일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훈훈한 분위기속에서 황제와 로디컬의 이야기를 훔쳐 듣던 공안들의 움직임이 덜컥거리듯 멈춰버렸고,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쿵.
머리를 잃어버린 육체가 바닥에 무너져 내렸고 , 산처럼 보물이 쌓여있는 방에 어울리지 않는 피 냄새가 풍기면서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안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서리고, 그렇게 빠릿빠릿하던 공안들이 일순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고 있을 무렵,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안타까운 일이야.”
황제는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 같았다.
그에 호응하듯, 방안에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고, 자신의 감정이 영향을 받는 느낌에 공안들은 재차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친구이자 신하인 로디컬이 이렇게 가다니. 사적으로는 좋은 친구를 잃었고, 공적으로는 제국의 유능한 원로를 잃었어.”
슬픔이 가득한 황제의 목소리에 공안들의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공안들의 분위기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황제는 씁쓸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네. 로디컬. 그래도 고통은 없었을 테니 이해해 주게나.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해서이니.”
탄식하듯 중얼거리던 황제가 베일 너머로 자세를 바로 했다.
“정중하게 수습해라.”
“알겠습니다.”
황제의 서류 정리를 보조할 정도면 공안 중에서도 상위 계급에 속하는 자들이다.
그런 그들 중에서도 대표라고 할 수 있는 1과장이 앞으로 나서며 깊숙이 고개를 숙였고, 황제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이어서 1과장의 눈빛을 받은 공안들이 앞으로 나서 로디컬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다시금 시간이 흘러가기 시작한 황제의 방은 로디컬이 들어서기 전과 다를 게 없어보였다.
황제는 생각에 잠겨있었고, 그런 황제를 중심으로 서류가 옮겨지고 분류되고 있었으며, 공안들의 움직임에는 일절 낭비가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베일 앞에서 1과장은 부동자세로 대기하고 있었고, 공기 중의 피 냄새는 가시지 않았으며, 묵묵히 로디컬의 시체를 수습하고 있는 공안들의 모습과 함께 방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조금은 느슨해졌던 공안들의 분위기가 바짝 조여지고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졌다.
“드라그.”
“예. 폐하.”
공안 1과장 드라그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답했다.
“로디컬의 유해를 가장 좋은 관에 안치시켜라. 괜찮은 친구였으니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폐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답하는 드라그였지만,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방금 전의 슬픈 감정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황제의 평이한 말투가 드라그의 영혼을 옥죄어 온 것이다.
“로디컬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은 것이다.”
“알겠습니다.”
암살인지 자연사인지, 자살인지 알 수 없게 사건을 조작하라는 황제의 명에 드라그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안은 이런 공작에 능한 이들이니 이들이 최선을 다한다면 제아무리 유능한 사람이 오더라도 얼마든지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게하르의 이빨이 그라인드로 향하고 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현재 북부를 벗어나 중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제국의 북부를 지키는 수십 개의 영지는 하나하나가 대단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자들은 있기 마련이고, 게하르 자작가는 단순 무력만 따진다면 북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기사 가문이다.
몇 개의 기사단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빨 기사단은 북부를 넘어서 제국 전체에도 알음알음 알려질 정도의 막강한 기사단이다.
“쉬쉬하고 있지만 단장인 구스타프는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선지 꽤 되었습니다.”
완숙한 소드마스터가 이끄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기사단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지간한 영지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무력이다.
“게하르가 승부수를 던졌군.”
어딘지 비웃는 것 같은 황제의 말이 울렸다.
“안타깝지만 타이밍이 안 맞았군.”
이어지는 황제의 말에 드라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제 아무리 막강한 무력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8대 귀족 중의 하나인 그라인드 백작가.
피해는 있을지 몰라도 막아내는 것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이빨기사단이 그라인드 백작가로 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둘째부인인 잉그리드에게 힘을 실어주고 다렌을 후계자로 못 박기 위한 무력시위에 가까우니 실제로 충돌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귀족들 간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어왔고, 소드마스터가 나섰으니 성공 가능성이 꽤나 높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그라인드는 상황이 달랐다.
소드마스터가 된 드웨인만 하더라도 구스타프를 견제할 수 있을 것인데, 거기에 끝을 알 수 없는 괴물인 아렌이 있는 것이다.
구스타프와 이빨 기사단이 몸 성히 북부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것에 드라그는 내기도 걸 수 있었다.
“시간을 잘 맞춰 봐라. 이빨 기사단이 그라인드에 도착할 때쯤에 로디컬의 부고를 알려봐. 아렌 드 그라인드라면 분명히 움직일 거다.”
단순히 로디컬 한명의 죽음이라면 아렌이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구스파트가 도달한 시점에서 로디컬의 부고가 알려진다면 아렌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직접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왜냐고?
“나라면 분명히 그럴 테니까.”
황제의 목소리에 유쾌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니 열심히 움직여주게나. 아렌 드 그라인드여.”
즐거운 감정이 방안에 휘몰아치기 시작했지만 거기에 휩쓸리는 공안은 아무도 없었다.
* * *
하나의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제법 많다.
하물며 그것이 하나의 영지가 된다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시설은 더욱 다양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라인드 백작가도 당연히 그런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고, 그중에는 당연히 감옥을 비롯한 고문실도 있었다.
“끄아아아아!”
감옥 안쪽 깊은 곳에서 울리는 비명소리에 간수장과 고문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직업상 인간의 비명과 고통에는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단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무려 장자인 로렌 도련님의 시해혐의로 잡혀 들어온 둘째부인의 집사인 훌리오를 본 순간 고문관은 자신이 평생 갈고 닦아온 솜씨를 발휘할 것이라고 마음먹고 눈에 불통을 튀겼지만, 아쉽게도 그에게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몰골로 끌려온 훌리오의 목숨을 붙여두라는 지시가 있었고, 사람을 고문하는 업에 종사하는 만큼 인체에 해박한 고문관은 자신의 솜씨를 반대로 발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싼 포션까지 동원하여 상처를 손보고, 혹시라도 자해를 대비한 조취까지 취해놓고야 고문관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렇게 명을 이행하고 늦은 저녁식사를 즐기려던 그때, 아렌이 고문실을 찾았다.
제 아무리 필요한 직업이라고는 하지만, 간수장과 고문관은 양지에 잘 드러나지 않는 직업군이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그들에게 아렌은 치하의 말을 보냈고, 그 순간 그들은 아렌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혹여 라도 다른 죄수들이 무례를 범할까 눈을 부라리며 훌리오가 있는 방으로 아렌을 안내했고, 그렇게 아렌이 홀로 들어간 방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름대로 배짱이 있다는 죄수들마저도 한쪽 구석에 숨어서 몸을 떨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비명이 얼마나 처절한 기운을 담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렇게 그라인드 백작가의 감옥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일순 비명이 멈췄고, 침묵이 감옥 안에 감돌았다.
모두들 두려운 눈으로 감옥 안의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보던 그때, 한 줄기 소리가 공기를 타고 울렸다.
덜컥.
“으으으으…….”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다 죽어가는 신음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감옥 너머에서 훤칠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어두침침하기 그지없는 감옥 안이었지만, 그럼에도 화려하게 빛나는 백금발과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그 자체만으로 빛이 나는 것 같은 귀공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림 같은 모습에 잠시 홀린 고문관과 간수장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잰 걸음으로 아렌의 곁으로 다가섰다.
“도련님.”
“별일 없으셨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들어가기 전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귀하신 도련님이 아닌가.
그라인드의 미래를 책임지실 것이 분명한 분이니만큼 터럭만큼의 상해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괜찮다. 수고가 많구나.”
“송구합니다요. 도련님.”
충성스런 하인의 모습에 만족한 아렌이 치하의 말을 하니 환하게 웃은 둘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라인드의 핏줄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맹목적인 충성을 보내는 하인들을 보면서 아렌은 마음이 고무되는 것을 느꼈다.
무인이었을 때에 세력을 만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맹목적인 충성을 보내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당대에 만들어진 것과 전통을 가진 집단의 차이겠지.’
그라인드의 역사는 못해도 수백 년.
수백 년 동안 한 지역을 다스리던 가문의 저력은 실로 만만히 볼 것이 아니고, 그러한 세력의 일원이라는 것은 강렬한 충족감을 주기 마련이다.
개인주의가 강한 아렌의 성향에 그라인드라는 집단에 대한 애정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아렌은 둘을 향해 말했다.
“목숨만 붙여 놔라. 처분은 추후 명을 내리겠다.”
“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굳은 결의가 서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둘을 뒤로 하고 아렌은 감옥을 나섰다.
“히엑!”
“어이쿠야!”
그의 뒤로 훌리오의 상태를 확인한 간수장과 고문관의 비명을 지르며 소생술을 사용하는 등 부산을 떨었지만, 아렌은 신경 쓰지 않았다.
* * *
“고생하셨습니다.”
“별거 아니었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베로아가 앞으로 나서더니 아렌의 옷매무세를 정리했고, 같이 대기하고 있던 벡스터와 에드워드, 드웨인, 아인이 허리를 숙였다.
저택에 도착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지만 아렌의 움직임은 온 백작가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고, 각 가신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아렌을 보러 온 것이다.
“늦은 시간인데 수고가 많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도련님.”
드웨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고, 다른 일행들도 저마다 너스레를 떨었다.
“성과는 있으셨습니까?”
“필요한 것은 들었다. 그나저나 넌 누구지?”
드웨인의 물음에 가볍게 답한 아렌이 아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인이 흠칫하더니 다시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수석행정관 아인이라고 합니다. 아렌 도련님.”
“기억에 없구나.”
행정관이라는 직책상 꼬마 아렌과 볼일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많이 뵙지 못했으니까요. 차차 기억이 나실 겁니다.”
에드워드의 설명에 아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도련님.”
담백한 대답에 그렇게까지 무도한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 아인의 귓가에 아렌의 무심한 목소리가 꽂혔다.
“그런데 표정이 어둡구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이냐?”
“예?”
흠칫한 아인이 고개를 들었고, 아렌과 눈이 마주쳤다.
어둡고 어두워서 마치 밤하늘 같은 눈동자는 일순간 아인의 정신을 아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지만, 아인은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눈동자가 탁하군. 뭔가 씐 것 같구나.”
하지만 이어지는 아렌의 말에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아인의 정신은 아늑해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