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90
090화
구겨지는 것을 넘어서 짓이기는 것 같은 소리에 모두가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별거 아닌 소리였지만, 알게 모르게 느껴진 위화감이 모두를 자극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느낌은 맞았다.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공간을 통째로 압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얼이 빠진 관객들은 물론, 교수들까지도 눈을 크게 떴다.
극도로 어려운 일이지만 공간을 자를 수는 있다.
말도 안 되는 난이도를 가지고 있지만, 공간을 건너뛰는 마법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간을 구겨버리는 것은 아직까지 듣도 보도 못했으니, 조금이라도 마법에 조예가 있는 모두가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지은 것이다.
공간이 도화지라면 그 안 채색된 것은 세계.
그런데 도화지 자체를 구겨버리니 세계 자체가 사라져버렸고, 그 자리에는 다시 새하얀 도화지만이 남아버렸다.
텅 빈 공간 사이로 아렌이 태연한 신색으로 걸어 나왔다.
아렌의 주변을 둘러싼 무시무시한 공세는 그대로이지만, 아렌의 전면에는 마치 잘라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고, 아렌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뭐지 그건?”
넋이 나가버린 표정을 짓고 있는 학생을 뒤로하고 알레르토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큐빅을 모으고 이치를 탐구하면서 알베르토가 도달한 것은 공간을 다루는 방법이었다.
비록 안타이오스에서나 가능한 방법이지만, 알베르토는 큐빅을 이용해서 공간을 깨트리는데 성공했고, 그런 이해가 있었기에 지금 아렌이 한 짓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짓인지를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르르르릉!
접혀진 공간이 펴지며 막강한 힘이 다시금 휘몰아쳤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별건 아니다.”
나른한 아렌의 목소리에 알베로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진리의 끝자락을 손에 넣고 사용하기까지 한 고심을 생각하면 아렌의 말은 지극히 오만했었으니까.
“작은 깨달음이 있었을 뿐이야.”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한 아렌이 가볍게 손을 오므렸다.
마치 갓난아이가 손을 쥐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나타난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와지직!
“으아아아악!”
끔찍한 소리와 함께 울린 비명에 알베르토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알베로트와 함께 아렌을 공격했던 학생.
그 학생의 몸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변해있었던 것이다.
“······으으으.”
신음을 내뱉고 있는 얼굴과 우반신은 그대로였지만, 어깨 아래로부터 이어지는 나머지 좌번신은 마치 압착이라도 한 것처럼 완전히 구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정도의 압력이라면 신체가 찢어질 만도 한데, 압축되어진 와중에서도 좌반신은 신체에 붙어있었으니 그것이 더욱 공포스러운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정말 공간을 다루는군.”
빛으로 변해 사라지는 학생을 바라본 알베르토가 크게 침을 삼켰다.
자신의 마도가 바라 왔던 이상향.
그것을 마법사가 아닌 자가 행하고 있다는 것에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단어에만 집착하다가는 평생 다가가지 못할 거다.”
그런 알베르토의 모습을 바라보면 피식 웃은 아렌이 한 마디를 건넸다.
무슨 변덕인지 모르겠지만, 집착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조언을 건넨 것이다.
“······뭐!?”
알베르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다급히 아렌을 향해 뭔가를 말하려고 하던 그 순간, 아렌의 손이 알베르토를 가리켰다.
“자. 잠깐!”
“수고했다.”
와지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알베르토가 있던 자리가 접혀 버렸고, 거짓말처럼 알베르토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잠시 후, 알베르토가 있던 자리에서 피어오르는 빛무리를 일변한 아렌이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이 난리 속에서도 그 모습을 지키고 있는 시청 건물.
가볍게 손을 흔들어 큐빅을 회수한 아렌이 느릿하게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텅!
울림 소리와 함께 아렌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고, 어느새 아렌은 시청의 앞에 서 있었다.
* * *
축지성촌.
경공을 수련하는 모든 무인들이 꿈에서나 상상해 봤을 이상향을 그 몸으로 펼치는데 성공했지만, 아렌은 담담했다.
이런 깨달음 하나에 일회일비하기에는 아렌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녹녹치 않았던 것이다.
결국 아렌이 지금까지 끊임없이 참오하고 수련한 적공이 작은 깨달음을 만나 개화한 것이고, 그것은 언젠가는 도달할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시점이 지금 이순간이 됐을 뿐.
때문에 아렌의 마음속은 명경지수와 같았지만, 그래도 슬며시 피어오르는 성취감을 어찌할 수는 없었고, 혼잣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인식을 방해하는 결계군.”
어느새 하나로 합쳐져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큐빅을 손안에서 굴리고 있던 아렌이 시청을 보면서 말했다.
커다란 크기와 이상할정도로 상처가 없었지만, 학생들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시청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마법이 펼쳐져 있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별전쟁에서 큐빅을 완성한자가 나오지 않은 원인이었다.
“······과연. 그렇다면 이해가 가지요.”
“확실히 지금까지 완성자가 없었다는 게 이상하기는 했어요.”
아렌의 말에 깨달은 것이 있는지 교수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했고, 마일리의 손이 꽉 쥐어졌다.
오늘이 아카데미의 마지막이라는 것은 이미 확신하고 있는 마일리다.
그런 와중에 아카데미의 최대 비밀 중의 하나인 큐빅과 블랙박스의 정체가 밝혀지려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는 것이다.
복잡한 눈으로 시청을 향해 다가가는 아렌을 바라보던 마일리가 양뺨을 때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뭐든지 마지막이 중요한 법.
아렌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마일리의 눈이 형형한 빛을 발했다.
끼이.
목재가 비틀리는 소리와 함께 시청의 커다란 문이 좌우로 열렸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재 때문에 햇빛이 비춰지지 않고 있어서인지 시청 내부는 어둡기 그지없었지만, 아렌에게 이런 어둠은 장애물이 아니었다.
파파파팟.
거기에 아렌을 환영이라도 하는 듯, 사방에 산재해 있던 마법등이 빛을 발했고, 이내 시청 내부를 환하게 비췄다.
“흠.”
정돈된 집기들과 일체의 흐트러짐이 없는 내부는 먼지 하나 없어서, 꽤나 신경 써서 관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반대로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아서 이질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도리어 어색한 그림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렌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아렌의 작은 발소리가 공간을 울릴 정도로 적막만이 가득한 곳을 가로지르며 아렌이 입을 열었다.
“큐빅으로 뭔가를 창조하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생명체를 생각했었다.”
뜬금없는 아렌의 독백이 안타이오스를 넘어 콜로세움까지 들려왔지만, 모두의 눈과 귀는 아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부르바스와 마일리, 교수들은 더욱더 귀를 기울였다.
“생명체는 정기신으로 구성되지. 이것은 기본이다. 어떠한 생명체도 이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천천히 건물의 중앙으로 걸어가면서 아렌은 말을 이었다.
“큐빅에는 정에 대한 배려가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했었고.”
정이라는 것은 정신, 즉 영혼을 말한다.
아렌이 손에 들고 있는 큐빅을 가볍게 던졌다가 받아들었다.
99라는 숫자가 박혀있는 큐빅의 모습이 모두의 눈에 깊게 박혀들었다.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야.”
턱.
중얼거림과 함께 아렌의 발걸음이 멈췄고, 아렌의 말과는 다르게 모두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수많은 책상이 모여 있는 곳에 있는 별 특징 없는 책상 앞에 아렌이 멈춰선 것이다.
“반성했다.”
아렌의 손이 들어 올려지더니 떨어져 내렸다.
콰지지지직!
모골이 송연한 소리와 함께 책상을 중심으로 집중된 압력이 땅으로 파고들었고, 절묘한 힘의 조절은 건물에 일체의 피해를 주지 않고 있었다.
“선입견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인데, 나도 모르게 선입견을 가져버렸으니 또 다시 하나 배웠지.”
소년의 모습으로 노쇠한 현자의 말을 하고 있는 아렌의 모습은 기이하기 그지없었지만 어느덧 그 점을 지적하는 자들은 없었다.
콰가가가각!
책상이 있던 자리가 한없이 밑으로 파고들었고, 이내 사람 하나 정도가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되었다.
일체의 빛이 세어나오지 않아서 마치 무저갱 같은 그 구멍을 향해 아렌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앗!”
“화면이 왜 이래?”
그와 동시에 아렌을 비추고 있던 화면 전체가 검게 변해버렸고, 갑자기 암전 돼 버린 화면에 관객들이 웅성거리던 것도 잠시.
“보인다!”
은은한 빛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화면은 다시금 아렌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저런 게 안타이오스에 있었나?”
“······지형 디자인한 게 누구야?”
구멍을 통해 떨어진 아렌의 모습이 나타난 것은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안타이오스 전체를 수용하고도 남을 것 같은 거대한 공동은 사방의 벽에 마법의 문자가 새겨져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빛이 어우러져서 공동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크기가 무색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텅 비어있는 커다란 공동은 모두의 얼굴에 의문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지막까지 감춰놓는구나.”
허공에 떠서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아렌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파칭!
공동의 중앙에 스파크가 일어나더니 이내 물감을 지워버린 것처럼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아!”
“······블랙박스다.”
너무도 어두워서 마치 밤하늘 같은 정육면체가 공동의 중심에 자연스럽게 떠 있었다.
지이잉.
공동 전체에 새겨진 마법문자가 빛을 발했고, 허공에 떠있는 블랙박스가 그 빛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한 점의 빛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모습에 모두가 경이에 찬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지만, 아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우웅.
어느 정도 빛을 빨아들인 블랙박스가 다시금 허공에 그 모습을 숨기려던 그때, 아렌이 자신의 큐빅을 꺼냈다.
둥.
서로가 공명하기 시작하는 블랙박스와 큐빅을 보면서 아렌이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이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내가 예측한 방향이 아니더군.”
둥실 떠올라 저절로 블랙박스로 향하려는 큐빅을 바라보며 아렌이 말을 이었다.
“세상의 모든 요소를 박아 넣고는 정작 영혼에 대한 배려는 없는 물건. 결국 큐빅을 만든 자는 생명체 따위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니었던 거지.”
가까이 다가가 서로 어우러지기 시작한 블랙박스와 큐빅의 모습을 응시한 아렌이 말했다.
“큐빅을 만든 자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의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예를 들자면 그래.”
아렌의 눈이 사방을 훑었고, 그 눈에 서린 냉엄한 눈빛에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이 안타이오스 같은 것을 말이지.”
그리고 그 순간 블랙박스와 큐빅이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