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Youngest Son Is a Player RAW novel - Chapter 137
제137화
그날 밤.
비가 오려는지 구름이 가득 찬 하늘은 달빛마저 가려버렸고, 백작의 소식을 들은 성민들은 평소보다 빨리 하루의 일과를 정리했기에 성안은 적막과 어둠에 쌓여 있는 듯했다.
어느새 자정을 넘긴 시각.
순찰을 도는 경비병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조용한 거리를 조심스레 가로지르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검은색 일색으로 정체를 숨긴 그들은 교묘하게 순찰병들의 눈을 피하며 내성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내성벽 아래.
가장 앞서 있던 이가 손으로 성벽을 더듬는가 싶더니 검게 칠해진 밧줄 하나를 찾아냈다.
스르륵.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아무런 소리조차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성벽을 오른 수십 명의 복면인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이 오른 성벽 위엔 경비병이 아무도 없었다.
‘좋아. 약속대로군.’
검은 후드 아래, 광택이 사라진 황동가면을 쓴 사내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마찬가지로 밧줄을 타고 조용히 성벽을 내려간 이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내성 곳곳으로 삼삼오오 흩어져 나갔다.
경사진 언덕길을 올라가자 긴 담장과 정원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담장을 따라 일정 간격으로 화톳불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옆을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기에 몰래 담장을 넘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검은 무리는 경비병이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담장 동쪽 어느 구역을 훌쩍 뛰어넘어 저택으로 침입했다.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것인지, 화톳불 근처의 병사들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창을 들고 서 있는 세 명의 병사는 멀리서 봤을 때는 멀쩡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이미 그들의 눈동자엔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몸은 교묘하게 가려진 지지대에 의해 서 있을 뿐이었다.
쉰 명이 넘는 검은 복면인들은 몇 개의 무리로 나뉘어 저택 내부에 침투를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잠겨 있어야 할 창문이 열려 있었고, 그들은 고양이처럼 조용히 저택 내부로 스며들었다.
무사히 내부에 진입한 검은 무리의 대장, 임페리얼 하운드 루벤 왕국 지부의 간부 6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수신호를 보냈다.
‘약속된 곳으로 이동해 명령을 기다려. 신호가 오르면 모두 죽이고 불태워라!’
십 년이 넘게 자신이 담당해왔던 애쉬튼 백작가의 숨통을 직접 끊을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6호의 머릿속이 아드레날린으로 불타올랐다.
당장 오늘 백작가가 멸문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오늘을 계기로 백작가는 몰락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흥분을 애써 감추며 6호는 그의 직속 부하들과 함께 저택의 복도를 조용히 걸어 나갔다.
‘아쉽지만 오늘 내 역할은 피를 보는 게 아니니까.’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시며 예정된 경로를 따라 계단을 걸어 올랐다.
분명 매 층마다 경비를 서는 이들이 있어야 함에도 아직까지 그들을 막아서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도착한 타겟의 방 앞에는 기사 하나와 병사 둘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아직 누군가가 침투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그들은 피곤한 눈빛으로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스르륵.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 녹아든 6호가 다시 나타난 곳은 기사의 머리 위쪽이었다.
검은 그림자 같은 그의 모습을 눈치챈 건지 맞은편 병사의 눈동자가 커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머리 위쪽에서도 날붙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푸슉, 핏!
경비를 서던 셋은 동시에 목 뒤에 단검이 박혀 숨이 끊어졌다.
그건 은빛 곰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실버베어 기사 또한 다르지 않았다.
엑스퍼트 초급에 불과한 기사로선 엑스퍼트 상급 암살자의 암습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스윽.
조용히 사체를 복도 벽에 기대 놓은 6호와 부하들이 소리 없이 방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섰다.
‘으읍!’
순식간에 침대에 다가선 6호가 약품이 묻은 헝겊으로 표적의 숨통을 틀어막자, 아주 잠깐 꿈틀거린 표적이 이내 잠잠해졌다.
굳이 품속의 몽타주를 꺼낼 필요도 없이 표적이 맞다는 걸 확인한 6호가 손짓하자 부하들이 커다란 자루를 꺼내 표적을 집어넣었다.
‘크크크.’
계획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맘에 들었는지 6호는 속으로 크게 웃음 지었다.
표적을 짊어진 부하들이 창문을 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6호는 살짝 갈등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도 지금 몸을 빼는 게 맞지만….’
너무 일이 잘 풀리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협력자가 넘겨준 정보에 의하면 저택 5층에는 골든베어 기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무리 기습이라고 해도 그와 부하들만으로 정규 기사단을 이길 수는 없는 일.
하지만 진짜 괴물들은 영지를 비운 상태이니 6호 자신의 몸 하나 피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했다.
‘일단 두 번째 타겟 쪽의 상황을 살피고 생각해야겠군. 그리고 이제 슬슬 신호가 오를 타이밍인데…’
그때 저택 창문 너머 멀리 떨어진 건물 하나에서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저택 곳곳에서 칼부림이 시작되었고,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적이다! 적이 침입했다!”
“불이야!!”
“아악! 살려줘!”
갑작스레 저택이 소란스러워졌고, 저택 밖도 불길과 소음으로 혼란했다.
6호는 향긋한 피비린내에 심장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며 느긋하게 두 번째 타겟의 방으로 향했다.
이미 부하들이 처리해 놓은 상태겠지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그곳에 들렀다가 백작이 있는 곳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삐걱, 삐걱.
이제 소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에 편하게 걸음을 옮겨 목적지로 향했는데, 짙은 피비린내가 훅 그의 코를 파고들었다.
‘적당히 하지 이 자식들이.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살짝 혀를 찬 그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휘리릭.
“헉!”
6호는 자신의 목을 노려오는 노란 검기에 화들짝 놀라 뒤로 텀블링하며 간신히 공격을 피해냈다.
어느새 양손에 단검을 꺼내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복장을 한 시체 더미와 그 옆에서 검을 아래로 향한 채 그를 노려보고 있는 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6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제길. 이 정도일 줄이야. 실력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분명 같이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눈앞의 기사, 퍼스트 기사단의 단장 필립에게 기세를 빼앗긴 6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두 번째 타겟의 확보는 물 건너간 거나 다름없었다. 나름 정예로 8명이나 붙였건만 택도 없었던 모양이다.
탁, 타다닥!
다행히 필립은 타겟의 보호가 최우선 목표인지 도망치는 6호를 따라오지 않았다.
6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재빨리 저택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습격을 알고 있었나? 아니 그렇진 않을 거야.’
그랬다면 첫 번째 표적을 그렇게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을 것이고, 계획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진 못했을 터.
‘필립이 있다는 건, 라울 놈이 비밀리에 병력을 숨겨뒀던 모양이군.’
정말 나이가 어리다고 우습게 볼 녀석이 아니었다. 아마도 불안한 마음에 대동했던 기사 몇을 저택에 돌려보냈겠지.
하지만 결국 그들의 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빠르게 담장 너머로 사라지는 6호의 등 뒤로 타오르는 저택의 불길과 연기가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 * *
쾅!
“도대체 경비를 어떻게 섰길래 이런 사단이 생긴 겁니까!”
“아니, 지금 이게 내 탓이란 건가!”
어수선한 저택 내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골든베어 기사단 수석 기사인 웨이론과 실버베어 기사단장 카를로 남작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저택 내외부 경비는 실버베어 기사단이 맡은 게 사실이잖습니까? 수십 명의 적들이 저택에 발을 들일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골든베어 기사단도 경비를 맡은 건 마찬가지 아닌가? 아무리 5층 전담이라지만 눈치채지 못한 건 그쪽도 마찬가진데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려는 수작인가?”
카를로 남작의 말은 억지투성이였지만, 직급과 신분에서 밀리는 웨이론은 말로 화를 터뜨릴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 일은 차후에 철저히 조사해서 책임을 물을 겁니다!”
“하!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목숨 바쳐 경비를 선 우리 기사단을 모욕한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다!”
간밤의 습격에서 실버 베어 기사단원 다섯이 목숨을 잃었다. 당연히 단장인 카를로 남작의 심정도 편할 리가 없었다.
“그만들 하시지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지켜보고 있던 필립이 끼어들었다.
필립의 말에 두 사람이 겨우 화를 참으며 입을 다물었다.
비록 백작가 직속 기사단은 아니지만 기사단장이고 라울의 임시 대리인이었으며, 어제 습격에서 커다란 공훈을 세웠기에 필립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일단 피해 상황부터 확인하고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보고하게.”
필립의 지시에 퍼스트 기사단원 한 명이 고개를 숙이고는 간략하게 브리핑했다.
간밤의 습격으로 저택의 경비병 30명이 전사했고, 실버베어 기사단의 기사 다섯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별채 하나가 불에 타서 완전히 전소했고, 동쪽 정원의 절반이 불탔으며, 본관 또한 곳곳이 불붙거나 부서지며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병사들 외에 사용인들 중엔 아무도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라울이 몰래 그들 사이에 퍼스트 기사단원들을 배치해 습격자들에 대비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겉으로 보기엔 큰 피해가 있어 보였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고 혼란한 와중에 레이디 에스텔라 님이 납치당하셨습니다.”
쾅!
“이런 낭패가!”
웨이론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분노했다. 카를로 남작도 이번에는 할 말이 없었는지 시선을 회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레이디 에스텔라.
큰형 딜런의 부인이자 라울의 형수였다. 백작부인이 사망한 이후 어린 나이에 백작가의 안살림을 책임지며 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기사들의 충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총사령관 어네스트 드 보겔 자작님의 저택에도 침입자가 들어 큰 손주인 리키가 납치되었고, 골든베어 기사단장 트레버……”
백작가 저택 말고도 내성에 있던 혈족과 고위 관료들의 저택도 일부 습격을 받아 사람들이 죽고 저택이 불탔다.
레이디 에스텔라 외에도 영지 중신들의 혈족이 여럿 납치된 상황이었다.
“놈들의 행적은? 추격대의 소식은 없나?”
“어찌 된 일인지 내성을 벗어난 이후로는 놈들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꽈드득.
웨이론이 이를 갈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내성 경비를 맡았던 수문장 놈은? 잡아왔나?”
“병사들이 찾아갔을 때는 이미 수문장과 그 가족들까지 모두 모습을 감췄다고 합니다. 뒤를 쫓고 있으니 무슨 소식이 들어올 겁니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백작령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이곳이 이렇게 허무하게 뚫리다니! 이래서야 백작님과 딜런 공자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
“…….”
웨이론이 탄식을 내뱉었고, 카를로 남작도 씁쓸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자,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합시다. 사건 직후 경비대장님께 성문을 봉쇄하도록 전했으니 놈들이 성을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겁니다. 웨이론 수석 기사님은 지금처럼 백작님의 호위에 만전을 기해주십시오. 그리고 카를로 남작님도 다시 저택의 경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아 있는 적의 단장이 저택을 노릴지 모르니까요. 저는 부하들과 함께 놈들을 추적하고 성의 경비상태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외성의 포털을 부숴버렸다는 건 또 다른 습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니 다들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습격자들은 간밤에 포털마저 박살 냈다. 이는 명백히 백작가의 주력이 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공작이었으니, 필립의 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임시 회의를 마치고 저택을 빠져나온 필립이 길드통신을 열었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마스터.」
「수고했어, 필립 경. 리비는 무사하지?」
「물론입니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잘 모시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쥐새끼들은 언제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거야 진짜 먹잇감이 미끼를 물고 난 후가 되겠지. 그나저나 케인은 어때? 별문제 없지?」
「아주 죽겠습니다. 언제까지 잠든 척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놈들은 정말 사람을 짐짝처럼 들고 다니네요. 좀 부드럽게 다뤄주면 좋겠건만.」
케인이 길드 통신으로 툴툴대자, 제이크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크크크. 조금만 더 참으시지요, 레이디 에스텔라. 때가 되면 이 백마 탄 제이크가 구하러 가겠습니다.」
「제길. 제이크 부단장님이 오시기 전에 제가 다 아작 내버릴 겁니다. 이놈들은 도대체 포로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사실 간밤에 잡혀간 레이디 에스텔라는 바로 변장한 케인이었다. 건장한 30대 남자가 가녀린 20대 여성의 모습으로 바뀌는 기적을 직접 확인하며 라울도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간밤에 납치된 중신들의 자제는 모두 케인의 첩보원들이 변장한 모습이었다.
실제 인물들은 모두 모종의 장소에서 라울이 보호하는 중이었다.
‘이제 무대는 갖춰졌다. 어서 무대 위에서 같이 춤춰보자고.’
라울은 무대 위에 올라올 배우들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떠올려보며 날카로운 비수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