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Youngest Son Is a Player RAW novel - Chapter 264
제264화
“찾았다.”
라울은 담백한 표정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성을 바라봤다.
하지만 실제 그의 마음속에 들끓는 감정은 복잡했다.
그는 바로 이 고성을 기준으로 더 이상 서쪽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대형 길드 연합….’
금역 시나리오가 시작된 이후부터였다.
그에 대한 직접적인 견제와 회유가 시작된 것은.
기댈 곳 없는 고아였던 배도현은 각종 세력이 보기에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후발 주자든 기성 길드든 랭킹 1위 플레이어를 영입한다는 건 상당한 상징성과 메리트를 가지게 마련.
하지만 배도현은 모든 이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게임 속에서만큼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길 바랐다.
기득권 세력에 영합하여 퀘스트를 독점하기보단, 평범한 플레이어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개척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보상이 X같았지, 개자식들!’
놈들이 가져온 영입 제안서는 터무니없었다.
기본급이라고 제시된 액수는 배도현이 쉬엄쉬엄 방송하는 수입의 1/10도 되지 않았다.
계약금은 그가 차고 있는 아이템 하나만 경매해도 나올 금액에 불과했고, 무슨 ‘금지 조항’이 그렇게 많은지 다 읽어보기도 힘들었다.
한 곳이 아니라 수십 곳의 제안서가 다 그 모양이었다는 건.
‘내가 만만했거나 그들 간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단 얘기겠지.’
어쩌면 진짜로 배도현의 영입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장애물 하나 치운다는 생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의 성향을 모를 리도 없고, 길드에 들어간다고 얌전히 단체 행동에 따른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대형 길드 연합과 배도현 간의 전쟁.
결과는 명백했다.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는 그저 패배자들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거의 10년을 이어간 전쟁에서 놈들은 모든 것을 얻었고, 배도현은 다 잃었다.
목숨까지도.
그리고 이 고성은 그와 놈들의 전장 가운데 하나였다.
서쪽 금역 몬스터 숲에 진입하기 위한 관문 도시 엑스퍼디션.
금역 시나리오 초반, 금역 초입 근처에 존재하는 유일한 A등급 도시이자, 대로를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곳.
그곳을 독점하려던 길드 연합을 배도현이 공격했고, 삼 일간의 전투 끝에 지배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불과 한 달 만에 다시 빼앗겼지만.’
금역을 개척하며 획득한 개척지의 지배를 위해선 여러 가지 규칙이 있었다.
그 가운데 공성전(영지전) 기간이 있었는데, S~F등급까지 존재하는 개척지의 규모에 따라 공성전이 허용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E, F등급 소규모 정착지는 언제든 공성이 가능했다.
하지만 D등급 중형 마을은 일주일에 한 번만 공격할 수 있다.
전투가 끝나면 개척지는 보호막이 생성되어 외부 침입자의 공격을 막고, 영주(촌장, 시장, 사령관)의 권한으로 적대 세력을 추방할 수 있다.
개척지의 등급이 높아질수록 보호 기간은 길어지고, A등급 도시의 경우엔 한 달간 시장의 권한이 주어졌다.
‘만약 그때 내게 세력이 있었다면….’
몬스터 숲이 통째로 길드 연합에 넘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라울은 과거를 회상하며 천천히 들판을 걸어 고성으로 향했다.
휘이잉.
서늘한 바람이 무너진 성벽 사이를 지나며 떨리는 음색을 토했다.
터져나간 성문은 경첩만이 남아 삐거덕거렸고, 허물어진 성문을 지나 안쪽에는 성한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은 잘 닦인 도로와 건물터, 그리고 위태로이 서 있는 낡은 내성뿐.
‘후우, 그냥 다 새로 지어야겠는데?’
지금 상태로 봐선 A등급은커녕 D등급 중형 마을 수준도 되지 못했다.
아마도 지형적인 이점과, 확장성 때문에 A등급으로 책정되었으리라.
터벅터벅 걸어서 내성(영주성) 안으로 들어서니 걷기가 무서울 정도로 낡아빠진 내부가 나타났다.
“아, 진짜 너무하네. 그래도 쓸 만한 게 조금은 남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동쪽 금역인 원소 정글보다는 나았다.
그곳은 애초에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진 마을이란 게 없었으니까.
“좋게 생각해. 아예 처음부터 터를 닦고 성벽을 올리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낫잖아.”
어느새 라울의 어깨 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던 라벨이 그를 위로했다.
“그야 그렇지만.”
전생에 처음 몬스터 숲으로 왔을 때는 도시가 어느 정도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하긴 돈이라고는 부족함이 없는 대형 길드 놈들이 있는 대로 쏟아부어서 복구해놓았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도시 하나를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끼기긱, 끼기긱.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나무 바닥을 밟아 내성 가장 깊숙한 홀로 향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라울은 원하던 것을 찾았다.
기다란 대전의 가장 안쪽.
영주의 의자 뒤쪽에 솟아 있는 웅장한 자연 조각상.
그 한가운데 있는 진열대의 가운데가 텅 비어 있었다.
라울이 조각상의 앞으로 다가가 비어 있는 진열대로 손을 뻗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군.’
라울의 손에서 마나가 빠져나가 진열대를 물들였다.
푸화핫!
* * *
서컹! 푸슉.
구우우우.
부엉이 얼굴에 곰의 몸체를 가진 중형 몬스터 아울베어가 신음성과 함께 쓰러져 내렸다.
쿠웅, 쿵.
그리고 동시에 주변에 있던 다른 아울베어 몇 개체가 마찬가지로 쓰러졌다.
“후으읍.”
일우가 호흡을 가다듬자, 주변에 흩어져 있던 그의 분신 9개체가 다시 몸으로 빨려 들어왔다.
“휘유, 점점 괴물이 되어 가는구나, 부길마.”
건틀렛으로 아울베어의 머리통을 박살 내버린 루이스 블레이크가 어깨를 풀며 다가왔다.
“괴물은 무슨. 아직 멀었지.”
일우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블레이크가 그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작게 말했다.
“아직도 신경 쓰여?”
“…….”
“하긴. 그런 얘기를 들으면 누구라도 당황할 만하지. 미스 서현은 며칠 동안 접속도 하지 않았잖아.”
“후우. 그러는 너는 괜찮아?”
“음? 뭐, 나는 딱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길마의 사정이 딱하긴 해도 관점에 따라선 잘된 일일 수도 있고 말이지. 린다를 봐, 오히려 좋아했잖아?”
문득 그때 린다의 모습을 떠올린 일우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나도 딱히 신경 쓰이는 건 아니야. 그저 좀 더 노력해야겠다 생각할 뿐이지.”
‘그에게 조금이라도 빚을 갚으려면 말이지.’
한때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고아 출신으로 차별당하던 자신의 인생은 더 오를 길이 없을 거라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바로 라울을 만나고 퍼스트 길드에 가입하게 되면서부터.
커넥트 최고의 플레이어 길드, 퍼플 길드의 부마스터.
퍼스트 플레이어 협회의 회장.
㈜퍼스트 매니지먼트의 부사장까지.
이제 대한민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그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접속을 끊고 나가면 평생 구경도 해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최고급 오피스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장에는 도무지 이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를 정도의 액수가 들어 있었고, 그 숫자는 실시간으로 뛰어오르고 있었다.
비서가 전해주는 미팅 일정에는 텔레비전에서나 볼 법한 유명 인사들과 정, 재계 거물들이 즐비하게 잡혀 있었다.
자신에게 큰 권한이 없음에도, 어떻게든 회장과 다리를 놓아달라고 하는 이들이 줄지어 대기 중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라울 회장님 덕분이었다.
그랬는데….
‘라울 회장님이 배도현이었다고?’
한 달 전.
왕국들의 내전이 끝나고 새로운 시나리오가 시작되려던 때.
퍼플 길드의 간부들이 전원 소집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라울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밝혔다.
자신이 배도현이고, 배도현이 바로 라울 자신이라고.
당연히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게임 속의 대영주와 지구의 인물이 동일인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담담하게 말하는 라울의 이야기에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커넥트의 테스트 파일럿이었다고?’
라울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대한민국 고아 출신의 배도현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도중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하지만 양부모는 좋지 않은 이들이었고, 오래지 않아 파양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방법조차 없던 그는 입대를 결심했고, 잠시의 군 생활 이후 용병 기업에 입사, 특수부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도중 우연히 ㈜커넥트의 회장인 알렉스 송과 만나게 되었고, 그의 전담 경호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경호하던 도중 테러를 당해 회복 불능의 부상을 입었고, 회장의 제안에 따라 캡슐의 테스트 파일럿이 된다.
‘그리고 눈을 떴더니 게임 속 캐릭터인 라울의 몸 속이었다고?’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현실에 있는 진짜 서류들(라벨이 위조했음)과 ㈜커넥트 진짜 본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캡슐 속 배도현의 사진(라벨이 위조했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커넥트 회장 알렉스 송 본인이 라울의 이야기가 진실임을 직접 보증했으니(라울과 알렉스 송 회장 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음).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여태까지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이해되었다.
유독 플레이어들에게 편의를 제공해왔던 퍼스트 길드와 라울.
그저 이방인이라고만 생각하는 다른 귀족들과 다르게, 플레이어들과 커넥트 시스템 자체를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라울과 퍼스트 길드의 인원들.
현실 세계에 ㈜퍼스트 컴퍼니까지 설립할 만큼 지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것.
그리고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격이 다른 강함을 보여주던 배도현의 모습까지.
솔직히 사실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에게는 은인이고, 이미 그와 많은 것들이 엮여 있으니까.’
다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배도현이 라울 드 퍼스트 백작이라니.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게 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는 시간만이 해결해 줄 문제일 터였다.
아마 길드원들의 생각도 일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충격적이었지만, 결국 달라질 건 없다는 것.
어찌 보면 그만큼 라울이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 밝혀져도 별 상관없어서일지도.’
어쨌든 그들은 라울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결의했고, 최대한 그를 돕기로 했다.
‘게임 엔딩을 본다면 현실 세계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니까.’
며칠간 두문불출하던 한서현이 독기를 머금고 렙업에 몰두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일우 자신도 배도현, 아니 라울에게 최대한 협조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자, 얼른 마무리하자. 아직 우리가 맡은 구역이 남아 있잖아.”
“워워, 진정해. 마나라도 좀 회복하고 가자고. 우리가 진척이 제일 빠르다니까?”
블레이크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그들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공지 사항]용감한 플레이어분들의 활약에 힘입어 금역 몬스터들의 침공이 저지되었습니다.
침공으로 인해 빼앗긴 영역을 되찾고 복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시나리오 [금역 개방-침공]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개척 정신이 뛰어난 어떤 플레이어에 의해 금역 내부의 숨겨진 개척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조건을 충족하여 새로운 시나리오가 오픈됩니다.
-시나리오 [금역 개방-개척]이 시작됩니다.
김일우와 블레이크의 시선이 마주쳤다.
“드디어.”
“시작이군.”
그리고 길드 통신창이 번쩍거리며 채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돌아가자. 긴급 소집이야.”
“다들 바빠지겠군.”
둘이 몸을 돌려 금역 초입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이좋게 몬스터와 전투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플레이어 간, 길드 간의 세력다툼이 시작될 것이다.
물론 퍼플 길드에게 덤벼들 자가 있을 때의 얘기긴 했지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