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es of the black clothed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13
13. 독보행(獨步行).
1.
겨울바람은 모질게도 불었다. 피풍의를 여며도 그 속을 파고든 바람은 속살을 아리게 했다. 북서변경의 이 칼바람은 귀신오 이후 처음이었다.
마치 칼로 저미는 것 같았다. 그 바람 속을 헤치며 현산은 청해(靑海)로 넘어갔다. 험준한 사천의 경계를 넘어 지친 말을 독려하며 이동했다.
당분간은 변경으로 가야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그 길을 정했다.
한 달이 넘게 걸린 여정은 고되고 힘들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사막을 횡단해 당도한 곳은 청해 땅의 수부도시인 서녕(西寧), 하지만 그 안으로 찾아 들지 않고 언저리에 멈췄다.
일월산(日月山).
청해호를 바라보는, 일월이란 이름이 붙은 산의 중턱에 앉아 현산은 호수를 조망하며 휴식을 취했다.
어느새 겨울은 물러가는 계절이 되어 기후는 더 할 수 없이 안온했다.
‘날이 따듯해져서 이젠 아무데서나 자도 되겠군.’
그동안은 눈과 바람을 피해 잠자리를 찾아야 했다. 여간 고생스럽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비와 이슬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괜찮을 날씨다.
‘잠자리는 그렇지만 당장 먹을 게 없구나.’
이젠 돈도 떨어지고 길양식도 떨어졌다.
당장 먹을 것이야 짐승을 잡아도 되겠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산과 들에서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 등의 구별을 소병에게 배웠고 사부 정두헌에게서도 배웠지만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현산 자신에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흑설무의 완성이다.
그것을 위해선 끊임없는 수련이 필요하다.
동시에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부딪쳐 경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계속된 명상을 통해 자신을 닦아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입산수련과 같은 방법은 적절치 않다.
세상에서, 사람들 속에서 보고 배워야 한다.
천하의 온갖 무예들을 보고 부딪치고 깨달아야 한다.
눈으로 보는 것과 몸으로 보는 것의 병행, 그것이 바로 수련이다.
‘그러자면 우선은 일거리를 찾아야겠구나.’
많은 것을 보고 배우자면 세상을 다녀야 한다.
필요불가결하게 돈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것들을 해결할 만큼은 있어야 한다.
‘제천무림맹 같은 곳에 다시 갈수는 없고.’
생각에 골몰하던 현산은 문득 기척을 느꼈다.
‘응?’
그놈이다, 일월산이라는 이 산에 오르던 때부터 뒤쫓아 오던 놈, 하지만 이내 사라졌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났다.
‘저놈은 뭐지?’
현산은 상대의 윤곽을 수풀 뒤로 보았다.
놈은 철저히 숨었다고 할 테지만 현산은 놈이 숨은 장소를 알고 있다.
놈이 내뿜는 산과 이질적인 기류가 전신을 통해 감지되었다.
체공호흡의 수련 결과다.
지난 한 달간의 여정동안 매일같이 명상에 들어 체공호흡을 수련했다. 혹독한 환경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감각의 인지가 가일층 진보했다.
‘음?’
현산의 감각 안에 또 다른 기척들이 감지됐다.
반경 십장(30미터) 안에서라면 주변과 다를 것이 없는 동물적 감각이다. 그 안에 숨어있는 놈 말고 다른 자들 삼십 여명의 기척이 감지된다.
‘이놈들, 산적?’
그렇게 생각한 현산은 어이가 없었다.
한눈에 봐도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자신과 같은 자를 털기 위해, 한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저 인원이 나섰단 말인가?
이유는 곧 밝혀졌다.
말발굽소리와 마차바퀴소리 등이 산 아래로부터 들려왔다.
‘이거구나.’
천천히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현산은 언덕길을 올라오는 한 무리의 행렬을 봤다.
상단이다.
중원과 변경을 오가며 교역하는 자들이 분명하다.
이지방의 이방향이라면 서쪽, 서역이거나 그에 근접한 곳이다.
그러나 교역은 금지되어 있다. 그러니 밀무역이 분명하지만,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실정이다.
자세히 보니 상단무리의 숫자가 오십을 넘는다.
‘저들을 털려는가?’
현산이 미간을 좁히고 있는 사이 상단의 행렬은 지척에 이르렀다.
오르막을 오르는 말들은 힘이 드는지 연신 푸르릉거렸다.
그 때문인지 행수인듯한 자가 휴식을 명했다.
“잠시 쉰다!”
현산이 휴식하던 산중턱, 일월산의 완만한 구릉으로 산을 넘어가게 되어 있는 길의 중간에는 평평한 곳이 있었다. 상단의 행렬이 다 차지하고도 공간은 여유가 남았다. 그 자리에 상단은 휴식할 태세로 들어찼다.
“휴, 힘들군.”
한숨을 돌린 모습의 행수는 현산을 아까부터 보고 있었지만 말을 걸진 않았다. 외진 변방의 산길에서 만난 자, 칼을 지닌 강호인, 수상쩍다.
‘저 자는 뭐지?’
혹시 산적무리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지만, 이 산엔 산적이 없다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고 상단의 무력에도 자신이 있기에 개의할 것은 없다.
‘흥, 산적이라면 요절을 내면 그만.’
행수의 생각이 그러하게 돌아가는 동안 현산은 상단 행렬을 응시하다가 대강 짐작하고 시선을 거뒀다.
‘호신에 자신이 있는 자들.’
확실히 저들에게도 준비는 되어 있다.
반 이상은 무공을 익힌 자들이 분명하다. 제각기 병기를 지니고 있음은 물론이고, 눈빛이 표한하고 강한 것이 험한 일에 이골이 난 자들이다.
‘이런 일을 하자면 저런 대비쯤은 하겠지.’
나무에 묶어뒀던 고삐를 푼 현산은 말을 어루만졌다.
“자, 이제 가자.”
푸르릉 내쉬는 숨으로 대답하는 말 등에 현산이 올라타려고 할 때였다.
“모두들 그 자리 꼼짝 마라!”
격한 호통을 지르며 그들이 뛰어나왔다.
숨어있던 자들, 역시 산적이었다.
흉포한 맹호들처럼 흉흉한 기세로 몰려나와 상단의 전면을 에워쌌다. 포위까지 할 숫자는 안 되고 산길의 지형도 아닌 바, 기세로 충분한 것이다.
“쯧.”
상단행수의 혀 차는 소리를 현산은 분명히 들었다.
돌아보니 얼굴표정이 분명히 보인다.
마른 얼굴의 수염이 실룩이는 것이, 하찮고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다.
회의경장 뒤로 착용한 대도를 천천히 돌려 잡는다.
“본 어르신들은 일월산의 산신들이시다!”
처음 호통 치며 모습을 보인 산적놈이 다시 소리쳤다. 행수의 표정과 상단 인원들의 동요 없는 기색은 보지도 못하는지, 제 기운에 취해 소리친다.
“피를 보고 싶지 않다! 가진 것을 다 내어놓고 산을 내려가라!”
행수는 회의경장을 가볍게 털며 거듭 혀를 찼고 산적놈은 거듭 소리쳤다.
“그리하면 목숨만은 보전할 것이다! 이 자비를 거역하는 놈은 모가지를 잘릴 것이다!”
산적놈은 감산도를 거칠게 후렸다. 그 칼바람이 사뭇 강하게 퍼졌다.
상단 행수의 눈빛은 조금 달라졌고 상단무사들의 동요 없던 눈빛도 날카롭게 변했다. 상대가 허접스러운 산적무리가 아니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일월산의 산신들을 뵙게 되어 인사드리오.”
행수가 회의경장 소매를 떨치고 나와 포권 한다. 그 손에 대도의 긴 자루가 거꾸로 잡혀 있다. 그걸 보는 산적 놈들의 눈이 살기로 험악해진다. 그러나 행수는 하등 개의치 않는 얼굴로 태연하게 제 할 말을 한다.
“본인 등은 산서 태원에 자리한 대운표국의 사람들로서 예서 멀지 않은 서령에 지점을 두고 장사를 하는 자들이외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것이란 생각은 하였으나 오늘이 되었구려.”
삼십여명 산적들을 대신해 소리치던 산적놈의 칼자국 난 얼굴이 실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행수는 대도를 거꾸로 잡고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본인은 참귀도(斬鬼刀) 전륭(全隆)이라 하오이다. 산신들의 성명은 어찌 되시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을 하고 술 한 잔 기울입시다.”
이제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행수의 언행, 산적들의 등장에 두려움은커녕 유희의 조롱을 보이고 있음이다. 산적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이런 찢어 죽일 놈들이!”
선도하던 산적놈이 분기탱천하며 감산도를 세웠다.
거의 동시에 산적들도 창칼을 겨누고 살기를 폭발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현산이 움직였다.
“이랴.”
겨우 피곤을 달랜 말의 고삐를 쥐고 현산은 걸음을 냈다.
방향은 당연히 산적들이 막아선 길, 태연하게 무리를 뚫고 가려는 움직임이다.
당연히 산적들은 눈을 치떴고, 그 모습을 본 상단행수는 미간을 좁혔다.
“두 쪽이 되기 싫으면 그 자리에 서라!”
산적놈은 감산도의 험악한 날빛을 번득이며 거듭 소리쳤다.
“가소로운 놈! 어디서 도발이냐! 네놈이 상단의 척후로 움직이는 것을 진즉부터 지켜봤다! 네놈이든 상단의 그 어느 놈이든 일월산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비를 걷어찬 것은 네놈들이니 달게 죽음을 받아라!”
감산도를 당장 내려칠 것 같은 산적놈에게 현산은 육중한 시선을 던졌다. 그 눈길에 놈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다 익 하는 찰나 육중한 음성을 냈다.
“나는 상단사람이 아니다.”
산적놈은 미간을 좁혔고 현산은 미간을 던졌다.
“비켜라.”
담담하지만 단호한 힘이 실린 현산의 말, 그것을 받은 당사자인 산적놈은 칼자국 난 얼굴을 또 움찔했다. 그러나 역시 찰나, 살기를 터트렸다.
“죽여라!”
응축된 살기를 터트리고 갈라오는 감산도, 크고 넓은 도신의 그것을 차갑게 응시하며 현산은 한사람을 생각했다.
대감도를 쓰던 양대목이다.
큰 체구에 굵은 눈썹을 휘며 웃던 그의 얼굴이, 다른 이들이 떠오른다.
감산도의 날이 어깨를 갈라 내리는 순간 현산은 반좌보를 밟아 옆으로 이동했다. 귀신오의 형님들에게서 배운, 정동에게서 소림오권을 배울 때 피나게 익힌, 사부 정두헌에게서 가르침 받은 피와 땀의 보법이다.
어, 하는 소리를 낼 정도로 놀란 산적놈의 얼굴엔 바로 당황의 현실이 들어찼다.
자신이 죽이려던 상대가, 현산이 귀신처럼 칼을 피한 결과,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오는 두려움이다.
현산은 손을 냈다.
수없이 반복해 연마한 철사장, 그것을 산적놈의 옆구리에 박았다.
하지만 살기 없이, 충격 없이, 놈의 균형만 허물어뜨렸다.
“컥.”
벼락처럼 옆구리를 가격당한 산적놈은 옆으로 주저앉았다.
숨이 막힌 얼굴은 창백했지만 상대가 자신에게 살수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눈을 치떴다. 그 상대가 자신을 주저앉힌 강자란 것을 인식해서다.
“이, 이놈을!”
동료 산적놈들이 움직이고 그들에게 주저앉은 놈이 구원을 청하는 상황.
그것을 가르며 현산의 칼이 산적놈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묵빛의 해동도, 그 무게를 느낀 산적놈은 경직했고 다른 산적놈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붙잡겠다면 이 칼이 길을 열 것이다.”
산적들은 주춤주춤거렸고 상단행수와 무사들은 눈동자에 강한 힘을 주며 상황을 주시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현산의 돌출은 위험해 보인다.
“나는 아무 상관없다.”
무심하고 담담하게 장내로 그 말을 던진 현산은 상단 행수를 응시하고 뒷말을 냈다.
“여기서 누가 무엇을 어찌하든 나완 상관없다. 내 갈 길을 갈 뿐이다.”
그러니 가던 길을 가겠다는, 그 길을 막는 다면 피를 보게 될 것이라는, 그건 산적이든 상단이든 마찬가지라는,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는 말.
해동도를 거볍게 거둔 현산은 행수를 응시하던 눈을 주저앉은 산적놈에게 꽂았다가, 다시 일월산의 숲을 향해 돌렸다.
그렇게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뚫어지게 숲만을 응시했다.
그러다 몸을 돌려 말고삐를 잡았다.
“가자.”
무심한 시선과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끌고 걸음을 내는 현산.
그 모습을 산적들은 주춤거리며 보고만 있었다.
뭔지 모를 위압갑과 기세에 눌려서, 현산의 존재감에 압도당해서다.
그리고 그걸 상단도 놀라며 지켜봤다.
현산이 걸음을 다시 멈춘 것은 그때였다.
앞을 누군가 가로막고 나타나서다.
“호랑이 간을 삶아먹은 놈이로구나.”
스산하게 진득한 살기를 담은 음성의 주인, 현산의 앞길을 막고 선 자는 민대머리의 거한이다.
호피가죽배자를 걸친 체구가 칠척에 이르는 자다.
화광을 내는 것 같은 호목의 눈알은 마주보기 힘들게 흉포함이 흐른다.
“무슨 재간을 가져 간담이 그리 큰지는 이제 배를 갈라보면 알겠지만······”
잔인무도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은 거한은 현산을 보며 웃었다.
“크흐흐흐흐.”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려낸 민대머리 거한은 커다란 낭아봉을 세우며 소리쳤다.
“누구도 일월산을 벗어날 수 없다!”
외침과 더불어 낭아봉이 현산의 머리를 노리고 내리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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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3. 독보행(獨步行)(2)
2.
도끼를 내려찍는 듯한 상대의 일격, 낭아봉의 흉악한 수직가름을 현산은 흑천으로 받아쳐 올렸다.
먹빛 칼과 낭아봉이 충돌하며 불꽃을 만들었다.
충격이 도신을 타고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 철봉이란 것을 알았다.
‘신력!’
민대머리 칠척거한은 체구가 말해주듯 엄청난 힘을 가졌다.
강철로 만든 낭아봉을 지푸라기처럼 휘두르는 자다.
단순히 힘만 센 것이 아니라 무공을 익혔다.
연이은 태풍처럼 들어오는 이 공격은 관부무예가 문명하다.
‘이놈들?’
칠척거한의 무지막지한 낭아봉 공격을 정신없이 받아치며 현산은 눈썹을 뒤틀었다.
이들의 정체가 단순한 산적이 아니란 것을 깨달아서다.
관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라면 관인, 이놈의 출신은 군부인 것이 확실하다.
‘변경에선 탈영한 군사들이 판을 친다더니······!’
이놈은, 이 산적놈들은 그런 놈들이다.
가혹한 환경과 처우를 견디지 못한 놈들이 군영을 뛰쳐나와 이렇게 산적이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산적이나 군이나 백성들에겐 다를 바 없는 존재, 본모습의 하나인지 모른다.
‘저놈!’
또 다른 인물의 출현을 현산은 칠척 거한의 공격 뒤로 보았다.
비호처럼 날렵한 움직임으로 상단 행수를 공격하는 사내다.
보통체구에 한 자루 장도를 지녔다. 그것으로 그려내는 칼그림자에 상단 행수가 밀리고 있다.
‘저놈이 진정한 수괴구나!’
확실하다, 사내가 출현하여 상단행수를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산적들이 공격했다. 현산 자신에게서 받은 위축과 경직을 모두 털어버리고 잊은 용맹함이다. 상단의 이십여 무사들과 어우러져 피튀기게 싸우고 있다.
‘군 출신의 산적놈들!’
호보촌을 생각하며 현산은 분노를 악물었다.
뒷걸음질하고 옆으로 피하며 그날의 그 기억을 기억했다.
매란이의 처참한 죽음, 호보촌 사람들의 가혹한 최후를 떠올렸다.
그렇게 주춤한 순간 낭아봉을 내리쳐 왔다.
처음 일격처럼 정수리로 찍어 내려오는 낭아봉, 현산은 잡았다.
격한 소리와 함께 낭아봉이 멈췄다.
그걸 양손으로 쥐고 후려친 칠척거한은 눈을 부릅떴다.
상대가, 현산이 왼손 하나만을 들어 공격을 막았기 때문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이렇게 막을 수 없다.
‘전력을 다한 내 공격을!’
혹시나 하던 불안, 처음 자신의 일격을 먹빛칼로 받아친 상대에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드러난 순간이다.
첫일격의 반발충격은 놀라운 것이었다.
낭아봉을 통해 들어온 그 정도 충격이면 상대는 주저앉았어야 한다.
그렇다, 확실히 저 먹빛 칼은 부러지거나 휘어졌어야 하고 상대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어야 하는 거다.
그런데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상대는 저 칼로 공격을 다 받아내며 피했다. 그리고 손으로 이젠 잡았다.
맨손이다. 강침들이 돌출한 낭아봉을 저 맨손으로 잡았다.
전력을 다한 힘을 한손으로 받아내고 멈추게 한 것도 놀랍지만, 강침들을 무시한 결과가 더 놀랍다.
저손은 구멍 나거나 으스러지지 않고 굳건히 잡고 있다.
‘수공! 고수!’
결과를 받아들이며 현실을 인지한 눈빛이 칠척거한의 눈에 확 하고 번질 때, 현산은 시퍼런 맹수의 안광을 뿜어내며 벼락처럼 움직였다. 움켜잡은 낭아봉을 잡아당기며 온몸으로 튀어나가 어깨를 거한에게 박았다.
폭죽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한은 튕겨나갔다.
산길을 구르는 그의 신형을 현산은 쫓아갔다.
거한이 굴러 일어나 허리에서 단도를 뽑는 순간에 그 면전에 들이쳤다.
경악하는 거한의 복부에 철사장을 때려 넣었다.
“컥!”
칠척거한은 두 번째 뒤로 몸을 날리며 굴렀다.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뜬 전륭은 상대의 장도가 일으키는 변화를 피해며 깨달았다.
‘군부무예!’
상대의 무공은 그렇다.
칠척거한과 더불어 산적무리를 이끄는 수괴가 분명한 자,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벼락처럼 튀어나와 공격하는 사내, 이 자의 장도가 풀어내는 무공은 관부십팔반 무예가 분명하다.
‘강하구나!’
위험한 접전이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싸움이다.
일월산에 산적무리가 없다는 방심 따위가 아니다.
어떠한 놈들이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만이 부른 결과다.
지금 싸우는 적들은 그저 그런 산적이 아닌 것이다.
‘잇!’
상박을 스쳐가는 첨예한 느낌에 전륭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 보통체구에 평범한 얼굴이지만 안광이 무서운 사내, 그 얼굴의 미소를 보았다.
‘이놈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참귀도라는 별호를 얻은 자신이, 험난한 서장교역로를 헤치며 살아온 자신이 산적따위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노옴!”
격노를 기합으로 터트리며 전륭은 대도를 커다랗게 휘둘렀다.
대도는 무서운 힘을 담고 바람을 일으키며 산적수괴의 장도를 강타했다.
충격음과 불꽃이 터지며 산적 수괴가 물러났다.
그 찰나를 전룡은 놓치지 않았다.
“갈라져라!”
의지를 뱉으며 바람처럼 나아간 전룡은 장도를 내리쳤다.
그 가름을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 산적수괴, 그의 얼굴에 두 번째 미소가 걸렸다.
‘이놈!’
불길한 예감을 삼킨 전륭은 나아가며 내리치던 움직임을 옆으로 휘돌렸다.
그 순간에 보고 겪었다.
산적수괴가 귀신처럼 반걸음을 피하며 가름을 피하는 것과, 그의 장도가 물결을 거스르는 잉어처럼 나오는 것을.
“큭!”
화끈한 충격을 받은 전륭은 휘청거리며 물러나다 끝내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일어서는데 어깨에서 피가 튄다.
통증은 나중이다. 갈라진 어깨를 보는 순간 전신을 엄습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이놈들······!’
산적들이 상단 무사들을 쓰러뜨리고 있다. 짐꾼 서른 명을 제외한 스무 명의 무사들, 맞서 싸우고 있지만 숫자에서 밀리고 산적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아 밀리고 있다. 저들과 최후를 맞게 될지 모를 두려움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차가운 미소로 말하며 다가오는 산적수괴를 전룡은 흉악한 얼굴로 노려봤다. 고통과 분노와 수치와 두려움이 뒤섞인, 충혈 된 눈으로다.
“수레와 마차를 놓고 물러가면 살 것이다.”
산적수괴의 차가운 미소 밴 그 말이 나온 순간이다.
격한 외마디 신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그 원인을 향해 전륭과 산적수괴는 고개를 돌렸다.
‘저!’
새로운 놀람으로 전륭은 눈을 치떴다.
민대머리의 칠척거한, 그가 뒹굴고 있다.
그와 싸우던 상대, 만만치 않지만 거한이 때려죽일 것이라 의심치 않았던 사내, 그가 묵빛 칼을 내려뜨린 모습으로 당당히 서 있다.
전륭이 눈썹을 떠는 그 순간 산적수괴가 비호처럼 움직였다.
토혈하는 칠척거한에게서 몸을 돌리며 현산은 해동도 흑천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자신을 향해 성난 범처럼 달려오는 자, 진정한 산적수괴의 장도를 시퍼런 눈으로 응시하며 마주 달려갔다.
상대의 칼을 후려쳤다.
파앙, 하는 칼과 칼의 충돌음이 일월산을 울리기 전에 격렬한 불꽃이 먼저 튀었다.
그 빛과 소리가 갈라놓듯 두 사람은 갈라섰다.
각자의 칼을 잡고 서서 무서운 시선을 서로에게 던지며, 무서운 살기를 발산했다.
‘강하다, 거한보다 배는 강해, 하지만 이길 수 있다. 벨 수 있어.’
시퍼런 안광으로 투지와 전의를 풀어낸 현산은 다시 걸음을 냈다.
그 순간 산적수괴가 바람처럼 다가왔다.
형상이 흐릿하게까지 보이는 움직임, 현묘한 보법이다.
그 움직임에서 이어진 장도의 날이 튀어나왔다.
‘목!’
눈에 보이는 것 이전에 현산은 감각으로 알았다.
외가일로의 완성을 위해 모질게도 수련한 육신이, 가릉강의 험악한 물길 속에서 체득한 체공호흡이, 전신모공이 열리며 장도의 날을 향해 곤두섰다.
흑천도 곤두섰다.
현산의 손에서 먹빛 해동도가 벼락처럼 솟아올랐다.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산적수괴의 장도, 그 날을 스치며 벼락이 되어 나갔다.
도신들이 스치는 찰나의 불꽃, 그 뒤로 피가 튀었다.
스친 칼들은 엇갈려 떨어졌다.
‘저럴 수가!’
전륭은 눈동자를 흔들었다.
갈라진 어깨를 부여잡고, 고통과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경직했다.
찰나에 이뤄진 승부, 그 결과를 보는 놀람과 충격이다.
산적수괴와 정체모를 사내의 칼은 동시에 서로를 그었다.
그렇다, 분명히 그랬다.
그랬는데 피를 터트린 것은 산적수괴다.
‘분명히 갈랐어!’
똑똑히 그 순간을 봤다.
산적수괴의 장도는 분명히 정체모를 젊은 사내의 목을 그었다.
인후를 노렸지만 그 결과를 냈다.
그랬는데 살이 갈라지고 피가 터지긴 커녕 젊은 사내는 멀쩡하다.
피 흘리는 건 산적수괴다.
‘뒤늦게 낸 저자의 먹빛 칼이······!’
정체모를 젊은 사내의 신비한 먹빛 칼이 산적수괴의 어깨를 갈랐다.
놈이 전륭 자신의 어깨를 갈라놓은 것처럼 됐다.
놈의 장도가 스치며 가른 젊은 사내의 목엔 붉은 자국만 보인다.
저건 뭔가? 철포삼을 익힌 건가?
“크으······!”
갈라진 어깨를 쥐고 휘청거리며 일어서는 자, 산적수괴를 응시하고 서서 현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현산을 노려보며 이를 악문 산적수괴는 주변을 돌아봤다.
싸움을 멈추고 자신을 보는 산적수하들과 눈을 맞췄다.
“빌어먹을······!”
가라앉은 욕설을 흘려낸 산적수괴는 아직도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민대머리 칠척거한을 응시한 후, 장도를 고쳐 잡고 현산을 무섭게 봤다.
“결판을 내자!”
결기에 찬 산적수괴의 전의를 마주하고 선 현산은 무겁게 시퍼렇게 번득이던 눈을 가라앉혔다. 그렇게 들끓던 살기와 투기를 응축하고 물었다.
“민가를 털어먹는 것이 쉽지 않더냐?”
현산의 느닷없는 물음에 미간을 찌푸리듯 좁힌 산적수괴는 입가를 비틀었다.
“무슨 개소리냐? 우리가 똥오줌도 구별 못하는 놈들 같으냐?”
갈라진 어깨의 고통으로 인상을 쓰며 산적수괴는 말했다.
“뼈골을 발라먹는 조세에 노역에, 늘 피를 빨리는 민가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가? 한밑천 잡으려면 이런 상단 놈들을 노려야지! 그래, 우리는 계속 이놈들을 지켜봐 왔었다! 돈 있는 놈들이야! 먹을 게 아주 많지!”
호통치듯 말하는 산적수괴를 보는 현산의 눈은 깊게 가라앉았다. 이제 마지막 결판을 내려는 산적수괴와 주변으로 물러선 산적들을 다시 봤다.
‘그렇군.’
일말의 예감대로다. 이들은 군영을 이탈하여 산적이 된 자들이다.
그러나 민가를 습격하는 짓은 안했다.
취할게 없어서기도 하지만, 수탈당하고 사는 민가의 삶을 아는 자들인 거다.
산적수괴의 말엔 그 분노가 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산적들의 공격엔 흉포한 살기가 없었다.
숫적인 우세로 상단무사들을 공격했지만 치명적인 살수를 펼치진 않았다. 군부에서 훈련 받은 자들이니 집단전법을 알 터인데도 위협공세만 한 거다.
산적수괴와 민대머리거한의 공격은 이 상황을 즉시 종결하려는 의도였다.
상대편의 머리를 쳐서 위험을 제거하고, 피를 적게 보며 빠르게 결과를 내는 방법이다. 그렇게 될 것이었는데 현산 자신이 장애가 된 것이다.
“그만하겠다.”
담담하고 단호한 한마디 말을 뱉으며 현산은 해동도 흑천을 도갑에 갈무리했다.
산적수괴는 눈을 치뜨며 혼란과 당혹을 드러냈고 지켜보던 자들 모두가 그랬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산은 말을 찾아 다시 고삐를 쥐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내는 떠나가는 현산, 그 등을 보고 산적수괴가 소리쳤다.
“뭐하자는 수작이냐!”
현산은 대답 없이, 반응 없이 산길을 헤쳐 사라졌다.
현산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산적수괴와 상단 행수 전륭은 서로를 봤다. 똑같이 갈라진 어깨를 부여잡고서, 일월산을 치는 바람 속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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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3. 독보행(獨步行)(3)
3.
대체로 그 지방의 이름을 사용하는 곳이라면 대표성을 지닌 곳이게 마련인데, 서령객잔이란 이름치고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객잔이다. 오래된 곳이란 것은 한눈에 봐도 알 정도인데, 그래선지 지나치게 낡은 곳이다.
‘그래서 싼 값이니 감수해야지.’
객방에 들며 현산은 침상에 엉덩이를 붙였다.
새삼스럽게 풍찬노숙해온 날들이 떠올라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
낡고 퇴락한 객잔의 모든 것이 좋기만 하다.
솔직히 야지에서의 노숙과 비교할 수 없음이다.
‘편하고 안온함을 찾는 것은 경계할 일. 음, 그마나 말을 팔수 있었으니 다행이긴 한데, 남은 돈을 다 쓰기 전에 정말로 뭔가 찾아 해야겠어.’
서령객잔, 이 낡은 객잔에 들기 위해 고생한 말을 팔았다.
그동안 야지에서 지친 몸을 잠시나마 달래주기 위해서 이곳에 들었고, 일거리를 찾기 위해서다.
무엇보다 완수해야 할 목표를 향해 나아가자면 그래야 한다.
‘음.’
새삼스러운 왼손의 감각을 느끼며 현산은 손을 응시했다.
산적수괴중의 한명인 민대머리 칠척 거한의 낭아철봉을 잡은 손이다.
그 신력을 받아낸 자극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검상의 흔적이 더 또렷하다.
‘벽송자.’
그의 검을 받아낸 상처자국이 손바닥에 남아 있다.
손만이 아니라 팔과 어깨와 허벅지등에 남아 있다.
양주부의 집에서 그와 싸우던 당시, 그때를 생각하면 오싹한 흥분과 소름이 돋는다.
그의 검은 진정 무서웠다.
‘그동안 수련한 외공을 무시하고 갈라버린 검.’
벽송자의 검은 그랬다.
처음엔 현산 자신의 피부가 갈라지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지만, 그 분노로 풀어낸 검격에는, 화산매화검법의 정화에는 피륙이 갈라졌다.
그것이 진정한 화산 검법이고 고수의 검공인 것이다.
‘그 무엇이든 상관없이 같아야 해.’
이를 악문 현산은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다짐하고 맹세했다.
‘해낸다,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이다!’
천하의 그 어떤 검공에도 갈라지지 않는, 어떠한 무공의 공격도 받아내는 진정한 외가일로를 극의의 달성을 결의하며 현산은 무기들을 쥐었다.
사부 정두헌이 하사한 해동도 흑천, 귀신오의 정동이 사용하던 삼단철봉, 고향을 떠날 때 재범이간 건네준 단도, 그것들을 만지며 눈을 감았다.
점소이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식사가 준비됐습니다요.”
다시 눈을 뜬 현산은 낡은 무복을 고쳐 입고 무기들을 착용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식사를 하러 가는 마당에 병기를 지니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고 남들 눈에도 과하겠지만, 한 몸으로 극의를 좇아가는 수련의 길이다.
계단을 내려가 객잔일층의 반점에 든 현산은 점소이가 식사를 차려놓은 안쪽자리에 앉았다.
화계와 소면이 먹음직스럽게 김을 피우고 있다.
젓가락을 들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군가 온다.
“젊은 무사양반은 어디서 오셨소?”
태연하게 다가와 맞은편 자리에 앉는 자는 노인이다.
구릿빛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다.
다름 아닌 이 객잔의 노주인이다. 손에는 화주병을 들었고 코와 얼굴이 붉다.
한눈에 봐도 술을 달고 사는 모습, 화주병을 내민다.
“한 모금 하시겠소?”
현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고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화주병을 거뒀다. 입에 박고 꿀꺽거리며 술을 넘기더니 엷은 미소로 짐작을 말한다.
“내 한평생을 이 자리에서 객잔을 운영하여 사람을 제법 볼 줄 아오만, 누군가에게 쫓기는 인상은 아니고······ 의복을 보니 먼 길을 온 듯하구랴.”
노인은 미간을 좁히며 현산을 훑어본다.
“음, 식사하면서도 병기를 지닌 걸 보아하니 자신에 대한 단속이 엄한 사람이구려. 좋은 습관이오, 암, 무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거요.”
다시 화주병을 기울여 마신 객잔주인노인은 생뚱맞게 계속 지껄인다.
“하아, 영웅은 사라지고 썩을 놈들만 넘쳐나는 세상이 돼 버렸소이다.”
객잔의 점소이와 아들내외로 보이는 이들이 염려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지만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평시에도 말하던, 품어온 것들을 풀어냈다.
“태조 홍무제께서 대명을 건국하신지 어언 이백여년이 흘러갔지만 이 땅엔 그때의 의기와 협의지심이 남아 있다 이 말이오. 중원강토를 원나라로부터 되찾은 영웅들의 피와 땀, 그 숭고한 가치가 이 땅에 있는 거요.”
현산은 노인을 보지 않고 식사에만 열중했고 노인은 계속 떠들었다.
“홍무제께서 집경로(금릉, 지금의 남경)를 함락하고 응천성에서 황위에 오르시던 날 이 땅엔 광영이 다시 찾아온 것이오. 그 숭고하고 거룩함이 중원강역을 보위하였던 바,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 기운이 다하여······”
노인은 찌푸린 얼굴로 화주병을 다시 입에 박았다. 현실을 생각하면 할수록 참담하고 화가 난다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때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어서 오십시오.”
객잔 밖으로 나간 점소이와 환대소리와 부산한 소리들을 현산을 식사하면서 들었다. 무리가 손님으로 든 상황, 어떠한 이들인지 짐작하고 있다.
“우선 식사부터 준비해다오.”
점소이에게 말하며 객잔 일층 반점 안으로 들어서는 자는 그다.
일월산에서 조우한 적이 있는 상단의 행수, 참귀도 전룡이라고 말한 인물이다.
“후아, 이제 좀 편하게 쉬겠구나.”
상단 무사들과 자리에 앉던 그가 표정을 바꾸었다.
식사하는 현산을 봐서다.
꿈틀하며 눈썹과 미간을 곤두세운 그가 긴장한 눈길을 계속 던진다.
“홍무제께서 응천성에서 황위에 오르시고 천하일통을 위해 싸우시던 중에······”
객잔주인 노인은 하던 말을 계속 지껄여 냈고 참귀도 전룡은 일어섰다.
“육십만 대군을 끌고 홍도(강서성 남창)을 장악하려던 진우량과 파양호에서 삼십육일간이나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셨지. 그때에 진우량은 전사하고 황제께서는 무창까지 승승장구하며 천하일통의 위업을 중원강토에······”
노인의 말을 자르며 참귀도 전룡이 현산에게 포권인사했다.
“은인을 다시 뵙게 되어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말이 잘린 노인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고 전륭은 정중한 목소리를 이어냈다.
“은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자칫 본 상단은 크나큰 피해를 입을 뻔했소이다. 경황 중에 인사도 못 드리어 안타깝던 차, 참으로 반갑고 감사하오.”
현산은 반응을 내지 않았고 노인의 표정이 더 뜨악해지는 가운데 전륭은 자리에 앉았다. 노인이 노려보거나 말거나 현산을 보며 다시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오. 대운표국 서령지부의 참귀도 전륭이오. 실례가 안 된다면 은인협사의 성명을 알고 싶소이다. 어느 고장의 뉘시오?”
현산이 아닌 노인이 전륭을 보는 가운데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대운표국 분이시구랴?”
침묵을 깬 사람, 노인을 전륭이 뜨악하게 돌아보는 데 노인은 계속 지껄인다.
“대운표국주의 전설과도 같은 영웅담을 알고 있소이다. 암, 대단한 인물이지. 일개 표사로 시작하여 중원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표행으로 오늘날의 대운표국을 만든 사내, 이젠 거대상단으로 세외를 노리는 거인.”
찬탄을 감추지 못하는 노인의 말에 전륭은 뜨악하던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런데 노인이 쉼 없이 주절거리는 통에 다시 인상을 쓰게 됐다.
“대운표국주와 같은 영웅들이 있기에 중원의 기상이 그나마 유지되는 것이오,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사내로 태어나 웅지를 펴지 못한다면······”
전륭은 이제 노인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았다. 그래서 노인을 무시하고 식사중인 현산에게 집중했다. 현산이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다.
“일월산의 산적놈들은 얌전히 물러갔소이다. 음, 그러기 위해서 전낭 몇 개를 건네주긴 했지만, 앞으로도 충돌이 있을 경우를 예상한 불가피함이외다. 어쨌든 피해가 이만한 정도에서 끝난 것이 정말로 다행한 일이오.”
전륭은 다시 한 번 현산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진실로 감사드리오, 다친 사람은 있으나 죽은 이는 없으니, 모두가 은인협사의 덕분이오. 감사한 마음을 사례하고 싶소만, 실례인지 모르겠소.”
전륭은 현산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폈다.
그런 전륭을 현산이 고개 들어 봤다.
산적수괴의 공격을 받아 갈라진 어깨를 봉합하고 면포로 감은 모습, 피를 흘려 창백한 안색이다. 그런데도 행수로서의 면모가 당당하다.
“내 갈 길을 갔을 뿐이오, 신경쓰지 마시오.”
담담하고 간명하게 그 말을 내고 현산은 다시 식사를 했다.
전륭은 머쓱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속으로 현산에 대해 평가하고 눈을 빛냈다.
‘하기야, 이 자가 우리를 도와주려고 싸운 것은 아니지.’
분명히 그렇다. 산적들이 떠나려는 현산을 붙잡으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그 자리에서 어떠한 일이 어떻게 벌이지든 현산은 상관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산적들을 물리친 것이다.
‘보아하니 적을 두지 못하고 떠도는 자 같은데······ 나이는 젊어서겠지. 저만한 무력이라면······ 이런 자를 곁에 둔다면 효용이 아주 클 것이야.’
계산을 확실하게 끝낸 전륭은 다시 은근한 표정과 목소리로 물었다.
“사해는 동도라 하지 않소이까? 불가에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하물며 산적들의 위험을 물리쳐준 협사를 어찌 모른 체 하겠소? 협사는 그리 말하지만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야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오.”
미소까지 띄우며 전륭은 계속 말했다.
“은덕을 모르면 짐승과 매한가지라, 본 대운표국 서령지부는 협사에게 정식으로 감사를 표하고자 하오. 시간이 허락한다면 본 지부로 동행합시다. 아니, 시간을 내서라도 그리합시다. 협사를 위한 만찬을 준비하겠소.”
현산은 여전히 무표정인데 곁에서 듣던 객잔의 노주인이 툭 말한다.
“애가 달았는데 이름이라도 알려주고 못이기는 척 가서 얻어먹게나.”
전륭이 이번에는 뜨악함을 넘은 표정을 짓는데 노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지껄인다.
“내가 사람 볼 줄 안다고 했지? 자네는 보아하니 정처가 없는 처지 같은 데, 갈 길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머물 곳이 필요한 법일세. 때마침 청하는 자리가 있으니 적당히 뭉개고 들어앉아서 먹고 지내며 길을 찾게나.”
자신의 말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 전륭이 표정을 누그러뜨리는데 노인의 시선이 돌아왔다.
“그런데 일월산에 도적이 있소? 몇이나 되더이까? 호되게 당했소? 아니지, 죽은 자가 없다했고 협사의 도움을 받았다 했으니 그건 아니군. 음, 그렇긴 한데 대운표국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이긴 한가? 그렇소?”
대놓고 그렇냐고 묻는 객잔노주인을 보는 전륭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허, 일월산에 산적이라? 어디서 온 놈들이야?”
노인은 전륭이 표정이 어떻거나 말거나 제 말을 했고, 그래서 전륭의 숨이 뜨거워지는데 객잔의 주인이, 노주인의 아들이 다가와 끼어들었다.
“아이고, 왜 이러세요? 어서 일어서세요.”
제 아버지를 부축해서, 아니 잡아 일으켜서 아들은 얼른 자리를 피했다. 전륭과 현산에게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다.
“하, 저 노인데 정말 입심이 대단하구만.”
감탄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뱉어낸 전륭은 다시 현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식사를 마치고 젓가락을 놓은 현산은 찻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산적들은 군부의 인물들이었소.”
미간을 좁혔다가 풀며 전룡은 바로 현산의 말을 받았다.
“그렇더이다. 군부의 무공을 사용하는 자들이었소. 필시 변경의 모진 여건을 벗어던지고 탈영한 자들일 것이오. 그러한 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요. 때문에 변방의 경비는 약해져만 가고, 하, 참으로 큰일이오.”
일부러 한숨을 더 크게 내며 전륭은 현산의 표정을 살폈다.
산적들의 이야기를 꺼낸 것 자체가, 말을 걸어왔다는 것 자체가 변화의 조짐이다. 그러니 친절한 표정과 말을 계속 섞어 어떻게든 엮어야 할 것이다.
“내 솔직히 오늘 크게 놀랐소이다. 협사와 같이 젊은 무사가 그리 고강한 실력을 지닌 것에, 산적수괴들을 물리치는 걸 보고 진정 탄복했소이다.”
입술에 침을 바르며 전륭은 목소릴 이어냈다.
“민대머리 거한의 낭아철봉을 맨손으로 받아내는 걸 보는 순간에는 오줌을 지릴 뻔했소이다. 협사의 발밑으로 먼지가 이는 걸 보고 힘을 풀어낸다는 것을 알았소만, 참으로 대단하시오. 그 손은 어떻소? 괜찮은 거요?”
걱정 반 찬탄 반의 눈길을 던지는 전륭에게 현산은 다시 물음을 던졌다.
“대운표국 서령지부라 하였는데, 변경교역을 하는 것이오?”
확실하게 현산의 관심을 인지한 전륭은 다시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그러하오. 아다시피 나라에서 금하였다가 풀어주기를 반복하는 상황이라,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작은 개울 줄기 끊듯이 끊고 다시 잇고 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오. 해서 은밀한 행로를 하게 되고 고생을 하게 되오.”
말끝에 전륭은 은근히 되물었다.
“우리 일에 관심이 있소?”
찻잔을 무심히 넘긴 현산은 전륭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일거릴 찾고 있소.”
전륭의 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밝은 빛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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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3. 독보행(獨步行)(4)
4.
대운표국 서령지부는 서령의 주산이라고 할 동북쪽의 오봉산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변방의 바람을 막아주는 오봉산 아래에는 서령시가로부터 확장해 나온 새로운 거리, 그 중심에 위치했다.
근엄한 표정의 지부장은 퇴직한 관리로서 상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서령지부의 실질적인 운영은 참귀도 전륭이 함이다.
오랜 세월 상단을 이끈 그의 경륜으로 서역교역로를 개척해 나감이다.
‘대운표국이 후발 주자라······’
지부마당의 부산함을 보며 현산은 전륭이 지난 밤 한 말을 떠올렸다.
그가 말하길 서쪽으로의 교역로를 개척하기 위해 나선 것이 두해밖에 안됐다는 거다. 상단으로서의 면모와 기틀을 다져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저들의 세상도 복잡하고 치열하기는 매한가지겠지.’
상인들, 상단들의 일과 삶이라는 것을 모른다. 하지만 세상 속의 일이고 사람들, 크게 다를 것이 없을 터다.
모두가 살기위해서 치열하게 발버둥침이다.
그 속에서 쓰러지는 자와 오연하게 앞서 나가는 자가 갈린다.
‘표왕 하웅휘.’
생소한 이름이지만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라 한다.
표국업계나 상단을 차치하고 강호무림에도 그닥 아는 바가 없는 터라 누구의 이름인들 생소하지 않겠는가 마는, 본적 없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 고개만 끄덕였다.
‘중원제일표국에 이어 중원제일 상단을 꿈꾼다······’
월창 밖으로 보이는 지부인원들의 부산함을 말없이 눈에 넣으며 현산은 생각했다. 환영의 술잔을 들며 전륭이 칭송을 쏟아내던 인물, 대운표국주 표왕 하웅휘의 본적 없는 얼굴을 그리며, 그의 목표를 더듬었다.
‘절반을 이루고 나머지 절반을 위해 매진하는······’
일개 표사로 출발해 표왕의 호칭을 얻은 그가 이젠 중원상계를 장악하려 웅지를 펴고 있음이다.
대단한 인물이다.
그가 품은 세상의 방향으로는 현산 자신의 관심이 일홉만큼도 없지만,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손으로 오늘을 일군거야.’
대운표국의 현판을 붙인 상단조직은 중원 각지에 지부를 내고 있다고 한다.
표행으로 기초를 닦은 터라 상단의 일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형국, 기왕의 중원상계에서는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결국 표행이거나 상단의 호위겠지.’
대운표국의 현재 상태에서 그 구분이 모호하지만 어쨌든 그 일이다.
참귀도 전륭은 일월산에서 예상치 못한 산적들의 공격을 받고 현산 자신의 절실함을 가진 거다. 다른 인물이라도 호위무력을 강화할 마음인 거다.
‘그만한 실력을 가진 산적들을 만났으니.’
다시 생각해 봐도, 전륭이 술기운에 말한 대로 일월산의 산적들은 간단치 않았다.
잡배들의 무리가 아니라 군부를 이탈한 자들의 무리로 무력이 고강했다.
나름 실력에 자신 있던 전륭에겐 뼈아픈 패배요 충격인 거다.
‘교역로를 개척하는 마당이니 더욱 절실하겠지.’
그 절실함에 현산 자신이 들었다.
전륭에게도 필요한 일이지만 현산 자신에게도 아주 절실한 것이 일이다.
당장 거처할 곳을 찾았다. 이곳에서 일을 하며 목표를 이뤄나가는 거다.
지금으로선 더할 나위없는 결과다.
‘산적들, 그들은······’
미간을 좁히고 현산은 그들을 다시 떠올렸다.
민대머리 칠척거한과 보통체구에 평범한 얼굴이던, 그러나 접전시의 눈빛은 달궈놓은 칼날 같았던 수괴.
그들은 민가를 털지 않고 상단을 노려 공격한 이유를 분명히 말했다.
‘뼈골을 빨리는······’
산적수괴의 표현 그대로다.
민초들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렇게 살고 있다.
털어도 나올게 없는 그들이 아니라 상단을 노렸다는 산적수괴의 말.
아픈 현실과 산적이지만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마지막 칼을 내지 않고 거뒀다.
‘일을 하기로 했으면 뭐라도 해야겠지.’
월창 밖 상단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던 현산은 처소 밖으로 나갔다.
* * *
“지부대인의 요청이 또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하는 전칠을 보던 시선을 돌린 전륭은 찌푸린 표정으로 월창밖을 내다봤다. 이제 봄이 오는 마당엔 상단 인원들이 사선 태원 본국으로 보낼 물품들을 정리하느라 아침을 잊었다.
“쯧, 그 욕심 많은 탐관오리가 정말로 사람 지겹게 하는 구나. 필경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서 그리하는 게야. 제대로 빨아보겠다는 거지.”
전륭의 구겨진 얼굴을 살피며 전칠은 다시 입을 열었다.
“부지부장께서 서장으로 상행을 나가신 상황을 설명하고 서령부(府로)의 입시를 미룬바 있으니 이번에는 달리 변명하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차분한 전칠의 얼굴을 보며 전륭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없는 동안 계속 시달렸을 테지.’
서령지부의 회계를 맡은 전칠은 육촌아우가 된다.
전륭 자신이 실질적인 지부장이듯 실질적으론 총관이다.
형제가 셋밖에 없는데 왜 전칠이라고 이름을 지은건지 물으면 그저 미소로 답하는 차분하고 진중한 아우다.
“나 없는 동안 고생했다, 자꾸 보채니 처먹을 걸 가지고 들어가 보마. 지부대인이란 놈이 내가 탑리목하(塔里木河)까지 가서 진귀한 걸 가지고 온 걸로 아는 모양이다. 틀린 짐작은 아니지만 그놈 줄건 아니지.”
짓궂은 미소를 지어낸 전륭은 음흉한 목소릴 이어냈다.
“지부놈 첩들이 좋아라할 것들을 가져가야겠다.”
“그런 게 뭐······”
의아한 얼굴인 전칠에게 진한 미소로 전륭은 답을 줬다.
“서장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들의 음경이지.”
전칠은 순간 눈과 얼굴을 경직했다. 하지만 이내 경직을 풀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 아하하하!”
마주 웃던 전륭은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인물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저 친구······’
현산이라고 이름을 밝힌 청년 무사, 같이 일하기로 결정한 그가 마당으로 나왔다.
상단인원들의 분주한 움직임 곁으로 돌아가 장작더미 앞에 섰다.
도끼를 잡더니 머뭇거림 없이 패기 시작한다.
소리가 경쾌하다.
전륭의 시선을 좇아 그 모습을 본 전칠이 입을 열었다.
“다시 봐도 참 진중한 사람입니다.”
“음.”
“아직 이립(而立, 30세)이 되려면 먼 나이같은데, 산적들을 제압한 무공이 그토록 고강했다니 놀랍습니다. 사문을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사연이 있지 싶습니다. 죄를 지은 자 같지는 않지만 탈이 생기진 않겠습니까?”
매사에 치밀한 성격답게 전칠은 일말의 불안을 털어놓았다. 현산이란 인물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작은 불안이다. 하지만 전륭은 무시했다.
“강호의 물을 마시고 사는 놈 중에 불안하지 않은 놈이 누가 있겠느냐? 칼을 쥔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사소한 것에 얽매여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우린 저자가 필요해. 필요하면 취해 쓰는 것이야.”
고개를 주억거린 전칠은 그래도 제가 할 바를 말했다.
“알아낼 수 있는 대로 알아는 보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네 일이니 히는 표정으로 전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순간을 노린 듯이 밖으로부터 전갈이 들어왔다.
“표행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전륭과 전칠이 시선을 모으는 속으로 들어온 상단접객처의 수하는 공손히 보고를 했다. 그 내용을 들은 전륭과 전칠은 서로를 보며 눈을 빛냈다.
* * *
장작패기를 마치고 도끼를 놓은 현산은 등에 꽂히는 시선을 느꼈다.
느릿하게 돌아서며 보니 젊은 사내가 바라보다 얼른 눈을 돌린다.
그런데 다시 보니 사내가 아니다.
가녀린 몸태하며 움직임, 남장 여인이 분명하다.
‘뭐지?’
의아함을 품은 현산의 시선 속에서 남장여인은 상단무사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사라졌다.
상단 접객처에서 나와 잠시 서성거린 것으로 짐작되는 남장여인.
그 시선에 담긴 것은 불안과 초조라고 현산은 읽어냈다.
* * *
찻잔에 차를 따라 내며 전륭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엄대인이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남장 여인은 야무지게 입술을 물었다가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합니다. 엄대인께서 북경으로 보낼 친서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륭은 자신의 찻잔을 들어 음미하며 무거운 숨을 소리 없이 내쉬었다.
엄대인측의 의뢰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일임을 예감했지만, 북경에 보낼 친서를 지니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더 확실해 진다.
‘변방의 학자에 불과하지만 기개가 있는 인물.’
엄대인은 서령에서 존경 받는 존재다.
탐관오리들의 가혹한 수탈과 학정에 반발하다 옥고를 치르기를 여러 차례, 이 지역 지방관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러한 이가 북경으로 보낼 친서라 함은 불문가지다.
‘그렇게 중요한 일인데, 이 남장여인은 뭔가?’
의문을 품는 전륭의 눈빛을 읽으며 남장여인은 차분한 음성을 이어냈다.
“엄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운표국 말고는 믿고 의지할 데가 없다 하시었습니다. 과거 표왕과의 인연이 아니더라도 대운표국이라면 높은 의기와 충정으로 해낼 것이라는, 오직 대운표국만이 가능하다 하셨습니다.”
전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빠져나갈 구멍을 막아버리는 구만.’
확실히 거부할 수 없는 인물의 의뢰다.
표왕 하웅휘와 엄일호 대인과의 수십 년 전 인연은 깊고 무겁다.
표행중 사경을 헤매게 된 표왕을 구완해 살려낸 이가 엄일호대인이다.
표왕은 죽을 때까지 은혜 갚겠노라 말했다.
“알아보셨겠지만 사내가 아닙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남장여인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냈다.
“소녀는 엄일호 대인의 먼 친척 질녀가 됩니다. 이번 표행의뢰물이 소녀입니다.”
이건 무슨 소리냔 표정으로 눈썹세우는 전룡에게 여인을 답을 이어냈다.
“주지하는 사실로서 서령의 지부대인은 탐욕스럽고 여색을 몹시도 밝히는 위인입니다. 지난 가을 서령호에서 갈대를 거둔 일이 있습니다만, 그때에 소녀를 보고 욕심을 품었습니다. 첩이 되라는 강압을 받았습니다.”
전륭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인과 친서가 표물이구나.’
친서는 북경의 명망 있는 권세가에게로 가는 것이고, 여인은 지부대인의 탐욕을 피해 가는 것이다. 은밀하고 안전하게 해내야 하는 일이다.
‘홀로 여기까지 남장을 하고, 나름 강단이 있는 여인이로군.’
여인에 대한 평가를 하며 전륭은 용모를 다시 살펴봤다. 이제 보니 남자처럼 꾸미느라 본래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미태가 드러남이 여실하다.
“먼 길을 가자면 더 치밀하게 꾸며야하겠소이다.”
전륭이 그리 말하자 여인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반색했다.
“의뢰를 받아주시는 건가요?”
전륭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표왕의 은인께서 주신 의뢰를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호랑이 간을 삶아먹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 성심성의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여인은 억누르고 있던 미소를 환히 피워냈다.
* * *
“처음 맡기는 일이 이리 중한 것이라면······”
신중하게 염려를 드러내는 전칠의 눈을 응시하고 전륭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먼 길이다, 지부대인 쪽에서 여인의 행방을 찾다보면 추적이 붙을 수도 있을 것이야. 눈길을 끌어선 안 되니 소수정예가 해야 할 일이다. 현재 우리에겐 그만한 일을 맡아 해낼 여력도 능력자도 없다. 그가 적임이다.”
다시 입을 열려는 전칠보다 먼저 전륭은 뒷말을 이어냈다.
“네 걱정대로 그에겐 첫 임무, 아는 건 그의 무력뿐, 그를 모르니 어디까지 신뢰하고 일을 맡겨야 할지 모른다. 무엇보다 엄대인의 의뢰는 대운표국의 중대사다.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이다. 해서 내가 동행하고자 한다.”
“예?”
놀란 표정의 전칠에게 전륭은 미소로 뒷말을 냈다.
“그러니 지부대인을 보는 일은 네가 해야겠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준비한 것들을 던져줘라. 첩들이 좋아할 물건이라고, 보신과 자양강장에는 최고라고 말좆을 던져주란 말이다. 지부대인놈이 좋아서 죽나 지켜보고.”
전칠은 황당한 표정을 바꾸고 눈을 흘긴다.
“쉰소리 하시는 걸 보니 북경 갈 생각에 좋으신 모양입니다.”
“어, 그래 보이냐? 음 들켰구나.”
잠시 눈을 흘기다 풀썩 웃은 두 사람은 정한 일을 어찌 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계획을 논의했다.
* * *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는 인물, 남장여인의 눈을 현산은 응시했다. 그러자 여인은 재빠르게 시선을 회피하고 자신의 말과 행장을 다시 살핀다.
‘북경까지 갈 표물.’
여인에 대한 생각과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을 되새기며 현산은 전륭이 한말을 떠올렸다.
‘표행의뢰를 받아 시작하면 그때부터 목숨을 걸어야 하오, 우리의 목숨보다 표물의 안전이 우선이오. 특히 이번 표물은, 여인은 필히 안전하게 이송해야 하오. 표왕의 은인이 의뢰한 일, 엄대인의 친척질녀인 것이오.’
전후의 사정은 다 들었다.
그러한 내막보다도 진짜 일을 시작한다는 것에 다소 흥분이 된다.
북경까지는 멀고 먼 길, 북경에 발을 들이게 됐다.
“자 출발합시다.”
말에 오른 전륭이 선두로 나서며 지부의 대문을 나섰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전륭의 뒤를 따르는 여인의 등을 응시하며 현산은 말배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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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4. 북경으로 가는 길(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