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es of the black clothed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14
14. 북경으로 가는 길.
1.
겨울이 갔다 하지만 북방의 바람은 칼날처럼 모질다. 그 바람과 어둠을 뚫고 서령을 벗어난 현산 일행은 변경을 더듬는 짐승들처럼 전진했다.
선두에서 이끄는 전륭은 몸에 익은 경험으로 침착하게 길을 헤쳐 나갔다.
“이쯤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다시 움직입시다.”
주변을 돌아보며 말을 멈춘 전륭은 현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은 현산은 안전 확인에 들어갔다.
야지와 야산이 펼쳐진 곳, 지나온 개활지와 머물 장소인 야산 아래를 신중하게 수색했다.
‘느린 감이 있어.’
특별한 이상이나 위험한 동정이 없음을 확인한 현산은 그 생각을 품었다.
밤새 말을 타고 이동한 거리가 이제 겨우 감숙 땅 난주를 앞에 두고 있다. 서령을 벗어나 민화를 지나고 감숙 땅에 들어 동자촌을 지난 거다.
이정도 거리의 배는 갔어야 한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산 자신의 생각이다. 다른 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생각과 행동의 결과를 구하기는 힘들다. 특히나 여인과의 동행, 무리해서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부작용보다는 예상 가능한 위험을 더 경계해야 할 텐데.’
생각을 곱씹고 더듬으며 현산은 일행 곁으로 돌아갔다.
어느새 모닥불을 피워놓은 전륭은 육포와 건량을 꺼내 굽고 있었다. 말안장에서 뺀 죽통에는 화주도 들어 있었다. 그걸 여인에게 건네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한기를 밀어내는데 다소간 도움이 됩니다.”
거친 남자의 얼굴로 변장한 여인은 생긋 미소 짓고 죽통을 받았다. 가죽면구로 턱과 볼을 두툼하게 한 얼굴인데도 눈동자는 별처럼 빛난다.
“감사합니다.”
진심어린 인사를 하고 여인은 죽통의 화주를 한 모금 넘겼다. 인상을 쓰고 어깨를 떤다. 겨울이 물러가 살을 에는 추위는 없지만 아직도 아침저녁으로는 매서운 변방의 추위, 그렇게 밀어내고는 죽통을 넘긴다.
“드시어요.”
여인이 건네주는 죽통을 응시한 현산은 말없이 받았다.
화주의 화끈함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모닥불을 보며 생각했다.
진소향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다운 열여덟의 이 여인이 이렇게 밤을 새워 도망가야 하는 현실이다.
‘지부대인의 눈에 들어서······’
전륭에게 들은 대강의 이야기, 사연은 분노를 치밀게 한다.
양친을 일찍 여의고 노복과 찬모와 같이 살아가던 여인이다.
기울어가는 가세 때문에 호숫가의 갈대를 베어다 엮는 일을 손수 하던 중 지부놈의 눈에 띄었다.
배를 타고 놀던 지부대인놈이 진소향이란 이 여인의 미색에 눈알이 돌아간 것이다.
욕심을 채우려 겁박을 해댔고, 여인은 엄인호라는 인물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상황이다. 쫓기듯 도망가는 이 현실.
‘백성을 제 우리 안의 개돼지처럼 여기는 놈들.’
새삼 치미는 분노에 현산은 주먹을 쥐었다.
그 때문에 모닥불에 던져 넣으려던 장작 하나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으스러졌다. 전륭이 주변에서 줍고 베어온 나뭇가지의 굵은 토막이다.
그걸 본 두 사람이 놀랐다.
“왜 그러는가?”
전륭이 묻자 현산은 실태를 깨달았다. 여인 진소향의 경직한 눈길을 보고서 얼른 으스러진 나무를 모닥불에 던져 넣고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추적하는 자들이 있다면 어찌 대응할까를 생각하다, 지나치게 몰두한 모양입니다.”
음, 하는 된소리를 내며 전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 진소향은 두려움이 번지는 시선으로 모닥불을 응시했다.
실상 그것이 제일 큰 문제인 거다.
지부대인이 상황을 파악하고 대노하며 행동할 것이 자명한 일이다.
“탐욕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라서······”
미간을 가득 좁히고 그렇게 말한 전륭은 여인을 힐긋 보고 뒷말을 냈다.
“필연코 뒤를 쫓아올 것이야.”
흠칫 어깨를 떤 여인 진소향은 모닥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고, 전륭은 현산에게 눈길을 돌려 맞춘 후에 남은 말을 이어냈다.
“하지만 우리가 하룻밤을 앞서 있으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지. 추적이 붙는다고 해도 그만큼의 거리와 시간을 벌고 있고, 지부대인이 부리는 자들이라고 해봐야 실상 대단찮은 무리, 두려워 할 자들이 없음이야.”
진소향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는 가운데 현산이 입을 열었다.
“지부대인의 휘하가 아닌 다른 인물이나 세력이 참여할 가능성은 없습니까?”
전륭은 미간을 다시 좁혔다.
현산의 말인즉슨 대단찮다고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대단한 자들이 뒤를 밟아올 가능성이 없냐는 거다.
그 부분은 확실히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지부대인 주변엔 가능성이 희박하다.
“도지휘사사에 협조를 요청해서 군병들을 동원하지 않는 이상 희박한 일일세. 지부대인이 아무리 막나가는 위인이라고 해도 이렇듯 사사로운 일에 그리 할 수는 없지. 흑도패를 부리는 게 유일한 수단일 것이야.”
현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걱정할건 없겠지만 강호무림인들을 동원하는 만일의 경우가 생긴다면 행로가 험난해 질 수도 있겠군요.”
전륭은 또 다시 미간을 선명하게 좁혔다.
‘지부대인 주변에 그럴만한······’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가능성이 없다.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지부대인은 강호무림인들의 성정을 아는 터라 교유가 없다.
그 그릇으로는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현산이 언급한 만일은 그냥 가능성이다.
“자자, 식사 하자고, 배를 채우고 다시 움직여야지.”
분위기를 바꾸며 전륭은 구운 육포와 건량을 진소향과 현산에게 건넸다. 자글자글한 육포의 기름냄새가 은은히 퍼지는 그때 현산은 눈을 치떴다.
‘냄새.’
바람을 타고 등 뒤로부터 냄새가 날아왔다.
현산 자신 일행이 밤새 지나온 방향으로부터다.
피 냄새, 쇠붙이 냄새, 숨 가쁜 땀 냄새다.
해도 뜨지 않은 시간 이런 야지의 이 냄새는 예상하던 위험일 가능성이 크다.
현산은 벌떡 일어나 모닥불에 흙을 덮었다.
놀란 전륭은 반사적으로 일어섰다가 현산의 눈을 보고 상황을 깨달았고, 영문 몰라 경직한 진소향을 부축해 일으켜 말에 태웠다.
그사이 현산은 흔적을 말끔하게 덮었다.
* * *
‘반각(약 7분).’
흘려보낸 시간을 가늠하며 현산은 비탈 아랫길을 응시했다.
냄새의 주인공들이 곧 모습을 보일 것이다.
저들이 오기까지 말발굽 자국 등의 흔적을 지우고 흩었다.
전륭과 진소향을 숨겼으니 남은 건 꼬리 자르기다.
‘이게 내가 할 일.’
그렇다, 전륭이 현산 자신을 고용한 것은 이런 일을 위해서다.
딱 지금 이 순간의 이런 상황을 상정하고 고용한 것은 아니지만, 위험에 맞서고 파훼하는 일이다.
이제 그 일을 할 때가 됐다. 예상보다 빨리 닥쳐왔다.
‘왔구나.’
두기의 말이 달려오고 있다.
그런데 마상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익다.
미간을 좁히며 다시 보니 알겠다.
민대머리 거한과 산적수괴, 그들이다.
그렇다면 산적들이?
아니, 그건 아니다. 저들은 쫓기고 있다.
‘뭐?’
더욱 미간 좁히는 현산의 시야와 감각에 그 순간 흑색섬광이 들어왔다.
그야말로 검은 뇌전처럼 허공을 가른 것은 오죽시(烏竹矢), 그것이 말을 맞혔다.
민대머리 거한이 탄 말, 커다란 울음소리를 내며 고꾸라진다.
“아우야!”
급하게 말을 세운 왕정은 말 등을 박차고 의형제 태웅호에게 달려갔다.
“크흑, 형님!”
칠척거한 태웅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의형 왕정에게 손사래를 쳤다.
오지 말고 혼자서 달아나라는 의미, 하지만 왕정은 무시하고 달려왔다.
“일어서라! 어서 일어서!”
다급하게 태웅호를 부축해 일으키던 왕정은 예도를 뽑아 휘둘렀다.
가슴으로 꽂혀 들어오던 오죽시를 번개처럼 자르고 또 다른 화살을 내리쳤다. 하지만 화살을 날리는 자의 궁술이 예사롭지 않아 허벅지에 맞았다.
“큭!”
왕정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자 태웅호는 격렬한 분노를 발산했다.
“이 개잡놈들아!”
그러나 분노만 터트릴 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말에서 굴러 떨어진 충격 때문이 아니라 본래 가진 부상 때문에 창백한 얼굴,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진다.
그 앞을 왕정이 절뚝거리며 칼을 쥐고 막아섰다.
“와라!”
죽을 각오로 외치는 왕정의 앞으로 오죽시를 날린 무리가 다가왔다.
시커먼 흑의무복에 흰색 허리띠를 두른 자들, 강호무림의 방파조직이 분명하다.
삼십 명의 그들 선두 중앙에서 한 사내가 흑궁을 겨누고 나섰다.
“왕정, 네놈의 골을 이제야 마시겠구나.”
처절한 원한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사내는 오른쪽 뺨을 가르는 흉터가 있다.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그런 흉터는 흑궁을 거머쥔 손등에도 있다.
“나 흑뢰궁 유현, 형님의 유해 앞에서 얼굴과 손등을 비수로 저미며 복수를 맹세했다. 드디어 네놈을 잡아 형님의 영전 앞에 바치게 됐구나.”
서리서리 분노와 원한을 흘려내는 사내 앞에서 왕정은 예도를 움켜쥐고 이를 갈았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뜨거운 숨으로 그 말을 뱉어낸 왕정은 거친 숨으로 격노를 분출했다.
“너희 흑일방 놈들을 다 베어죽이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유현 네놈의 형 유건을 벨 때처럼 모조리 죽여야 하거늘! 이렇게 최후를 맞이하게 됐으니 죽음을 구걸하지 않겠다! 와라!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겠다!”
서릿발 같은 왕정의 기세에 흑뢰궁 유현의 눈동자에 더욱 격한 불길이 곤두섰다.
“씹어 먹을 놈이!”
왕정의 뒤에서 칠척거한 태웅호가 소리쳤다.
“네놈의 형이 뒈질 때 어땠는지 아느냐! 살려달라고 빌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애원했단 말이다! 흑일방의 부방주라는 놈이 그랬단 말이다!”
시원하게 소리친 태웅호는 시원하게 대소를 터트렸다.
비탈아래 상황을 숨어서 지켜보던 현산은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였다.
‘그런 사연이군.’
일월산 산적들을 이끌던 자들, 왕정이란 사내와 칠척거한은 흑일방에게 쫓기고 있었음이다. 군부출신이 분명한 두 사람이 흑일방과 어떻게 얽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흑일방 부방주 유건이란 자를 죽인 사연이다.
‘마도대연합의 복장과 비슷해.’
흑의에 흰색 허리띠, 아마도 마교의 위세를 등에 없고자 한 것으로 짐작된다.
마교, 청해땅 서령은 본래 마도대연합의 뿌리가 내려 있던 곳, 지금은 신강으로 물러나 있지만 그들의 이름이 주는 무게와 두려움은 여전하다.
‘우릴 추적해온 자들이 아니야.’
그러니 더 이상 신경 쓸 이유가 없다.
그래서 현산은 물러나고자 했다. 그 순간 들려온 이야기만 아니라면.
“그 아가리를 찢어버릴 것이다!”
주변을 뒤흔드는 격렬한 고함을 터트린 자, 흑뢰궁 유건은 흑궁 겨눈 손을 꿈틀거리며 뒷말을 냈다.
“이 길로 도망친 년놈들을 잡은 후에 네놈들의 가죽을 벗겨주마.”
팽팽하던 활시위를 천천히 풀며, 흑궁을 내리며 유건은 차가운 살기의 미소를 피워냈다.
“진소향이란 계집을 데리고 도망치는 대운표국 서령지부의 부지부장 참귀도 전륭, 그리고 또 한 놈, 그것들과 같이 네놈들의 뼈를 발라낼 것이야.”
왕정과 태웅호의 주변을 흑일방 무사들이 에워쌌다.
굵은 눈썹을 꿈틀 곤두세운 현산은 유현이란 자가 뱉은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의미가 명확하다, 저들은 현산 자신일행을 추적해온 자들이다.
‘희박하던 가능성이 현실이 됐구나.’
지부대인이 강호무림인들을 동원했다.
흑일방이란 이름을 가진 자들, 저들의 세가 어떠한지 모르지만 짐작이 아주 없지는 않다.
마도대연합과 제천무림맹의 충돌이 가라앉은 이 변방에 자리 잡은 자들, 승냥이 떼다.
‘여기서 맥적산이 얼마나 되나······’
갑자기 옛 생각이 떠올라 현산은 아스라함을 품었다.
귀신오의 일원으로 처절한 전투를 벌이던 그 시절, 열다섯의 그때가 생생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소병과 형님들의 얼굴이 눈앞에 선하다.
바로 이 감숙 땅이다.
‘응?’
현산은 눈썹을 확 뒤틀며 몸을 돌렸다.
호통소리 때문이다.
다름 아닌 전륭의 고함, 그와 진소향이 은신한 곳에 누군가 접근해 일이 생긴 것이다.
산비탈을 박차고 현산은 달려갔다.
그 순간 흑뢰궁 유건의 손에서 오죽시가 터져 나왔다.
해동도로 갈라 쳐 내리고 미친 듯이 비탈을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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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4. 북경으로 가는 길(2)
2.
진소향을 등 뒤로 둔 전륭은 날아오는 비도들을 박도로 쳐내며 분노와 당황을 삼켰다.
짐승가죽피풍의를 걸친 자들의 느닷없는 공격.
예상치 못한 이 상황은 현산이 인지한 일, 이놈들은 숨어 있는 자신들을 찾아냈다.
‘전문 추적자들!’
상대가 그런 자들임을 직감한다.
필경 임하회족(臨夏回族)이다.
짐승가죽털모자를 덮어쓴 저 구릿빛 얼굴과 높은 콧대와 복장이 말해준다. 무엇보다 현산이 지운 흔적을 찾아내 자신들을 찾아 급습하는 능력이다.
‘지부대인 놈이 저런 자들을 부릴 줄은!’
다급한 상황 속에서 전륭은 생각을 더 이을 수가 없었다.
삼인의 공격자, 임하회족이 확실한 추적자 놈들은 회월도를 벼락처럼 휘두르고 있다.
‘이 개잡놈들이!’
진소향을 보호하면서 세 놈의 공격을 막아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혼자 몸이라면 어찌어찌 반격하고 빠져나갈 틈을 만들 텐데 그게 안 된다.
호전적이고 들짐승 같은 임하회족답게 이놈들은 강하고 사납다.
‘부상 때문에! 이대로는 안 돼! 차라리 현산을 불러 말을 타고 도주하는 것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은 그것뿐이라는, 심중의 결론을 악문 이 사이로 토하는 전륭의 숨은 뜨겁다. 그런데 그순간 좌측 어깨로 회월도가 내리쳐왔다.
산적들과의 접전에서 갈라진 어깨, 그래서 박도를 휘두르는 힘이 새는 그 약점을 귀신같이 노린 일격이다.
박도를 다급히 비껴 올려 막았지만 피가 튄다.
“큭!”
상박이 갈라져 피를 흘리며 전륭은 소리쳤다.
“죽일 놈들아! 물러가라!”
죽이자고 달려든 놈들이 호통에 물러갈 일이야 있겠는가 마는, 이 소리를 듣고 현산이 달려오기를 기대하는 바라 전륭은 격하게 또 소리쳤다.
“사냥개노릇을 하는 임하회족놈들아!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호통 치는 전륭에게로 삼인의 임하회족 추적자들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숲으로 뛰어 들어간 현산은 등 뒤에서 날아오는 오죽시를 무시하고 질주했다. 흑뢰궁 유현이란 자의 궁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숲에서는 무용지물, 나무사이로 비호처럼 이동하며 오죽시를 조롱하듯이 달렸다.
‘추적자들!’
전륭이 호통 쳐 알렸다.
임하회족이다.
그들의 추적능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제천무림맹의 일원으로 마도대연합과 싸울 당시 그들은 공포였다.
소리 없이 등 뒤로 다가와 급습하는 그들의 능력은 귀신 그 자체다.
‘안이하게 생각했다!’
현산은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책망했다.
임하회족과 같은 저런 자들이 추적해올 가능성도 생각했어야 했는데, 그런 최악까지는 예상 못한 거다.
저들은 현산 자신이 지운 흔적이나 말 냄새를 찾아 닥쳐온 것이다.
짐승 같은 야지에서의 생활능력을 가진 임하회족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저들은 강하고 용맹스럽다.
그런 자들이 흑일방이란 강호무리와 일하고 있음이다.
단순한 사냥개 노릇인지 뭔지 몰라도 위험은 목전에 닥쳐왔다.
‘죽인다!’
시퍼런 안광을 터트리며 현산은 숲을 헤치고 도약해 나갔다.
진소향을 등 뒤로 두고 추적자들의 공격을 힘겹게 받아내고 있는 전륭을 보며, 피 흘리는 그를 쪼개려고 회월도를 휘두르는 임하회족놈들에게 짓쳐갔다.
현산이 그야말로 비호처럼 거리를 좁힌 도약으로 해동도 흑천을 내려치는 찰나, 그 기세를 인지한 중앙의 추적자놈이 벼락처럼 돌며 회월도를 후려쳤다.
횡을 가르는 그 반격 위로 현산은 흑천을 도끼처럼 찍었다.
캉, 하는 소리보다 먼저 불꽃이 찰나에 피어났다.
그 불꽃을 가르고 흑천이 갈라내려갔다.
치뜬 눈의 임하회족 추적자놈이 뒤로 물러섰고, 놈의 앞에 갈라진 회월도가 떨어졌고, 경직한 놈의 미간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머리부터 둘로 갈라지며 허물어지는 추적자놈의 옆으로 현산은 튀어나갔다.
동료의 허망하고 황당하고 죽음을 놀라 돌아보는 놈이 손을 뿌린다.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 그 손짓이 독분 살포임을 현산은 알고 있다.
‘쪼개버린다!’
시퍼런 살기를 전신으로 발산하며 현산은 흑천 올려 그었다.
독분 뿌리려는 상대의 팔을 벼락처럼 갈라버리고 쇄도해 이격을 내리쳤다.
목과 어깨가 갈라지며 가슴이 쪼개진 놈은 참혹한 모습으로 허물어졌다.
바로 그 순간 전륭이 휘청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그 목을 치려는 놈, 세 놈 중에 남은 한 놈에게 현산은 거짓 같은 움직임으로 돌아서며 쇄도했다.
동료들이 당한 걸 알지만 전륭을 반드시 베려던 놈이 눈을 부릅뜬다.
본능적이며 반사적으로 방향을 돌려 나오는 회월도를 향해 현산은 달려들었다.
그건 마치 죽으려고 작정하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정말로 죽으려고 작정한 결과, 회월도의 날을 몸으로 받았다.
그리고 놈도 받았다.
펑 소리를 내며 임하회족 추적자놈은 나가떨어졌다.
코와 입으로 피를 뿜으며 버르적거리는 놈은 살긴 글렀다.
그런 놈의 가슴에 흑천을 박았다가 뺀 현산은 전륭과 진소향에게 돌아와 침착히 부축하며 말에 태웠다.
“자, 자네, 그, 팔은······”
창백한 안색으로 전륭은 현산의 팔을 보고 물었다.
마지막 추적자 놈의 회월도를 맞은, 현산이 일부러 몸으로 받아낸 것이 분명한 일격의 흔적이 팔에 남았다.
옷이 갈라졌다. 그런데 현산의 팔은 아무렇지도 않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대답 아닌 대답으로 말에 오른 현산은 두 사람을 이끌고 은신했던 숲을 빠져나갔다.
산길로 접어들어 전력으로 말을 달렸다.
그러나 이 도주는 머지않아 막히고 말 것을 안다.
그렇지만 바로 그것을 노린 이동이다.
으드득 이를 간 흑뢰궁 유현은 죽은 자들을 발로 걷어찼다.
임하회족의 추적자들, 꽤 많은 돈을 주고 고용한 사냥개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뒈졌다.
워낙에 유명한 놈들이라 기대한 것을 비웃듯이 개처럼 죽어버렸다.
“저놈이 대체 누구야?”
산길로 도주한 전륭 일행을, 그중에 임하회족추적자 셋을 개처럼 도륙한 자를 궁금해 하며 유현은 황당한 분노를 삼켰다. 그런 유현의 뒤에 포박당한 모습의 산적수괴 왕정과 칠척거한 태웅호는 눈빛을 교환했다.
‘그자입니다, 형님.’
‘그래, 이놈들 상대를 잘못 고른 거다.’
두 사람의 생각 중 일부를 흑뢰궁 유현도 알고 있는 바다.
그래서 다급한 추적을 멈추고 여유를 부리고 있음이다.
상대가 일방적인 도주가 아니라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이 앞으로 펼쳐지는 길이 그러함이다.
“저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한가락 실력이 있는 놈이 분명하다.”
수하들을 돌아보며 싸늘한 안광으로 유현은 이야기했다.
“이 앞의 산길은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없는 파검로(破劍路)다. 말고삐를 쥐고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할 길이지.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험로, 놈은 그곳을 이용할 심산이다. 파검로의 끝에서 우릴 노릴 것이야.”
죽은 임하회족 추적자들의 시체를 발로 차며 유현은 계속 말했다.
“이놈들이 제대로 해줬으면 안 해도 될 수고를 해야 할 상황이다. 저놈은 우리를 떼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분명 반격한다. 그럴 능력도 있는 놈이다. 하지만 저놈이 간과한 것의 하나가 바로 내 궁술이다.”
흑궁을 올리며 유현은 강한 살기를 풀어냈다.
“파검로의 선두로 내가 갈 것이다. 흑궁으로 길을 열 것이야.”
수하들의 이글거리는 눈을 보며 유현은 마지막 말을 던졌다.
“놈을 잡아 이놈들과 같이 가죽을 벗기자!”
흑일방 무사들은 환호를 외쳤고 왕정과 태웅호는 고개 숙이고 이만 악물었다.
숨을 헐떡이며 전륭은 산길 아래쪽을 봤다.
흑일방놈들은 바로 쫓아오지 않고 있다.
이제 지나가야 할 파검로의 지형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둘러야 하건만 현산은 무슨 생각인지 말에서 내려 물을 마시고 있다.
“내 걱정은 말고 어서 이동하세나.”
전륭이 몸을 일으키자 현산은 진소향의 굳은 얼굴을 한번 본 후에 담담히 말했다.
“임하회족의 독은 지독합니다.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진 않지만 지금처럼 기혈의 흐름을 방해하여 운신에 지장을 줍니다. 조치를 취하십시오.”
전륭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현산의 말처럼 자신은 임하회족의 독에 당했다. 당한 줄도 모르고 당한 거다.
그래서 싸우는 내내 몸이 무겁고 숨이 가빴다.
무엇보다 어깨가 갈라진 이전의 부상이 큰 장애였다.
‘산적수괴와의 싸움이 없었다면······’
그랬다면 이처럼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강호의 위험이 어디 사정 봐가면서 닥쳐오는 것인가, 어떠하든 변명에 불과하다.
‘그 산적수괴들이 저놈들에게 잡혔다니, 무슨 사연인가?’
짐작 못할 부분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어쩔 작정인가?”
물으면서 전륭은 그 순간을 떠올렸다.
숲에서 비호처럼 튀어나온 현산이 임하회족 추적자 놈들을 갈라버리던 광경이다.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지금 이런 꼴을 당하고 보니 사람 하나는 잘 잡았다는 생각이 든다.
“저놈들을 처리할 겁니다.”
너무나 담담하게, 뒷산의 나무들을 베어 오겠다는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현산의 대답에 전륭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진소향은 숨을 멈췄다.
두 사람의 표정과 눈길을 돌아본 현산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우릴 죽이고 진소저를 잡아가고자 온 놈들입니다. 어느 한쪽이 무너져야만 끝나는 일입니다. 죽이고자 하는 놈에게 죽어줄 일은 없습니다. 반대로 죽입니다. 그래왔습니다. 산에서는 누구도 내 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전륭은 눈썹을 부르르 떠는 반응으로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상대는 삼십 명이나······”
“경험이 있습니다.”
경험, 그게 뭔지 전륭은 모른다.
혹시 일월산에서 산적들과 접전했던 일을 말함인가?
그때 확실히 산적들은 덤벼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산적수괴가 나섰기 때문이고 상황이 그러했음이지 지금 이 현실과는 다르다.
‘아니,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현산의 바위처럼 육중한 눈빛을 보고 전륭은 깨달았다.
‘진짜 경험이 있는 거야······!’
전륭의 눈빛이 흔들릴 때 현산은 수통을 말안장에 끼우고 흑천을 잡았다.
“기다리십시오.”
산길 아래로 달려 내려가는 현산을 보며 전륭과 진소향은 다시 숨을 멈췄다.
어차피 손안에 든 상대, 피할 수 없는 길이 앞을 막고 있는 상황, 흑뢰궁 유현은 수통의 물을 마시며 여유를 부린 후에 흑궁을 잡고 명령했다.
“자, 년놈들을 잡으러 가자!”
유현의 음성이 흩어지던 그 순간이다.
산길 위쪽을 보던 수하 하나가 소리쳤다.
“놈이 달려옵니다!”
휘뜩 고개를 돌린 유현은 눈을 치뜨고 그 모습을 봤다.
낡은 청의 무복을 걸친 놈이 설산의 비호처럼 달려 내려오는 광경, 그 놈에게서 은빛 섬광이 터져 나오는 것, 그 섬광이 소리친 수하의 이마에 박힌 결과.
‘뭐!’
황당한 죽음으로 쓰러지는 수하를 보던 유현은 현실로 돌아와 소리쳤다.
“잡아 죽여!”
격렬한 분노로 유현은 전신을 부들거렸다.
예상을 빗나간 상황, 정체모를 놈이 놀랍게도 공격을 해왔다.
파검로를 지나간 후에 반격하리라던 예상을 비웃었다.
저렇게 혼자서 맹호처럼 달려왔다.
저놈은 미친 것인가?
경사가 가파른 산길을 벼락처럼 달려 내려가며 현산은 두 번째 비도를 날렸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달려 올라오는 흑일방 놈들과의 거리는 이제 이장정도, 중앙이 아니라 우측 놈의 심장에 비도를 던져 고꾸라뜨렸다.
‘두 놈.’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현산은 도약했다. 호보촌을 몰살한 군병들을 산에서 벨 때처럼, 그때를 떠올리며 흑천과 하나 되어 검은 벼락이 됐다.
도약으로 흑일방 놈들의 머리를 넘어가며 현산은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 회전 속에서 흑천의 가름을 터트려 중앙 놈의 뒤통수를 쪼갰다.
바로 뒷놈의 칼을 밟고 어깨를 밟아 부서내리며 좌우 두 놈의 가슴을 쪼갰다.
‘다섯 놈.’
착지와 동시에 현산은 쐐기처럼 앞으로 질주해 나갔다.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놈, 흑궁을 당기는 놈, 흑뢰궁 유현을 향해 쇄도했다.
놈이 당긴 흑궁이 오죽시를 튕겨내는 걸 시퍼런 눈으로 보며 흑천을 후렸다.
쉬카악, 하는 기음과 함께 오죽시가 현산의 미간 앞에서 갈라졌다.
그 순간 유현이 발사한 두번째 오죽시가 날아왔고, 현산은 그걸 왼손으로 막았다.
콱하는 충격으로 오죽시는 왼손에 잡혔고 우직하며 부러졌다.
“저놈을 잡아!”
유현의 발악 같은 외침과 동시에 현산의 좌우에서 흑일방무사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내는 칼질을 현산은 팔 들어 머릴 막는 것으로만 대응했다.
콰콰카칵 하는 소리가 몸에서 터졌지만 현산은 멈추지 않았다.
“이런 죽일!”
경악과 충격의 눈으로 유현이 뒤로 몸을 던질 때, 현산은 흑천을 던졌다.
두 손으로 잡아 내리치듯 던진 장도는 검은 회오리처럼 돌아 비상했고, 흑궁을 들어 막는 유현의 팔과 활을 가르고 들어가 가슴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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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4. 북경으로 가는 길(3)
3.
왕정과 태웅호는 얼어붙은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정체모를 사내의 손에 흑일방 놈들이 도륙되고 있어서다.
흑뢰궁 유현에게 칼을 던져 가슴을 쪼갠 걸 시작으로 모조리 난도질해버리고 있다.
이건 거짓이다.
‘혼자서!’
치뜬 눈으로 왕정은 몸을 부들거렸다.
젊디젊은 도객, 정체모를 사내가 묵빛 칼과 하나가 되어 흑일방 놈들을 차례차례 동강내는 광경이 허망하고 허황되다.
저 사내와 손을 겨뤄봤기에 알지만 이건 예상이상이다.
‘서른이나 되는 숫자를!’
사내는 그야말로 비호같다. 산을 호령하는 맹호다.
바람처럼 산자락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은 무시무시하고, 묵빛 칼을 후리는 모습은 몸서리쳐진다.
그 칼질과 발길을 아무도 피하지 못한다.
도망치는 놈들이 동강난다.
‘산을 알아,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흑일방 놈들을 베고 있어······!’
그렇다는 걸 왕정은 깨달았다.
사내가 의도하고 계획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사내의 움직임은 마치 본능처럼 산과 하나가 되어 풀어져 나왔다.
산을 밟고 있기만 할뿐인 흑일방 놈들을 산의 기세로 갈라버림이다.
‘사신을 만났었구나······!’
새삼스러운 자각과 그에 따른 두려움으로 왕정은 소름을 피워 올렸다.
일월산에서 저 사내와 겨뤘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이 진정 새삼스럽다. 사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과 태웅호는 죽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형님······”
태웅호의 떨리는 음성은 복잡하고 무겁기 그지없다.
분명 직접 겨뤘을 때 패하긴 했지만 저 정도로 무시무시한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서 흑뢰궁 유현과 흑일방 놈들을 도륙하는 모습은 사신 같다.
“저 자에 대해서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구나······!”
탄식과도 같은 음성으로 왕정은 심정을 말했다.
진정 상대를 제대로 평가하고 판단하지 못했다.
위험하고 강한 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모른 거다.
그런데 사내의 강함은 단순한 무공만이 아니라 복합적이다.
“싸울 줄 아는 자다.”
왕정이 분명하게 이어낸 말, 그것의 의미를 태웅호는 알아들었다.
자신도 느끼고 깨닫는 바여서다.
정체모를 묵빛 칼의 주인은 현재의 조건과 주변상황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그래서 상대의 약점을 가르는, 그런 자다.
‘다 죽었구나······!’
그런 결과로 흑일방 놈들이 전부 죽었다.
흑뢰궁 유현이 쓰러진 후에 당황과 놀람으로 주춤거리다 사내가 칼을 뽑아 들고 돌아서는 순간 반은 몸을 돌렸고 반은 계속 주춤거렸다.
그놈들을 먼저 죽이고 다 죽였다.
‘도망치는 놈들을 쫓아가서 하나하나······!’
맹호가 늑대들을 쫓아가 후려친 결과다.
모조리 저승길에 들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자라곤 가슴이 갈라져 쓰러져 있는 흑뢰궁 유현뿐이다.
“형님, 저 자가 형제들의 복수를 해줬습니다······”
떨리는 음성의 태웅호를 돌아보고 다시 눈길을 돌린 왕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됐구나······”
복잡하고 무거운 시선을 던지는 두 사람, 산적수괴 의형제 앞으로 걸어간 현산은 흑천을 내리쳐 포박을 갈랐다. 그리곤 눈길도 주지 않고 돌아서서 흑뢰궁 유현에게 다가갔다. 경련하고 있는 놈의 눈을 보며 물었다.
“사주한 놈이 누구냐?”
가슴이 쩍 갈라진 유현은 죽음이 임박한 잿빛 눈동자로 현산을 봤다.
“너······ 는······”
무릎을 접고 앉아 유현의 눈을 더 가까이 응시하며 현산은 말했다.
“서령부의 지부대인이냐?”
대답대신 울컥 피를 흘려낸 유현은 마지막 미소를 피워냈다.
“지부······ 그 돼지가······ 포기 안할······”
거기까지 말하고 울컥 피를 또 흘려내는 유현, 그 모습을 차갑게 내려다보던 현산은 무릎을 펴고 일어서는 동작으로 흑천을 내리쳐 목을 잘랐다.
뎅그렁 유현의 머리가 몸통 옆으로 굴렀다.
경악의 숨을 삼키며 전륭은 산길을 내려갔다.
여기저기 갈라져 쓰러져 있는 흑일방 공격자들의 시신을 보면서 더욱 경직한 숨을 삼키며 현산에게로 갔다.
그런데 현산이 또 칼질을 했다. 잘린 머리가 데굴거린다.
‘일홉의 자비도 없구나······!’
현산의 뒷모습이 무섭게 보인다.
죽어가는 자의 목을 친 저 행위가 말해주는 것은 명료하다.
적에겐 동정과 자비가 없다는 것, 손을 쓰고 죽이기로 마음먹으면 완벽하고 말끔하게 한다는 것, 그렇게 끝을 내 버렸다.
‘서른이나 되는 숫자의 적을 혼자서······!’
새삼스러운 충격과 경탄으로 전륭은 숨쉬기가 힘들었다.
뒤따르는 진소향의 숨소리가 부들거리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이 순간 경악스럽다.
강한 자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와 같은 결과를 내리라곤 정말 몰랐다.
‘강호가 현산이란 이름 때문에 진동할 날이 오겠구나······!’
묵빛 해동도의 날을 현산은 유심히 살폈다.
이가 상한 곳은 없다. 도신에 피와 기름도 묻지 않았다.
확실히 예사로운 칼이 아니다.
죽어 마땅한 자들의 피를 먹어서인지 소리 없이 포효하는 같다.
즐거워하고 있음이다.
‘잘했다.’
마음속으로 칼에게 말을 전한 현산은 도갑에 갈무리했다.
주변을 다시 돌아보니 베어버린 자들의 처참한 모습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제대로 했다.
호보촌에서의 경험으로 훨씬 잘했다. 군더더기 없이 잘 갈랐다.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갑자기 다가온 음성의 주인은 진소향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그녀의 눈엔 아직도 충격과 두려움이 진하게 남아 있다.
그 눈을 현산 마주 봤다.
“이 정신 좀 보게, 정말로 다친 데는 없는가? 괜찮은 게야?”
진소향의 말에서 깨달은 듯 전륭도 물었다.
결과가 이리 난 것에 놀라고만 있던 정신이 이제 현실을 보는 것이다.
현산은 분명 칼에 맞았었다.
“괜찮습니다.”
가볍게 대답한 현산은 진소향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목 자른 유현을 응시했다.
“서령부의 지부대인이 보낸 것이 맞습니다.”
전륭은 대번에 인상을 구기며 분노를 드러냈고 진소향은 입술을 물었다.
두 사람의 반응이 그러한 순간 현산은 그들을 봤다. 산적수괴형제다.
“구명지은을 감사드립니다.”
왕정은 정중하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태웅호도 그랬다. 그들에게로 진륭과 진소향의 시선이 돌아갔고, 고개를 든 의형제는 사연을 말했다.
“흑일방과는 은원이 있었습니다.”
미간을 찌푸리고 옛생각을 더듬던 왕정은 한숨으로 이야기를 이어냈다.
“본시 우리 의형제는 청해의 서쪽 끝 변경을 지키던 군인들이었습니다. 팔자가 기구해서 그러한지 악연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흑일방이었지요.”
사연인즉 이러했다.
변경의 위소에서 근무하던 왕정과 태웅호는 백호의 지위를 가진 무관이었다.
어느 날 상관인 천호의 명을 받아 흑일방과 협작하는 출행을 했고, 장족마을을 몰살하는 것에 반발하여 일이 생겼다.
명령을 내린 천호와 그 윗선까지 개입된 인신매매의 악행이었다.
목표가 된 장족마을 사람들을 마교와 연계하여 반역을 도모하는 세력으로, 그 근거지로 혐의를 씌웠지만 거짓이었다. 장족처녀들이 목적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동행한 흑일방의 부방주 유건을 죽이고 군문을 이탈했다.
뜻을 따르는 수하들 수십을 데리고 추적을 피하며 도주, 일월산의 산적이 된 것이다. 그러하던 차에 유건의 동생 유현이 꼬리를 밟아왔다.
“부상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터인데······”
현산을 힐긋 응시한 왕정은 쓰디쓴 얼굴로 뒷말을 냈다.
“유현놈의 흑일방 무리에게 형제들을 다 잃고 도주하였으나 결국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유현놈이 하는 소리를 들어보니 서령부의 지부대인으로부터 사주를 받았다는 것, 놈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릴 노리고 이 지방에 온 차에 청부까지 맡은 것이지요.”
상황을 인지한 전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역헌 그자가······”
지부대인의 탐욕스러운 얼굴과 미소를 떠올리며 이를 갈던 전륭은 미간을 확 좁혔다.
“혹시 이놈들이 혈연관계?”
무슨 소린가 하며 시선을 던지는 이들, 현산과 진소향은 물론 왕정과 태웅호를 차례로 본 전륭은 자신의 짐작을 말했다.
“서령부 지부대인 유역헌이란 놈은 탐욕스럽기기 이루 말할 데가 없는 놈이지. 때문에 자신에게 손해가 생길까봐 강호무림인과는 교유가 일절 없단 말이야. 그런데 흑일방이란 이놈들과 어떻게 접촉해 이리 했을까?”
현산이 미간을 가볍게 좁힌 채로 한마디를 뱉었다.
“같은 성씨로군요.”
왕정과 왕태호가 동시에 아, 하는 표정을 지었고 전륭은 다시 말했다.
“상당한 가능성이야. 유역헌, 유건과 유현.”
단정 짓듯 이름을 말한 전륭은 왕정과 태웅호를 노려보듯 응시했다. 일월산에서의 묵은 감정이 담긴 그 시선을 받은 두 사람은 다시 포권했다.
“왕정이 전대인과 대운표국 서령지부에게 지은 죄를 사죄드립니다.”
“태웅호가 사죄드립니다.”
두 사람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은 전륭은 풀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뒤끝을 안보이진 않았다.
“내게 선사한 어깨 부상 덕분에 제법 고생을 했군.”
그 순간 말없이 듣고만 있던 진소향이 나섰다.
“상처를 다시 살펴봐야할 것 같습니다.”
왼쪽 어깨 때문에 다시 부상 입은 팔, 응급처지로 지혈한 그것을 진소향이 봐주려 하자 전륭은 어색한 헛기침을 지으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진소저의 마음 씀이 비단결 같구려.”
전륭의 팔소매를 찢어 상처를 화주로 소독한 후 금창약을 바르고 면포를 감은 진소향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하찮은 소녀의 목숨을 위해 이리 해주시는 것에 비하겠습니까.”
더 내지 못한 말을 삼킨 진소향은 왕정과 태웅호에게로 다가가 두 사람의 상처도 돌봐줬다. 그동안 현산은 말을 단속하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두 사람은 어찌 할 텐가?”
전륭의 물음에 왕정과 태웅호는 서로를 봤다.
말인즉슨 너희는 이제 너희 갈대로 가라는 의미여서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다. 일월산에서 형제들을 다 잃었고 목적도 없다.
두 사람만 산적 노릇을 할 수도 없다.
“괜찮으시다면 동행하고 싶습니다.”
툭 튀어나온 태웅호의 말에 왕정이 이게 무슨 소리냔 얼굴로 돌아봤고 전륭은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웅호는 제 맘을 밝혔다.
“북경으로 가시는 길임을 압니다. 도중에 산서 태원에도 들르시겠지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는가 하는 의형 왕정의 눈을 응시한 태웅호는 간절한 눈빛으로, 미리 말하지 않았지만 이것뿐이란 얼굴로 말했다.
“대운표국에 일신을 의탁하고 싶습니다.”
왕정의 눈은 더 커졌고 전륭은 미간을 확 좁혔다.
“보시는 것처럼 사지육신 멀쩡하고 허우대도 좋습니다. 허드렛일이라도 시켜주신다면 성심성의껏 해보겠습니다. 부디 내치지 마시고 거둬주십시오.”
태웅호의 생각과 마음을 이제 완전히 읽은 왕정은 잠시 된숨을 내쉬며 생각하더니 전륭에게 포권하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거둬주십시오.”
황당한 표정을 지은 전륭은 미간을 꿈틀거리며 되물음을 냈다.
“대운표국이 군문의 도망자들을 받아 감춰주는 곳인가?”
왕정과 태웅호는 흠칫하며 어깨를 좁혔고 전륭은 거듭 말했다.
“변경에서 사달을 일으킨 자들을 품었다가 무슨 후환이 생길지 알겠는가? 정체를 숨기고 산다 해도 흑일방이 이렇게 꼬리를 잡아왔듯이 탈이 생기지 않겠나? 그때가 되면 일은 대운표국에게 생기는 것이야, 그게 무슨 소린지 알겠지? 자네들을 받아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말이야.”
된숨을 거듭 뿜어내며 고개 숙인 두 사람, 왕정과 태웅호는 포기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송구합니다.”
사과의 말을 낸 왕정은 말없이 무심한 현산을 응시하고 전륭을 응시 한 후 포권했다.
“이만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목적지까지 무탈하게 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안녕히들 가십시오.”
태웅호의 인사까지 받은 전륭은 미간을 찌푸렸고, 여전히 표정 없는 현산에게 목례하고 진소향에게 목례한 왕정과 태웅호는 돌아서 말을 잡았다.
“쯧, 이보게들.”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두 사람을 부른 전륭은 한숨 쉬듯 말했다.
“이미 후환은 짊어진 몸이거늘 무엇을 저어할까, 제기랄 거, 같이 가세나. 아무려면 사람 수가 많은 게 더 났겠지.”
왕정과 태웅호의 표정이 환하게 펴지는 가운데 현산이 제일먼저 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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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5. 그 땅을 다시 밟으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