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ies of the black clothed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15
15. 그 땅을 다시 밟으며.
1.
전륭의 이동로를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동진(東進), 무조건적인 그것이다.
중요한 경유지인 산서 태원을 향해서 최단거리로 동진 중이다. 대운표국에 우선 들러 보고하고 휴식한 후에 다시 북경으로 향하는 계획이다.
‘제천무림맹의 땅.’
잦아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며 현산은 기억을 떠올렸다.
제천무림맹 흑사자단의 일원으로, 귀신오의 한사람으로 전선을 넘나들던 피의 기억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서안, 그곳에 제천무림맹 혁리세가가 있다.
“과거에 이곳에서 전쟁이 치열했습니다, 아십니까?”
모닥불 맞은편에 앉은 칠척거한 태웅호가 조심스레 말을 걸어온다. 그 눈을 무심히 응시하고 새벽이 물러가는 하늘을 본 현산은 고갤 끄덕였다.
“워낙 유명한 일이니 아시겠지요.”
엷은 미소로 마주 고개를 끄덕인 태웅호는 침구를 정리하는 왕정과 옷매무새를 만지는 진소향, 기지캐 켜는 전륭을 돌아본 후 목소릴 이어냈다.
“참전했었습니다. 첫임무였지요”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보이는 현산을 응시하며 태웅호는 계속 말했다.
“본래 제천무림맹과 마도대연합의 전쟁은 관에서 참여할 것이 아니었습니다만, 맥적산의 금광을 차지하기 위한 맥적산 전투이후로 양측의 공방이 더할 수 없이 격화되고 전세가 커지는 바람에 휘말린 결과입니다.”
피식, 비웃음 같은 미소를 입가에 피워낸 태웅호는 내막을 자세히 말했다.
“마도대연합에서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섰지요. 제천무림맹은 연수한 화산과 종남과 공동파의 도움을 더 크게 요청했지만 그들은 발을 뺏습니다.”
더 짙어진 비웃음으로 태웅호는 뒷말을 냈다.
“기대했던 맥적산의 금맥이 말라버린 결과지요. 소리만 요란했달까요,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실제 채굴에 들어가니 바닥이 드러난 겁니다.”
왕정이 태웅호의 이야기를 듣고 슬그머니 모닥불로 다가와 앉는 데 태웅호는 계속 이야기했다.
“마도대연합은 그야말로 무서운 맹호처럼 달려들었고 제천무림맹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걸 극복하고자 혁리세가주 혁리웅이 만들어낸 수가 관의 개입입니다. 서융(西戎)들이 중원에 침범했다며 도지휘사사를 끌어들였습니다. 진실이야 어떠하든 도지휘사와 혁리웅의 결탁이 실체입니다.”
현산은 고개를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그랬구나.’
자신이 이 섬서 땅의 남서쪽 끄트머리 가릉강가에서, 사천 광현에서 넘어가면 바로 나오는 그곳에서 피땀 흘리는 수련을 하며 지낸 수년 동안, 전쟁의 판도는 그렇게 흘러간 것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이었다.
“고래로부터 화하(華河)유역을 중화로 여기고 사방을 오랑캐로 규정한 것이 중원 땅의 역사입니다. 동이 서융 남만 북적, 동서남북을 그렇게 부르고 여겼지요. 그중 가장 두려운 것은 북적으로서 흉노이고 선비족입니다만, 화하유역만을 중원으로 친다면 지금 이 땅도 오랑캐의 땅입니다.”
설명 아닌 설명으로 목소릴 이어내던 태웅호에게 왕정이 핀잔 아닌 핀잔을 던졌다.
“네놈이 학관의 부학훈도(교사)라도 되는 줄 아냐? 난데없이 아는 체야?”
태웅호가 옅게 미간을 찌푸리는데 현산이 물음을 냈다.
“제천무림맹은 현재 어떤 상태입니까?”
현산의 물음, 그 반응에 왕정이 관심의 눈빛을 보이고 태웅호는 바로 대답했다.
“마도대연합을 서융의 외적으로 씌워 몰아내는 데 성공하기는 했습니다만, 관군을 끌어들인 대가를 치러야했습니다. 맥적산의 금광은 나라에서 삼켜버렸고, 치부해놓았던 재산을 뒷감당으로 쓰는 통에 힘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서안에 웅크리고 재기를 노리고 있는 종이호랑이입니다.”
“화산과 청성과 공동과 종남은 어떠합니까?”
“그들이야 항시 그대로지요, 달리 구대문파라 하겠습니까? 제천무림맹을 도와주는 척하다가 판세가 여의치 않게 돌아가는 걸 알고는 바로 발을 뺀 겁니다. 관군이 개입하는 상황이 가장 크게 작용하긴 했습니다만.”
태웅호의 대답에 이어 왕정이 찌푸린 얼굴로 한숨의 입을 열었다.
“하아, 그 바람에 우리 같은 놈들 신세도 이렇게 쭈그러들고 말았습니다. 무림의 분쟁에 참여해 피 흘리고 죽고 개고생 했지요. 마도대연합놈들 참 지독하기가······ 하, 아무튼 그러다 끝내는 이 모양 이 꼴이 됐습니다.”
왕정의 곁으로 전륭이 뒤늦게 자리 잡으며 핀잔했다.
“새벽부터 뭔 신세한탄이야?”
새벽어둠은 이제 물러가 아침이 되고 있다.
아침식사거리를 꺼내놓으며 그렇게 대화에 끼어든 전륭은 어깨와 팔을 움직이며 태웅호에게 물었다.
“부상은 어떤가? 많이 좋아졌지?”
태웅호는 엷은 미소로 고갤 끄덕이며 현산을 봤다.
“현협사께서 구해주신 약초를 복용하고 상처에 발랐더니 정말로 놀랍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부상을 여러 번 당해봤지만 신기하기 그지없습니다.”
정중하기 그지없는, 현산을 향한 태웅호의 존칭을 당연히 여기며 전륭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나도 그렇다니까? 하, 이거 정말 연구감이야. 분명 주변의 잡초 같은 것들인데,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렇게 보이고 여기던 흔한 것들인데, 상처와 부상에 이렇듯 효험을 보이니 놀랄 노자가 아니냔 말이지?”
전륭과 왕정과 태웅호와 진심으로 다시 탄복해 마지않았다.
행로 중에 현산이 구해온 약초 아닌 약초들을 복용하고 바르고 했더니 부상은 놀랍게 호전 중이다. 현산만의 아는, 사부 정두헌에게서 배우고 익힌 산야초의 처방과 복용, 정확한 분량조절과 배합이 만든 결과다.
“도대체 자네는 어디서 그런 방법들을 배운 것인가?”
탄복하는 눈빛으로 전륭이 물었지만 현산이 모닥불을 응시하며 대답하지 않았다.
전륭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걸 보지 못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사부 정두헌에게서 가르침 받던 날들, 호보촌사람들, 그날의 참화.
“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어색함을 밀어내며 전륭이 육포를 불에 구우려 할 때 변화가 생겨났다.
“어?”
왕정이 놀란 눈으로 하늘을 봤다.
어둑함을 밀어내고 아침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가르며 화전(火箭)이 비상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신호전(信號箭)이다.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이번엔 명시(鳴矢)가 날아오른다.
“불 꺼!”
현산이 일어서며 외쳤고 태웅호가 바로 모닥불을 덮었다.
* * *
“크으······!”
고통스러운 신음을 악문 이 사이로 흘려내며 황병기는 장운을 봤다.
피칠갑이 된 장운의 상처와 부상은 팔 하나가 잘린 자신에 못지않다.
무엇보다도 큰 상처는 저 가슴속이다.
동료이자 수하들인 금위들을 잃었다.
‘무도한 것들! 감히 황제의 명을 받드는 어사와 금군을 해치다니!’
분노로 치를 떤 황병기는 추적자들의 지독함에 새삼 다시 치를 떨었다.
화산파의 악도 벽송자를 너무 쉽게 봤다.
놈의 배후가 지금 이 상황을 만들었다.
화산은 무도하게도 벽송자를 요구했고 거절하자 공격했다.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세상, 강호무림인이라 하는 족속들의 성향에 본래 그러하다고는 해도, 작금의 상황은 대명황실이 자초한 것이야.’
화산은 저희가 직접 검을 휘두르지도 않고 있다.
제천무림맹이 그들의 칼 노릇을 하고 있다.
기존의 금룡단과 청운단 등의 조직을 재편해 만든 제천단, 그놈들이 지옥의 야차처럼 칼을 그어대며 쫓아오고 있다.
‘제천무림맹,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화산의 주구노릇을 하다니······!’
제천무림맹의 현 성세가 예전만 못해서 이뤄진 일이다.
청성과 종남과 공동이 떨어져 나가고 자금은 바닥이 나 점점 기울어 가는 마당, 화산이라는 뿌리 깊은 힘 하나만이라도 잡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가 이리했다.
‘그래, 아직은 섬서 땅이 너희의 것이란 말이지?’
더 정확하게는 그리 만들고 싶다는 여망이고 바람이다.
섬서땅은 본시부터 화산파와 종남파가 뿌리 내린 곳이다.
혁리세가가 자리 잡은 서안을 중심으로 동쪽엔 화산이, 남쪽에 종남산이 버티고 있다.
그들이 주인이다.
화산과 종남, 구대문파의 일익인 그들이 주인임을 그 누가 부정하랴.
그들은 주인행세를 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주인임을 천하가 알아서다.
그러한데 혁리세가는 그 아성을 깨고 주인이 되고자 발버둥치고 있음이다.
‘너희 중에 누가 마지막에 웃을지 모르지만······ 제기랄, 지금 그런 생각할 때가 아니지.’
고통을 참으며 황병기는 돌아보는 장운과 눈을 맞췄다.
“이 자리에서 누군가 불을 피웠습니다.”
황병기는 미간을 좁혔고 장운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말했다.
“이동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앞을 막지 않은 것이나 정황으로 판단하건데 적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명시 등을 보고 급히 이동한 겁니다.”
“적은 아니란 말이지?”
장운은 고개를 끄덕였고 황병기는 눈으로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하냐는 물음, 그런데 그건 상관인 자신이 내려야 할 결정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쫓기는 와중, 접전시의 판단과 결정은 장운이 하는 게 맞음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연하(延河)가 흐릅니다. 강을 건너가면 장성경비를 책임진 군병들의 후방 위소에 닿을 겁니다. 그곳까지만 고생하십시오.”
황병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가자.”
장운과 황병기, 두 사람은 떠오르기 시작한 햇살을 받으며 달려갔다.
* * *
모닥불 피웠던 자리를 손으로 만지고 혀끝에도 대보는 자, 사천제일 추종객 초요를 보며 벽송자는 이를 갈았다. 이곳을 거쳐 연하 쪽으로 도주한 놈들, 어사 황병기와 호위무장 장운이란 놈을 생각하며 치를 떨었다.
‘하룻강아지 같은 놈들, 감히 화산을 건드려? 이제 곧 네놈들을 잡아 뼈를 발라내고 심장을 가른 후, 머릴 열고 골을 꺼낼 것이다. 종이호랑이만도 못한 황제의 새서를 지녔다고? 핫,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지!’
제형안찰사사에 압송되어 갔던 일을 생각하며 벽송자는 부드득 또 이를 갈았다.
그곳에서 당한 수모와 곤욕을 생가하면 숨도 안 쉬어진다.
천만다행하게도 황병기란 놈이 죽인 화현지현 부함덕이란 놈의 덕을 봤다.
그놈이 조정의 실세인 병부시랑의 사촌아우였다.
부함덕을 베어버린 황병기, 그 사실을 안 병부시랑 부일현이 대노해 조치했고 황병기는 황명을 빗대어 권력을 남용한 죄로 압송될 신세가 됐다.
전세역전의 일인 거다.
‘본산의 압력도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화산에서 엄중하게 항의하고 압력을 전했기에 안찰사가 시간을 끌었다.
그사이에 조정의 병부시랑 부일현의 힘이 닥친 것, 황병기는 끈 떨어진 연이 됐다.
놈이 다시 반전의 기회를 만들기 전에 모가지를 쳐야 한다.
‘화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장문인에게서 내려온 엄중한 명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화산의 명예를 회복하라는 명, 그 일을 위해 제천무림맹을 앞세웠다.
이 복잡하고 엄중한 상황의 책임을 통감한다.
그러니 기필코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
‘황병기 네놈을 먼저 잡아 죽이고 그놈을······!’
현산이란 이름의 젊은 도객을 떠올리며 벽송자는 이를 갈고 치를 떨었다.
그놈과 싸우던 당시를 떠올리면 분노와 함께 놀람이 곤두선다.
놈은 매화검을 받아냈다.
놈이 검을 손으로 받아내 반격하던 순간이 생생하다.
‘그놈······’
생각을 깨는 목소리가 그 순간 다가왔다.
“이 곳에 최소한 셋 이상의 인물이 있었습니다.”
사천제일 추종객 초요, 깡마른 얼굴에서 빛나는 날카로운 눈동자를 응시하며 벽송자는 이야기를 들었다.
“떠난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최대 이각(삼십분) 안쪽입니다. 그 후에 놈들이 이곳을 지나쳐 갔습니다. 출혈 흔적도 치우지 못한 걸로 봐선 많이 지쳤습니다. 강을 넘을 목적이 확실합니다, 군병위소가 목적이겠지요.”
벽송자는 냉소를 흘려냈다.
“흥, 그놈이 아직도 착각 속에 있음이다. 위소를 찾아간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음이야. 그런데도 이리하는 건 최후의 희망 같은 것이지. 장운이란 무장 놈의 인연이 있거나 뭐 그런 것, 그것마저 부수고 잡는다.”
차가운 냉소의 얼굴로 옆을 돌아본 벽송자는 제천단 부단주 명일하와 눈을 맞췄다.
“그대들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시간일세.”
서른을 갓 넘긴 혈기왕성한 무인 명일하는 검을 뽑아들고 백인의 제천단 무사들에게 외쳤다.
“연하의 강줄기를 자르고 놈을 잡는다!”
와아 하는 함성으로 검을 뽑아든 백인의 제천단은 맹렬하게 말을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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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5. 그 땅을 다시 밟으며(2)
2.
수룡처럼 강을 헤치며 배를 끌고 가는 현산을 보며 전륭과 왕정과 태웅호와 진소향은 또다른 놀람과 경탄을 삼켰다. 이제 완연하게 해가 떠올라 사위가 밝은 시간, 나룻배를 찾아낸 도강은 빠르고 안전하게 되고 있다.
현산의 능력덕분이다.
강을 목적지로 빠르게 이동했고, 강가수풀 속에 숨겨진 나룻배를 찾아냈으며, 줄을 몸에 매고는 저렇게 잉어처럼 강을 가르고 헤엄친다.
거친 물살을 아랑곳 않는 저 수공은 놀랍기만 하다.
네 사람의 경탄과 긴장 속에서의 도강은 현산이 몸을 일으키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전륭이 가장 먼저 몸을 날렸고 왕정과 대웅호가 강가에 착지하자마자 진소향이 남아 있는 나룻배를 끌어올렸다. 그런데 현산은 다시 물속이다.
“엇, 그만두래도!”
전륭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현산은 격류를 가르고 강을 헤엄쳐 나갔다.
하류로 몸을 쓸고 가려는 강물의 격렬한 힘을 온몸으로 느끼며 기억을 떠올렸다.
사람을 일곱 번 죽인다는 가릉강 칠살협에서의 수련이다.
‘그때는 정말로 매일 매일이 죽음이었어.’
힘들었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련의 날들이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목숨을 잃고 말았을, 가릉강 칠살협의 수련은 생사가 혼재한 것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연하의 이 물결은 부드럽고 간지러운 재롱이다.
‘기다려라.’
강가에 매어놓은 말들을 향해 현산은 진정 수룡처럼 강을 가르고 나갔다.
건너에서 보고 있는 일행들의 눈이 놀라 커질 정도로 삽시간에 강을 가로질러 말고삐를 잡았다. 강물을 보고 뒷걸음질하는 놈들을 달랬다.
“쉬쉬, 괜찮아.”
흥분하고 두려워하는 말들을 달래고 쓰다듬어 진정시킨 현산은 강에 다시 몸을 던졌다.
본능적인 몸짓으로 헤엄치지만 강물에 떠내려가는 말들을 잡아당기며 강물을 헤엄쳤다.
다섯 마리의 말은 그 힘에 끌려갔다.
* * *
“헉 헉, 헉, 헉.”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강가에 다다른 황병기는 자신만큼 어깨를 들먹이며 주변을 훑어보는 장운을 응시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눈에 봐도 거칠고 강한 강물이다.
배가 없으면 넘어갈 수가 없을 지경이다.
‘제기랄······!’
겨우내 얼어 있던 눈이 녹으면서 강물이 불어난 때문이다.
가물 때는 바닥이 보이는 곳이 있을 정도 마르기도 한다는 연하인데, 도망치는 이 발길을 잡으려는 것인지 저렇게 성난 물살로 넘실거리며 흐르고 있다.
“배가 있습니다!”
나룻배를 발견한 장운이 소리치며 바로 달려갔다.
강가의 바위 뒤로 숨기듯 엎어져 있는 것, 낡고 작은 배다.
어디서 나는 힘인지 모르게 일어선 황병기도 휘청거리며 달려갔다.
그런데 장운이 배 앞에 선 채 굳어 있다.
“왜 그래?”
헐떡이며 장운 곁에 선 황병기는 원인을 봤다, 엎어진 나룻배를 보고 장운이 움직이지 않고 굳어버린 이유다.
구멍이 나 있다.
돌덩이를 내리친 듯 커다란 구멍, 안쪽에 머리통보다 큰 돌덩이가 비웃듯이 보인다.
“하.”
기력이 빠져나가는 몸을 수습하지 못하고 황병기는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그 순간 장운은 뒤를 돌아봤다.
자신들이 도주해온 강안 수풀 저편에서 피어나는 먼지바람, 적들은 이제 잠시 후면 들이닥칠 것이다.
“결정하셔야겠습니다.”
비장한 장운의 목소리에 반응하며 고개를 든 황병기는 이를 으스러지게 악물었다.
결정, 그래야 할 때가 왔다.
이대로 죽음을 무릅쓰고 강물로 몸을 던지든지, 닥쳐오는 적들을 맞이해 장렬하게 싸우다 죽을 것인지.
‘희박하게라도 살 길은 강물.’
그렇다, 벽송자가 이끌고 오는 제천무림맹의 제천단놈들은 황병기 자신과 장운을 죽이려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고자 한다. 그러니 강물을 택하는 것이 낫다.
죽더라도 욕됨을 피하는 길, 정해진 선택이다.
“나와라!”
장운이 그 순간 소리쳤다.
격류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황병기가 일어서려던 순간이다.
군검을 움켜쥔 장운이 무섭게 노려보는 수풀이 움직였다.
그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자는 사내, 두 사람이 아는 얼굴이다.
“자, 자네!”
황병기가 놀람과 반가움으로 눈을 크게 뜨며 일어섰다.
장운도 뜻밖의 사람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반응으로 눈썹과 미간을 바르르 떨었다.
“다시 뵙게 됐습니다.”
정중한 음성으로 인사하며 빠르게 다가온 자, 현산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 순간 이곳에서 조우하게 된 연유와 두 사람의 행색과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오직 지금은 이것만이 중요하다는 눈빛과 목소리를 전했다.
“이걸 몸에 매십시오.”
현산이 건넨 것은 가죽수통, 물은 없고 공기가 들어 팽팽한 것이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는 두 사람에게 설명하는 대신 돌덩이를 든 현산은 엎어놓은 나룻배를 향해 내리쳤다. 두 번째 구멍이 더 크게 생겼다.
“이, 이거, 자네가 이리 해놓은 것인가?”
황병기의 물음에 현산은 다른 대답을 했다.
“근처에 다른 배는 없습니다. 하류로 이어진 지형과 물살의 방향과 세기 등을 보건데 이곳에서 족히 오리(五里)는 내려가야 물길이 약해집니다.”
그렇다는 거다.
현산이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여기서 강을 건넌다는 것.
그걸 위해 공기를 채운 가죽수통을 몸에 엮으란 거다.
그건 알겠는데 강은 어떻게 건널 것인가? 오리 아래로 휩쓸려 내려가자는 계획인가?
“현산 자네가 이곳에 어떻게, 아니, 그건 나중 문제고, 가죽수통을 안고 떠내려가자는 소린가?”
황병기의 물음에 바로 이어 장운이 물었다.
“불을 피웠던 이들의 흔적, 그대인가?”
대답대신 강물 건너로 시선을 던진 현산은 해야 할 말을 했다.
“두 분을 이끌고 나갈 겁니다. 추적자들은 쫓아오지 못할 겁니다.”
황당한 표정의 황병기와 날카로운 눈빛을 내는 장운에게 현산은 아주 담담히 말했다.
“죽음을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 * *
“서둘러라!”
제천단을 독려하며 말달려가는 부단주 명일하를 보며 벽송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수풀로 가리워진 강안은 이제 코앞이다.
소리를 들어보니 물살이 거세다.
얼음과 눈이 녹아내려가는 시기, 놈들은 앞이 막혔다.
‘배가 없다면!’
만일 배를 구했다면 도강을 시도할 터, 하지만 인적이 아예 없는 이러한 곳에 배가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애초부터 놈들이 도주로를 잘못 선택한 측면, 역으로 보면 몰이를 그만큼 잘한 거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버려진 나룻배라도 있다면.’
어금니를 물며 말 달린 벽송자는 강안 수풀을 지나갔다.
그 순간 트인 시야 안에 들어오는 강을 봤고, 강물 중앙을 가르는 그림자들을 봤다.
“놈들이 강을 건너간다!”
강가에 선 제천단부단주 명일하의 외침을 귀에 박으며 벽송자는 소리쳤다.
“화살을 발사해!”
명일하는 바로 지시했고 백인의 제천단 무사들은 안장에서 활을 꺼내 당겼다. 만월처럼 휘어진 그 활들이 화살비를 강물로 쏘아 보냈다.
새카맣게 허공을 엎어 내리는 화살비를 돌아본 현산은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숨을 크게 마셔요!”
무슨 소린지 알아들은 장운은 큰 숨을 들이마셨다.
황병기도 반 박자 늦게 인지하고 그랬다.
자신들 둘을 줄어 엮어 끌고 헤엄쳐 나가는 현산이다.
당황에 이은 경탄과 놀람에 이어 이제는 무조건 신뢰할 때다.
현산은 그야말로 강물을 지배하는 수룡처럼 수면 아래로 잠수했다.
호흡을 멈춘 장운과 황병기가 막 끌려들어갔을 때 화살비가 수면을 때렸다.
흉악한 살촉의 이빨들은 물속을 헤집고 들어왔지만 이내 휩쓸려나갔다.
강가로 달려가 멈춘 벽송자는 눈에 힘을 주고 강물을 봤다.
화살비가 쏟아져 내린 지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데 예상하는 모습이 안 이어진다.
고슴도치가 된 놈들이 떠올라 휩쓸려 내려가는, 그게 안 보인다.
‘저놈들이 잠수를 한 이유가?’
불안한 예감을 이 사이에 문 벽송자는 애초의 상황을 더듬었다.
이 격류를 헤엄쳐 건너가는 놈들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놈들은 강의 반을 건너갔다. 격류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는 소리다.
‘세놈이었어!’
뒤늦은 자각으로 벽송자는 눈썹을 확 곤두세웠다.
‘누가?’
격류 속에서 본 인영은 분명 셋이었다.
추적하던 황병기와 장운이란 무장놈을 제외하고 하나가 더 있음이다.
부상당한 두 놈을 그놈이 끌고 헤엄치는 거다.
이 거친 강물 속에서 그자체가 황당하지만, 분명 그런 상황이다.
‘이놈들이······!’
새로운 자각 속에 치미는 분노를 눈동자로 발산하던 벽송자는 그 순간 봤다.
강물 위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놈들이다.
한 놈이 수룡처럼 앞에서 끌며 헤엄치고 황병기와 장운이란 놈이 끌려가는 모습, 딱 그대로다.
“배를 찾아!”
격렬한 외침으로 터진 벽송자의 분노 속에 제천단은 강가를 헤집었다.
그렇게 배 하나를 바로 찾아냈는데, 커다란 구멍이 두 개나 난 나룻배다. 그걸 본 벽송자가 떨리는 분노로 부들거리는데 추종객 초요가 다가왔다.
“추혼삭을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깡마른 얼굴의 초요가 내미는 쇠사슬, 추혼삭을 보고 벽송자는 눈을 치떴다.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았다.
벽송자 자신의 내력화후면 강 건너로 추혼삭을 던질 수 있을 터, 밧줄을 연결해 강을 건너자는 이야기다.
‘이놈들, 반드시 잡아 죽인다!’
낚아채듯 추혼삭을 받아든 벽송자는 초요가 밧줄을 연결하는 동안 강을 노려봤다.
적당한 위치가 보인다.
집채만한 바위 두 개가 몸통을 맞대고 있다.
그사이에 추혼삭의 추를 던져 끼우면 줄다리가 이뤄질 것이다.
“됐습니다.”
초요가 물러서자 벽송자는 추혼삭의 무게와 밧줄의 길이 등을 가늠했다.
초요의 밧줄과 제천단이 가진 밧줄을 연결한 길이가 충분하다.
강물에 한 발을 담그듯 딛고 서서 추혼삭을 돌려 회오리를 만들었다.
‘저놈!’
작은 회오리를 만들던 벽송자는 눈을 있는 대로 치떴다.
마침내 강을 건너 몸을 일으킨 놈들, 황병기와 장운의 휘청거림과 달리 꼿꼿하게 서서 이쪽을 응시하는 놈, 저놈은 그놈이다.
현산이라는 놈, 죽여야 할 놈이다.
‘이게 무슨!’
황당함으로 추혼삭 휘돌리기를 주춤했던 벽송자 이를 갈아부쳤다.
‘오냐 좋다! 네놈들을 한자리에서 죽이게 됐구나!’
벽송자는 있는 힘을 다해 추혼삭을 던졌다.
의도한대로 추혼삭의 추는 바위틈을 정확히 파고 들어갔다.
그 순간 보니 현산이란 놈이 몸을 돌린다.
“줄을 팽팽히 당겨 연결하고 강을 건너라!”
제천단부단주 명일하는 명령했고 벽송자는 두 번째 추혼삭을 던졌다.
황병기와 장운을 먼저 이동하게 하고서 혼자 남아 있던 현산, 이제야 몸을 돌려 달려오는 그를 보고 있던 태웅호가 일행들을 돌아보고 말했다.
“저놈들이 곧 강을 건널 겁니다. 그러기 전에 이동해야 합니다.”
그러든가 아니면 추혼삭을 제거하든가다.
현산을 도와 다 같이 행동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도 임시방편, 시간을 벌어 도주한다고 해도 인적 물적자원이 풍부한, 모든 면에서 유리한 저들을 떼기 힘들다.
“기다리라 한 이유가 있을 걸세.”
전륭이 경험 많은 자답게 침착한 긴장으로 말을 냈다.
잘린 팔을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던 황병기는 바로 뜻을 읽었다.
예상치 못한 활약과 능력을 보여주는 현산이다, 도주가 아니라 기다리라 한 목적이 있을 터다.
‘설마?’
한 가닥 떠오르는 생각을 황당함으로 치부하고 털어낸 황병기의 앞에, 긴장한 숨으로 수풀 뒤에 은신한 일행 앞에 그 순간 현산이 닥쳐왔다.
털끝만큼의 위축과 긴장도 없는,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음성으로 말한다.
“저들을 여기서 잘라낼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왕정과 태웅호의 시선을 받으며 현산은 명확한 뒷마을 냈다.
“저 강물 속에 수장할 겁니다.”
왕정과 태웅호는 헛하는 소리로 반응했고 전륭은 입을 딱 벌렸으며 황병기는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고 장운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모두가 한 가닥 불안한 예감으로 품던 것, 하지만 터무니없던 것,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잘라내야만 계속 갈수 있습니다.”
시퍼렇게 번득이는 안광으로 결론을 낸 현산은 다시 일어서 돌아섰다.
“기다리십시오.”
그 말을 남기고 강으로 달려가는 현산을 일행들은 경직한 채 봤다.
성난 대호처럼 질주한 그가 무섭게 도약해 추혼삭을 묵빛칼로 내리치는 모습을, 도강하던 적들이 강물에 휩쓸리는 광경을 보며 얼어붙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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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5. 그 땅을 다시 밟으며(3)
3.
“어서 건너가라!”
잡아당긴 밧줄을 커다란 바위에 돌려 묶은 제천단부단주 명일하의 명을 따라 제천단 무사들이 도강을 시작했다.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줄 위로 엎드려 잡아당기며 전진해 나갔다. 그런데 빠른 그 대응에 반응이 왔다.
“저놈이 돌아온다!”
누군가의 외침처럼 현산이 강가로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두 번째 추혼삭을 엮고 세 번째 추혼삭을 돌리던 벽송자는 그걸 보고 눈을 치떴다.
도망친 줄 알았던 놈이 되돌아 달려오는 저 모습의 답은 하나다.
‘저놈이!’
부릅뜬 눈으로 벽송자는 그 광경을 봤다.
현산이 성난 맹호처럼 도약해 올랐다가 묵빛 칼을 내리치는 모습, 추혼삭이 불꽃을 내며 잘리는 광경, 장력을 잃은 밧줄이 흐트러지고 제천단무사들이 강물에 떨어지는 모습.
“죽일 놈이!”
참을 수 없는 격노로, 본능적으로 벽송자는 반응했다.
휘돌리던 세 번째 추혼삭을 던졌다.
강 건너 현산을 향해서다.
추혼삭의 추는 마치 창날처럼 비상해 나갔고, 정확하게 현산의 형상을 노리고 꽂혀 들어갔다.
그렇지만 바라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묵빛 칼의 가름에 튕겨나갔다.
“이익!”
벽송자는 벼락같은 신법으로 움직였다.
제천단무사의 손에서 활과 전통을 낚아채 두 번째 추혼삭의 밧줄에 올랐다.
출렁이는 요동 속에 강을 건너려는 제천단 무사들의 등과 머리를 밟으며 평지처럼 달려갔다.
“이노옴!”
격노로 잡아당긴 벽송자의 활에서 토해져 나오는 화살은 정말로 벼락이었다.
끊어진 줄을 삼켜버린 강물, 그 속으로 같이 삼켜진 제천단 무사들의 비명조차 없는 휩쓸림을 차갑게 응시한 현산은 지체하지 않았다. 두 번째 추혼삭 밧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강 건너에서 추혼삭이 날아왔다.
달려가던 힘을 칼에 실어 후려쳐내고 보니 그다.
화산의 일대제자 벽송자다.
악연으로 얽힌 인물, 그 악연이 이어져 지금 이렇게 다시 만났다.
잘라내지 않으면 언제고 다시 이어질 악연이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죽인다!’
강력한 의지와 살기를 전신으로 뿜어내며 현산은 움직였다.
두 번째 추혼삭을 끊기 위해서다.
그런데 벽송자가 제천단 무사들을 밟고 줄 위로 올라서 달려온다.
경탄스러움을 넘은 신법과 경공, 오행매화보와 암향표다.
‘악적 도사놈이!’
그야말로 벼락처럼 화살을 발사하는 벽송자의 능력에 현산은 놀람을 삼킬 사이도 없이 흑천을 휘둘렀다. 두 번째 추혼삭으로의 접근을 막는 벽송자의 공격, 전신을 파고드는 화살을 받아치는 것만으로 휘청거린다.
역시 화산 일대제자의 위용, 고수의 면모이자 힘이다.
화살에 실려오는 역도를 이렇게 정면으로 맞받는 것은 현명치 않다.
체내에 그 충격의 기운이 쌓인다.
벽송자가 노리는 것의 하나다. 적의 뜻대로 될 순 없다.
오른 발을 뒤로 빼며 왼발을 축으로 현산은 돌았다.
팽이처럼 휘돌며 날아오는 화살을 받아쳤다.
직전과는 달리 회전하는 힘으로 비껴치는 형국, 체내에 쌓인 힘을 동시에 풀어냈다.
그러다 강물로 몸을 던졌다.
소용돌이 같은 모습으로 강물을 파고든 현산은 다시 떠오르지 않았다.
‘이놈이?’
거칠게 성을 내는 강물 속으로 숨어버린 현산을 찾아 벽송자는 눈을 치떴다.
일부러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진 놈의 의도가 명확해서다.
자신을 숨기고 드러나 있는 대상을 공격하겠다는 것, 그럴 능력을 가진 놈이다.
‘도대체 이놈의 정체가 무엇이야?’
분노와 당황과 긴장의 이 순간에 벽송자는 그 의문을 다시 씹었다.
현산이라는 이름만 알뿐인 저 놈은 벽송자 자신의 검을 받아냈었다.
어처구니없지만 놈에게 창피를 당할뻔했다.
아니 명확히 말하자면 창피당했다.
‘내 어깨에 칼질하고 발길질 한 놈, 수공을 이렇게까지 익힌 놈이라니······!’
흔들리는 밧줄 위에서 이를 악문 벽송자는 본능적인 위기를 감지했다.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이대로 있으면 현산의 역공을 맞을 것이라는, 그러니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직감이다. 그러나 한 박자 늦고 말았다.
‘헛!’
요동치는 강물위로 그림자가 치솟았다.
현산, 놈의 먹빛칼이 도광을 뿌렸다.
수면을 차고 오르는 잉어처럼 치솟은 현산은 밧줄을 잘랐다.
장력이 사라진 밧줄은 첫 번째처럼 강물에 삼켜져 휩쓸렸고, 거기 붙어 있던 제천단 무사들도 그랬다.
첫 번째 이십 명 이번에는 열다섯이 강물에 먹혔다.
‘남은 놈들!’
다시 강물 속으로 스며든 현산은 시퍼런 안광을 풀어내며 제천단 무사들을 향해 나갔다.
끊어진 밧줄에 매달린 놈들, 강가에서 밧줄을 잡아당기는 놈들을 노리는 수룡이 되어, 수초처럼 흔들리는 놈들을 갈랐다.
줄이 끊어지는 순간, 현산이 확실한 그림자가 강물위로 솟구치는 찰나, 벽송자는 몸을 돌려 전력으로 경공을 전개했다.
오행매화보를 이처럼 처절하게 펼친 적이 있을까, 끊어지는 밧줄을 차고 강 건너로 도약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고 결과, 현산이란 놈이 황병기와 장운을 넘겨준 강 건너쪽이 더 가까워서다.
그렇지만 먼 거리, 강물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강중심이 아니어서 힘이 약하다.
“헉! 으헉!”
강물에 구르는 돌멩이처럼 벽송자는 미친 듯이 휩쓸려 갔다.
수공이라곤 배워 본적이 없기에 물을 미친 듯이 먹었다.
그래도 살겠다는 의지와 화산일대제자로서의 무공과 능력으로 허우적허우적 강가로 헤쳐 나갔다.
“쿠웩!”
먹은 물을 토하며 진저리를 친 벽송자는 흔들리는 고개를 들어 봤다.
자신은 삽시간에 이십여장이나 떠내려 왔다.
강 중앙이었다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강물 속에서 발버둥친 때문인지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빌어먹을······!’
분노와 치욕스러움에 이를 악물던 벽송자는 처절한 비명을 들었다.
치뜬 눈으로 제천단이 있는 강 건너를 보니 명확한 상황이 보인다.
강물에서 튀어나간 현산이 제천단 무사들을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토막치고 있다.
‘저놈이!’
벌떡 몸을 세운 벽송자는 부릅뜬 눈으로 숨을 멈췄다.
격랑으로 흘러가는 강물의 색이 벌겋다.
제천단 무사들의 피, 바위에 부딪치며 떠내려가는 것은 몸뚱이다.
잘린 줄을 잡고 살겠다고 발버둥치던 놈들이다.
‘저놈을!’
검을 움켜잡고 벽송자는 강가를 달렸다.
처음 현산이 추혼삭을 끊어버린 지점까지, 안 떠내려갔다면 자신이 본래 넘어갔어야 할 위치로 달렸다.
그곳에 멈췄다. 하지만 강 건너를 보고 부들거릴 뿐 넘어갈 방법이 없다.
‘저놈은 악귀로구나!’
혼자서 제천단 무사들을 도륙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현산을 보며 벽송자는 치를 떨었다. 그 몸서리가 분노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열둘.’
베어 넘긴 제천단의 숫자를 세며 현산은 강안 수풀을 향해 질주했다.
본래 숫자에서 이미 반이나 줄어들은 제천단이지만 아직도 오십여명이 남아 있다.
합격진법을 위주로 한 공격을 펼치는 저들의 기회를 차단함이다.
‘와라!’
수풀 사이로 달려 들어간 현산은 광기에 사로잡혀 달려드는 제천단 무사들을 하나씩 베어 넘겼다. 비좁고 거칠게 자란 강가수목들을 이용해 피하고 뛰며, 바위 아래로 구르고 돌을 던져 제지하며 차례로 갈랐다.
황당한 충격으로 벽송자는 눈을 흔들었다, 수염과 뺨을 경련했다.
건너가지 못하는 강 저편에선 일장의 도살극이 벌어지고 있다.
어찌 저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 있을까 싶게, 황당하게 제천단놈들은 갈라지고 있다.
‘저렇게 싸우는 놈이라니······!’
감탄을 넘어 두려움이 든다.
그렇다, 이건 두려움이다.
현산이란 저놈이 싸우는 모습, 저 방식은 무섭다.
제 주변의 지형지물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
혼자서 제천단 일백 무사를 저렇게 도륙할 수 있는 이유다.
‘아무리 제천무림맹의 성세가 전과 같지 않다고 해도······!’
제천단이란 이름을 한 저놈들은 과거의 청운단이나 금륭단에 비할 수 없는 놈들인 건 분명하다. 혁리세가에 합세했던 명문이나 유명방파등의 세력이 다 발을 뺀 마당, 남아있는 놈들을 어찌어찌 규합한 것이 제천단이다.
그래도 흑사자단이라고 부르던 화살받이 놈들과는 다르다.
전장의 경력을 바탕으로 경험과 무공이 충분한 놈들이다.
그런데 저렇게 당하고 있다.
저건 늑대무리에 맹호가 뛰어들어 유린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성난 늑대 떼는 호랑이를 물어 죽이기라도 하지!’
치미는 분노와 충격으로 벽송자는 전신을 부들거렸다.
그러노라니 생각이 미친다.
현산이란 저놈이 먼저 강을 넘겨 보낸 놈들, 황병기와 무장 장운이다.
그놈들을 죽이고자 이렇게 쫓아온 거다. 그놈들이 여기 있다.
섬뜩한 살기를 눈동자로 폭사하며 벽송자는 돌아섰다.
‘일흔 셋!’
목을 친 제천단 무사놈을 어깨로 받아 밀며 현산은 수풀 밖으로 튀어나갔다.
남은 놈들이 도망치고 있어서다.
수령이 분명한 놈, 복장이 다른 놈이 선두로 말을 달려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말을 잡아타고 쫓았다.
“이랴!”
말배를 차고 강가를 질주하며 현산은 안장의 활을 잡아 화살을 쟀다.
살기 위해 수하들도 버리고 도주하는 수령놈을 노리고 잡아당긴 시위를 놓았다.
핑, 하는 소리를 남기고 날아간 화살은 말엉덩이를 정확히 맞췄다.
고꾸라지는 말 위에서 튕겨나가는 수령놈, 놈의 주변에 다른 놈들은 없다.
현산 자신이 노리는 게 저놈이라는 게 명확한 마당, 사방으로 말을 달려 도망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령놈이 목표, 말등을 차고 나갔다.
“으와아!”
발악 같은 괴성을 지르며 검을 움켜쥔 제천단 수령놈, 부단주 명일하에게 현산은 쇄도했다.
머리위로 세운 흑천을 착지와 함께 내리쳤다.
장작을 내리쳤을 때의 느낌을 온몸으로 인지하며 목표한 놈을 스쳐지났다.
몸을 돌리는 현산의 곁에서 둘로 갈라진 명일하가 허물어졌다.
강 건너에서 들려오는 단말마와 같은 괴성에 멈춰서 고개 돌렸던 벽송자는 으드득 이를 갈며 어깨를 떤 후에 다시 앞을 봤다. 이제는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는 기척, 숨기려 하지 않는 놈들의 숨소리가 숲에서 나온다.
“황병기!”
이득 이를 갈아 부친 장운이 겨우 피를 닦아낸 얼굴에 살기를 곤두세웠다.
“여기서 끝장을 내야 합니다.”
현산의 말과 같은 맥락, 그래야 할 상황과 결론임을 모두가 공감했다.
전륭 등의 입장에선 난데없이 날아든 횡액이랄 수 있지만, 내막을 듣고 보니 현산도 피할 수 없던 일이다. 그가 강 건너 적들을 모조리 갈랐다.
“상대는 화산파의 고수입니다.”
왕정이 무거운 음성으로 현실을 거론했다.
그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상대에 대한 명확한 현실을 알고 하자는 것이다.
화산파의 일대제자, 그 존재감은 허울이 아니라 엄정한 현실이다.
“저자의 이목과 손을 피해 달아날 길도 없습니다.”
장운이 군검을 움켜쥐고 결의를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벽송자가 강 건너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 이젠 피할 수 없음이다.
방법이란 오직하나, 싸워서 이기는 것뿐이다. 모두가 합심해야 한다.
“현산이 곧 넘어 올 겁니다. 합시다.”
전륭이 결론을 뱉어낸 순간 모두가 시퍼런 눈을 빛내며 숲을 나갔다.
“호오.”
조롱이 분명한 표정으로 벽송자는 매화검을 가볍게 흔들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들, 황병기의 호위무장인 장운이란 놈만이 아니다.
현산놈의 일행이 분명한 놈들이 함께다.
칠척거한 놈은 특히나 눈에 들어온다.
“그래, 살기 위한 발악들을 해 봐라.”
차가운 살기의 미소를 뿌리며 벽송자는 걸음을 냈다.
“네놈들에게 줄 것은 죽음이다!”
거친 고함으로 살기를 터트린 벽송자는 암향표를 전개하며 화산매화검을 펼쳤다.
강을 맹렬하게 질주하며 현산은 눈을 부릅떴다.
벽송자가 검으로 매화를 그려내는 것, 그 힘을 장운이 받아내는 것, 그가 피를 뿌리며 튕겨나가는 순간 왕정과 태웅호와 전륭이 덤벼드는 걸 보며 강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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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5. 그 땅을 다시 밟으며(4)
4.
전력을 다한 일격, 화산매화검의 정수인 매화칠로(梅花七路)의 일격을 놈이 받아냈다.
장운이라는 놈, 금의위 무장이 분명한 놈이다.
놀랍게도 벽파검문주 제성호보다 검이 빨랐던 놈, 선두로 나서기에 온 힘을 다했다.
‘놈!’
됐다, 검이 피워낸 매화로 놈의 검을 동강냈다.
피를 뿜으며 뒹구는 놈의 모습을 보니 다시 일어설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일은 다 된 거다.
가장 강한 상대를 쓰러뜨렸으니 나머지 놈들을 베는 건 여반장이다.
‘허접한 것들이!’
달려드는 놈들 중에 장운보다 강한 놈은 없다.
그러니 장운이 부상당한 상태였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
도주하는 과정에서의 부상이 누적된 결과, 사형 벽암자의 검이 만들어 놓은 무서운 결과인 거다.
그 누구도 화산 일대제자 매화절암검 벽암자의 검을 제대로 받아낼 수 없음이다.
장운이란 놈이 그 자리에서 피토하고 죽지 않은 것은 사형 벽암자가 손속에 사정을 둬서다.
그렇기에 저놈들이 도망칠 수 있었다.
그렇게 사형 벽암자는 돌아섰다.
눈빛으로 말했다. 뒤처리를 말끔히 하고 화산으로 돌아오라고.
그 명을 지금 받들고 있다.
거의 다 됐다. 장운이란 놈이 정상이었다면 힘겨운 싸움이 됐을 테지만, 이놈들만 베면 된다.
‘모조리 죽여 버린다!’
온몸으로 살기를 발산하며 벽송자는 매화검을 뿌렸다.
그런데 그 순간 전륭이 손을 뿌렸다.
매캐하고 뿌연 가루가 자욱하게 퍼졌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린 그것이 뭔지 몰라 벽송자는 숨을 멈추고 신형을 뺐다.
‘독분!’
독이라고 판단한 벽송자는 검풍을 일으켜 독분을 가르고 밀어내며 뒷걸음질했다. 그런데 독분 아래로 두갈래 도광이 발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이놈들이!’
훌쩍 뒤로 도약해 피하며 격노를 삼킨 벽송자는 공격한 두 인영의 정체를 봤다.
민대머리 칠척거한 태웅호와 평범한 얼굴에 칼날 같은 눈을 한 왕정, 그들의 사이로 대도를 쥔 전륭이 합세해 다시 달려오는 모습이다.
‘이것들이!’
치미는 격노를 이갈아 뿌리며 벽송자는 다시 걸음을 냈다.
그러나 바로 멈췄다.
뒤로부터 닥쳐오는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기세가 섬뜩하다.
바람처럼 돌아선 벽송자는 기운의 정체를 봤다.
‘놈!’
현산, 그놈이다.
놈이 묵빛 칼을 치켜들고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다.
강물을 박차고 나와 땅에 발을 딛자마자 현산은 온힘을 다해 달렸다.
장운이란 이름의 무장을 피 토하며 뒹굴게 만든 자, 화산의 일대제자 벽송자를 향해 맹호처럼 질주했다.
그래야 한다, 늦으면 일행들이 위험하다.
“장운!”
호위무장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간 황병기는 한 팔로 부축해 안았다.
울컥거리며 입안에 남은 피를 게워낸 장운은 백지장 같은 안색으로 이를 악물었다. 황병기의 힘겨운 부축을 받아 상체를 일으켜 접전을 바라봤다.
“괜찮은가?”
다급한 황병기의 물음에 반응하지 않고 장운은 그들만을 응시했다.
임기응변과 합격으로 벽송자를 물러나게 한, 그렇게 짧은 시간을 번 전륭과 태웅호와 왕정의 계획의 결론, 강물 밖으로 나온 현산의 질주를 봤다.
황병기도 장운의 그 시선을 따라 가 눈을 치떴다.
화산의 고수를 맞아 할 수 있는 최선이 고작 현산을 기다려 시간을 버는 일이라는 무력감과 자괴감과, 현산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절박감, 의구심으로 눈이 떨린다.
의구심, 과연 현산이란 존재를 믿고 의지해야 하는 가에 대한 의구심이다.
현산이 벽송자를 이길 것이란 확신이 없어서이다.
강호의 누가 봐도 어불성설의 싸움인 거다. 그렇지만 그 수밖에, 희망이란 그것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산이란 사내가 정확하게 가늠이 안 되는 존재여서다.
그러함을 직전까지 눈으로 봤다.
제천단 무사 일백을 어떻게 박살내는 지 봤다.
바로 그러한 존재인 현산과 힘을 합친다면 벽송자를 이길 수도 있다.
‘제발······!’
황병기의 떨리는 눈과 장운의 창백한 시선은 꿈틀하며 경직했다. 그야말로 벼락처럼 거리를 좁히고 질주해온 현산과 돌아선 벽송자가 부딪혀서다.
눈부시게 피어나는 매화, 그것이 쾌환의 검술이 만들어내는 착각이지만 화산의 검은 이미 환시를 넘어선 실체라는 것을 알기에 현산은 이를 악물었다. 두 손으로 움켜쥔 흑천에 힘과 의지를 실어 흑설일섬을 후렸다.
묵빛 도광의 번개와 눈부신 매화가 충돌했다.
검과 도가 날을 그으며 내는 불꽃이 눈부시게 피어났다.
현산은 몸을 팽이처럼 돌리며 충돌의 힘을 흘림과 동시에 횡격의 흑설일섬을 두 번째로 벽송자의 허리에 후렸다.
같은 순간 오행매화보의 신묘한 보법으로 중심을 이동한 벽송자는 매화삼수지기의 수로서 현산의 칼 흑천을 비끼더니 내리눌렀다.
현산이 흠칫하는 그 찰나에 왼손의 죽엽수를 뻗어냈다. 현산의 관자놀이를 후린다.
죽엽수의 살기가 옆머리를 후려쳐 오는 순간 현산은 몸을 뒤집었다.
벽송자의 검이 내리누르는 힘을 이용해 옆으로 돌았다.
죽엽수는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동시에 칼을 후렸다.
옆으로 떠서 회전하는 현산의 몸이 피워낸 검은 칼날의 회오리는 벽송자의 도복자락을 난자했다.
눈을 치뜨고 바람처럼 뒤로 몸을 빼긴 했지만 벽송자는 낭패를 면지 못했다.
너덜거리는 옷자락을 보고 눈을 치떴다.
“이 죽일······!”
수치와 분노로 치를 떠는 벽송자를 보고 선 현산의 곁으로 그들이 다가와 섰다.
대도를 움켜쥔 전륭과 흑일방 놈들의 칼을 지닌 왕정과 태웅호다.
결사의 의지로 벌려선 그들을 보며 벽송자는 눈가를 꿈틀거렸다.
“벌레 보다 못한 것들이······!”
무시무시한 살기를 전신으로 흘려내며 벽송자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해 보아라, 네놈들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할 수 있는 대로 손을 합쳐 덤벼보란 소리, 그래도 남는 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조롱, 그 미소를 매화꽃처럼 피워낸 벽송자는 검을 세웠다.
“화산은 진정 더럽고 추악하구나.”
걸음을 내려던 벽송자는 움직임을 멈췄다.
화산을 입에 담은 현산을 노려봤다.
시퍼렇게 빛나는 눈을 한 현산, 그 입에서 다시 화산이 나왔다.
“화산은 아름다운 곳이라고 사부가 말씀하셨었다. 사숙도 그러셨지.”
미간을 좁히고 뒤트는 벽송자를 보며 현산은 뒷말을 이어냈다.
“그 말씀을 하시는 두 분의 눈에는 아픔이 들어 있었다. 그게 왜인지, 무엇인지 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알겠다.”
뒤튼 미간으로 입을 열려는 벽송자 보다 먼저 현산은 남은 말을 던졌다.
“화산을 추악하게 만든 너 같은 자들 때문이지.”
벽송자는 미간을 있는 대로 뒤틀어 일그러뜨렸고 격노를 터트렸다.
“네놈의 머릴 베어 화산의 매화나무에 걸고 말리라!”
벽송자가 다시 움직이는 순간 현산은 뒤 허리에 착용한 삼단철봉을 태웅호에게 던졌다.
몸통에 둘렀던 활은 왕정에게 던졌다.
그렇게 뛰쳐나갔다. 비구의 비도를 꺼내 던지며, 그걸 받아치는 벽송자에게 달려갔다.
황병기와 장운의 뒤에서 몸을 떨며 진소향은 기원했다.
제발 이 싸움을 이기게 해달라고, 두 손을 모아잡고 천지신명에게 빌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지, 세상에 왜이런지 몰라 입술을 악물었다.
아니 안다, 세상에 욕심과 불의가 넘쳐흘러서다.
자신 같은 여인을 탐한 서령지부대인 유욕헌의 욕심, 진실을 덮기 위해 그 진실을 아는 자들을 죽이려는 화산파 도사의 불의, 세상은 그러한 것들로 넘실거린다.
‘하늘이시여, 세상을 바로 잡아 주소서······!’
간절한 염원으로 기도하던 진소향은 눈을 치뜨며 얼어붙었다.
벽송자와 어우러지던 현산이 튕겨나가 구르고 있어서다.
구르던 몸을 튕겨 일어난 현산은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죽엽수에 맞은 옆구리의 충격이 그렇게 만들었다.
다른 이 같았으면 토혈하고 쓰러졌을 일격, 그 힘이 속을 울렁거리게 한다.
하지만 맞는 순간 힘을 털어냈다.
‘궁극상통, 내외합일.’
심중에 화두로 잡은 그 의지를, 의미를 되새기며 현산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입으로 들이 마시는 숨이 아니라 체공으로, 전신의 모공으로 마시는 숨이다.
그렇게 새로 들어찬 힘으로 흑천을 움켜잡고 다시 달렸다.
“가소로운 놈들!”
벽송자는 매화를 화려하게 피워내며 태웅호의 철봉을 받아치고 왕정의 직도를 후려쳤다.
그 내력의 충격을 이 악물어 참지만 휘청거리는 두 사람의 사이로 파고 현산은 들어갔다.
눈 치뜨는 벽송자에게 흑설일섬을 후렸다.
무지막지한 힘과 속도로 갈라 내린 일격.
흑설일섬을 받아친 벽송자가 뒷걸음질했다.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눈동자와 얼굴, 현산이 지금 뿌린 일격은 전혀 다른 위력이어서다. 어째서 이런 변화가 생기는지 몰라서다.
“이노옴!”
발끝을 땅에 찍으며 다시 튀어나오는 벽송자를 향해 현산은 흑천을 뻗었다.
화산일대제자라는 존재, 눈앞의 고수와 싸우는 동안 깨달아진 심득을 이뤄냈다.
뇌리에 스치는 이름은 흑설비격, 일격필살의 찌르기다.
마주 뻗어 나오는 벽송자의 검을 응시하며 현산은 온 힘과 의지를 다했다.
흑천의 묵빛칼날과 벽송자의 은빛 검날이 스치며 불꽃을 피워내는 찰나, 벽송자의 눈동자에 어리는 경악을 보았다. 그렇게 감각을 느꼈다.
섬뜩하고 화끈한 육신의 고통.
왼 어깨 근육을 파고 들어간 벽송자의 검이 주는 감각이다.
동시에 손을 통해 들어온 감각이 있다.
흑천의 날이 파고 들어간 벽송자의 왼 어깨, 그걸 인지한 순간 몸을 빼며 소리쳤다.
“화살!”
현산이 뒤로 몸을 날리는 순간 벽송자의 왼어깨 중앙을 찔러 들어간 흑천의 날이 빠져나오고 당연하게 벽송자의 검도 현산의 어깨근육에서 빠지던 그 찰나, 왕정이 활을 당겨 화살을 날렸다. 일발삼시의 섬광이다.
“큭!”
그야말로 벼락같은 현산의 공격과 빠짐.
왕정의 섬전 같은 화살 공격에 벽송자는 당황과 충격이 어린 몸으로 검을 휘둘렀다.
두 대의 화살은 검으로 갈랐지만 한 대는 허벅지에 박혔다.
물러나는 그를 태웅호가 공격했다.
“뒈져라!”
현산의 삼단철봉, 정동이 소유했던 그것의 끝을 잡고 도약한 태웅호는 도끼처럼 내리쳤다.
신력이 실린 철봉은 무지막지한 소릴 내며 벽송자를 강타했다.
검으로 받아냈지만 연속된 공격으로 벽송자는 휘청거렸다.
“죽어라 이 개자식 도사놈아!”
태웅호가 연속해서 철봉을 휘둘러 치고 벽송자가 휘청거리며 물러나는 동안 현산은 땅에서 튕겨 일어나 다시 질주했다. 벽송자를 향해서다.
‘벤다!’
현산은 떠올렸다. 귀신오의 오장 소병과 형님들에게서 가르침 받은 것들, 그 시간들, 사부 정두헌의 가르침과 시간들, 새카맣게 내리던 흑설.
‘모두 봐 주십시오!’
묵빛 칼 흑천이 그 순간 울어댔다.
그 진동을 현산은 영혼으로 느꼈다.
포효하는 칼의 울음, 몸과 마음으로 퍼지며 하나 된 그 의지로 칼을 떨쳤다.
장운은 숨을 멈추고 경직했다. 그리고 부르르 몸서리치듯 소름을 털어냈다. 지금 본 것이 거짓이 아님을 알기에 터지는 충격은 더욱 강렬하다.
‘베었다!’
벽송자가 허물어지고 있다.
화산매화검을 뿌려대던 검과 같이 상반신이 사선으로 동강나서 쓰러지고 있다.
그의 몸을 스쳐지나가 멈춰 서 있는 현산의 몸에선 피가 튀어나오고 있다.
옆구리가 깊고 크게 갈라졌다.
‘화산의 고수를, 일대제자를······!’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저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염원했지만, 현산이 이기기를 고대했지만, 정말로 저렇게 벽송자를 벨 줄은 몰랐다. 그러기엔 화산이란 이름 너무나 커서, 현산이란 존재가 미미해서다.
“저 친구······ 강호를 뒤흔들 것이야······!”
황병기의 탄식과도 같은 중얼거림을 들으며 장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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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천의 칼이 울어. 16. 대운표국(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