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82)
“어후, 말하는 거 완전 재수 없어. 그렇게 말하면 쿨해 보이는 줄 알아? 추워. 할 말 없음 그냥 들어가.”
무슨 사탕을 줘야 이놈이 그만 칭얼댈까?
“하늘아, 내가 너한테 부탁할 게 좀 있는데, 부탁해도 안 들어줄 거지?”
“어.”
뭐야?
뭔데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막 나와?
“보통 이렇게 말을 꺼내면 무슨 부탁인지 정도는 물어봐 줘야 정상 아냐?”
“정상이 아닌가 보지.”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 사이에 무슨 부탁을 하고 들어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자. 진짜 춥다.”
“너 정엽이 형 연락처 알고 있지?”
“…뭐?”
“정엽이 형 연락처.”
“여기에서 정엽이 오빠 이야기가 왜 나와? 그건 지난 추석 연휴 때 할아버지랑 이야기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아니? 회장님이 말씀을 안 해 주신 거뿐이지, 난 포기 안 했는데?”
“솔직히 나도 좀 궁금했어.”
자세를 바로잡고 앉으며 하늘이가 물었다.
“오빠가 정엽이 오빠 소식은 왜 궁금해해?”
“사촌이 사촌 소식을 궁금해하는 게 비정상이라는 뜻이야, 아님 내가 정엽이 형 소식을 궁금해하는 게 비정상이라는 뜻이야?”
“당연히 후자지. 오빠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내가 오빠를 몰라? 아마 오늘 이 집에 모인 사람들 중 손정훈이라는 사람에 대해선 내가 제일 잘 알걸?”
“진짜?”
“뭘 또 그렇게 물어? 당연한 거 아냐? 대학에서만 2년을 같이 지냈어. 여기에 나만큼 오빠의 진짜 모습을 여과 없이 다 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고.”
“그건 또 그렇네.”
“그러니까 내 앞에서까지 변한 척 연기하지 마. 오빠가 오로지 사촌이라서 정엽이 오빠의 소식을 궁금해한다는 건 분명 코미디가 맞는데, 정말 재미없고, 질 낮은 코미디야.”
“지금 한국에 없지?”
“뭘 알면서 물어?”
“파리에 있는 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그럴 거라는 건 대충 알고 있어. 거기 집이 있다면서?”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나.
눈을 가늘게 뜨며 날 쳐다보는 게 영판 태산이 표정 그대로다.
“그래도 한 번씩 한국에는 들어오지? 큰아버지 산소를 가 봤는데, 관리가 잘되어 있더라. 꽂혀 있는 조화도 그리 오래 지난 거 같지는 않고.”
“거길 오빠가 왜 갔어?”
“큰아버지 산소니까.”
“……?”
“큰아버지 기일 땐 들어오나? 들어오면 회장님께 인사는 드리고? 드리겠지. 그러니까 내가 정엽이 형 소식을 궁금해하는 걸 네가 불편해하는 거 아니겠냐고. 그래도 참 다행이긴 하다. 감사하고.”
“뭐가 다행이고, 또 감사하다는 거야?”
“오늘 보니까 확실히 알겠네. 우리 아버지한테만 담을 쌓고 계시지, 회장님이 고모나 정엽이 형 쪽으로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써 주시고 있는 거 같아서.”
“진짜 그날 결혼식장에서도 그러더니, 계속 사람 적응 안 되게 만드네….”
“다음에 정엽이 형 한국 들어올 때, 혹시라도 언제쯤 들어오는지 알게 되면 네가 나한테 좀 알려 줄 수 있겠어?”
“만나서 뭐 하려고? 왜 아무것도 아닌 걸로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지? 난 내가 오빠라는 사람한테 궁금한 게 생길 수 있다는 거 자체가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아.”
“보고 싶어.”
하늘이 앞에서 이 이상의 진심을 만들어 보이기가 힘들었다.
“같이 밥도 먹어 보고 싶고, 술을 한다면 술도 한잔 같이 마셔 보고 싶고… 그냥 그래. 그거 다야.”
“그게 다야?”
“어, 그게 다야.”
“진짜 그게 다야?”
“다른 게 뭐가 더 있어야 돼?”
“…….”
“물론 마음먹고 사람들 써서 찾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순 있겠지. 그런데 네가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그걸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아. 억지로 만나 본들, 네 말대로 그렇게 만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네. 애는 쓰겠지만, 좀… 가족이니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어. 우리 아버지랑 회장님이 자연스럽게 다시 만나신 것처럼.”
“…….”
“이게 중간에서 누가 도움을 안 주면, 사실 억지로 하는 게 아닌 이상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걸 네가 좀… 도와주면 고맙겠어. 고모도 그냥 지금처럼 서로 모르는 사람으로 지내는 게 맞겠다고 하고, 회장님도 그러시고….”
“…….”
“내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 볼 만한 사람이… 주위에 이젠 너 말고는 마땅히 없네.”
* * *
오죽하면 그럴까.
혹시 정말 진심인 건 아닐까….
손님들이 모두 돌아간 후 방 안으로 들어간 하늘이는 계속해서 정훈이의 마지막 말이 떠올라 짜증스러웠다.
하늘이는 씻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입었던 옷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그리고 정훈이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머릿속에서 씻어 내고자 딴생각을 억지로 해 봤지만, 이내 다시금 정훈이에 대한 생각이 스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진짜 개짜증 나네!”
벌떡 몸을 일으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는 애꿎은 베개를 발로 걷어차며 심술을 부렸다.
“우리가 뭐 평생 자기 집안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며 뒷바라지를 해 줘야 하는 사람들이야 뭐야?”
그러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스마트폰을 드는 자신이 더 짜증스러웠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하루 종일 할아버지 앞에서 실실거리며 철 다 든 척. 개재수 없어.”
어느새 하늘이의 폰은 정엽이의 프랑스 번호를 찾아 놓고 있었다.
“더는 귀찮게 엮이기 싫어서 한 번은 도와준다, 내가. 안 도와주면 또 옛날 버릇 나와서 해 줄 때까지 귀찮게 굴 거 아냐. 정말 싫다, 정말 싫어.”
결국 하늘이는 입맛을 다신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두 번의 신호음 끝에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기분이다.
―하늘! 어쩐 일이야?
하늘이에게 정엽이 오빠라는 존재는 언제나 기분 좋은 에너지가 넘쳐 나는 사람이다.
“오늘 한국 설날인 건 알아?”
―거짓말.
“뭐래, 또? 또 깜빡했지? 그럴 거 같더라.”
―진짜야? 왜?
“내가 이런 질문 받는 게 싫어서 저번 추석 때 먼저 전화 안 했던 거였어.”
―오우, 쉣! 그럼 전화 끊어. 나 지금 할아버지한테 전화부터 드리고 다시 전화 걸게.
“할아버지 오늘 많이 취하셨어.”
―또 고모부가 계속 따라 줬구나?
“항상 그렇지 뭐.”
―지난주까지 분명 오늘이 한국 설날인 거 알고 있었는데, 그걸 그새 또 까먹었네. 할아버지한테는 그럼 아침에 전화드려야겠다.
“괜히 전화 시간 맞춘다고 잠 못 자고 기다리지 말고. 그냥 내일 편할 때 전화 한 통 드려.”
―그래, 아저씨, 아주머니는 잘 지내시지? 태양이는? 전역할 때 거의 다 되지 않았나? 아 참,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너 남자 친구 만들었어? 내가 저번에 통화할 때 무조건 만들어서 다음에 나 한국 들어갈 때 데리고 오라고 말한 거 기억하지?
“하나씩 물어, 하나씩. 그렇게 궁금한 거 많은 사람이 어째서 내가 먼저 연락 안 하면 절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을까?”
―너야 인스타로 잘 지내고 있는 거 다 잘 보고 있는데, 뭘 또 전화까지 해?
“퍽이나.”
―새해 복 많이 받아, 우리 하늘이.
“오빠도. 언니랑 데이빗한테도 안부 전해 주고. 다음에 한국 들어올 땐 데이빗도 데리고 들어올 거지?”
―상황 봐서. 안나가 시간 뺄 수 있다면 데이빗도 데리고 갈 건데, 힘들다고 하면 나 혼자선 못 데리고 가지. 아빠랑 노는 건 좋아해도 아직 씻고 재우는 건 엄마 손을 타.
“우리 데이빗 못 본 지 벌써 1년이 넘었네.”
―그렇게 보고 싶음 와서 봐. 넌 혼자잖아. 아무래도 셋이 함께 움직이는 거보단 너 하나 움직이는 게 더 수월하지 않겠어?
“알겠어. 계획 한번 세워 보자.”
―굿, 굿!
“아 참, 근데 오빠.”
―응.
하늘이는 망설였다.
지금까지 정엽이에게 정훈이란 존재를 먼저 꺼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하늘이었다.
항상 밝은 에너지를 전달해 주는 정엽이지만, 정훈이라는 존재 앞에서까지 그 에너지를 유지해 줄 수 있을지, 하늘이는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 저기….”
―뭐야? 왜 너답지 않게 뜸을 들여? 무슨 일인데?
“오늘 우리 집에 정훈이 오빠가 왔어.”
―…정훈이?
“어.”
하지만 하늘이의 걱정과는 반대로 정엽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유쾌하기만 했다.
―이야, 진짜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다. 정태는? 정태는 같이 안 왔어?
“정훈이 오빠 혼자 왔어.”
―그래? 어디 보자… 정훈이도 이제 나이가 제법 되지 않나? 너랑 한 살 차이야, 두 살 차이야?
“두 살. 올해 서른이야.”
―크흐… 그 찡찡이가 벌써 서른이야? 어휴, 이젠 봐도 어른들 빼놓고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그럼 정태가 올해 서른넷이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오빠 나이 백 살인 줄 알겠어. 그 집 오빠들이랑 나이 차이도 몇 살 안 나는 사람이 뭘 그렇게 신기해하면서 말을 해?”
―야, 인마. 너도 외국 생활 나만큼 오래 하면서 잊고 지냈던 사람들 소식 갑자기 들어 봐라. 신기할 수밖에.
결국 하늘이는 용기를 냈다.
용기를 내면서도 자기가 왜 정훈이의 부탁으로 이런 용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정훈이 오빠가 오빠 안부를 물어.”
―잘 지낸다고 해 주지.
“그런 말도 조심스럽지, 내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게 뭐 있어? 그러지 마.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그냥 모든 게 다 행복하기만 해. 정훈이는 어때? 잘 지내고 있대?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고, 오빠를 만나 보고 싶어 하는 거 같아.”
―날? 날 왜?
“나도 그걸 모르겠어. 실은 지난 추석 연휴 끝나고도 우리 집에 한 번 찾아왔었거든.”
―정훈이가?
“응. 그때도 할아버지한테 오빠를 만나게 해 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했었어.”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할아버지가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쓸데없는 짓 할 생각 하지 말라고 못을 박았거든.”
―에이, 왜 그러셨대?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작은집 사람들 피할 이유도 없는데 왜 그렇게 날 약자처럼 감싸시는 거야? 그러지 마시라고 네가 말 좀 전해 드려.
“그럴게.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오빠한테 전해 주는 거야. 나한테 오빠 다음에 한국 들어올 일 있음, 자기한테 미리 말 좀 해 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잖아.”
―나도 궁금하네. 그 찡찡이 녀석이 벌써 서른이라고 하니까, 어떻게 컸는지도 보고 싶고.
“진심이야?”
―그럼 진심이지.
“그럼 다음에 오빠 한국 들어올 때 정훈이 오빠한테도 이야기 해 줘도 돼?”
―안 될 게 뭐가 있어? 피할 이유도 없고, 피하고 싶지도 않아. 오히려 이젠 나도 아빠가 되고 보니까, 언제 기회가 된다면 작은아버지한테 꼭 한번 물어보고 싶어. 그때 왜 그렇게까지 하셨던 건지. 하셔야 했던 건지.
“…….”
―에고, 내가 너한테 너무 무거운 소릴 했네. 아무튼 난 괜찮으니까 혼자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 정훈이한테 나도 궁금하다고, 그러니까 다음에 나 한국 들어갈 일 있음 시간 맞춰서 한번 보자고 해.
“…….”
―아닌가? 이젠 재경가 둘째 도련님인데, 만나더라도 내가 시간을 맞춰야 하는 건가?
* * *
이사회가 열릴 걸세
설 연휴가 끝나고 다시 일주일.
정태를 데리고 해외 지사 순방을 다녀온 홍준이는 스너프 뱅크 시스템에 관한 투자 내용을 미래금융 쪽과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나갔고, 모직 쪽에선 신기한 VMD팀 팀장이 정식 출근을 시작해 단 일주일 만에 개발팀 전체를 묘한 긴장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연휴에 여독이 남아 있는 한 주가 총알처럼 지나가고 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이런 건 하나에 얼마나 합니까?”
기원 근처에 있는 바둑용품점에 들렀다.
“직접 쓰시게?”
“아뇨, 선물하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