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uke is so good at magic RAW novel - Chapter 21
21화 재회 (3)
제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칼리아 학원.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부터 어디 시골의 들어 본 적도 없는 군소 귀족의 영애까지 모인 학원.
하지만 200여 명이 넘는 학원의 학생들 중에, 예명을 가진 학생은 한 명뿐이었다.
……이리도 혹독하고 어려운 시기에 이러한 꽃과 같은 아이가 태어났더냐.
짐이 어릴 때 보았던 매화꽃이 떠오르는구나.
이제부터 짐은 그대를 백매화라 부르리라.
아나스타시아.
펠하임 공작가의 막내 영애.
예명. 제국의 고위층 사이에서 자리 잡은 문화.
실제로 부르는 일은 거의 없으나, 예명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명예로 여겨진다.
그 예명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실의 핏줄뿐이기 때문이다.
전쟁 영웅. 시대를 풍미한 가희 등. 예명을 하사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중에서도 아나스타시아는 선대 황제에게 직접 예명을 하사받았다.
계승권 싸움에서 멀어진 황족이나, 황족이긴 하나 일찍이 결혼해 사실상 다른 가문의 일원이 된 자에게 받는 것과는 급이 달랐다.
더욱이 아나스타시아가 하사받은 백매화라는 예명은 황제에게 하사받은 예명들 중에서도 더욱 가치 있는 것이었다.
대마법사, 황실 기사단장처럼 일종의 관례처럼 하사받은 것이 아니라.
칼리아 학원에서 열린 경연(競演)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받은 이명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선대 황제가 마지막으로 내린 예명이었기에 그녀가 하사받은 ‘백매화’라는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졌다.
제국의 내로라하는 영애들이 모인 칼리아 학원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고한 꽃.
그것이 아나스타시아 펠하임이었다.
“아나스타시아.”
그래서 카를로스 크로우의 이름은 그가 마탑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제국의 사교계에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제국에서 가장 고고한 꽃. 그녀가 예명을 하사받기도 전에 가문 간의 약혼이 결정되었으니까.
“오랜만이다.”
“네. 오랜만이네요. 카를.”
유리아와는 다른 고상한 아가씨가 그녀였다.
그녀는 유리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나스타시아를 뒤따라온 잘생긴 청년이 카를을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카를. 나의 둘도 없는 벗이여!”
“…오버하지 마라. 칼리테.”
“아, 내가 너무 그랬나? 하긴 우리가 얼굴을 안 본 지는 꽤 되긴 했지.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대를 벗이라 생각하는데, 너는?”
“악우겠지.”
“악법도 법이니 악우 또한 벗이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정말 오랜만이야.”
굉장히 능청맞은 성격. 삿된 말로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이라 그 성격이 더욱 도드라졌다. 카를이 가장 어려워하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그래도 칼리테가 지닌 특유의 친화력 때문에 두 사람은 사석에서는 서로에게 편하게 말을 할 정도로 친했다.
“나는 분명히 아나스타시아에게 면회를 신청했는데 왜 너도 같이 온 거냐.”
“마침 내가 이 학교에 있었거든. 매제 될 사람을 찾아왔을 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있다.”
“오호라. 무슨 문제?”
“이제부터 말할 테니까, 먼저 좀 앉지.”
“아하하. 알겠어. 어릴 때보다 더 날카로워졌네. 마법사가 되더니 사람이 달라졌어.”
칼리테는 카를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가 제 여동생, 아나스타시아를 슬쩍 본 칼리테가 카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어때? 오랜만에 보는 안나는? 내가 기억하기론 거의 10년 만인데. 맞나?”
10년은 아니었다.
불과 3년 전에 그녀와 카를은 만난 적이 있었다.
아나스타시아가 이 학교에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카를을 만나서 인사하고 싶다며 찾아왔던 게 마지막이었다.
어쨌든 굉장히 오래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카를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하기도 했고.
“선대 황제 폐하께서 세상을 뜨시기 전에 안나에게 지어 주신 예명이 뭔지 알아? 백매화야. 백매화. 어때, 어울리지?”
유리아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입고 있는 옷이 어울려 청순한 소녀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피를 나누었기 때문일까,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아름다워도 결국엔 청순하고 아름다운 오징어였다.
“…….”
“왜 말이 없어? 아, 넋이 나가 버린 건가?”
백매화라는 예명이 왜 붙었을까.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는 저 새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면서, 매화가 흩날리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걸까.
황제가 저 모습을 보고 예명을 하사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애초부터 몸의 주인인 카를로스에게도 그녀를 향한 감정이 특별하지 않은 것이어서일까.
카를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아름답다. 저기 있는 건어물과 다르게.”
“건어물? 누구보고 하는 말이야 그거!”
“하하하!”
“칼리테 오라버니는 누구 편을 드는 거에요!”
칼리테가 폭소를 터뜨렸다.
살짝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 말이 제대로 먹혀들어 간 것이었다.
“아니, 아니. 너무 웃겨서 그래. 미안해. 우리 안나는 얌전해서 이런 일이 별로 없는데 카를이랑 유리아는 오랜만에 봤을 텐데도 이러는 것을 보면 진짜 사이가 좋은 것 같네.”
“사이가 좋기는 개뿔….”
그녀가 픽 내뱉는 말을 들은 아나스타시아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유리. 그런 말은 자제하기로 했잖니.”
“아, 아, 그랬지…. 아니, 근데 먼저 건어물이라고 하는데….”
“착한 유리 네가 참아. 네 오라버니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서 그런 거니까.”
“후… 그래 내가 착하니까 참는다.”
서로를 애칭으로 부를 정도로 친한가.
아니, 유리아의 성격이면 학교의 모든 이와 친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잠시 보고 있었던 칼리테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뭐 어쨌든, 다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렇게 얘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카를, 싫어하는 차 있나? 내가 요즘 차를 달이는 취미가 생겨서 말이야.”
“……네가 타 주는 차만 아니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커피를 마시면 되겠네. 커피는 차가 아니니까. 맞지?”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카를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느새 칼리테가 면회실에서 나갔다.
“아나스타시아.”
“네? 카를?”
“저 녀석한테 언제 저런 취미가 생긴 거지?”
“글쎄요. 제가 몇 달 전에 감기에 걸렸는데 그때 제가 마실 차를 끓이면서 재미를 붙인 모양이에요.”
“허….”
카를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펠하임 공작가의 공자 칼리테 펠하임.
첫째 공자인 동시에 다섯 공작가 중 하나인 펠하임 공작가의 계승자이기에 당연히 게임에는 네임드로 등장한다.
플레이어의 선택지에 따라 공작이 되기도, 혹은 공자로 남기도 하지만.
공작이든 공자든 칼리테 펠하임은 숨기는 것이 많은 인물이다.
‘일단 시나리오에서는 떡밥만 남겼는데.’
마지막 시나리오 클리어만 남기고 있었던 카를은 똑똑히 기억한다.
칼리테 펠하임은,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
펠하임 공작이 되는 것도,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도 아닌 다른 무언가.
에라 오브 엠파이어는 확장팩이 예고되어 있었기에 유저들은 확장팩에서 그가 목적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놈이 차 끓이는 취미를 가진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다.
성격은 몰라도 저건 확실한 가식이다.
“자! 차랑 간단한 요깃거리를 가지고 왔어. 우리 사랑스러운 동생은 우유를 살짝 탄 홍차. 마찬가지로 어여쁜 유리아 아가씨는 진달래 꽃잎 차. 그리고 카를 너는 아주 쓰게 탄 에스프레소!”
“……참 나. 유치하기는.”
“맛있게들 먹어. 아, 카를 설탕 필요한가?”
“일단 마셔 보고.”
카를은 그가 내민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강한 향. 혀끝이 얼얼할 정도로 쓰디쓴 맛.
허나, 그 자체로 먹을 만하다는 것에 놀란 카를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때? 잘 타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잘 타긴 하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좀 다재다능하긴 하지. 이제 우리 저택 시녀장보다 내가 더 차를 잘 끓인다니까?”
염병.
카를은 목 끝까지 차오르는 그 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래서 카를, 내 동생에게 따로 면회 신청까지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혼약식 일정?”
“……오라버니.”
“일단 햇수로 따지면 거의 15년이잖아? 물론 그때는 안나도, 너도 어릴 때였지만 지금은 두 사람 다 어엿한 성인이고. 이제 카를도 탑에서 나왔으니까 언제 혼약을 올리든 문제는 없지.”
“칼리테 오라버니.”
“잠깐만 기다려 줘, 안나. 중요한 얘기잖아. 물론 네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만 카를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부터 물어봐야지.”
카를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럴 때는 쓰디쓴 에스프레소가 도움이 되었다. 정신을 확 들게 해 주었으니까.
지금 자신의 발언으로, 가문 간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걸 인지하고 자신의 ‘특성’을 이용해 생길 문제까지 미리 예측한 뒤.
카를은 자신의 겉옷 안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새하얀 손수건을 내밀면서 말했다.
“아나스타시아.”
“네. 카를.”
“우리 약혼은 파기하는 게 어떻겠나.”
그 말을 들은 유리아는 입에 머금고 있었던 차를 뿜을 뻔했다.
가까스로 다시 삼켰지만, 너무 급하게 삼키는 바람에 뭐가 잘못됐는지 딸꾹질이 시작됐다.
딸꾹.
유리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저, 저, 저 인간이 오늘 왜 저래?’
조금 전에는 자기한테 공작 한번 해 볼 생각 없냐고 그러더니.
이젠 15년 전에 맺은 약혼을 깨뜨리자고?
힘을 탐하다가 미치광이가 되는 마법사가 있다는데, 설마 작은 오라버니도 그런 경우인가?
“약혼 파기라.”
칼리테가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생글생글 웃던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지, 카를로스? 나는 아주 ‘정당한’ 이유를 듣고 싶은데.”
가문 간의 혼약. 당연하게도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제국의 다섯 기둥이라 불리는 공작가 사이의 혼약은 더더욱.
상대방에게 명확한 결격 사유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혼약의 파기는 상대방의 가문에 전쟁을 하자는 말과 똑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동생이 싫어졌나? 다른 연인이 생겼나? 대체 이유가 뭐지?”
“……그런 건 아니다 칼리테. 선대 황제께서 아나스타시아에게 내린 예명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그러면,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무엇이지?”
“……내 사정 때문이다.”
가문 간의 혼약에서 일방적인 입장을 내세우는 것은 금기다.
상대방이 결격 사유로 내세울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폭풍이 몰려오고 있어. 칼리테. 북쪽의 마족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더군.”
“……흠?”
“내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기존의 마족 장로회는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 마족 사회 전체가 뒤집어질 것이고, 새로운 우두머리가 생길 거다. 그리고 칼리테 너도 알다시피 사회의 혼란을 잠재울 가장 쉬운 방법은….”
“전쟁이지. 아니면 학살이고. 마족 놈들은 학살보단 전쟁을 택하는 것들이고.”
“그래. 그리고 우리 가문은 전쟁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되어 있어.”
객관적으로 말해서, 그렇다.
역사서에 기록된 지나간 전쟁들에 비해 크로우 가문의 사병 수는 줄어들었고, 징집할 수 있는 병력의 수도 한계가 있다.
원래는 그 한계를, 다른 가문과 황실의 지원을 받아 해결하지만.
‘제국 전체가 반란으로 요동치면 지원을 받는 건 불가능하다.’
어떻게든 발악하면 3년까지는 버틸 수 있다.
그 후에는, 아카데미에서 길러 낸 마법사들을 동원해 제국이 안정될 때까지 전쟁을 지연시키는 것이 카를의 목표였다.
“약혼이나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도저히 나지 않을 것 같다. 미안하군. 아나스타시아, 그리고 칼리테. 이런 이유로 파혼을 제안해서. 하지만,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나보고 당주가 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도 전쟁 때문이었어?”
“영지의 사사로운 업무까지 신경 쓰면서 전쟁을 준비할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이 내겐 없다.”
카를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라버니, 유리.”
아나스타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시만 자리를 비켜 줄래요? 둘이서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그녀가 진지한 어조로 말하고 있음을 깨달은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리아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으나 그것을 감지한 칼리테가 그녀를 잡아끌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백매화라는 그녀의 예명을, 카를은 오늘 처음 들어 보았다.
카를로스가 들었더라면 그의 기억 속에 있었을 것이고.
게임 속에 있었다면 정현이 기억할 것이다.
“당신은 아니었나 보네요.”
카를로스가 듣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그만큼 아나스타시아에게 무관심해서.
정현이 모르는 이유는, 그녀가 게임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여서.
칼리테는 비중이 꽤 높은 캐릭터인데, 황제에게 예명까지 하사받은 그녀는 왜 게임에 없었을까.
“요 근래 두 달 동안 제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 당신이에요. 카를.”
“…그랬나.”
“처음에는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그다음 주부터는 또 살았다는 소문이 돌고. 또 다음 주에는 자기 형을 끌어내리고 공작위를 찬탈했다고 하고. 또 그다음에는 무슨 학교를 세운다고 하지를 않나….”
카를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의문점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은 어디서, 어떻게 들은 것일까.
전장에 있었던 병사들도 카를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확신이 아니었다. 살아서 돌아온 것이 3일 후의 일이었으니 죽었다는 ‘소문’보다는 살았다는 ‘소식’이 먼저 전해져야 한다.
제도만큼 멀리 떨어진 곳이면 소식이 소문을 뒤덮어, 소문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까.
‘아무리 공작가의 여식이라지만… 학교 안에 있는 한 들을 수 있는 정보엔 한계가 있을 텐데.’
내부에 펠하임 가문에 협력하는 이가 있는 건가.
아니, 칼리테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으니 펠하임 가문에 대한 협력은 아닌가.
‘아나스타시아가 심어 둔 누군가가 있다.’
오로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서.
왜?
대체 아나스타시아가 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얻어 내려고 사람을 심어 놓은 것인가.
이해, 사고, 분석. 그런 특성들이 작용하다가, 뚝 멈추어 버렸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몰랐다.”
“그래 놓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약혼 파기라니.”
가느다란 앞니가 입술을 짓눌러 하얗게 물든 것이 보였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한 사람.”
“미안하다. 아나스타시아.”
하지만 나는 카를로스가 만든 인연을 이어 나갈 여유가 없다.
너와의 약혼이 계속해서 유지되어,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면 나는 필연적으로 제도의 정치판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멀쩡해 보여도, 결국엔 몰락할 제국의 정치 따위에 연연할 시간은 더더욱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약혼을 파기하는 것이다.
“그러면.”
……카를은 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그리고 입술을 떼려는 순간.
아나스타시아가 먼저 말했다.
“약혼은 계속 유지해요. 갑자기 약혼이 파기되면 바쁜 당신이 처리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날 테니까.”
“……그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있겠지만.”
아나스타시아가 카를의 말을 따라하며, 하얀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입술 위에 대었다.
“약혼을 파기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도 있어요.”
“무슨 방법이.”
“제가 카를 당신의 마음을 바꿔서.”
손가락이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저와 결혼하고 싶게 만들어 줄게요.”
두 사람의 심장 소리가 서로 교차했다.
그 이외엔 모든 것이, 한없이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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