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270)
칼뎀 대여관은 상업도시 올덱에서도 가장 귀중한 손님들을 받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올덱 초입에 큼지막한 건물 네 동을 소유한 거대여관이고, 그 모든 거물의 최고층 두 개동은 모두 최고급 귀빈을 접대하기 위한 초호화 객실.
한 명의 손님이 두 개의 층을 통째로 쓴다는 건 상상하기 힘들지만, 대륙 제일가는 귀빈쯤 되면 그 정도는 사치의 축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긴 세월 올덱에 방문하는 여러 귀빈들을 잔뜩 접대해왔기에, 쌓인 노하우도 상당한 편이다.
허나, 아무리 그래도 하루만에 성도 카르페아의 성녀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건 너무한 요구였다.
올덱 청장의 말을 듣자마자 모든 인력을 동원해 급하게 귀빈을 맞이할 준비를 하긴 했으나, 아무리 보아도 성녀 클라리스에 걸맞은 대접이라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거진 6시간 만에 이 정도를 준비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분전이었으므로, 성황도 차원에서도 딱히 별다른 불만을 말하진 않았다.
애초에 예고도 없이 방문했다. 모두 성녀 클라리스의 갑작스러운 변덕 때문이었다.
“원래는 황도에 방문해서 예배를 주관할 예정이었는데 말이에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정을 변경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큰 빚을 졌습니다.”
“뭐, 이유 없이 급박하게 부를 사람이 아니란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에드경. 필시 저를 이렇게까지 하게 만든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겠죠.”
에드를 부르는 말투는 많이 딱딱해져있었다. 그야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장소는 칼뎀 대여관의 최고 귀빈실. 성녀 클라리스의 보좌진들이 잔뜩 모여 앉아 있는 이 장소는 사실상 성황도 성녀 집무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녀의 발걸음 하나 하나까지도 모두 눈에 담아두는 성당기사단이니만큼,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대하듯이 에드를 상대하면 노발대발할 것이 분명했다.
에드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살갑게 굴지는 않는 클라리스의 모습에 별다른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클라리스만 속으로 괜히 마음이 불편할 뿐이었다.
“…이번 엘테 상회의 이권 다툼은 성황도 쪽에 앞으로 큰 득이 될 겁니다.”
어쨌든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성녀 클라리스를 올덱에다 불러다 놨으니, 뒷수습을 할 때가 되었다.
일단 에드 로스테일러라는 이름만 보고 움직여주었으나, 의리만으로 어떻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성녀라는 직위의 사람은, 한 개인이라기보단 기관이나 집단에 가깝다.
그녀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성황도의 일정들이 꽤 많이 어그러지고, 많은 신하들이 덩달아 움직여야만 한다.
그러니, 성녀 클라리스가 이렇게까지 움직였어야만 하는 합당한 이유를 대야만 한다. 그것이 에드 본인의 신뢰와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엘테 상회의 차기 회주에게 큰 빚을 지워놓는 것은, 무엇보다 성녀님의 독자 세력 형성에 큰 의미가 있을테니까요.”
그 말에, 성녀의 보좌진은 서로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클라리스는 텔로스 교단의 위세를 한 몸에 업고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자는 아니다.
성황과 대주교들은 아닌 척 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세를 살피고 있으니… 권력 집단이라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다들 비슷비슷해 보인다.
결국 신들의 종복조차도 다툼의 늪에서 완전히 헤어나올 순 없다.
다툼이란 곧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그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힘을 가지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세력을 품에 안고 있을 필요가 있다.
“엘테 상회와의 거래 건은… 그래요, 에드 경의 ‘설계도’인 셈이군요.”
성황도와 엘테상회의 상호 결속.
로르텔이 이끄는 엘테 상회가 성황도 물류 유통량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도록, 성녀 클라리스가 보장해준다.
그럼 로르텔 입장에서는, 성황도 물류 유통에서 오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더불어, 상회 내부의 권력 구도에서도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이런 대형 거래를 물어왔으니, 차기 회주 자리를 지키는데 이만한 뒷배가 또 없다.
그리고 클라리스 입장에서는, 성황도 물류 유통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엘테 상회를 자기 손아귀에 쥐게 됨으로써 성황도 내부에 대한 목소리와 영향력이 더 커지게 된다.
성황도의 물류 의존도를 엘테 상회 쪽에 최대한 쏠리게 만들수록, 엘테 상회의 회주에게 빚을 지워둔 클라리스의 목소리 또한 커지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내부결속을 위해 영향력을 뻗치는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중간다리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에드 로스테일러다.
성녀 클라리스도, 로르텔 케헬른도… 결국 에드를 향한 신뢰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성녀의 보좌진들은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에드 쪽을 보고선 마른침을 삼켰다.
큼지막한 제국의 지도. 그 위에 덧대어 그려진 수많은 권력의 움직임과 구도를 그리고 있는 느낌이다.
이번 엘테 상회 피습 사건은, 상회 내부 권력 다툼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 정도로 넘어가게 될 터.
사람들의 시선은 결국 현장에 도착한 클라리스와, 새로 엘테 상회의 회주가 될 로르텔에게로 쏠리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엘테 상회를 때리고 부순 한 망나니 귀족의 이름은 조용히 묻히게 될지도 모르겠으나….
진짜 판을 짠 사람은 바로 그 금발의 귀족이다.
보통 이런 일에 있어서 실세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채 물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인간들이다.
보좌진들은 그 편린을 슬쩍 엿본 듯한 느낌이 들어, 조용히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제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는 없는 제안이네요. 에드 경.”
에드의 설명을 듣던 클라리스는 인자하게 웃었다.
실베니아 아카데미에서 봤을 때처럼 쾌활하게 웃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허심탄회한 웃음이었다.
어쨌든 에드의 제안을 거절할 마음은 없었다.
“이런 먼 곳까지, 일정도 제치고 마차를 달리게 할만한 이유로는 충분하구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자세한 계약 내용은 보좌진들한테 지시를 해서 전달할게요. 다만… 이번 피습 사건의 뒤처리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 이야기 하고 나서, 클라리스는 귀빈실 입구 언저리에서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한 사람은 차분하고 조신하게 예를 다하고 있는 메이드, 벨 마이아고.
나머지 한 사람은, 쭈뼛거리면서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 소녀… 로르텔 케헬른이다.
엄숙한 현장 분위기에 못이겨서, 로르텔은 귀여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로르텔 경이 저런 상태면… 제 입장에서도 곤혹스러운데요… 얼른 차기 회주로서 일에 착수해줘야 할텐데…”
“…시간이 해결해줄 거란 말밖에 따로 드릴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급한 일은 아니니 상관 없지만, 그래도 슬로그가 가만히 있을 거 같진 않아서요.”
이제 막 상회의 난리통에서 빠져나와 대여관으로 돌아온 참이다.
상황 파악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클라리스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걱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에드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슬로그 켈드럭스는 사망했습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엘테 상회 일도 일단락 되었다고, 타냐 아가씨께 전서구를 보내두었습니다.”
“너도 고생 많았다, 벨. 지시한대로 전부 일처리를 깔끔하게 잘 해줬네.”
벨이 잡아놓은 숙소는 호화롭진 않아도 실속있었다.
부둣가가 잘 보이는 곳으로 잡아놓으라는 내 지시에 딱 맞게,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여러 범선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여관이었다.
야트막한 언덕 아래로 뻗어 있는 가로수들과,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까지.
테이블 한 켠에 팔을 얹고 가만히 바깥 바람을 맞고 있다보니 피로가 몰려왔다.
벨과 동행하던 로르텔은 이미 한 켠의 침대 위에서 쌔근 쌔근 잠든 상태다. 세상 평화로워보이는 모습은, 보고 있는 사람마저 마음이 푸근하게 만든다.
“귀가 일정은 어떻게 되십니까? 곧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학기도 시작하니, 조만간 복귀하셔야 개학일정에 맞춰 아켄섬으로 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고려하고는 있는데, 아직 올덱에서 할 일이 좀 더 남았다. 일단 로르텔을 리엔나 비서한테 넘겨야지.”
저주가 풀리기 전까지는 리엔나 비서가 잘 맡아서 챙겨줄 것이다.
현재 리엔나 비서는 상회의 변절자들을 수습하고 있는 모양이니… 당장은 바쁠 것이다.
“저… 에드 도련님.”
“말 안해도 안다. 네가 이렇게 장기간 저택을 떠난 건 처음이니, 저택 꼴이 말이 아니겠지. ”
누누이 말했지만, 벨은 저택을 책임지고 있는 핵심인력이다.
아직 벨을 대신할만한 인력이 충분치 않으니, 저택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안봐도 뻔했다. 벨이 그런 걱정을 안하고 있을 리가 없다.
이미 방에 들어올 때 벨이 자기 짐을 챙겨서 정리해놓은 걸 확인했다. 자기 방을 따로 잡아놓지 않은 시점에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게 딱 티가 났다.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푸욱 묻은 채, 발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한낮의 바닷바람이 커튼을 나부끼며 들어오자, 노곤함이 조금씩 밀려온다.
“먼저 돌아가도 좋아. 나는 올덱에서 처리할 일이 두가지 정도 남았으니까… 마무리 하고 가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가하셨을 때, 부끄러운 집안 꼴을 보여드리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번 올덱 출장에서 벨도 꽤 고생을 했다.
이 먼 거리까지 마차를 타고 와서, 오자마자 잡다한 일들을 잔뜩 시켜댔으니… 쌓인 피로감도 보통은 아닐 것이다.
큼지막한 일들도 모두 마무리됐다.
간만에 저택에서 빠져나와서, 아무 눈치도 안보고 좀 쉬게 둘까 했더니만… 한다는 말이 곧바로 일하러 돌아간다는 말이라니.
– 휘익.
미리 준비해두었던 목재 짐가방을 들어 올려서 탁자에 올려넣더니, 두고간 것은 없는지 체크하는 모습.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놀리고 있는 벨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문득 말을 던졌다.
“야, 벨.”
“…예?”
“너, 메이드 일 한 지는 얼마나 됐냐.”
플란첼 남작가문에서 빠져나와, 클레드릭 수도원을 잠깐 거쳐 오필리스관, 그리고 로스테일러 저택에 이르기까지.
일평생을 메이드 일을 하며 살아온 벨에게, 경력을 묻거든 양손으로도 다 헤아릴 수도 없을 터.
“… 정확한 햇수를 센 적은 없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철 들었을 무렵엔 이미 이 일을 하고 있었던지라…”
“그러냐.”
“예. 혹시 뭔가 신경쓰이는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나는 의자에 몸을 묻은 채로, 툭 던지듯이 물었다.
“지치지 않냐는 거야.”
“배려 감사합니다. 허나, 틈틈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로, 무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컨디션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배려라기보단… 그냥 호기심이다. 한가지 일만 평생 한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잘 모르겠어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글쎄다.”
턱을 괸채 창밖을 올려다 본다.
푸른 하늘과 중천에 떠있는 태양. 턱을 쓸어내리는 바닷바람.
이따금씩 잠든 로르텔이 쌔근대는 소리와, 커튼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네가 생각하기에, 언제쯤 되면 은퇴해야겠단 생각이 들 것 같냐?”
“은퇴… 말입니까…?”
“그래. 평생을 업으로 살아온 일을 이제 슬슬 관둬야 되겠단 생각이 들 때가… 어떨 때일까 싶어서…”
“…딱히 상상해본적은 없습니다만. 한 번 생각해보자면…”
벨은 움직이던 팔을 멈추고, 덩달아 창밖을 내다보며 이야기 한다.
“…제가 오필리스관에서 일할 때 생각 나십니까?”
“당연하지.”
“전대 메이드장이셨던 엘리스님께서는… 그 결말은 좋지 않으셨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으셔서 일을 그만두실 결정을 하셨었지요. 저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몸이 움직이는 한 계속 일할 것 같습니다.”
벨은 이윽고 시선을 내리깐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어쨌든, 평생을 업으로 삼아왔던 일을 관두고 은퇴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니까요.”
“…그래.”
턱을 괸채 내다 본 창밖의 부둣가는, 오늘도 여전히 분주히 움직이는 상인들로 가득했다.
“뭐, 다들 그런 법이겠지. 쓸 데 없는 질문해서 미안하게 됐다.”
“아닙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밀려오는 잠에 몸을 맡겼다.
아마 해가지고 달이 뜰 때 쯤이 되면, 리엔나 비서 쪽이나 관청 쪽에서 연락이 오리라.
그 때까지는 달콤한 휴식의 때다.
과로한 몸에 힘을 풀면서,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
– 쿠궁, 쿵!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눈을 감기 전에는 해가 중천에 떠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해가 저물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물감이 퍼진듯한 하늘 아래, 생업에 분주하던 부둣가의 사람들도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까악대는 갈매기 소리 또한 한적한 느낌이 되어있었다.
내가 앉아있던 창가의 테이블 근처도 완전히 붉게 물들어서, 잠깐 사이에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 내부도 꽤나 어둑어둑해진 것이, 낮잠이랍시고 생각보다 더 오래 잠들어버린 것 같다.
꽤나 피곤한 상태긴했다.
“…”
테이블 위엔 벨이 남겨놓은 편지가 있었다. 깨우기도 뭣해서 알아서 저택으로 떠난 모양이었다.
미리 허가를 해줬으니, 별 문제는 없겠지.
나는 앞머리를 몇 번 탁탁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잠을 다 쫓아냈다.
입이 텁텁해져서 냉수를 좀 마실까 싶어서 찻주전자를 들어올려보았다. 그러나 텅 비어있었다.
생각해보니 잠들기 전에 영 지치고 갈증도 나서 다 마셔버렸다. 아무래도 여관 로비에 가서 새로 물을 받아와야 할 듯 싶었다.
“윽, 크으윽…”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거하게 한 번 기지개를 했다.
방 안에는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는 로르텔의 모습만 보일 뿐이다. 나는 찻주전자를 챙겨들고 방을 나가서 로비쪽으로 향했다.
쿵쿵 울리는 목재 바닥을 밟고 아래층 로비로 내려가서, 앉아 있는 직원에게 물을 좀 더 달라고 요청했다.
친절한 미소와 함께 찻주전자를 받아든 직원은 얼른 냉수를 떠다 주었다.
“그… 옷가지라든가 필요하시면 사다드릴까요?”
“…예?”
“아, 상관없으시다면… 괜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
직원의 기묘한 질문에 나는 의문을 표했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냉수가 잔뜩 들어있는 주전자를 받아들고 계단을 올라가 방앞으로 돌아오니, 안에서 묘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쌔근쌔근 잠들어있던 어린 로르텔이 깨어난 모양이었다. 나보다도 일찍 잠들었으니, 슬슬 일어나 있을 법도 하다. 이래저래 로르텔도 많이 놀랐을테고,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느라 많이 피곤했을테니 달래줄 필요가 있다.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야, 로르텔. 일어났──”
– 콰당탕, 쾅!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침대 위의 로르텔이 화들짝 놀라서 이불을 확 뒤집어 썼다.
“…”
뭘 그렇게까지 놀라나 싶었으나, 일단 터벅터벅 방 안으로 걸어들어가서 주전자를 창가 앞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걸터 앉아서 여유롭게 이야기했다.
“벨은 먼저 돌아갔다. 걔도 바쁘니까 계속 같이 있어주기는 힘들거야. 벨 없다고 울지 말고, 당분간은 아마 엘테 상회 쪽 리엔나 비서랑…”
그렇게 차분하게 말을 하고 있자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이불을 덮고 안에서 몸을 베베꼬고 있는 로르텔의 모습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고 해야할까….
“…로르텔?”
그러다가 침대 근처로 시선이 가자, 바닥에 옷가지 몇 개가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어린 로르텔이 입고 있던 옷들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숨이 턱 막히기 시작했다.
“…로르텔… 너….”
…
………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이불이랑 혼연일체가 되어서 밖에 나오지 않는 로르텔의 몸집이…. 어쩐지… 평소보다 더 커보인다.
여… 여기서는… 섣부르게 대답을 강요해서 좋을 게 없다. 나는 섬세함과는 거리가 좀 먼 사람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소한의 눈치라는 것이 있다.
갑자기 목이 더 타는 것 같아 일단 냉수를 한 잔 더 따라마셨다.
정적 속에서 꿀꺽 꿀꺽 물을 마시는 소리만이 퍼졌다. 그렇게 지옥같은 정적이 계속되었다.
물을 몇 번이고 들이킨 나는, 이윽고 컵을 내려놓고 얼굴을 한 번 싹 쓸어올려서 마른 세수를 했다.
그렇다고 영원히 이렇게 가만히 있을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몇 번이고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에, 후욱 하고 짧게 숨을 내신 뒤 로르텔이 누워있는 침대 옆으로 스윽 걸어갔다.
그리고 내 침대에 걸터앉아서, 천천히 로르텔을 불렀다.
“……야…”
“…….”
“언제… 일어났냐…”
“하…한시간 쯤… 됐는데요…”
어조만 들어보아도 깔끔하고 명확하다. 내가 알고 있는 로르텔의 목소리였다.
“…”
“…”
“무리가 안된다면, 네 지금 몸 상태라든가… 상황 같은 거… 설명 해볼래… 어디 아프거나 부작용은 없는지… 심리 상태는 어떤지… 필요한 일이다…”
“…”
이불 속 로르텔을 넌지시 바라보며 최대한 차분히 말했다.
“그… 몸.. 상태는… 괜찮은 거 같아요…”
“…그래…”
“일어난지 좀 됐는데… 에드 선배님께서 주무시고 계시길래…”
“…”
“오… 옷이… 맞는 옷이 없어서… 그래서… 민망해서 일단… 얼른 이불만 두르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게… 생각대로 잘 안되서…”
방금 직원의 기묘한 질문이… 어쩌다 튀어나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래서.. 그… 횡설수설해서 죄송한데요….”
“아니다… 천천히 말해라…”
아마… 저주에 걸려있는 동안의 기억은… 전부 떠올랐을테다…
흑역사… 라는 간단명료한 단어 하나만으로 그 모든 걸 표현하기엔… 너무나도 장대하고도 치명적이다.
로르텔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통스럽게 이야기 했다.
“저… 에드 선배님…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
“……죽고싶어요……………….”
그래….. 그럴만하다……
이제 시작이다….. 힘내라… 너 자신과의 싸움이다…..
마음을…. 굳게 먹는 거다……!!